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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밝게한다는 씨앗"
결명자를 아시나요?
저희 초등학교 때 학교의 온갖 일을 돌봐주시는 분을 "소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행정실 직원으로 공무직 관리원쯤 되는 일자리였습니다.
화단을 정리하시며,
학교 울타리를 정리하기도 하시고,
야간에는 학교에서 숙직을 하시면서 학교를 지켜주시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분이 화단에 결명자를 심어서 그 열매로 물을 끓여 드셨습니다.
아마 아흔쯤 되시는 연세이신데도 신문을 돋보기 없이 보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리 눈이 좋으시냐고 물어보면 "평생 결명자차만 마셨다"라고 말씀 하신답니다.
그분께서 지금은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이세상에 안계신 어머니께서 산모퉁이에 결명자를 심으셨습니다.
워낙 가파라서 다니시기가 아주 불편한 빈땅입니다.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를 짚고 기어다니다시피 다니면서 빈 공간에 결명자를 심곤 하셨습니다.
물론 자식들은 말렸죠.
워낙 가파른 길이라 위험했거든요.
길 아래는 낭떨어지고요.
빈땅이 있어서 아까우신거죠.
결명자는 노란꽃이 조그맣게 피고,
길쭉하게 열매를 맺는 답니다.
가을에 잎이 떨어지고,
익으면 낫으로 베어 지푸라기로 한주먹씩 묶어서 세워두었다가 한 열흘 정도 지나면 바짝 마른답니다.
지게로 조금씩 날라다가 마당에서 들깨를 털듯이 막대기로 두들겨서 알맹이만 걷어 들입니다.
털고난 결명자대는 군불 지피실 때 불쏘시개로 쓰기도 했습니다.
깨끗하게 손질한 결명자는 빤질빤질하게 빛이납니다.
자식들과 친척들에게도 나눔을 했습니다.
그러고도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께서 매년마다 결명자와 은행을 구해달라고 하십니다.
나머지는 제가 실고와서 시내 약재상에 갔다 줍니다.
한번은 시장 약재상에 갔다 주었는데
사장님께서 너무 깨끗하게 손질을 잘하셨다고 하면서 어머니께 음료수라도 사다 드리라고 음료수값을 따로 주시더군요.
다음에도 자기네 집으로 꼭 갔다 달라고 하면서요.
두드린 결명자를 바람에 검부적을 날리고 함박에 물을 붓고 조리로 모래와 티끌을 헹궈내면서 깨끗하게 말린 결명자는 빤질빤질하고 깨끗했습니다.
장사하시는분이 얼마나 결명자가 깨끗하고 상품성이 좋으면 웃돈을 더 주셨을까요?
얼마전에는 아버지께서 혼자 계시면서 집앞 텃밭과 좀 떨어진 논두렁에 결명자를 심으셨습니다.
결명자는 소독도 필요없고,
추비같은 것도 필요없어서 어느 작물보다 재배가 편하긴 합니다.
연세도 있으시고 하시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는데도 몰래 심으셨답니다.
그 때 눈에 황반변성 때문에 안과치료를 받고 계셨거든요.
그냥 혼자서 하실려고 하셨던 일이 지금 못하시게 되셔서 걱정을 태산같이 하시고 계시더군요.
주말에 가까이에 있는 사촌동생이랑 같이 내려가서 들깨랑 결명자를 다 베어서 마당에 널고 왔습니다.
논두렁에 언덕에 결명자가 꽤 많았습니다.
경운기를 빌려서 한가득 실고 왔거든요.
옛날 나락을 베어서 논에 세웠던 것 같이 세울려고 했는데,
잘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어설프게 마당에 세웠습니다.
오늘도 지금은 세상에 안계신 어머니를 생각을 하면서 가실거지를 했습니다.
저희집 텃밭에 아버지께서 은행나무를 뺑 둘러서 심으셨습니다.
어느새 나무가 자라서 은행이 더덕더덕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달린 은행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기다란 대나무 장대로 은행을 털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장대로 털면 은행나무에 은행열매순이 떨어져서 다음해에 은행이 열리지않는다고 하셔서 나무에 올라가서 은행을 털었습니다.
은행나무 아래에 그물망을 깔고 나무에 올라가서 발로 나무가지를 발로 구르면 은행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은행을 비료포대에 담아서 차곡차곡 창고옆에다 쌓았습니다.
은행이 기관지에 좋다고 몇개씩 구워 먹으면 좋다고 합니다.
비료포대에 넣어둔 은행이 껍질이 썩으면서 냄새가 지독하게 납니다.
이 때 비료포대에 있는 은행껍질에서 맑은 노란 은행물이 나옵니다.
이 은행을 담은 포대에서 나온 맑은 물이 천식에 좋으시다고 병에 받아서 천식을 앓고 있는 사람들한테 나눔도 했습니다.
10월초에 은행을 따서 포대에 담았던 은행이 껍질이 썩으면 냇가에 리어카로 실고가서 마대포대에 넣고 발로 밟으면 껍질이 잘 벗겨집니다.
집안에서 껍질을 씻으면 은행 특유의 구린내가 진동을 하기 때문에 두분이서 리어카로 냇가로 실고가서 씻었습니다.
깨끗하게 씻은 은행을 마당에서 말려서 여러곳에 나눔도 하시고 제가 실고와서 약재상에 팔아서 용돈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문제는 은행나무 가지가 결이 없어서 그냥 뚝 끊어집니다.
그래서 은행을 털 때는 전봇대에 공사하는 사람들이 착용하는 어깨띠 같은 것이 있어서 나무에 매달고 은행을 털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해마다 제가 내려가서 은행을 털어 드렸는데 내려가지를 못했습니다.
전화를 드렸습니다.
"다음주에 제가 내려가서 은행을 털어드릴께요"했더니 어머니께서 사람을 시켜서 은행을 털었다고 하시더군요.
어머니께서 사람을 사서 그까짖 은행을 털 분이 절대 아니시거든요.
다음 주말에 내려가서 확인했더니 어머니께서 사다리를 놓고 은행나무에 오르셔서 은행을 털으셨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등골이 오싹하더군요.
은행나무와 감나무는 나무결이 없어서 가지가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어지거든요.
제가 막 화가 나는 겁니다.
그까짓 은행 때문에 자칫 어머니를 다칠 수 있겠다?싶더군요.
은행나무를 없애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만해도 은행나무가 별로 없어서 은행나무 몇그루에서 쌀 한가마니값 정도의 수익이 있었습니다.
물론 절대 안된다고 하십니다.
그래도 은행을 따시다가 은행나무에서 떨어지시기라도 하신다면 큰 일이잖아요?
엔진톱을 빌려서 은행나무를 다 베어버렀습니다.
길 모퉁이에 아름들이 고목인 큰 은행나무는 산림청에 민원을 넣었더니 크레인을 몰고와서 전문가들이 높은 곳부터 꼭대기부터 차곡차곡 자르더군요.
은행잎이 단풍들면 노랗고 보기는 좋은데 골목에 떨어진 은행과 은행잎을 처리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거든요.
부모님들 덕분에
매년마다 결명자를 볶아서 결명자차를 끓여 먹었고,
은행을 까서 전자렌지에 돌려서 은행을 구어 먹었었는데
이제는 결명자차도
은행도 먹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내장산과 문수사 단풍숲을 다녀왔습니다.
올 단풍은 예년같지 않지만 문수사 단풍숲의 가새가새한 작은 형형색색의 단풍잎과 아름드리 단풍나무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날씨가 쌀쌀합니다.
옷 따뜻하게 하셔서 감기에 잡히시지 않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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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주를 쑤었습니다.
어른들께서 안계시니까 생활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된장, 고추장을 그냥 주시는대로 덥썩 받아만 먹었습니다.
된장과 고추장이 그냥 만들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저희는 오래전부터 된장과 고추장을 집에서 만들었습니다.
한해 건너서 만들었습니다.
옛날 어르신들께서 동짓달에 메주를 만들어야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입동이 지나서 메주를 만들어야 맛있는 메주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음주에 추위가 있다는 예보가 있어서 조금 이르게 메주를 쑤었습니다.
추울 때 메주를 쑤면 어설프거든요.
요즘은 건조기가 있어서 조금 일찍 메주를 쑤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께서 관행으로 메주를 쑤셨는데 현대문명의 산물(건조기와 전기장판 물고추가는 기계)을 이용했더니 더욱 더 간편하더군요.
잘 말린 콩을 덜 익은 콩과 상한 콩을 골라내고 깨끗한 물로 씻어서 5시간 정도 물에 불립니다.
물에 불린 콩을 4시간 정도 메주콩 색이 약간 갈색이 날 때까지 처음엔 쎈불로 끓이다가 콩이 익으면 중불에 삶고 하나씩 먹어보면서 포근하게 삶아진 메주콩을 약한 불로 뜸을 들이고 스텐으로 된 소쿠리망에 부어 물을 빼고 광목으로 만든 포대에 넣고 끈으로 주둥이를 동여매서 지근지근 밟았더니 콩 알갱이가 8-90%는 깨지더군요.
이 때 콩물 맛은 달작지근합니다.
너무 아까워서 지난 봄에 담근 장독에 조금 부었습니다.
옛날에는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펴서 메주콩 몇 말을 한꺼번에 삶았습니다.
삶은 콩을 하나씩 집어 먹으면 고소했습니다.
골목에 연세드신 어르신께서 어디서 콩 삶는 냄새가 난다고 하시네요.
메주를 많이 쑤어보신 옛날 분들이라 메주콩 삶는 냄새를 금방 맡으시더군요.
먹거리가 없을 때라 메주콩 삶을 때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지피면서 콩을 조금씩 집어 먹었습니다.
메주콩을 삶을 때 고구마를 같이 삶으면 콩물이 고구마를 가장 맛있게 삶아집니다.
고구마속이 노랗고 단맛이 훨씬 더합니다.
지금은 스텐으로 된 찜통이나 양은솥에 삶습니다.
희안하게도 바닥이 두꺼운 스텐으로 된 찜통은 메주콩이 바닥에 누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텐보다 얇은 양은솥은 콩이 눌지 않는 답니다.
메주콩을 끓일 때 넘치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이 있더군요.
콩물이 넘치면 끈적거리고 솥주변이 지저분 하거든요.
메주콩을 삶을 때 된장끼를 조금하면 콩물이 넘치지 않습니다.
몇년 전에 물고추를 가는 기계에 가장 구멍이 큰 망을 씌워서 메주콩을 갈았는데도 콩 알갱이가 없이 죽같아서 간장 담글 때 많이 풀어지더군요.
작년에는 포대에 넣고 밟아서 메주를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메주를 많이 쑤기 때문에 기계에 갈아서 만들었습니다.
메주콩은 삶는 동안 내내 들여다봐야 합니다.
물이 너무 많으면 메주 맛이 없다는 어르신들 말씀도 있습니다.
그래서 찰박찰박하게 물을 넣고 삶아야 합니다.
끓어 넘을 때마다 뚜껑을 열고 거품을 걷어내기도 하고 나무 주걱으로 위아래로 수시로 저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닥에서 콩이 눌어 붙을 수도 있답니다.
가마솥에 장작불로 은근하게 메주콩을 삶아야 하는데 요즘 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대형 가스밥솥에 메주콩을 삶다가 세말(24k)이나 많아서 삼발이에 올려서 끓이고 캠핑용 3k하는 가스솥에도 끓였습니다.
한꺼번에 다 삶아서 메주를 만들려고 당근에서 대형밥솥을 35,000원에 사와서 같이 끓였습니다.
얼마전에 당근에 대형가스밥솥이 나왔더군요.
그래서 당근에 확인했더니 밥솥이 있다고해서 사왔습니다.
당근을 조금 이용하는 편입니다.
가끔 당근을 보면 쓸만한 생필품이 아주 저렴하게 나옵니다.
커다란 양은솥과 화덕도 샀고 30k용 앉은뱅이 저울은 20,000원, 100k용 저울은 30,000원에 구입했는데 거의 새 것 수준입니다.
제가 갖고 싶었던 고추건조기를 당근에서 구입했고,
제 고추건조기를 당근에 팔기도 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가스밥솥이 15년이 넘게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작동이 잘 되더군요.
밥솥이 바닥이 워낙 두꺼워서 늘어 붙지도 않고 잘 삶아졌습니다.
50인분 밥을 하는 밥솥인데 정말 밥이 눌지도 않고 맛있는 밥이 만들어집니다.
쇠뼈나 쇠머리 씨래기 등을 삶을 때 그만입니다.
저희는 어머니께서 살아계실적에 해마다 아버지생신에 맞춰서 형제들 모임을 했습니다.
조카들까지 모이면 그 때도 30명이 넘을 때도 있어서 34평짜리 콘도를 4개씩 빌리기도 했습니다.
그 때 붕어를 한관사서 붕어찜을 하기도 했고 돼지족발을 삶아서 밥솥채 들고 갔습니다.
그러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다음해에 코로나때문에 모임을 갖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편한 세상입니까?
옛날 어르신들께서는 다 삶은 메주콩을 확독이나 절구통에다 도굿대나 절구대로 콩을 의깨서 네모난 메주틀에 넣고 발로 밟아서 단단하게 메주를 만들었습니다.
잘 삶아진 콩이라 힘들지 않게 콩을 의깰 수 있습니다.
콩이 식으면 잘 의깨지지도 않고 메주 모양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메주콩이 식기 전에 의깨고 메주모양을 만들어야합니다.
메주콩이 80%정도만 의깨고,
20%정도는 콩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광목 포대기에 넣고 밟으니까 힘들지않고 콩이 잘 으깨졌습니다.
옛날 절구통에 빻는 메주콩과 흡사했습니다.
지난 장수장날에 구입한 손잡이가 있는 네모난 통에 면포를 깔고 으깨진 메주콩을 넣고 주먹으로 다지고 틀에 꽉차게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께서 메주를 만드셨던 넹소난 메주틀과 둥그런 누룩틀이 갈라져서 철사로 동여 매진채 사랑채 기둥에 매달려 있습니다.
틀에서 꺼내 쟁반위에 뒤집기를 몇차례 반복하여 치대면서 모양을 내면 각이 반듯하게 네모난 메주가 탄생합니다.
이렇게 많이 치대는 이유는 메주가 갈라지지않게하는 방법입니다.
메주가 갈라지면 그 틈새로 새까만 곰팡이가 생기더군요.
메주 갯수를 홀수로 만들어야 한다네요.
작년에랑 그래서 한개는 조약돌만하게 만들었습니다.
메주 하나를 쪼개서 홀수로 만들려다가 올해는 그냥 똑같은 크기로 20개를 만들었습니다.
짝수로 만들었다고 별일 있겠어요?
흔하게 어떤 경우를 메주 같다고 하지요?
메주가 어때서요!
노란 메주가 이쁘기만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메주색이 짙은색으로 변합니다.
옛날에는 이렇게 만든 메주를 새끼를 꼬아 엮어서 햇볕이 잘든 양지쪽 처마밑에 매달아서 말렸습니다.
이 때 덜 마른 메주에 지푸라기가 닿는 곳에 통풍이 잘 안되어서 까맣게 곰팡이가 생기기도 합니다.
지푸라기에서 유익한 바실러스균이 나와서 메주를 발효시키는 좋은 효소를 만든다고 합니다.
메주를 띄울 때 바닥에 깔아도 지푸라기효능은 있습니다.
곰팡이가 생긴 메주는 나중에 간장 담글 때 칼로 도려내야하고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메주를 이틀정도 식혀서 건조기에 지푸라기를 깔고 45도로 38시간을 배습을 하면서 말립니다.
상황에 따라서 시간은 건조기에 따라 조절하시면 됩니다.
밖에다 말릴 때보다 먼지도 안묻고 깨끗하게 말려집니다.
옛날에는 미세먼지가 없을 때라 밖에다 걸어서 말려도 괜찮았는데 요즘은 바깥 공기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건조기에서 꺼낸 메주에서 청국장 뜨는 냄새가 나더군요.
곰팡이만 생기지 않은 정도로 수분이 빠지면 메주를 건조기에서 꺼내 깨끗하게 씻은 지푸라기로 새끼를 꼬아서 하우스 천장에 매달아면 햇볕도 쐬이고 바람도 쐬입니다.
혹시나 텃밭에 있는 하우스에 고양이나 쥐들이 손대지 못하게 높게 매달아야 하기에 알루미늄 사다리를 하우스대에 매달아서 메주를 매달게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하우스에 걸어 놓으면 따뜻한 공기와 비닐을 통과한 햇볕에 잘 마릅니다.
혹시 메주가 얼면 메주가 버글거립니다.
건조기에서 완전히 말리지 않아서 메주속이 마르면서 발효가 되기도 하거든요.
잘 말린 메주는 장담그기 보름전 쯤 다시 전기장판위에 낮은 온도로 지푸라기랑 솔잎을 깔고 메주를 놓고 메주위에 깨끗한 이불을 덮어서 띄울려고 합니다.
옛날 어른신들께서는 멱다리나 가마니에 솔가지와 지푸라기를 넣고 불을 지피는 방 아랫묵에 이불을 씌워서 띄웠습니다.
