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만 농민이 선택한 1등 농사앱
전북전주 유일기
농민·텃밭 농부
추가한 이웃467명

올해 처음으로 마늘을 캐고 참깨씨앗을 넣었습니다. 마늘을 캐고 촉촉한 땅에 보들보들한 땅이라 발아가 잘 되어습니다. 어제 가위로 ...

게시글
자유주제·자유게시판
당정에서 설명절 전날인 1월 27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을 발표했다.
그런데 성동구청장이 27일보다 명절후인 31일이 더 임시공휴일로 더 적합하다고 제안했다.
임시공휴일은 국민의 휴식시간 확보와 내수경기 진작과 관광활성화를 도모하기위해서 설과 추석명절을 즈음해서 지정한 임시공휴일이다.
그런데 성동구청장은 1월 27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면 오히려 기혼 여성의 부담이 가중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27일은 설날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휴식보다는 가족 모임을 준비하며 하루를 보내게 될 수 있다.
임시공휴일을 전날인 27일이 좋으냐?
명절 끝나고 난뒤 31일이 좋으냐?
불현듯 조삼모사(朝三暮四)가 생각난다.
아침에는 3개,
저녁에는 4개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잔꾀로 남을 속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인과 원숭이가 식사량을 정하는데 주인의 꾀로 인해 원숭이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합의점을 찾게 된다.
옛날 중국 송나라 시절에 원숭이를 좋아하는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원숭이 숫자가 늘어나니까 모자란 원숭이 먹이 도토리를 줄이기 위해서 원숭이들한테 제안을 했다.
늘어나는 원숭이 때문에 원숭이 먹이가 부담이되어 저공이 꾀를 낸다.
저공은 워낙 원숭이를 좋아해서 원숭이와 의사소통까지 하게 되었다.
"얘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줄테니 괜찮겠느냐?"
이 말을 들은 원숭이들이 펄쩍뛰면서
"아침에 3개요? 배고파서 싫어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저공은 이렇게 제안을 했다.
"그러면 좋다. 아침에 도토리를 4개를 주고, 저녁에 3개를 줄테니 괜찮겠느냐?" 했더니
"네. 괜찮아요. 아침에 4개를 먹으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하면서 엎드려 절을 하며 좋아했다.
그저 아침만 배부르게 먹는 것만 생각한 것이지요.
하루에 원숭이 먹이인 도토리는 7개였습니다.
이때부터 눈앞에 나타나는 이익만 생각하고 결과가 같은 것을 모를 때 '조삼모사'라 하였다.
사람들은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즐거움을 만족시키다보니 많이 먹고 살이 찌게 된다.
그러나 살이 찌게 되면 온갖 성인병에 걸리기 쉽고 건강이 안 좋게 됩니다.
알면서도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하고 많이 먹게 됩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술, 담배 등이 몸에 안 좋은 것인 줄 알지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술과 담배를 즐기게 됩니다.
그렇게 현재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서 좋지 않은 행동인 것을 알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도 조삼모사가 아니겠어요?
어느 날 고추건조기를 어떻게 하면 때깔좋은 고추를 말릴까?하고 유튜브를 시청했습니다.
수년간 전국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고추건조기 AS를 해주면서 농촌실정을 잘아시는 기술자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고추농사를 하는 어느 농부이야기를 예를 들어서 말씀을 하더군요.
몇년 전에 건고추를 100근을 생산해서 1근당 10,000원씩 1,000,000원의 소득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엔 봄가뭄과 잦은비와 오랜 장마로 고추 작황이 좋지 않아서 50근 정도밖에 수확을 못했답니다.
전년에 1근에 10,000원씩 하던 고추값이 그 해는 1근에 20,000원정도 할거라는 예상입니다.
그래서 올해도 1,000,000원의 소득이 있겠다고 합니다.
