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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전화국 이야기입니다.
손잡이로 전화기를 돌려서 교환이 나오고 걸고자 하는 곳 전화번호를 신청하면 교환수가 연결해서 통화를 했던 추억 생각나시죠?
야간에 통화량이 적을 때에는 교환수랑 전화데이트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우체국이나 전신전화국에가서 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 신청하면 접수번호를 받았습니다.
내가 신청한 전화가 연결되고 내 번호가 호출되면 한쪽 구석에 설치된 전화부스에 문을 열고 들어가서 통화를 했습니다.
통화가 끝나면 통화지역과 통화시간에 따라서 요금을 내곤했습니다.
특히 군복무 중인 자식들한테 부고나 급한 일이 있으면 원고지 같은 전보용 쪽지에 한칸한칸에 전달할 내용을 적어서 접수하면 글자수와 배달 지역에 따라서 요금을 납부했습니다.
전보료를 아낄려고 간단명료하게 신청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속달, 등기, 보통우편같이 그때도 바로 전달되는 전보도 있었고,
다음날 전달되는 전보도 있었습니다.
전보료가 달랐겠죠.
그러다 다이얼 전화기가 생기면서 공중전화 부스가 시내 곳곳에 공공건물과 다방등에 많이 설치되었습니다.
노란색 다이얼 공중전화기 생각나시죠?
그래서 가정에서 전화를 설치할 때 숫자가 낮은 번호를 선호했습니다.
숫자 1보다 0은 따다닥하는소리가 열번이 나거든요.
기본통화 시간이 지나면 끊기기 때문에 동전을 미리 준비하고 통화를 했습니다.
항상 호주머니에 동전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요즘 손세차장에서 동전넣고 손세차할 때 시간이 지나면 물이 끓기죠.
공중전화기도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공중전화카드와 겸용으로 사용하는 보턴식 전화기로 바뀌었습니다.
공중전화카드는 대부분 기업에서 홍보용으로 많이 만들어서 보급되기도 했습니다.
전신전화국에서 판매한 전화카드도 한쪽면에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국가기념일을 넣기도 하고,
대통령취임을 기념하는 사진을 넣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결혼식장에 축하를 갔는데,
신랑과 신부사진을 넣어서 답례로 받아온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 신용카드와 같이 크기랑 모양이 비슷했습니다.
시골에는 마을회관이나 구판장에 전화가 비상용으로 한대씩 있어서 객지에 나간 자식들이 전화를 하면 이장님께서 방송으로 전화왔다고 알려줍니다.
기본요금이 3분이라 전화요금이 더 나올까봐 부모님께서는 불이나케 달려오셔서 헐레벌떡 전화를 받으시곤 했습니다.
들녘에서 일하시다가도 방송을 듣고 달려오셔서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저의 큰아이가 82년 2월 새벽에 태어났습니다.
고향에서 손주소식을 기다리시는 부모님께 아들손주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은데,
새벽이라 날이나 밝아야 전화를 드리야 했습니다.
마을 구판장에 전화를 드려서 아버님을 바꿔달라고 해야 하는데,
한겨울 이른 새벽에 전화를 못하잖아요.
종손주가 태어나서 얼마나 좋아 하시겠어요.
날이 새고 아침식사를 하고 난 뒤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구판장과 저희집은 가까웠습니다.
그러다 시골에도 전화를 설치했습니다.
문화수준이 달라진거죠.
저희 고향 마을은 1985년경 부터라고 생각됩니다.
이젠 안부전화를 아무 때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원일기라는 농촌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대를 형성한 드라마여서 꼭 전원일기를 보셨습니다.
드라마가 끝나는 시간에 꼭 전화를 드렸습니다.
진지는 잘 드셨습니까?
방은 따뜻하시게 불을 지피셨습니까?
불 조심 하십시요?
너무 일 많이 하시지 마십시요?
이런 안부전화를 드렸습니다.
군단위로 지역번호를 부여해서 같은 도내에서도 지역을 벗어나면 시외 통화요금이 부과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도단위로 지역번호가 만들어졌습니다.
도내에는 거리에 따라 시내통화 요금이고,
도를 벗어나면 시외요금이 부과되었습니다.
야간에는 전화요금이 할인되기도 했습니다.