그 때 방에서 나는 메주 뜨는 퀘퀘한 냄새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코를 막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건조기와 전기장판을 이용해서 메주를 말리고 띄우니까 곰팡이도 없고 깨끗해서 간장 담글 때 쇠솔로 깨끗하게 씻어야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전문적으로 메주를 만든 곳에서는 황토방을 만들어서 누에 채반같이 차곡차곡 쌓아보일러로 따뜻하게 해서 띄우더군요.
이 때 메주 뜨는 냄새는 좋은 냄새는 아닙니다.
아시죠?
시큼한 메주 뜨는 냄새를요!
가끔씩 잘 못 말려서 메주가 상할수도 있습니다.
그 메주는 아깝지만 버려야 하거든요.
잘못 말린 메주나 속이 상한 메주는 자칫 된장에서 곯은 냄새가 날 수도 있습니다.
저희도 두번정도 된장을 2%가 부족하게 실패한 적도 있었습니다.
흔히 양파망에 메주를 매달아서 말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양파망안에 지푸라기가 닿는 자리에 까맣게 곰팡이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렇게 잘 띄운 메주는 깨끗한 박스에 담았다가 설쇠고 이월 말(午)날에 간수가 다 빠진 소금물을 풀어서 간장을 담급니다.
2025년 내년에는 2월 6일(丙午)과 2월 18일(戊午)이 말날이네요.
2월 6일보다는 추위가 풀린 2월 18일이 나을듯 합니다.
메주콩은 작년에 10k에 45,000원정도로 구입했습니다.
올해는 대두값이 작년대비 인상된 것 같습니다.
아직 들판에 가을걷이 하느라 콩타작이 안 끝났더군요.
콩타작이 다 끝나면 값이 내려가지 않을까?싶습니다.
메주콩 한말로 메주를 만들면 16k정도되는 메주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메주가 로컬푸드에서 작년에 160,000원 정도하더군요.
메주를 만들기가 옛날 같이 그렇게 번거롭지가 않습니다.
아파트에서도 베란다에 빨래 건조기에 매달아서 메주를 말릴 수도 있습니다.
발효식품인 간장이나 된장은 오래 묵힐수록 진한 맛이 납니다.
일반 가정에서 메주 한말을 쑤어서 간장을 담근다면 3년 정도는 드실 수 있습니다.
아직 메주를 쑤어보시지 않은 가정에서는 반말이라도 한번 체험해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꼭 메주를 쑤지 않아도 토막만한 메주 2-3개정도를 사서 항아리에 담으셔도 좋은 된장과 간장을 드실 수 있습니다.
저희 메주 만드는 긴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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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에 담갔던 멸치액젓을 달였습니다.
저희는 봄엔 멸치액젓을 담고
가을엔 새우젓갈을 담급니다.
젓갈은 오래 묵힐 수록 감칠맛이 더 나는 것 같습니나
작년에 담근 멸치액젓을 젓갈통속에 용수를 박아서 말금한 액젓을 걸러서 먹었습니다.
보통 한통에 생멸치 두박스씩을 넣고 젓갈을 담갔거든요.
용수를 박아서 액젓을 걸러 병에 담았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사용합니다.
저희는 음식 간을 맞출 때나 겉절이 등 나물을 무칠 때 액젓으로 하더군요.
번거롭게 꼭 집에서 담그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맛은 물론이고 청결면에서도 깨끗하게 할 수가 있어서 2년마다 6-8박스를 담그고 있습니다.
새우와는 다르게 멸치상자는 20k가 조금 넘게 들었습니다.
새우는 손잡이가 있는 큰상자라 43k이상 들었습니다.
말금한 멸치액젓을 걸러내면
젓갈통 바닥에 멸치만 가라앉아서 쌓여 있더군요.
맨아래에는 아직도 가라앉은 소금에 살이 붙은 멸치가 그대로 있는 것도 있습니다.
오래전에는 그냥 버리기도 했습니다.
액젓을 다 덜어내고 바닥에 가라앉은 멸치를 커다란 스텐통에다 달였습니다.
찬바람이 있어야 젓갈을 달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멸치액젓 냄새에 온 동네 파리가 다 모여들거든요.
11월인데 아직도 날파리들이 날라다니더군요.
하우스에 곶감을 널고 선풍기를 틀어서 말렸었는데 지난주에 며칠 추위가 있어서 그냥 말리고 있는데 어제는 낮기온이 20도가 넘어서 날파리들이 있더군요.
그래서 찬바람이 불어야 젓갈을 달인 것 같습니다.
도심지에서 젓갈을 달이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젓갈을 달이면 온 동네 젓갈 달이는 냄새가 진동을 해서요.
그래도 어떻합니까?
멸치가 아까워서 마당에 LPG가스통을 삼바리에 연결해서 달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파리는 안 달라들더군요.
남은 멸치 찌거기가 워낙 틉틉해서 계속 저어주어야 합니다.
한번 누르면 다른 거 같지 않아 누린내가 많이 나서 먹질 못합니다.
뽀글뽀글 끓을 때까지 수시로 젓어 통바닥에 눌지않게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끓어오르면 젖지 않아도 되거든요.
찜통 바닥에 있는 찌거기들이 끓어올라서 누를 일이 없답니다.
펄펄 끓이면 멸치 살은 다 녹고 멸치 뼈와 조그마한 알갱이가 보이는데 아마도 하얀 멸치 눈알 같습니다.
용수로 거른 액젓은 띠끌하나없이 말금하지만 달인 액젓은 멸치살이 풀어져서 약간 거뭇하고 거칠지만 새끼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면 맛은 용수로 거른 액젓보다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약간은 틉틉하고 걸죽하기도해서 김장할 때는 달인 멸치액젓을 넣고 양념을 버무립니다.
이렇게 달인 멸치젓갈을 항아리위에 면포를 두개정도 깔고 내리면 쫄쫄쫄하면서 잘 걸러집니다.
식어서 젓갈이 엉켜지면 액젓이 걸러지지 않거든요.
그래서 식기전에 저어가면서 액젓을 내려야합니다.
새우젓은 달일 일이 없지요.
숙성되면 그대로 넣으면 되니까요.
봄새우는 껍질이 조금 거칠더군요.
그리고 숙성되면 물이 많이 생기더군요.
역시 새우도 가을에 담아야 살이 쪄서 봄새우보다 맛있는 것 같습니다.
가득 담긴 새우는 한박스가 40k가 넘은 양이라 병이나 비닐봉투에 담아 냉장보관해야 하는데 여간 복잡하지 않더군요.
시장에서 새우젓을 구입하면 값이 비쌉니다.
그래서 번거롭더라도 집에서 담가서 형제들끼리 나눔하고 있습니다.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참 이상하더군요?
김치 냉장고가 있으니까 추위가 있기전에 김장을 하면 좋을텐데
꼭 비바람 몰아치고 추위가 있으면 김장을 하느라 난리를 치더군요.
강추위가 한번 있고난 다음 날은 틀림없이 시장이 북적거립니다.
옛날 저장시설이 없을 때는 늦게 김장을해야 내년 봄까지 김치를 먹어야해서 눈맞고 어름을 깨가면서 냇가에서 배추를 씻어서 김장을 했습니다.
또 눈도 맞고 서리도 맞고 얼었다 녹았다해야 배추가 맛있다고 했습니다.
배추는 90일 배추라고해서 씨앗을 뿌려서 90일이되면 배추가 다 크거든요.
굳이 늦게 김장을 할 필요가 없지않나?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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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곶감을 깍았습니다.
세월의 시계가 올해는 예년보다 열흘 정도 늦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기후가 가을은 늦어지고,
봄은 빨리오는 기후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화가 피는 시기는 점점 빨라지고
단풍이 물든 시기는 점점 늦어지고 있습니다.
올해는 10월 평균기온이 높아서 나뭇잎이 단풍이 들지않고 바로 낙엽이 지는 것 같습니다.
시내 거리에 은행나뭇잎이 이제서야 노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매년 10월 20일 쯤 되면 서리가 내렸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어제 11월 7일에 된서리가 내렸습니다.
엇그제만해도 멀쩡했던 가지잎 호박잎이 다 시들었습니다.
엇그제 호박잎이랑 쪼그맣게 달린 호박을 따서 된장국을 끓일려고 설마 내일은 괜찮겠지?했는데 서리를 맞아시들어 버리고 나무가 가린 곳에만 싱싱해서 따왔습니다.
오늘 아침 날씨는 이틀 쌀쌀했는데 예년 기온으로 어제보다 차갑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감을 홍시로 먹으면 오래동안 보관이 어려위서 곶감으로 깍아 제사와 시제를 모실 때랑 명절 차례상에 올리기도하고,
나눔의 행복도 있습니다
또 찰밥을 할 때 곶감을 잘라 넣으면 달작지근한 맛있는 찰밥이 됩니다.
작년엔 감이 흉년이라고 했는데 저희는 감이 많이 달려서 곶감을 많이 깍았습니다.
저희 이웃인 완주군이 곶감고지인데 곶감을 깍을 감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고 합니다.
제 지인은 매년 집안에 큰 감나무 한그루에서 6-7접을 땄는데 총 70개밖에 못땄다고 하더군요.
곶감을 깍아서 형제들한테 20개씩 제사를 모시는 형제들은 30개씩을 친척들한테도 나누다보니 거의 3접 반 정도를 나눈 것 같습니다.
저희 둘째 손주가 네살적에 어린이집에서 야외학습을 나가는데 간식으로 뭐를 싸줄까?했더니 "까만감"을 싸달라고 하더랍니다.
곶감이 생각나지 않고 곶감이 냉동고에서 꺼내면 까맣잖아요?
그래서 곶감을 "까만감"이라고 했나봅니다.
올해는 엄청나게 감이 달렸었는데 봄철 냉해와 잦은 비 그리고 폭염 때문에 야구공만한 감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커다란 감이 떨어지니까 아깝더군요.
시골에도 감나무에 별로 안보였는데
어제 청과시장에 들렀는데 생각보다 감이 많이 나왔고 저렴하더군요.
옛날에는 한접이 100개로 한접, 두접으로 판매되었는데 요즘은 10k를 한박스로 거래가 되더군요.
10k 한상자에 많게는 40개가 넘으면 작은 감이고
30개에서 35개들이는 조금 큰 감이더군요.
저희는 그래도 작년 겨울에 퇴비를 뿌리고 봄에 감나무 주변에 복합비료를 한웅큼씩 주었더니 감나무에 감잎이 떨어지고 감이 색이나면서 노랗게 익은 감이 제법 보였습니다.
대봉시인데 많이 달린 감은 작은편이고 적게 달린 감은 숫자가 적은 대신에 크기가 엄청 크게 달렸습니다.
그래도 평균적으로 10k 한상자에 35개 정도는 되는 것 같습디다.
몇 그루는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많이 달렸습니다.
작년에는 곶감을 깍아서 건조기에 말렸다가 비닐하우스에서 선풍기로 말렸는데 고양이가 있는 것 같아서 올해는 건조기에서 말리는 시간을 늘리고 있습니다.
고온으로 말리면 곶감이 딱딱해져서 37도로 하루 말리다가 하루는 숙성시키고,
이렇게 건조기를 켰다 끄다를 너댓번하면 곶감 색갈이 납니다.
건조기에서 꺼내 햇볕에 숙성시켜야 하는데 텃밭이 떨어져 있어서 건조기만 켰다 껐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건조기에서 습기가 빠지면서 번데기같이 주름이 생길 때 비닐하우스에 널면 햇볕을 받으면서 말랑말랑해지면서 당분이 더 생기는 것 같습니다.
텃밭에 혹시나 고양이나 쥐가 드나들 수 있어서 어른키만큼 높게 건조대를 만들어 곶감을 손으로 도넛츠모양으로 납작하게 모양을 내고 건조기 채반채 며칠 말리면 색이 찐해지면서 하얀분이 나기 시작합니다.
옛날에 건조기에 넣지않고 움막을 지어서 매달아 말린 곶감은 곰팡이가 생기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황으로 훈증을 한다고 합니다.
황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검증이 아직은 되지 않은 상태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판매하는 선홍색 곶감은 먹지 않습니다.
특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판매하는 곶감은 대부분 거의 중국산이 많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살다온 지인이 절대 중국산 곶감은 먹지 말라고 하더군요.
곶감 말리는 건조기가 나오기전에 가을장마가 있어서 움막을 지어서 곶감을 말리는 농가에서 곶감이 곯고 곰팡이가 껴서 판매를 못하고 버린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곶감을 걸고 아래에다 황을 피워 황의 연기로 곰팡이가 슬지 않게 하고 곶감 색깔을 까맣지않고 뽀얗게하기 위해서 훈증을 한다고 합니다.
곶감 만들기가 손도 많이가고 오랫동안 말려야해서 힘들기도 합니다.
너무 큰 감은 감말랭이로 말리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감을 칼로 깍아서 싸리나무로 가운데 끼워 새끼로 둥그렇게해서 처마밑에 매달아서 제사 때랑 썼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곰팡이가 생기고,
자칫 잘못하면 쌔까맣게 썩기도 했습니다.
곶감을 먹으면 시큼한 맛이 있었습니다.
깍은 감을 싸리나무 가지에 10개씩 꿰어서 말리는데 지금 생각하면 비위생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곶감을 깍고 난 감껍질도 말려서 먹으면 하얀분이 나서 달작지근한 맛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기계화가 되어서 대량으로 생산한 농가에서는 기계로 깍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정집에서는 감자칼 있죠.
그 필러로 깍기 때문에 쉽게 감 껍질을 벗길 수 있습니다.
또 싸리나무 대신에 철물점에서 곶감을 말리는 곶감곶이를 판매합니다.
곶감곶이 한개에 곶감 10개씩 끼워집니다.
꼭지를 집게모양으로 된 곳에 끼워서 햇볕 잘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어두면 됩니다.
시내에서 가끔씩 보면 베란다나 옥상에 빨래건조대에 달아 매서 말리다가 비라도 내리면 비닐을 씌워서 말리기도 하는 모습을 가끔씩 보기도 합니다.
감꼭지가 없는 감도 고리에 끼울 수 있게끔 곶감 집게가 있어서 양쪽에 끼워 고리에 끼울 수 있게 합니다.
나머지 감은 감말랭이를 만들어서 1년 내내 간식으로 먹으면 영양식으로도 좋습니다.
과일류는 말리면 당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물론 변비가 있는 사람은 많이 먹으면 자칫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탄닌이라는 성분 때문에 변비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감말랭이도 깨끗하게 씻어서 꼭지를 칼로 도려내고 감자칼로 깍으면 간단하게 껍질을 벗겨낼 수가 있습니다.
칼로 조각을 내서 말리면 되는데요?
너무 얇게 자르면 나중에 딱딱해집니다.
보통 크기의 대봉시라면 2등분하면 말랐을 때 곶감같이 말랑말랑한 감말랭이가 됩니다.
아주 큰 감이라면 조각을 더 내야 겠죠.
보통 2등분하여 말리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좋습니다.
중간에 하얀심과 씨를 빼서 말리셔야 먹기가 편리하고,
하얀심이 변비를 유발한다고 합니다.
자연건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힘듭니다.
식품건조기나 커다란 농산물 건조기에 말리면 되는데 처음부터 온도를 높게 해서 말리면 짧은 시간에 말릴 수가 있겠지만 감말랭이가 딱딱하게 말려집니다.
그래서 낮은 온도로 시간을 오래 말리는 것이 보드랍게 말릴 수 있습니다.
말려진 감말랭이는 조금씩 소포장해서 냉동고에 보관했다가 먹기전에 꺼내 놓으면 하얗게 분이 생깁니다.
바로 먹으면 딱딱하기 때문에 미리 꺼내 놓으면 말랑말랑해집니다.
감말랭이가 우리 몸에 꽤나 많은 좋은 성분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간식보다도 더 좋은 간식꺼리가 되지 않을까?싶습니다.
너무 익은 감은 홍시로 먹어야겠죠?
옛날 시골에서는 닭을 가두는 덗가래라고 하나요?
거기다 감을 담아서 세가지로 갈라진 감나무나 지붕에 올려 놓았다가 홍시가 되면 꺼내 먹곤 했죠.
그때는 냉장고나 냉동고같은 시설이 없을 때니까요.
여름철에 우물에 김치통을 넣었다가 꺼내서 먹었습니다.
저희 고향에서는 우물을 시암이라고도 했습니다.
두레박같이 끈에 빨간 김치통을 매달아서 우물에 담갔다가 꺼내서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손주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깨끗하게 씻어서 곶감을 만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깍은 곶감은 하우스에 높게 건조대를 만들어서 앞으로 이틀 정도 지나면 걷어서 10개씩 비닐에 싸서 냉동고에 넣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세접이 넘게 깍아서 건조기에 조금 큰감이라 40도로 설정하고 시간을 24시간으로 설정해 놓고 왔습니다.