그 농부는 풍작이었던 작년도 1백만원의 소득을 얻었고 흉작인 올해도 1백만원의 소득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작년에 1근에 10,000원하던 고추가 1근에 20,000원까지 상승하니까 물가를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수입관세를 낮추면서 고추를 수입해서 작년 가격으로 만들려고 늘 이런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일반 공산품 가격은 뒷전이고 유독 농수산물 가격에만 물가안정이라는 명목으로 수입을하거나 정부 비축물을 풀어서 가격을 뚝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그 분 말씀이 책상앞에서만 물가안정을 부르짖지 말고 그 실무자는 농촌현장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이런 조삼모사식으로 농산물에 대한 정책을 하지는 않을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중국 송나라의 저공(狙公)의 지혜로운 우화(寓話)인 조삼모사(朝三暮四)를 익혔습니다.
가끔씩 조삼모사식의 정치를 하는 정치인도 있습니다.
지난 며칠 강력한 한파가 있었습니다.
독감환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날씨가 조금 풀렸지만 따뜻하게 하셔야겠습니다.
주말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아요 8 댓글 8
자유주제·자유게시판
어제 밤에 소복하게 눈이 내렸다.
차위와 담장위에 하얀 눈이 솜덩이 같이 푹신하게 쌓였다.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혔다.
내일까지 눈도 더 내리고,
기온도 더 내려간다는 예보가 있다.
어릴적 우물가 장독대에 소복하게 내린 눈을 입을 대고 핥아 먹었던 추억이 새로운 아침이다.
옛날 "시룻번"을 기억하시나요?
옛날 시루떡을 만들 때 떡이 설지 않게 솥과 떡시루 사이를 김이 새지않게 바른 것을 "시룻번"이라고 한다.
요즘은 많이 사라졌지만 개업을 하거나 이사를 하면 시루떡을 만들어 이웃에 돌리며 인사를 했다.
한문으로 "증병(甑餠)"이라고 하는 시루떡은 주로 맵쌀이나 찹쌀을 섞어 떡가루를 만들고,
고물은 붉은 팥이나 녹두, 깨 따위를 얹어서 만들었다.
특히 고사를 지낼 때는 붉은팥을 고물로 쓴 시루떡을 젯상에 올렸는데,
이는 잡귀가 붉은색을 무서워해 액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시루떡이지만,
만드는 과정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물에 불린 쌀을 절구통에 넣고 도굿대로 빻아서 쌀을 체로 거르고 싸래기는 다시 절구로 빻아서 가루로 만는다.
팥은 얼게미로 쳐서 고운 가루를 만드셨다.
체는 가는 망으로 만든 것이고,
얼게미는 굵은 망으로 만들었다.
1년에 10번이 넘는 제사 때마다 울어머니께서는 늘 이렇게 손수 떡쌀과 고물을 만드셔서 떡을 만들어 제사상에 올리셨다.
겨울철에는 무우를 채로 썰어 넣어 무우떡을 만드시기도 하셨다.
체로 걸러낸 고운 쌀가루와 얼게미로 거른 팥고물을 시루바닥에 얇은 천을 깔고 그위에 한겹한겹 쌓아 올린다.
여름에는 시루떡이 서로 달라 붙지 않게 칙잎을 깔고 떡을 안치기도 했다.
옛날 어르신들께서는 옹기로 만든 시루에 떡을 만드셨는데 요즘은 양은솥이 대신해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솥에 있는 물을 끓여서 수증기로 시루속에 쌀가루를 찐다.
찰곡식의 경우 열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오래 찌면 떡이 흠뻑 젖어 질퍽거리고,
반면에 열이 약하면 김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 아래는 익고 위쪽은 아예 익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성을 다해야 제대로 된 시루떡을 맛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정성이 부족해서 시루떡이 설었다"는 속담도 있다.
가끔씩 젓가락 같은 것으로 찔려서 잘 익었나 확인을 하기도 했다.
시루떡을 찔 때 물을 담은 솥에 시루를 얹고 물을 끓여서 떡을 찌는데
시루를 솥에 안칠 때 그 틈에서 김이 새지 못하게 바르는 반죽이 "시룻번"이다.
솥과 시루 사이의 틈에 밀가루 반죽을 붙여 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이 때 반죽한 밀가루를 "시룻번"이라고 했다.