가정에서 전화요금을 아껴볼려고 출근해서 직장에서 얄밉게도 전화를 했던 추잡스런 기억도 있습니다.
가정마다 전화기가 있었는데,
휴대폰에 밀려서 서서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1983년에 의사나 긴급연락이 필요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삐삐라는 무선호출기를 사용했습니다.
허리벨트에 기계를 차고 다니면서 폼잡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에 이동통신 수단인 핸드폰이 출시 되었습니다.
그땐 냉장고폰이라 해서 손아귀에 바듯이 들어가는 제법 큰 전화기였습니다.
자동차에 부착 시켜서 사용했습니다.
자동차와 더불어 부(富)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뚜껑이 없는 냉장고 폰에서,
폴더폰으로,
스마트폰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초등학교 학생도 스마트폰을 소지하니까요.
아이들은 게임을 해야하기에 필요하고,
성인들은 검색을 하는데 꼭 필요한 기계가 되었습니다.
자동차 없이 생활했던 사람들은 자동차가 없어도 크게 분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휴대폰을 사용하던 사람들에게 휴대폰을 못쓰게 하면 적응할까요?
특히 젊은이들은요?
어느날 부턴가 휴대폰이 생활의 필수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군복무 하는 병사들도 휴대폰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잠시라도 휴대폰 놓고 외출해 보신적 있으시죠?
괜찮으시던가요?
뭔가 허전하고!
가스렌지에 불을 끄지않고 나온 느낌!
대문을 닫지않고 나온 느낌!
편리하기도 하고,
또 거짓말 하기도 좋을 때도 있지요.
만나기 좀 불편한 사람의 전화는 지금 멀리 있다는 핑게를 해본 일도 있으시죠?
오늘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옛날 추억을 끄집어 내봅니다.
어제는 그렇게 자식들을 늘 먼저 생각하시고 희생하셨던 어머니의 일곱번째 제사를 모시는 날이었습니다.
저희 육남매와 전주에 살고 있는 사촌들이 함께 제사를 모셨습니다.
늘 어머니 제사 때 쑥인절미를 10k를 합니다.
메주콩에 마늘과 생강을 넣고 콩고물을 만들면 마늘 냄새와 생강냄새가 콩가루의 고소함과 향긋하니 맛있습니다.
평소에 버섯을 사서 먹을 때 버섯을 담은 까만 프라스틱 그릇이 있습니다.
그 것을 차곡차곡 모았다가 인절미를 만들어서 그 그릇에 담습니다.
그러면 나눔을할 때 깔끔하고 너무 좋습니다.
이틀전에 고춧가루 6k를 고추장을 담갔습니다.
육수를 끓인물에 고춧가루를 풀고,
엿기름을 고아서 조청을 만들어서 넣고,
메주가루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서 소주를 한병 넣더군요.
저으면서 수시로 손가락으로 찍어 보면서 간을 맞춥니다.
조청이 들어가서 쫀득하고 제가 농사지은 고추라서아지 고추장 색깔이 너무 이쁘더군요.
자그마한 항아리에 담고 꿀병으로 10개를 담았습니다.
미꾸라지를 한관사서 추어탕을 50인분 가스솥으로 두개를 끓였습니다.
지난 가을에 무청을 그늘진 곳에 줄을 매고 말렸거든요.
씨래기는 햇볕을 보면 색깔이 노랗게 변해서 꼭 그늘에 말려야 합니다.
음식점에서 쓰는 커다란 국자로 두개씩 10개를 담았습니다.
올해는 배추보다 무우가 훨씬 비싸더군요.
매년 이맘 때 천원 미만이었는데 올해는 세배가까이 하더군요.
텃밭에 묻어둔 무를 한포대 캐왔습니다.
제사를 모시고 떠나는 형제들한테 쑥인절미, 추어탕, 고추장, 무와 전을 골고루 싸서 보냈습니다.
시어머니 제사를 모시고 형제들한테 많은 나눔을 해준 애쓴 아내한테 오랫만에 애썼다고 감사의 말을 했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임실 피자마을에 가서 화덕피자와 해물파스타를 사준다고 했습니다.
날씨가 포근해서인지?
마음이 따뜻한 하루였습니다.
저를 팔불출이라고 나무라지 않았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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