입동절기라서인지 아침 공기가 차가웠습니다.
내일부턴 평년기온이라네요.
11월 중순에 접어 들었습니다.
10월보다 좀 마음 편하시고 행복한 남은 11월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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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자유주제·자유게시판
어제는 집에서 청국장을 띄웠습니다.
잘 씻은 메주콩을 물에 불려서 푹 삶았습니다.
가스렌지 가장 약한 불로 4시간정도를 삶으면 약간 갈색으로 변하면서 푹 삶아집니다.
이 때 불이 쎄거나 솥이 얇으면 콩이 눌어 붙습니다.
청국장은 납두균에 의해 따뜻한 곳에서 발효되는 동안 실모양의 점질물이 생깁니다.
청국장은 냄새는 고약하지만 맛과 영양이 풍부해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훌륭한 발효식품입니다.
항암효과는 물론이고,
치매예방에 도움이 되며 피부 노화방지,
골다공증 예방,
간 건강에도 좋은 식품이라고 합니다.
소화도 잘되는 식품이라 우리 건강에 아주 좋은 식품입니다.
예전 어르신들께서는 잘 삶은 콩을 대나무 소쿠리에 지푸라기를 깔고 아랫묵에 이불을 덮어서 띄웠습니다.
따뜻한 구들에 두꺼운 이불을 씌웠으니 콩이 발효되면서 심한 냄새가 납니다.
이틀 정도 띄워서 끈적끈적거리는 실같은 점액질이 나오면 고추가루와 마늘을 넣어 절구통에 넣고 빻았습니다.
그것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배추잎이나 풋호박, 두부를 넣고 청국장찌개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고약한 냄새와는 달리 맛있는 발효식품인 청국장이었습니다.
메주는 발효시키는데 오랜시간이 필요하지만 청국장은 단시간에 만들 수 있어서 간단하게 만들어 먹습니다.
요즘은 잘 삶은 콩을 대나무 소쿠리 대신에 스텐으로 된 채반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대나무 소쿠리를 쓰는 가정이 보기 힘든 세상이니까요!
저희는 대나무 소쿠리에 얇은 보자기를 깔고 메주콩을 담습니다.
깨끗하게 씻어서 잘 다듬어진 지푸라기를 군데군데 말아서 꽂아 놓습니다.
메주나 청국장이나 지푸라기에서 바실리스균이 있어서 메주콩을 잘 발효시켜주며 유해한 균의 칩입을 막아준다고 합니다.
옛 선조님들께서 메주를 아랫묵에 지푸라기를 깔고 말려서 다시 지푸라기로 엮어 처마밑에 매달아 놓은것도 신비로운 일이었습니다.
잘 말린 메주를 멱다리에 담아 솔가지를 넣고 방한구석에 놓아 두었다가 장을 담갔습니다.
이렇게 지푸라기가 메주나 청국장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지금은 옛날 어르신들께서 했던 방식은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현대문명의 기계를 이용합니다.
간편하고도 쉽게 만들면서 청국장맛은 그대로 유지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 때는 겨울철 난방으로 많게 사용했던
전기장판을 전자파가 있다나?해서 잘 쓰질않습니다.
아까워서 지인들 것까지 몇개를 모아서 비닐로 싸매서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이 때 전기장판을 꺼내서 소쿠리를 아래위로 에워싸고 위에 이불로 덮어 줍니다.
이 때 전기장판 온도는 35~40도 정도로 하루 반나절정도 지나서 이불과 전기장판을 벗기면 구수한 냄새와 뜨끈뜨끈한 청국장이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고릿한 냄새가 나질 않아서 좋습니다.
냄새가 적게 나는 것은 소쿠리에 적은 양으로 띄우니까 냄새가 적게 나지 않을까?싶습니다.
지푸라기를 걷어내고 절구통이나 양푼에 넣고 콩이 3/2정도만 깨지게 방망이로 으깹니다.
으깬 청국장을 한번에 끓일만큼 납작하게 눌러서 만듭니다.
조금만 식혀서 방망이질을 해야지 식어버리면 콩이 으깨지지 않습니다.
이때 끈전끈적한 점액질이 나옵니다.
미꾸라지나 장어를 손질할 때 나오는 그런 점액질입니다.
그 점질물이 우리 몸에 아주 좋은 영양소랍니다.
저희는 오래전부터 집에서 고추장을 담아서 먹습니다.
어머니께서 하셨던 그대로요.
고추장을 담글 때 메주가루 대신에 청국장가루를 첨가해야 하기 때문에 4k정도는 말립니다.
작년에 고추장 담그면서 방앗간에서 메주가루를 구입했는데 엄청 비싸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때 아내가 내년에는 꼭 청국장가루를 만들어야 겠다고 했습니다.
식품건조기에 넣고 말리는데,
청국장이 마르면서 약간은 고약한 냄새 때문에 파리들이 날라와서 파리를 쫒는 진풍경도 있었습니다.
앞집에서 고양이를 2마리 키우는데 고양이가 청국장 냄새를 맡고 담장위에서 혀를 낼름거리면서 코를 핥고 있네요.
저녁 밥상에는 오늘 만든 청국장찌개가 올라왔습니다.
손주가 할머니랑 영상통화를 하면서 "할머니 청국장 맛있어요" 옆에서 큰손주도 "저도 좋아해요"라는 말에 많이 만들어서 냉동고에 넣을려고 합니다.
손주들이 가장 무서운 손님이라고 하죠.
쌀쌀한 날씨에 뜨끈뜨끈한 청국장찌개가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햇콩이 나오고 찬바람나면 한번 더 만들어야겠다고 하네요.
청국장을 애기들 주먹만하게 둥글게 만들어서 냉동고에 보관했다가 사시사철 먹고 싶을 때 꺼내서 먹습니다.
옛날에는 냉동시설이 없어서 겨울에만 청국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뜨끈뜨끈한 청국장찌개가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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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요즘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을 알려주세요
스포츠 중계를 좋아합니다.
야구는 끝났고
배구를 즐겨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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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기름을 길렀습니다.
엿질금 이라고도 하죠.
오래전엔 겉보리를 많이 생산하는 동진면 농협에서 겉보리 40k를 엿기름을 길렀습니다.
시내에서는 1k에 1,700 - 1,800원 정도하는데 직접 구입하니까 1k에 1,000원씩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중앙시장 쌀가계에서 1k에 3,000원씩 하더군요.
물가가 많이 올랐다고 하지만 너무 많이 올랐더군요.
해마다 엿기름을 20k정도를 길러서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올해는 줄이기로 해서 10k를 두번에 나누어서 기를려고 합니다.
집에서 엿기름을 길러서 1년내내 부담없이 사용합니다.
물론 엿기름 만드는데 손이 참 많이 갑니다.
우선 겉보리를 선풍기 바람에 꺼시랑이랑 찌거기를 날려서 잘여문 겉보리만 사용합니다.
물에 불려서 소쿠리나 시루에 넣고 어두운 곳에서 싹이 잘 나기 때문에 광목보자기로 덮고 다라이로 덮어 줍니다.
2 - 3일 지나면 새싹이 나오기 시작합니다.이 때 보리싹 수염이 엉키지않게 자주 찢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싹들이 엉켜서 수염을 떼기가 힘들거든요.
미지근한 물로 몇차례 갈아주어야 합니다.
날씨가 따뜻하면 금새 새싹이 나옵니다.
대신에 잘못하면 보리새싹이 트면서 열을 많이 내기 때문에 골기도해서 버릴 때도 있답니다.
요즘같은 날씨에는 몇일 걸려야 새싹이 나옵니다.
기온이 차가우면 새싹이 더디게 나온답니다.
이럴 때는 거실이나 욕실에서 길러야합니다.
보리싹이 손가락 한마디 조금 못미칠 정도로 길러지면 손으로 비벼서 수염을 다 떼내야합니다.
그런 다음 바짝 말려서 방앗간에서 빻아 보관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꺼내서 쓰시면 됩니다.
햇볕이 좋을때는 옥상에 널어서 말리는데, 날씨가 좋지 않으면 건조기에 넣어서 낮은 온도로 말립니다.
건조기에 말리면 편하긴 합니다.
요즘같은 날씨에는 몇일 걸려야 새싹이 나옵니다.
기온이 차가우면 새싹이 더디게 나온답니다.
옥상에 말릴 때는 비들기나 참새가 훔쳐 먹습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틀어 놓습니다.
시중에서 파는것보다 깨끗하기도 하거니와 당도가 휠씬 높습니다.
손주가 호박식혜를 참 좋아합니다.
어느 날은"할머니 냉장고에 호박식혜 없어요"합니다.
꼭 누가 시킨듯이요!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어느 할머니가 안해 주겠어요?
첨가물을 아무것도 넣지않고,
고두밥찌고 엿기름과 단맛을 내기 위해서 배즙을 넣습니다.
저희집에 식당에서 밥지을 때 사용하는 커다란 가스밥솥이 있습니다.
제가 현직에 있으면서 학생들 간부수련회와 학교 축제를할 때 들고 다니면서 삼겹도 삶고 비빔밥도 하곤 했습니다.
커다란 LPG가스통과 가스솥을 들고 다니면서 벼라별 짖을 다 한것 같습니다.
젊었다는 이야기겠지요?
호박은 단호박과 만차량이 있습니다.
단호박은 그리 크지않고 동그랗습니다.
만차량은 좀 길쭉하고 줄무늬가 있고 제법 크게 달립니다.
단호박은 많이 열리지도 않고 오래동안 보관이 어렵더군요.
단맛은 제일이고요.
만차량은 땅바닥이 아닌 나무가지 같은 것으로 넝쿨을 올려주기만 하면 엄청나게 열립니다.
암수 두그루를 심어야 합니다.
전에 옥상에 판넬을 깔고 만차량을 심었습니다.
만차량을 심은 곳에 음식물 쓰레기를 땅에 묻어서 양분이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거의 25개가넘게 수확을 했었습니다.
만차량은 워낙 번식력이 강해서 엄청나게 뻗어 나가거든요.
호박잎도 연잎 크기고요.
넝쿨은 어른 엄지 손가락보다 더 굵습니다.
호박잎과 줄기가 억셉니다.
바람이 통하는 곳에 보관하면 내년 봄까지도 썩지않고 거뜬하게 보관이 됩니다.
단맛은 단호박에 비해서 덜한 편입니다.
호박죽이나 호박식혜를 만드실려면 만차량을 심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대신에 많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밭언덕 같은 곳에 암수 두그루만 심으시면 엄청나게 달립니다.
이렇게 엿기름을 길러서 빻아 놓으면 요긴하게 쓸데가 많습니다.
고추장 담글 때도 넣고,
조청도 만들고,
명절 때나 제사 때,
식구들 모임할 때,
식혜를 만들어 먹습니다.
엿을 만들 때도 쓰고요.
고두밥을 쪄서 보자기에 싼 엿기름과 같이 항아리에 넣어 뜨끈한 구들방 아랫묵에 이불을 뒤집어 씌워 다음날 내벽에 꺼내어 짭니다.
물론 지금은 보온밥솥에다 식혜를 만듭니다.
얼마나 편한 세상입니까?
이 때 항아리 속에서 삭힌 고두밥을 꼭 짜내고 남은 엿밥은 간식으로 먹기도 했습니다.
짜낸 국물을 가마솥에 한나절 정도 끓이면 조청도 되고, 두사람이 서로 계속 당기면 속에 구멍이 생간 하얀 엿이 만들어 집니다.
이 때 오래 잡아 당길수록 엿속에 구멍이 크고 많이 만들어져서 연한 엿이 만들어 집니다.
갓볶은 콩가루에 버무린 엿이 얼마나 달고 고소했는지요!
설명절에는 무나 호박을 썰어서 조청에 절이면 아주 쫀득하고 맛있는무와 호박졸임 맛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추억거리가 되어 버렸네요.
제가 73년 겨울에 첫 휴가를 마치고 귀대 할 때에 어머니께서 엿을 한말 만들어 주셨습니다.
부대에가서 고참들이랑 나누어 먹으라고요.
아마 아들이 쫄병이라 잘봐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해주셨겠죠!
또 결혼해서 일부러 체험할려고 한번 만들어 본 것이 마지막 고은 엿이었습니다.
지금은 엿을 만들어 먹는 가정이 없죠.
워낙 손이 많이 가거든요.
엿을 한번 만들면 손톱사이에 때가 다 빠진다고 하죠.
둘이서 계속 잡아 당기니까요.
또 텃밭에 기른 도라지를 캐서 생강이랑 엿기름 달인 물을 넣고 오래동안 달이면 도라지청이 되지요.
특히 저희집엔 큰 손주가 어릴적부터 호박식혜를 먹여서 곧잘 먹습니다.
그래서 텃밭에 하우스대를 엮어서 단호박을 심었습니다.
맨땅에 심은것보다 그물망을 쳐서 올리면 더 많이 열리거든요.
밭 가장자리에는 만차량을 심어서 호박식혜를 만들어 주곤합니다.
이때 단호박은 단맛이 있어서 배즙을 조금만 넣으면 되는데,
만차량은 색은 노랗게 이쁘지만 단맛이 덜해서 배즙이 더 필요합니다.
식혜를 만들 때 단맛을 내기위해서 설탕이나 인공감미료 대신 배즙을 넣고 식혜를 만들거든요.
어느날 아들 내외가 볼일이 있어서 우리집에 놀러 왔습니다.
부엌에서 식사하고 난 뒤에 식탁에서 차주문을 하더군요.
할머니집 부엌이 할머니카페라 하면서요.
"할머니, 커피네잔이랑 호박식혜 한잔이요"이렇게 주문하기도 합니다.
아들 내외가 밥먹고 난후에 차마시러 데리고 다녔나 봅니다.
식혜가 기침에 좋다고 하기도 해서 자주 만들어 주곤합니다.
도라지청도 감기 예방에 도움이되고, 호흡기에 좋다고 해서 만들어 먹는답니다.
어느덧 10월의 마지막 날이네요.
늦더위가 있어서 푸른 10월이 되었네요.
이용 가수의 "잊혀진 계절"이 종일 듣게되는 날이네요.
다음주부터 찬공기가 내려와서 추워지기 시작한다는 예보입니다.
10월의 마지지막 날을 멎지게 보내시고
새달 11월은 10월보다 좀더 나은 달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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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자유주제·자유게시판
오늘 들깨를 털었습니다.
원래는 모레나 털려고 했는데 내일 비소식이 있어서 서둘러 오늘 들깨를 털었습니다.
이슬을 맞혀서 털었더니 들깨가 튀지도 않고 검부적도 적게 나온 것 같습니다.
작년에는 들깨모를 부었는데 싹이 나질 않아서 여러번 씨를 뿌렸는데 올해는 그런대로 들깨모종이 자랐답니다.
들깨는 원래 6월 6일 현충일 쯤 들깨모를 부었다가 6월 25일 6.25사변일 쯤 본밭에 옮기는 것이 들깨를 심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어찌하다보니 7월 들깨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들깨모가 덜 자라서 손가락 두세마디 정도의 어린 들깨모를 이식했습니다.
예년보다 2주정도 늦게 들깨모를 간격을 더 띄워서 심었다.
중간에 적심도 자주 했습니다.
6월 들깨나 7월 들깨나 9월 중순께 들깨꽃이 피는 시기는 같은 것 같았다.
매년 이 맘 때면 다음해에는 들깨모를 더 간격을 넓게 심어야겠다라고 다짐을 합니다.
올해는 늦게 심기도 했지만 간격도 조금 띄우고 심어서 쓰러지거나 죽은 들깨가 없었고,
들깨꽃이 필 때 웃비료를 살짝하고 막대기로 털어주었습니다.
그래선지 들깨 꼬트리가 제법 길게 달린 것 같았습니다.
올해는 조금 내심 기대를 하면서 들깨가 아직 마르진 않았지만 내일 비소식이 있어서 오늘 오전에 서둘러서 털었습니다.
들깨를 털 때 튀어나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둘레에 망을 쳤습니다.
막대기로 털고 선풍기로 부쳐서 들깨를 담았습니다.
양이 많으면 넓게 비닐을 피고 도리깨로 두드리면 편한데 조금이라 막대기로 털었습니다.
작년보다 작은 면적인데도 평년작은 된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7월 들깨를 심기로하고 간격을 더 띄워서 키를 키우지 않고 가지를 많이 번지게 심어야겠습니다.
오늘은 햇볕이 강했습니다.
따스한 햇볕아래 오랏만에 준비해간 점심을 먹고 커피도 마셨습니다.
일이 서툴러서 23k를 터는데 거의 한나절을 소비했습니다.
한국시리즈 야구중계를 봐야하는데 마음이 바빴습니다.
작년엔 옥상에 널었는데 벌레가 많아서 하수스에 널고 까만 망으로 덮고 왔습니다.
이제 가을걷이는 양파 2판을 심고
곶감과 감말랭이를 하면 마무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야구중계방송을 보면서 오늘 저의 이야기를 끄적거려봅니다.
주말 행복하시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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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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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 -