떡을 골고루 잘 익게 하기 위해 솥전과 시루가 맞닿는 부분을 빙 돌아가며 반죽을 붙인다.
이때 사용하는 반죽은 대부분 밀가루 반죽이다.
그러나 부유한 집에서는 쌀가루 반죽을 사용하기도 했다.
떡을 찔 때 아이들은 구어지다시피 노릇노릇한 시룻번을 먹을려고 서로 아궁이에 불을 땔려고 했다.
떡이 다 되었을 때쯤 엄마가 칼로 그것을 떼어주면 바삭거린 주전부리가 되기도 했다.
시루떡이 잘 익히기 위해 만들어 붙였던 "시룻번"은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떼어 먹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떡은 아니었다.
어쨌든 시룻번을 발라 찐 시루떡은 떡가루와 그 사이 놓인 고물로 인해서 좌우로 층을 이룬다.
흰쌀가루와 팥고물이 차곡차곡 쌓여서 이쁘기도 했다.
요즘은 이사할 때랑 개업할 때 애기들 첫돌 때 시루떡을 돌리는 풍습이 없어진 것 같다.시루떡 대신에 롤케익으로 돌리는 경우도 있었다.
시루떡이 필요하면 떡방앗간에 맞춤으로 주문하면 간단하게 해결되기도 한다.
아직도 우리는 차를 새로 구입했을 때 팥시루떡을 상에 올리고 고사를 지냈다.
이런 내가 옛날 사람이구나!싶다.
간도 치지않은 밀가루로 만든 "시룻번"이 뭐가 맛있었을까요?
먹거리가 부족했을 때 "시룻번"을 먹었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시룻번"을 기억하는 세대는 옛날 사람들이 아닐까?싶습니다.
좋아요 24 댓글 15
Farmmorning
자유주제·자유게시판
전신 전화국 이야기입니다.
손잡이로 전화기를 돌려서 교환이 나오고 걸고자 하는 곳 전화번호를 신청하면 교환수가 연결해서 통화를 했던 추억 생각나시죠?
야간에 통화량이 적을 때에는 교환수랑 전화데이트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우체국이나 전신전화국에가서 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 신청하면 접수번호를 받았습니다.
내가 신청한 전화가 연결되고 내 번호가 호출되면 한쪽 구석에 설치된 전화부스에 문을 열고 들어가서 통화를 했습니다.
통화가 끝나면 통화지역과 통화시간에 따라서 요금을 내곤했습니다.
특히 군복무 중인 자식들한테 부고나 급한 일이 있으면 원고지 같은 전보용 쪽지에 한칸한칸에 전달할 내용을 적어서 접수하면 글자수와 배달 지역에 따라서 요금을 납부했습니다.
전보료를 아낄려고 간단명료하게 신청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속달, 등기, 보통우편같이 그때도 바로 전달되는 전보도 있었고,
다음날 전달되는 전보도 있었습니다.
전보료가 달랐겠죠.
그러다 다이얼 전화기가 생기면서 공중전화 부스가 시내 곳곳에 공공건물과 다방등에 많이 설치되었습니다.
노란색 다이얼 공중전화기 생각나시죠?
그래서 가정에서 전화를 설치할 때 숫자가 낮은 번호를 선호했습니다.
숫자 1보다 0은 따다닥하는소리가 열번이 나거든요.
기본통화 시간이 지나면 끊기기 때문에 동전을 미리 준비하고 통화를 했습니다.
항상 호주머니에 동전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요즘 손세차장에서 동전넣고 손세차할 때 시간이 지나면 물이 끓기죠.
공중전화기도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공중전화카드와 겸용으로 사용하는 보턴식 전화기로 바뀌었습니다.
공중전화카드는 대부분 기업에서 홍보용으로 많이 만들어서 보급되기도 했습니다.