오늘날의 60, 70, 80세대들이 살아온 길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들이다!"
글을 읽으면서 아주 먼 이야기 같지만 얼른 머릿속에 생각이 많이나서 저의 생각을(●) 얹어 보았습니다.
참으로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었지만 정(情)만큼은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정으로 풍요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우리는 <호롱불> 세대였다.
90%는 전깃불이 없고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호롱불에 머리카락을 태우기도 했고 속옷에 기생하는 써캐를 태우기도 했다.
자다가 등잔을 발로차서 호롱에 있던 석유가 쏟아져서 석유기름 냄새가 온 방안에 몇날몇일 나기도 했다.
호롱심지를 높게하면 그으름이 생겨서 콧속이 새까매지기도 했다.
석유기름은 한되 두되 이렇게 병이나 양철통으로 담아서 구입했다.
호롱불 대신에 촛불을 키기도 했다.

2. 우리는 <뒷간> 세대였다.
90%는 실내 화장실이 없고, 엄동설한 한겨울에도 뒷 구석 재래식변소에서 볼 일을 봤다.
또 잿간이나 돼지막에 올라가서 생리작용을 해결하기도했다.
●지금같이 보드런 화장지는 없고 신문지나 책을 찢어서 사용했다.
그 중에 제일은 미렁지로 만든 일력자리 달력이었다.
라사점이나 안경점에서 주로 만들었다.
옛날엔 옥수수껍질이나 지푸라기를 비벼서 사용하기도 했다고한다.
측간을 갈 때 무서움을 타는 아이들은 측간 문앞에서 무섭다고 기다리라고했다.
외국인들한테 우리나라를 관광할 때 가장 애로가 뭐였나?를 문체부에서 설문을 받았습니다.
제일 많은 것이 냄새나고 지저분한 화장실 문제였다.
정부에서 즉각 공중화장실과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을 점검하고 감독한 결과 전국 어딜가나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3. 우리는 <우물> 세대였다.
상수도가 없어 동네 공동우물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 항아리에 담아 놓고 마셔야 했다.
●군대에서 철모속에 썼던 화이바로 물바가지를 대신해서 물을 퍼올렸다.
우물가엔 앵두나무와 향나무가 있었는데 제
사를 모실 때 향나무를 잘라 향을 피웠다.
우물은 냉장고 역할도했다.
전기시설이 없었고 냉장고가 없을 때라 열무김치를 담가서 빨간 항아리모양의 프라스틱통에 담아 우물속에 끈으로 묶어서 담갔다가 꺼내 먹었다.

4. 우리는 <가마솥> 세대였다.
98%는 목욕탕이 없어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목욕을 했다.
●설명절에나 돼야 읍내에 나가서 "다이얼"이라는 노오란 비누와 이태리 때수건으로 싹싹문질러 때를 벗겼다.
너무 벗겨서 쓰라리기도했다.
샴푸대신에 늘 빨래비누나 세수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요즘같이 매일 머리를 감는 일은 없었다.

5. 우리는 <손빨래> 세대였다.
100%가 세탁기가 없어 개울에 나가
추운 겨울에도 얼음장을 깨고 빨래를 했다.
●공동우물가나 시냇가에 널찍한 바위에서 빨래방망이로 두들겨서 빨래를 했다.
고무장갑이 없이 겨울철 빨래를 할 때는 손이 얼어서 시리다가 저렸다.
삼베나 광목은 양잿물에 담갔다가 찌든 때를 빼고 빨래를 했다.

6. 우리는 <보행/자전거> 세대였다.
95%는 자가용이 없어 대부분은 걷거나
일부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지프차나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부의 상징이었다.
멀리있는 교통이 불편한 학교를 다니는 여학생들도 자전거로 통학을했다.
유독 우리고장 남원여고 학생들은 많은 여학생들이 자전거로 통학을했다.
학교가 시내에서 조금 멀리 있어서 교통편의가 좋지 않았다.
교복은 치마지만 자전거로 통학할 때는 바지를 입고 다녔다.

7. 우리는 <고무신> 세대였다.
95%는 구두도 운동화도 없어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타이어표"검정 고무신은 어찌나 질긴지?발바닥쪽이 밀릉밀릉할 때까지 신어야했다.
여름엔 양말을 신지않아서 조금만 걸어도 까만 때꼬장물이 고무신 테두리에 보였다.
교복을 입으면서 얇은 천으로 된 검정운동화를 신게 되었다.
체육시간에 공을 몇차례 차면 운동화 가운데가 동그랗게 벗겨지기도 했다.
교복에 학교를 상징하는 뺏지와 모자에 교포를 달고 다녔다.

8. 우리는 <까까중> 세대였다.
100%가 이발비가 적게 드는 까까중 머리로 다녔다.
●고향 마을에 1년에 나락 한말과 껕보리 한말을 주고 양손 바리깡으로 머리를 빡빡 깍아주시는 어른이 계셨다.
한달 보름정도에 한번씩 이발을 하는데 바리깡에 머리카락이 씹히면 머리는 하늘로 치솟는다.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머리를 하도 감지 않아서 쇠똥같이 때가 낄 때도 있었다.

9. 우리는 <보자기> 세대였다.
98%는책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차고 뛰어 다녔다.
●어깨에 천이 미끄러운 나이론천인 다우다로 만든 책보로 책을 싸서 어깨에 둘러매고 뛰면 할머니께서 합천해인사에 다녀오시면서 선물로 사주신 나무로 된 필통을 사주셨는데 나무필통속에 연필이 얼마나 달그락 거리는지?
다우다천이 미끄러워서 풀리면 책이랑 필통속에 연필이 다 쏟아지기도했다.
양철로 만든 필통도 있었다.

10. 우리는 <고무줄> 세대였다.
100%가 장난감이나 놀이기구가 없어서 여자애는 고무줄 넘기하고, 사내애는 말타기 놀이도하고 새총을 만들었다.
●여자애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 면도칼로 고무줄을 자르고 도망치기도 했다.
남자애들은 자치기나 못치기 땅따먹기 등 놀이를 즐겼다.

11. 우리는 <강냉이> 세대였다.
100%가 쌀이나 보리쌀이 없어서 학교에서 주는 강냉이 가루로 강냉이 빵이나 꿀꿀이 죽을 만들어 끼니를 때워야만 했다.
●미국에서 원조식품으로 우유가루를 주었는데 유통과정에서 오래되어 우유가루가 돌뎅이가 되었는데 얼마나 딱딱한지?
우유가루 덩어리를 깨서 먹으면 달작지근하고 맛있었다.
우유덩어리에 삿카린을 조금넣고 끓여서 마실 때 그 맛은 신기루였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강냉이죽을 끓여서 나누어 먹었다.
옥수수가루로 만든 푸석푸석한 옥수수빵도 맛있었다.

12. 우리는 <주경야독> 세대였다.
98%가 낮에는 가사일, 농사일 돕기, 풀베기,
나무하기, 소먹이기, 동생돌보기 등을 하고서 밤이 되어야 학교숙제를 했다.
●집집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소를 먹였다.
학교갔다오면 소를 몰고 방천이나 냇가에가서 소에게 풀을 먹였다.
꼴망태를 메고 낫을 숫돌에 날이 서도록 잘 갈아서 깔을 한망태씩 매일 베기도했다.
집집마다 소를 키우기 때문에 소깔도 귀했다.
시내에서 바라구 등 많은 풀을 보면 소깔베는 생각이 나서 아깝다고 생각하곤 했다.
지금도 천변에 수북하게 자란 풀을보면 낫으로 베다가 소를 먹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소를 몰고 가다가 소가 맛있는 콩을 보고 논두렁에 콩잎을 뜯어 먹어 논주인한테 야단을 맞은적도 있었다.

13. 우리는 <주판> 세대였다.
100%가 전자계산기나 컴퓨터는 없고 다섯 알 짜리 주판을 굴리면서 셈을 했다.
급수를 따야 은행 등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
●상업학교에 진학해서 주산급수를 따고 은행에 취업하면 동네잔치를 하기도했다.
은행에 취직을 할려면 2급이상은 따야했다.
주산은 아이들 지능을 키우는데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세계주산대회와 암산대회도 열리곤 했다.
시내에 주산학원도 엄청 많았다.

14. 우리는 <일제고사> 세대였다.
100%가 입학 / 졸업은 물론이고,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교생이 일제히 시험을 치르고 등수를 매겨 경쟁했다.
●일제고사에서 1등을하면 그 집안에 경사가났다.
일제고사 성적으로 등수를 매겼다.

15. 우리는 <입학시험> 세대였다.
100%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본고사 입학시험을 치러 상급학교에 진학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께서 마을회관이나 넓은 집을 빌려서 중학교 진학희망자들을 모아서 중학교입시를 위한 과외를 합숙을 하면서 했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2곳의 남자중학교가 있었는데 경쟁율이 평균 2:1이 넘었었다.

16. 우리는 <공돌이 공순이> 세대였다.
하도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하면 식모살이 아니면 구로공단 같은 공장에서 공돌이 공순이 버스차장을 하면서 땀 흘려 일을 하고 야간에는 교복입고 야간학교에 등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지게를 맞췄고 그 지게지기가 싫으면 검정고무신을 신고 야간 완행열차타고 서울로 올라가 요꼬공장 등에 취직을했다.
여자아이들은 지금은 도우미라고 하는데 부잣집에 들어가서 식모살이를 하기도했다.
추석과 설명절에 새옷에 새구두에 폼을 잔뜩내고 고향을 찾아와서 시건방을 떨고 다니고기도했다.

17. 우리는 <삯 월세> 세대였다.
80%가 신혼 살림집을 구할 돈이 없어 거의 모두가 사글세 단칸방부터 시작하여 전세로 옮겨 다녀야만 했다.
●처음엔 사글세방으로 시작해서 전세로 옮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단칸방이나 미닫이로 가운데를 막은 이간장방을 얻어서 살림을 시작했다.

18. 우리는 <월남전> 세대였다.
나라가 빈곤하여 목숨걸고 전쟁터에서 돈을 벌어 와야만 했다.
●지금은 비행기로 3시간 남짓이면 가는 베트남인데 부산항에서 배로 보름이 걸렸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갔던 파월장병님들께 많은 감사를 드립니다.
윌남전에 다녀온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도했다.

 19. 우리는 <광부. 간호사> 세대였다.
최 빈곤국으로 독일에 가서 석탄 광부와 시체 닦는 일로 돈을 벌어 와야 했다.
그나마 고졸이상 경쟁이 치열했다.
평균 5:1이었다.
●서독에서 1,000미터 넘는 깊은 땅굴에 들어가 석탄을 캐고 서독의 병원에서 요양원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를 돌보고 대 소변을 치우고 시체를 닦고 염을 하면서 외화를 벌어들이고, 노무자를 담보로 차관을 얻어와
공장을 지으며 산업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이 진정한 애국자로 인정받고 국가보훈 자격을 드렸으면 한다.
이분들 때문에 독일에서 차관을 했고 경제개발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쥐나 개나 엉터리 국가유공자들이 많이 있는데 진정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충분한 국가유공자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20. 우리는 <중동 노동자> 세대였다.
열사의 나라 중동지역에서 가족과 자식을 위해 돈을 벌었다.
우리가 피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건재하고 있지 않는가?
●뜨거운 사막에가 건설현장에서 많은 돈을 벌어 가정의 경제는 물론이고 국가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국내에서 건설일을 하는 사람보다 몇곱은 더 임금을 받았던 것 같다.

젊은이들이 우리를 "꼰대"라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이다.
우리 중에는 지금도 재활용 폐품을 줍는 부모도 계신다.
작은 리어카에 폐지를 주어 폐지값이 헐값이라 몇푼밖에 받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과 가족을 위해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일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가난하고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와 열심히 캥거루 세대를 키워낸 죄밖에 없는 샌드위치 세대 들일 뿐이다.
곳곳에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네요.
요즘 곳곳에 화재가 많습니다.
재산피해도 이제는 그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날씨가 늦게까지 더위가 있더니 갑작스럽게 차가워졌습니다.
올해 독감이 유행일거라는 중대본부의 예상이니 독감예방접종을 하셔서 독감에 걸리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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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제·자유게시판
숙(쑥)맥같은 사람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숙맥이라 한다.
숙(菽)은 콩이고 맥(麥)은 보리다.
"야이! 쑥맥아~"를 순수하게 풀이하면
"야이! 콩보리 같은 놈아~"
콩(菽)은 맛은 별로 없지만 밭에서 나는 쇠고기로 단백질과 지방산이 풍부합니다.
보리(麥)는 못살던 시대에 보릿고개의 한을 줬지만 식이섬유가 풍부한 자연강장제입니다.
밀과 보리라면 몰라도 콩과 보리는 그 크기와 모양이 전혀 달라 보통 사람들도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쑥맥!'이라고 욕아닌 욕을 하기도 한다.
춘추시대의 도공의 형이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둔하여 아무일도 맡길 수 없었던 일화에서 유래하여 사리분별을 잘못하거나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리숙함을 뜻하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된장인지 똥인지~~"
원래 의미대로라면 모멸감과 수치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우리가 편하게 쓸 때는 쑥맥이라해도 화를 내는 사람이 없으니 실제 의미보다는 조금 가볍게 "서툰 사람"정도로 쓰지않나 싶습니다.
도공의 형은 콩과 보리를 구별 못했지만 이런 멎진 말을 후세에 남겼는데 아직도 삶을 헤매고 있는 나는 후세에 무엇을 남길까?
이렇게 한층 가볍게 서툰 사람을 쑥맥같은 사람이라고 개그화 되었는데
숙맥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콩과 보리뿐이겠는가?
진정한 쑥맥들이 숙맥불변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설치는 세상이 답답합니다.
상식과 비정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욕과 평상어를 구별하지 못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해를 보고 달이라 하고,
달을 보고 해라고 하면,
낮과 밤이 바뀌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날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숙맥의 난(亂)에 절정에 이르고 있다.
숙(寂)과 맥(麥)을 분별해야 할 언론과 권력기관은 숙맥의 시대에 기름을 부으며 부추기고 있고, 각종 권력은 그 위에서 마음껏 난세를 즐기고 있다.
콩과 보리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의 세상을 침묵하고 살기에는 너무나 힘겹고 답답하고 가슴아픈 일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가 거짓말 같이 슬며시 우리곁에 와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지만 그런 세상이 되고 보니 두눈 똑바로 달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생각만 해도 오짝하는 등줄기에
진땀이 납니다.
우리생활에 공감되는 글이라 퍼와서 제 생각도 꾸겨 넣었습니다.
이번주에는 계절이 바뀌느라 기상들이 요동을 칠 것 같습니다.
연일 날씨가 따뜻해서 김장철을 잠시 잊고 살았는데 한번쯤 추위가 있어야 서둘러 김장을 하더군요.
겨울나기에는 뭐니뭐니해도 서리맞고 자란 90일 가을배추로 김장해서 김치독에 김치를 가득채우고 동치미를 담아 마당 한켠에 묻고, 연탄창고에 연탄을 차곡차곡 가득채우고, 광에 방아를 찧어서 커다란 항아리독이나 뒤주에 가득 담아놓을 때 겨우나기가 끝났을 때는 옛날 이야기가 되었네요.
김치냉장고가 있어서 차가운 바람과 눈 맞으면서 김장할 일도 없고요?
대가족이라 1접 이상씩 김장했었는데 그렇게 할 일도 없게 되었지요.
생골가지나 장작을 패서 쌓았다가 두꺼운 구들장을 데우느라 군불을 땠었죠.
그래서 한 때는 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사람들을 산림청에서 완장을 팔뚝에 두른 사람들이 나와서 적발하기도 했었습니다.
산림녹화라는 명목으로 산에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했었습니다.
겨울철 불을 지피기 위해서 워낙 나무를 많이 베내서 벌거숭이 산이 많았습니다.
그 때 사방사업을 실시했습니다.
벌거숭이 산에 나무를 심어서 산사태를 방지하고 산림녹화를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해질녘이면 시골에서 밥을 짓고, 쇠죽을 끓이고, 군불을 때느라 굴뚝에서 나온 하얀연기가 겨울철 낮은 기압때문에 가라앉아 골목길에 자욱했던 산수화처럼 예쁜 그림이 있었습니다.
지금 난방은 가스와 기름 보일러 시골에는 화목보일러로 하기 때문에 연탄은 하우스에서 농작물 보온용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마트마다 방금 도정한 하얀 쌀이 쌓여 있어서 언제든지?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잖습니까?
옛날엔 지푸라기로 짠 쌀가마니에 90k들이 80k들이를 담았습니다.
고향에서 서울로 농사지은 쌀을 자식들한테 90k들이 쌀한가마니를 남원역에서 서울로 부치면 거의 1주일정도 시간이 소요됩니다.
남원역 창고에서 쥐들이 빼먹고 지푸라기로 짠 가마니라 새끼로 꿰맨 곳으로 쌀이 빠지고 인부들이 쇠꼬챙이로 들어 옮길 때 쇠꼬챙이 치른 곳으로 쌀이 흘러서 쌀가마니가 홀쭉해지고 아마 5k 많게는 10k이상 부족했다고들 했습니다.
지금은 지푸라기로 짠 가마니는 사라지고 종이비닐봉투에 40k들이 20k들이 10k들이 이것도 많다고 5k들이 포장도 나오더군요.
이렇게 편리한 세상이 왜 마음도 편하지않고 정(情)이 부족할까요?
먹을 것이 없을 때 콩 한조각도 니누어 먹을 때가 마음도 편했고 정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시내에 가로수들이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먼산 단풍은 서리가 내려야 이쁘게 물들더군요.
이번 가을비가 끝나고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산간지방은 어름도 있을 수 있고,
바람도 차갑습니다.
얇은 가디건에서 패딩으로 바로 옷이 바뀔 수 있다는 의류계의 이아기가 실감납니다.
면역력이 떨어진 연세드신 분이나 아이들은 감기에 취약하니까 따뜻한 옷을 준비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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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을 대상으로 응모한 짧은 글 당선작이라는 글이 2024년 1월에 발표되었다고 있어서 보내드립니다.
어쩌면 나이드신 분들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밤새 제법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들녘에 아직도 벼를 수확하지 않은 논이 보이고,
들깨를 베어서 뉘어 놓았습니다.
많은 비에 피해가 있지나 않을까?염려스럽습니다.
오늘은 종일 비소식이 있습니다.
내일 비그치면 대체로 맑은 날씨가 있는데 기온이 많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올해는 독감예방접종을 꼭 하셔야겠습니다.
올 겨울에 매서운 독감이 유행할꺼라는 중대본부의 예상입니다.
접종하고 한달여 지나야 독감예방하는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10월이 접종적기라고 합니다.
나이들어가면서 혹시나 나는 어떨까?웃픈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1. 가슴이 뛰어서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라.
2. 전구 다 쓸 때 만큼도
남지 않은 나의 수명.
3. 종이랑 펜 찾는 사이에
쓸 말 까먹네.
4. 병원에서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들은 병명은 "노환입니다"
5. 일어나긴 했는데
잘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다.
6. 자명종 울리려면 멀었나
일어나서 기다린다.
7. 연명치료 필요없다고
써놓고 매일 병원 다닌다.
8. 만보기 숫자 절반 이상이
물건 찾아 헤맨 걸음.
9. 몇 가닥 없지만
전액 다 내야 하는 이발료.
10. 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산다.
11. 쓰는 돈이
술값에서 약값으로 변하는 나이.
12. 젊게 입은 옷에도
자리를 양보받아 허사임을 알다.
13. 이봐 할멈!
입고 있는 팬티 내 것일세.
14. 일어섰다가 용건을
까먹어 다시 앉는다.
15. 분위기 보고
노망난 척하고 위기 넘긴다.
16. 무농약에 집착하면서
먹는 내복 약에 쩔어 산다.
17. 자동응답기에 대고
천천히 말하라며 고함치는 영감.
18. 전에도 몇 번이나
분명히 말했을 터인데 "처음 듣는다!"고.
19. 할멈!
개한테 주는 사랑
나한테도 좀 주구려.
20. 심각한 건
정보 유출보다 오줌 유출.
21. 정년이다.
지금부턴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지.
22. 안약을 넣는데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린다.
23. 비상금 둔 곳 까먹어
아내에게 묻는다.
24. 경치보다 화장실이
신경 쓰이는 관광지
25. 손을 잡는다.
옛날에는 데이트, 지금은 부축.
26. 이 나이쯤 되니
재채기 한 번에도 목숨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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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한번 맺은 인연은 영원 하세요.
오늘 목마르지 않다 하여 우물에 돌을 던지지 마세요.
오늘 필요하지 않다고 하여 나를 팔꿈치로 떠밀지 마세요.
오늘 배신하면 내일 배신 당합니다.
사람의 우수한 지능은 개구리 지능과 동률을 이를 때가 많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까맣게 잊고 있듯 사람들도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그러다가 다시 어려움에 처하면 까맣게 있고 있다가
그를 찾아가 낯 뜨거운 도움을 청합니다.
개구리와 다를 것이 뭐가 있나요.
비 올때만 이용하는 개구리와 뭐 다를 게 있나요.
배신해 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물물을 언제나 먹기 위해서는 먹지 않는 우물을 깨끗이 관리 해 놓아야 하듯이 필요할 때 언제고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필요 없는 동안에도 인맥을 유지시켜 놓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관심하고 배신하면 그가 진정으로 필요하게 되었을 때 그의 앞에 나타날 수 없게 됩니다.
포도알맹이 빼먹듯 필요할 때 이용 해먹고 배신해 버리면 상대방도 그와 똑같은 태도로 맞습니다.
한번 맺은 인연은 소중히 간직하여 오래도록 필요한 사람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등을 돌려 버리면 상대방도 등을 돌려 버리게 됩니다.
내가 은혜를 져 버리면 상대방도 관심을 줘버리며 내가 배신하면 상대방도 아예 무시해버리게 됩니다.
한번 맺은 인연 소중히 하세요.

덕분입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한날 되세요.♡

너무 좋은 글이라 퍼왔습니다.
인간사가 늘 그랬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었죠.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옛말에 "인심(人心)이 노적(露積)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심을 얻고 살아가는 삶을 하는 사람은 인덕이 노적같이 쌓인다는 말이겠지요.
저희 시골집 앞집에 정말 열심히 사시는 작년에 팔순을 맞이하신 부부가 계십니다.
그렇게 많은 농사일을 하시면서도 저희 텃밭도 관리를 해주시면서 빈집인 저희집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관리를 해 주십니다.
그 많은 논을 직접 경운기로 갈아엎고 로타리를 쳐서 이양기로 직접 모내기를 하십니다.
오로지 탈곡할 때만 콤바인으로 하더군요.
저희 텃밭을 이용하시고 대신에 배추를 심어주셔서 제 형제들 김장을 시골에서 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저희 어머니 살아계실 적에는 솔잎나무를 한짐씩 해다가 주셔서 어머니께서 불쏘시개로 쓰셨습니다.
저희 산에서 죽은 나무를 잘라서 경운기로 가득 실어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내려가서 장작을 패서 처마 밑에 쌓아 놓으면 한겨울 아버지께서 부엌에 군불을 지피셔서 구들이 뜨거워서 따뜻하시게 보내시곤 하셨습니다.
별거 아니지만 시골집에 내려갈 때 뭐좀 챙겨다 드리곤 했습니다.
몇년전에 농협에서 조합원이신 아버지앞으로 나온 농자재교환권을 조금 드렸습니다.
비료라도 구입해서 쓰시라고요.
제가 사다드리면 되겠지만 필요한 비료를 사다쓰시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형제들이나 어르신들께 안부전화를 많게 드린 편입니다.
저는 고모도 고모할머니도 없습니다.
명절 때면 친정이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모가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다리가 불편하셔서 바깥 출입을 못하시는 연세 많으신 이모님이 혼자서 생활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른 이모님보다 더 전화를 자주 드리고 있습니다.
어제일을 말씀 드렸더니 이모님께서 "인심이 노적이다" 라고 말씀 하시네요.
인심을 노적같이 쌓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얼마 전에 뜻하지 않게 이웃한테 자그마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저희 텃밭에서 생산된 작물을 나눔을 했거든요.
사실 작물을 심다보면 어떻게 꼭 필요한 양만 심겠습니까?
종자를 사다보면 남길 수가 없어서 빈터에다 뿌립니다.
요즘 무나 알타리를 솎아야 합니다.
저희가 다 먹을 수가 없답니다.
또 찬바람이 부니까 풋호박이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솎아낸 알타리와 무, 풋호박 등을 이웃에 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이웃이 사촌보다 더 가까울 수 있는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맺은 인연은 소중하게 기억되기도 합니다.
오늘도 카톡으로라도 안부를 전할 수 있는 인연도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홍산마늘과 육쪽마늘을 심었습니다.
홍산마늘은 관리와 수확을 좋은 편인데 역시 마늘은 육쪽이 향과 맛이 좋은 것 같습니다.
들깨는 꼬투리가 늦게 익어 이제야 베었습니다.
이제 가을걷이는 들깨를 터는 일과 곶감을 깍는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감나무 잎에 가려서 별로 보이지않던 감이 색이나면서 제법 크고 탐스런 감이 많이 보이네요.
큰 감은 감말랭이로 만들고 작은 감은 곶감을 깍을려고 합니다.
2014년에 퇴직하고 텃밭에 엄두가 나질 않아서 감나무를 네줄 18그루를 심었는데 지금은 언덕밑으로 옮기고 두줄로 줄여서 11그루만 있습니다.
10월도 막바지에 달했습니다.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내일은 전국에 제법 많은 비소식이 있습니다.
지금 비는 아무 쓰잘떼기가 없는 비인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기온이 한자리수로 떨어졌습니다.
비 그치고 기온이 많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남은 10월은 더 아름다운 달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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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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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의 노인들의 경이로운 특징

- 굶기를 밥 먹듯이 하다가 최초로 밥 세끼를 먹기 시작한 세대
- 고층 빌딩을 본 첫 세대이자 에레베이터를 탄 첫 세대
-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한 첫 세대
- 자가용을 운전하기 시작한 첫 세대
- 스포츠센터에 다니면서 운동을 하기 시작한 첫 세대
- 세상에 꿈도 못 꾸던 세계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첫 세대
- 집에서 전화받기 시작한 첫 세대이고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한 첫 세대
- 민주주의를 경험한 첫 세대
- 주판으로 계산하다가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컴퓨터를 쓴 첫 세대
- 환갑잔치를 포기한 첫 세대
-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첫 세대
-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며느리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첫 세대
- 의사 선생님을 가장 많이 만난 첫 세대입니다.

어쩌면 좋은 세상을 만난 것 같기도 하면서
웬지 서글픈 마음도 있네요.
이번 비가 그치면 바람도 세차고 쌀쌀한 날씨라고 예보합니다.
내일 아침부터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예보라 따뜻한 옷차림도 준비해야겠습니다.
10월들어 맞이한 세번째 주말도 행복하시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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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제·자유게시판
父母로부터 배우는 子女 🏝

옛날 어느곳에~
孝心(효심)이 아주 두터운~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夫婦(부부)가 모두 일을 하러 들로 나가고,
늙은 할머니가 혼자 집을 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심심하기도 하고, 무슨일이든 거들어야 할것 같은 생각이 들어, 호박넝쿨 구덩이에 거름을 주려고,
눈이 어두운 터라,
그만 막 짜다 놓은 참기름 단지를~
거름으로 잘못알고~
호박넝쿨 구덩이에 붓고 말았습니다~~

마침 밖에 놀러 나갔다 막 돌아온 어린 손녀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孫女(손녀)는 이사실을 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리면 놀라실것 같아서, 모른체 하고, 얼마후 집에 돌아온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 할머니께서 참기름을 오줌인줄 아시고, 호박넝쿨 구덩이에 부으셨어요"

"뭐야? 그래, 할머니도 아시니?"

"아니요, 말씀드리면 놀라실것 같아서,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어요"

"오냐, 참잘했다. 할머니께서 아시면 얼마나 놀라시겠니?"

어머니는 딸의 행동이 너무나 기특해서, 딸을 등에 업고 뜰을 돌며, 稱讚(칭찬)을 했습니다.

조금후, 남편이 돌아와 그 광경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물었습니다.

"아니, 여보! 다 큰 아이를 업고, 웬 수선이요?"

"글세, 이 아이가 얼마나 기특한지 알아요?"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체 하셔야 되요"

이말을 들은 남편은, 갑자기 땅에 엎드려, 아내에게 절을 했습니다.

"여보, 내절 받으시오~~"
내 어머님을 그처럼 받드니~ 어찌 내가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소 !!"

자신이 父母(부모)님에게~
孝道(효도)하고, 順從 (순종)하면, 내 子女(자녀)들이~
나에게 孝道(효도)하며 순종합니다.

자녀들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집안에 녹아있는~
좋은 정서가 자녀들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가슴 깊이 닿는 좋은 글이라 퍼왔습니다.
요즘 학부모들의 지나친 관심으로 어린아이들이 잘못을 못 느끼고 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내 자식이 귀하죠?
그래도 어른들이 모범을 보여야 따를 수 있지 않을까요?
제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적에 결혼하면 멀리 서울에가서 산다고 하더군요.
제 형제가 육남매인데 동생들은 멀리서 살기 때문에 집안에 행사 때와 명절 때 남원에 들립니다.
저는 장남이라는 무게 때문에 거의 매주 토요일 일과를 마치고 두 아이를 데리고 남원에 내려가서 농사일을 도와드리는 것이 제 일과였습니다.
농사철엔 한번도 빠지지않고 쉬는 날 매번 다녔습니다.
제 둘째가 매주 남원을 다니면서 부모님 일손을 도와드리는 제 생활을 보고 제 동생들처럼 명절 때와 집안 행사 때와 쌀을 가지러 올 때만 집에 내려온다고 초등학교 다니는 어릴 때 밥상머리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웃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두아들이 저를 닮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부모님께 전화를
지금까지 드렸습니다.
옛날에는 전주를 벗어나면 시외전화요금이 부과되었습니다.
군단위로 지역번호가 있었거든요.
지금은 도단위로 지역번호가 있고 핸드폰으로 통화료가 무상이 많습니다.
특별한 일없이 그냥 일 좀 그만 하시라고 방에 따뜻하시게 하시라는 등 일상적인 이야기를 드립니다.
오죽하면 어머니께서 "큰 아들 전화받는 재미로 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군복무 때도 그 시절에 가끔씩 전화를 드렸습니다.
지금도 제 형제 육남매한테는 1주일에 한두번씩 사촌들한테는 한달에 두세번씩 안부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사촌 여동생이 큰 오빠전화를 받으면 시댁에서 가오가 슨다고 말하더군요.
고속버스를 운전하는 사촌동생이 있는데 제 전화를 받으면 엔돌핀이 솟는다고 술한잔 걸치면 말하더군요.
제 큰 애가 할아버지한테 전화를 자주 드렸습니다.
지금은 아버지께서 난청이 있으셔서 전화마저도 자주 못 드리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적에 "큰 손주는 즈그 아부지 닮아서 전화를 자주한다"라고 자랑삼아서 자주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아들 둘은 매일 퇴근하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합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퇴근시간이되면 전화기를 꼭 손에 쥐고 있습니다.
텃밭에서 일을 할 때도 아들들이 전화를 하면 혹시나 못받을까봐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일을 합니다.
제 부모님께서 제 전화를 기다렸듯이 제 아내도 아들들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마음이 따뜻한 이야기를 읽고 다시한번 가정교육이 제일 먼저라고 생각해 봅니다.
가을 비는 별로 쓰잘떼기가 없습니다.
중부지방으로 비가 많이 내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태전에 가을에 많은 비로 김장용 배추와 무가 무름병으로 썩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촌에 계시는 농부님들도 배추를 사서 김장을 했고,
추위가 있을 때 배추밭에 하얗게 마를 배추가 많이 보였습니다.
이번 가을도 일찍 파종한 배추가 염려스럽습니다.
오늘 내일 비가 끝나면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예보입니다.
저는 오늘 독감예방접종과 코로나접종도 했습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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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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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대"
열쇠의 사투리다.
"아무리 찾아봐도 열쇠가 없다"라는 표준어를 "아무리 찾아봐도 쇳대가 없다".
"열쇠로 문을 꽉 잠가야 남이 못 들어오지"라는 표준어를 "쇳대로 문을 꽉 잠가야 넘이 못 들온다".
"열쇠를 한참 찾았는데 서랍에 들어 있더구나"의 표준어를 "쇳대를 한참 찾았는디 빼다지에 들어 있더라".
엣날엔 추수를 마치면 쌀방아를 찧어서 도장이나 광에 넣고 주먹만한 자물쇠를 채우고 쇳대를 벽에 걸어 놓았는데 깜박 잊고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한참을 찾기도 했다.
그래서 나무막대기에 끈으로 묶어서 기둥에 달아 놓기도 했다.
안채 맨 끝에 곡물이나 잡다한 것을 보관하는 작은 창고 같은 것을 도장이라고 한다.
광은 사랑채 맨 끝에 방 한칸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서 문짝을 번호릍 써서 기둥 양쪽에 홈을 파고 차례대로 내리면서 나락을 채웠다.
지금도 사랑채 광엔 복(福)자 그릇과 새파란 접시와 밥그릇, 대접 등 여러가지가 쌓여 있고 숫자가 8번까지 써진 광문짝 판대기가 차곡차곡 세워져 있다.
그 때는 나락을 낫으로 베어 논에서 한다발씩 묶어 세워서 1주일 이상 말린 다음 지게로 짊어지고 날라 마당에 나락가리를 높게 만들고 타작을 했다.
하루 종일 발로 밟는 공상으로 나락을 훓고 저녁을 먹고 손으로 돌린 풍구 바람으로 나락을 돌려서 꺼스랭이와 먼지를 날려보내고 깨끗한 나락을 광문을 닫아 가면서 광에 가득 채웠다.
공상을 발로 밟아 타작을 하다 모터를 달아서 나락 타작을 쉽게할 수 있었다.
나락을 훑고 난 지푸라기는 집 밖에 차곡차곡 집채만하게 쌓았다가 소와 돼지막에 수시로 넣어서 소와 돼지의 분비물에 밣혀서 퇴비로 쓰였다.
지푸라기는 작두로 썰어서 여름에 말려 두었던 건초와 쌀겨를 섞어 쇠죽을 끓였다.
또 지푸라기로 새끼도 꼬고,
가마니도 짜고,
망태기와 멍석, 멱다리를 만들었다.
나락 모가지를 빼서 방비도 만들기도 했다.
지푸라기도 하나 버릴 것이 없이 다 쓸모가 있었다.
가을걷이를 마치면 광에서 나락을 꺼내서 다시 지푸라기로 만든 멍석에 며칠을 햇볕에 말려서 1년 먹을 양식을 방아를 찧어 도장이나 광에 넣으셨다.
저희 집은 다음해에 가뭄이나 천재지변 때문에 흉년이들까 염려되어 꼭 다음해에 먹을 어느정도 양식을 커다란 항아리나 쌀괴에 넣어서 보관했다.
군인들 먹을 식량을 전쟁이 나도 식량을 보급할 수 있도록 군량미를 보관하듯이 매년마다 1년 먹을 식량을 보관한 셈이다.
그러다가 까만 비닐로 된 가벼운 나이론 멍석이 만들어져서 신작로 한켠이나 넓은 빈 공간에서 말려 방아를 찧기 때문에 밥맛이 좋고 오랫동안 보관해도 쌀이 변하지 않았다.
비포장된 마당이나 신작로에 나락을 널다보니 나락에 돌이 들어가서 쌀에 돌이 들어 있기도 했다.
또한 방앗간 정미기가 돌을 제대로 골라내지 못해서 쌀을 잘 일어서 밥을 지어도 밥을 먹다가 돌이 씹히는 일이 허다했다.
지금 같이 콤바인으로 훑어서 저온창고로 바로 들어가서 보관했다가 방아를 찧기 때문에 미질이 좋지 않고 보관도 오래할 수가 없다고 한다.
지금도 저희 고향에 한분은 식구들 먹을 쌀을 잘 말려서 방아를 찧는다고 하신다.
또 연세드신 어르신들께서는 자물쇠를 쎄통(쇠통)이라고 부르기도 하셨다.
대문이나 광을 잠그는 자물쇠는 둥그런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자물쇠였다.
할머니께서 "광 쇳대 좀 갖고 오너라".라고 부르셨던 정겨운 할머니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농사를 하는 집은 꼭 광이나 마굿간 같은 곳이 있어야 곡물도 쌓아두고 농기구도 보관할 수가 있었다.
나락을 쌓아 놓은 광은 흙으로 벽을 쌓아서 쥐가 써가래나 기둥사이에 구멍을 뚫고 나락을 먹는다.
할머니께서 쥐구멍을 막는다고 밤송이를 쥐구멍에 쑤셔 넣으시기도 했다.
흔히 농기구를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도구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농기구는 호미나 삽, 괭이, 낫 등을 말하고,
농기계는 동력으로 움직이는 콤바인, 경운기, 관리기같은 기계를 말한다
오늘 날은 자물쇠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열쇠가 꼭 있어야하는 자물쇠에서 번호를 일렬로 맞추면 열리는 크기가 작은 번호키로 변했고,
대문도 현관문도 비밀번호를 "삐삐삐"누르면 열리는 도어락에서 한걸음 더나가 지문과 얼굴로 인식하는 키로 바뀌었다.
지금도 저희 시골집 아랫채 기둥에 어른 주먹만한 녹슨 둥그런 자물통이 두꺼운 실로 매달은 열쇠가 꽂아진 채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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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자유주제·자유게시판
어제 장성 황룡강가을꽃축제를 다녀왔습니다.
원래 주말이나 축제기간에는 별로 나다니지 않거든요.
너무 많은 인파와 차량 때문에 완전 짜증으로 꽉 찼습니다.
잠시 황룡강변을 산책하고
장성호를 들렀는데
역시 차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옥정호구절초축제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옥정호를 두른 자그마한 산에 가을꽃 하얀 구절초로 산을 덮었거든요.
역시 차가 들어가질 못해서 임실 치즈테마파크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지난주에 축제가 끝났는데 천만송이 국화가 덜 피어서 실망했다고 하더군요.
국화값만 2억원을 들여서 치즈축제를 했다네요.
아마 이번주가 국화가 만개해서 너무 이쁠 것 같습니다.
임실군은 치즈축제와 붕어섬출렁다리 축제는 성공한 축제거든요.
어제 임실 치즈테마공원이 제일 이뻤답니다.
축제가 끝났는데도 전국에서 관광버스로 구경왔더군요.
화덕피자도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해질녘까지 쉬었다 왔습니다.
임실 치즈테마공원 국화사진을 보냅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좋은 일이 많으셔서
웃는 날이 많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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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자유주제·자유게시판
어제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뜨겁고 엄청난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53살의 젊은 작가 한강씨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나라는 노벨 평화상 다음으로 두번째 수상입니다.
사실 노벨 평화상은 여러가지 껄떡지근한 뒷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노벨 문학상은 깨끗하다고나 할까요?
그야말로 티없이 깨끗한 노벨 문학상입니다.
그래서 더 빛나고 아름다운 수상이 아닌가?싶습니다.
맨날 지밥그릇 챙기느라 민생은 뒷전이고, 핏대를 세우고 고성과 쌈박질만하느라 밥값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국회 국감장에서도 잠시 멈췄고 쬐끔이지만 잠시 화기애애한 시간이 있었다고 하네요.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한국 문학계의 큰 경사이군요.
노벨 문학상에 목말라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중국작가가 받을 줄 알았는데 한강작가가 받게되어 너무너무 기쁘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리말이 너무 뛰어나서 번역이 힘들기로 유명해서 노벨상 받기가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도 아마 번역이 심들어서 수상에 못미치지않았나?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노벨 문학상의 대상으론 충분한 작품이 아닌가?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한글날 다음날 노벨상 수상 쾌거를 세종대왕께서도 기뻐하실 일입니다.
답답한 현실에 한줄기 밝은 빛이 보이는 느낌입니다.
글쓰기의 고단함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크셨을텐데 극복하시고 쾌거를 이루셨네요.
자랑스럽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의 여성 수상자라는 사실도 자랑스럽습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채식 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흰"을 읽어야겠어요.
노벨 문학상이 발표되자 서점으로 달려가서 한강작가님의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채식주의자가 노벨 문학상을 받게 했네요.
부친이신 한승원 선생님의 글은 문학인들의 교과서이기도 하니
그 아버지에 그 따님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참으로 좋은소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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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제·자유게시판
새벽에 배추랑 무에 물을 주었습니다.
해뜨기전이라 어둑해도 호스로 배추에 물주는데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배추를 심고 워낙 날씨가 뜨거워서 배추가 심하게 몸살을 앓더니 더디게 크네요.
항암배추와 불암플러스 2판을 9월 3일에 심었는데 다들 그랬겠지만 저도 30여포기가 뜨거운 날씨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나머지는 괜찮겠지?했는데 크기가 차이가 많네요.
같은 날 심었는데 제 각각입니다.
하기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젠 결구가 되기 시작하는데 통이 크질 않습니다.
그 동안 고추나무가 옆에 있어서 아침 햇살을 받지 못한 영향도 있겠다!싶어서 서둘러 고춧대도 뽑았습니다.
매년 배추를 심었던 방법과 다른점이 있답니다.
해마다 참깨를 베고 퇴비와 토양살충제, 비료를 넣고 경운해 새로 고랑을 만들어서 비닐멀칭을하고 배추를 심었었습니다.
올해는 어찌하다가 참깨두덕에 그냥 배추를 심었거든요.
무도 올해는 그냥 참깨두덕에 심었습니다.
무도 맘에 들지 않네요.
어제 nk비료로 2차추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나가서 물을 흠뻑주었습니다.
오늘은 남원 5일 장날입니다.
시골 장날은 한번씩 구경할만 합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풍경입니다.
거의 시골 노인분들께서 농사지으신 온갖 물건을 많지도 않게 조금씩 들고 나오셔서 쭈그리고 앉아 팔고 계십니다.
허리는 굽고,
손등은 까끄럽게 트고,
얼굴엔 많은 주름살이 마음을 안따깝게 하더군요.
오늘 남원을 다녀올려고 했습니다.
시골집 별채 앞에 고구마와 땅콩을 조금 심었습니다.
제 텃밭에는 까치와 비들기 때문에 땅콩을 심지 못하거든요.
첫해 땅콩을 심고 어찌나 꿩이 땅콩을 빼먹는지?
옛날 나락이 피면 참새들이 달려들어서 나락즙을 다 빨아먹습니다.
참새떼가 다녀가면 쭉쟁이가 많습니다.
그 때 새그물망이 있었습니다.
장대를 꽂고 그물망을 씌워 놓으면 참새가 나락위에 앉지 못합니다.
어머니께서 아껴두신 새그물망을 땅콩두덕에 씌웠는데도 꿩이 들어가서 다 빼먹더군요.
구멍을 막아도 다음 날 가보면 또 뚫고 들어가서 빼먹고 다시 그 구멍으로 나갔더군요.
고구마는 아침 햇살이 들지 않는 곳이라 몇차례 심었는데 알이 들지 않았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알맹이는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앞이라 새나 고라니피해가 없을 것 같아서 고구마 1단과 땅콩을 한줌 심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고구마는 캤는데 땅콩이 알이 여물지 않았더군요.
그리고 사과대추나무 한그루가 너무 새파래서 남겼거든요.
가을걷이도 마무리할 겸 5일장도 구경할 겸해서 남원에 내려갔습니다.
실은 남원 장날에만 나오는 자연산 미꾸라지를 살려고 합니다.
남원 장날엔 가끔식 자연산 미꾸라지가 나옵니다.
이번 주말에 손주들이 내려온다고 하네요.
아내가 큰손주한테 "뭐 먹고 싶느냐?"고 했더니,
초등학교 3학년인 큰 손주가 대뜸"할머니 추어탕이요"하는거예요.
그 동안 몇차례 추어탕을 끓여서 보냈는데 아주 잘 먹는답니다.
추어탕은 된장과 고춧가루도 들어갑니다.
고춧가루가 들어가서 약간 얼큰하기도 합니다.
대접에 추어탕을 한그릇 주면 공기밥을 덥썩 말아서 먹는답니다.
꼭 어른들 먹는 것 처럼요.
심지어는 추어탕을 먹고나서 이마에 흘린 땀을 닦으면서 "추어탕을 먹었더니 땀이나네요"라고 하더랍니다.
이번에는 텃밭에서 키운 열무와 경종배추로 씨래기를 만들었습니다.
남원은 보절면이라는 곳에서 미꾸라지를 양식합니다.
남원 추어탕이 대표 음식이잖아요?
미꾸라지 수요가 많아서 미꾸라지 양식을 많이하고 있습니다.
시장에 들어가면 좌판에서 해산물을 많이 팔고 있습니다.
여수가 가깝기 때문에 싱싱한 해산물이 많이 올라옵니다.
특히 은빛이 번뜩이는 은갈치는 살아있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역시 시장의 백미(白眉)는 튀김과 호떡이 아니겠어요?
고소한 기름냄새를 풍기고 사람들이 줄서 있는 곳은 튀김집과 호떡집이더군요.
시장에 들릴 때마다 호떡을 굽고 있는 좌판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찹쌀 호떡은 별미지요.
시장 골목 한켠에 자연산 미꾸라지를 판매하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아들이 통발로 미꾸라지를 잡았는데 1k에 15,000원씩 판매한다고 합니다.
2k를 샀습니다.
도랑이나 방죽에 고등어나 어분을 통발에 넣고 저녁에 던져놓았다가 아침에가면 미꾸라지와 피라미들이 냄새를 맞고 통발에 들어왔다가 나가지 못합니다.
그 때 통발을 잡아당겨서 양동이에대고 털면 통발속에 있던 물고기가 나옵니다.
어쩔 때는 빈 통발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지금은 예전같이 많지는 않습니다.
제2의 산삼이라는 능이도 송이버섯도 나왔더군요.
금값이었던 배추도
알타리도
쪽파도
식탁에 올라갈 채소류가 많더군요.
반질반질한 알밤도 도토리도 눈에 띠었습니다.
그 중에 아주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요즘 보기도 드물고 아는 사람도 드문 "박고지"였습니다.
박고지는 여물기 전의 박을 따서 속을 파낸 후에 껍질을 벗겨서 길게 썰어 말려서 토란대를 뭉친 것처럼 돌돌말아 뭉친 반찬거리입니다.
저도 먹어보진 못했지만 시장에서 아낙네가 팔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박고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주 옛날 사람이 아닐까?싶습니다.
날씨도 시원해서인지 풍성한 장날이었습니다.
이곳저곳 구경하고 시골집에 들어가서 땅콩을 마무리했습니다.
햇살이 있고 화창한 날씨인데도 모기는 왜 그리 따라다니는지요?
앉아서 땅콩을 따는데 손이 닿지 않는 어깨나 등쪽을 공격합니다.
모기약으로 처방을 하면서 땅콩을 캤습니다.
제가 76년 여름에 군에 입대를 했는데 점호시간에 손등에 모기가 물어서 움직일 수도 없고 힘을 잔뜩 줬더니 모기 침이 빠지질 못하더군요.
점호를 마치고 손바닥으로 즉사를 시켰던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땅콩은 북을 자주 주어야 땅콩이 달리는데 지금은 그냥 심어만 놓으면 지가 알아서 알을 달더군요.
바로 올라와서 텃밭에 있는 건조기에 대추를 말리고 있었는데 땅콩도 깨끗하게 씻어서 건조기에 살짝 말릴려고 넣었습니다.
제 배추가 너무 크질 않는다고 했더니 물 20리터 한말에 요소비료 40g을 녹여서 배추에 옆면시비를 두세번해주면 배추가 커진다고해서 배추와 무에 옆면시비를 했습니다.
한달여 시간이 있으니까 크겠죠?
남원 5일장날을 다녀와서 일기를 써봅니다.
요즘 덥지도 춥지도 않고 푸르고 맑은 하늘이라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그래도 일교차가 많이 납니다.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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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자유주제·자유게시판
- 타자 경진대회 -
오늘은 578돌 한글날입니다.
요즘은 그냥 국경일이라 쉬는 날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제가 현직에 근무했던 학교가 상업학교라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잡아서 가정에 보탬을 주고자 상업학교에 진학하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전주시내에 거주하는 학생들보다 무주, 진안, 장수, 남원, 임실, 순창, 정읍, 고창 등 도내에서 많은 학생들이 전주로 유학을 온 셈이었습니다.
시내에 연고가 없으면 그나마 형편이 조금 나은 집은 하숙을 시켰지만 대부분 월세로 방을 얻어서 자취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때 하숙비는 쌀 6말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저희반 한 아이는 바로위에 오빠랑 이간 장방(二間 長房)을 월세로 얻어서 오빠 빨래도 다해주고 도시락까지 싸주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이간 장방이란 길다란 방을 가운데 미닫이가 달린 두개의 방을 말합니다.
상업학교에서 은행이나 대기업에 취업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때는 오로지 상업고등학교 출신만을 신입행원으로 뽑을 때였습니다.
은행이나 대기업에 취직을 하기위해서 성적도 우수해야 했지만 특히 주산과 부기, 타자 자격을 꼭 따야하는 필수조건이었습니다.
은행이나 대기업의 추천서는 반드시 "용모 단정하고 주산2급, 부기2급, 한글타자2급, 영문타자3급 이상의 자격을 가진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추천하라는 단서가 붙었습니다.
지금같이 계산기와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이라 모든 이자계산이 주판으로 할 때라 이 세가지 종목의 자격증은 필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세가지 자격증을 다 따는 학생들은 IQ도 높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매년 한글날이면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8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서울에서 전국 상업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글타자 경진대회가 열렸습니다.
아마 상업학교에서는 중앙에서 실시하는 이 대회가 가장 큰 대회였던 것 같았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학교에서 매년 타자경진대회에 출전해서 많은 수상을 받았습니다.
해마다 워낙 좋은 성적을 냈기에 전국 상업학교에서 가장 경계했던 학교가 제가 근무했던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눈을 가리고 고사리같은 손가락으로 타자기 자판을 두드리는 훈련을 하는 학생들이 노력한 결과를 전국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수상을하고 돌아왔습니다.
대상은 받으면 대기업이나 특별한 기관에서 특채를 하기도했습니다.
계산기와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사라진 주판과 타자기가 80년대말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전국대회가 열렸던 사라진 타자경진대회를 떠 올려봅니다.
저는 지금도 제 이야기를 핸드폰으로 써내려갑니다.
쓰다가 틀리면 다시 쓰면되고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요?
옛날 시골에선 면사무소에 들락거리는 동네 이장님께서 동네 아이들 출생신고를 해주셨습니다.
메모지에 적어서 출생신고를 했더라면 틀린이름과 생년월일이 없었겠지요.
이장님께서 면소재지에 나가셨다가 친구분들 만나서 막걸리한잔 하시다가 깜박해서 이름도 생년월일도 틀리게 올려진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 한창 가을걷이를할 때입니다.
옛날 10월은 공휴일이 많았습니다.
10월 1일 국군의 날.
10월 3일 개천절.
10월 9일 한글날.
10월 24일 UN가입일.
또 여학교이고 시골에서 농사지으신 부모님 일손을 도와드리는 농번기 방학이 모내기철과 가을걷이 때 2-3일정도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김장방학도 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은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삶의 일과이며 방법이듯이 저는 공휴일과 주일은 시골에 내려가서 부모님 일손을 도와드리는 것이 제 일과이며 도리였습니다.
어쩌면 장남이라 제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산에 알밤을 주어야했고,
주말에 내려가서 나락을 베어 논에 세워서 말렸다가 다음 주말에 집으로 날라서 발로 밟은 공상으로 타작을하고,
논두렁에 심은 콩을 거둬드리고,
들깨도 털고,
고구마도 캐야했고,
이렇게 가을걷이가 끝나면 쌓아놓은 나락을 마당과 넖은 공간도 모자라서 신작로에까지 널어 말려서 광에다 넣고 필요할 때마다 방아를 찧었습니다.
이렇게 말린 나락은 밥맛도 좋고 오래동안 보관해도 쌀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10월부터 11월까지 열번 이상을 다녀와서야 가을걷이가 끝납니다.
그 많은 공휴일과 일요일을 편하게 쉬거나 나들이를 가을걷이를할 때는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요즘 곳곳에 가을축제가 많더군요.
저는 사람들이 너무 북적거리면 혼란스러위서 축제가 끝나면 한바뀌를 도는 편입니다.
어디를 놀러가더라도 주말은 피해서 일정을 잡는 편입니다.
요 며칠동안 고춧대를 뽑아내고,
비닐 걷고 고추끈도 다 치우고,
고추말뚝도 한쪽에 쌓았습니다.
퇴비를 뿌리고 혹시나 가스나 있을까?염러되어 경운하고 며칠뒤에 마늘을 심을려고 합니다.
늦더위가 있어서인지 고추가 많이 달려있는데 아까워서 따다가 이웃에 나눔을 했는데 이것도 보통일이 아니네요.
깊어가는 가을에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아침 뉴스에 청소년들한테 "족보"가 뭐냐고 물었더니,
"족발과 보쌈세트"라고했다네요.
족보(族譜)
어느 가정이나 책상 한귀퉁이에 꽂아있는 한 족속의 게통과 혈통 관게를 밝혀 놓은 고귀한 책.
족보를 족발과 보쌈세트로 이해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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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농기구 관리법을 공유해주세요
다쓰고난 농기계는 기름칠을해서 햇볕이 직접쐬지않는 곳에 포장을 덮어 보관해야합니다.
특히 타이어는 까만천으로 덮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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