전신전화국에서 판매한 전화카드도 한쪽면에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국가기념일을 넣기도 하고,
대통령취임을 기념하는 사진을 넣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결혼식장에 축하를 갔는데,
신랑과 신부사진을 넣어서 답례로 받아온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 신용카드와 같이 크기랑 모양이 비슷했습니다.
시골에는 마을회관이나 구판장에 전화가 비상용으로 한대씩 있어서 객지에 나간 자식들이 전화를 하면 이장님께서 방송으로 전화왔다고 알려줍니다.
기본요금이 3분이라 전화요금이 더 나올까봐 부모님께서는 불이나케 달려오셔서 헐레벌떡 전화를 받으시곤 했습니다.
들녘에서 일하시다가도 방송을 듣고 달려오셔서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저의 큰아이가 82년 2월 새벽에 태어났습니다.
고향에서 손주소식을 기다리시는 부모님께 아들손주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은데,
새벽이라 날이나 밝아야 전화를 드리야 했습니다.
마을 구판장에 전화를 드려서 아버님을 바꿔달라고 해야 하는데,
한겨울 이른 새벽에 전화를 못하잖아요.
종손주가 태어나서 얼마나 좋아 하시겠어요.
날이 새고 아침식사를 하고 난 뒤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구판장과 저희집은 가까웠습니다.
그러다 시골에도 전화를 설치했습니다.
문화수준이 달라진거죠.
저희 고향 마을은 1985년경 부터라고 생각됩니다.
이젠 안부전화를 아무 때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원일기라는 농촌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대를 형성한 드라마여서 꼭 전원일기를 보셨습니다.
드라마가 끝나는 시간에 꼭 전화를 드렸습니다.
진지는 잘 드셨습니까?
방은 따뜻하시게 불을 지피셨습니까?
불 조심 하십시요?
너무 일 많이 하시지 마십시요?
이런 안부전화를 드렸습니다.
군단위로 지역번호를 부여해서 같은 도내에서도 지역을 벗어나면 시외 통화요금이 부과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도단위로 지역번호가 만들어졌습니다.
도내에는 거리에 따라 시내통화 요금이고,
도를 벗어나면 시외요금이 부과되었습니다.
야간에는 전화요금이 할인되기도 했습니다.
가정에서 전화요금을 아껴볼려고 출근해서 직장에서 얄밉게도 전화를 했던 추잡스런 기억도 있습니다.
가정마다 전화기가 있었는데,
휴대폰에 밀려서 서서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1983년에 의사나 긴급연락이 필요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삐삐라는 무선호출기를 사용했습니다.
허리벨트에 기계를 차고 다니면서 폼잡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에 이동통신 수단인 핸드폰이 출시 되었습니다.
그땐 냉장고폰이라 해서 손아귀에 바듯이 들어가는 제법 큰 전화기였습니다.
자동차에 부착 시켜서 사용했습니다.
자동차와 더불어 부(富)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뚜껑이 없는 냉장고 폰에서,
폴더폰으로,
스마트폰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초등학교 학생도 스마트폰을 소지하니까요.
아이들은 게임을 해야하기에 필요하고,
성인들은 검색을 하는데 꼭 필요한 기계가 되었습니다.
자동차 없이 생활했던 사람들은 자동차가 없어도 크게 분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휴대폰을 사용하던 사람들에게 휴대폰을 못쓰게 하면 적응할까요?
특히 젊은이들은요?
어느날 부턴가 휴대폰이 생활의 필수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군복무 하는 병사들도 휴대폰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잠시라도 휴대폰 놓고 외출해 보신적 있으시죠?
괜찮으시던가요?
뭔가 허전하고!
가스렌지에 불을 끄지않고 나온 느낌!
대문을 닫지않고 나온 느낌!
편리하기도 하고,
또 거짓말 하기도 좋을 때도 있지요.
만나기 좀 불편한 사람의 전화는 지금 멀리 있다는 핑게를 해본 일도 있으시죠?
오늘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옛날 추억을 끄집어 내봅니다.
어제는 그렇게 자식들을 늘 먼저 생각하시고 희생하셨던 어머니의 일곱번째 제사를 모시는 날이었습니다.
저희 육남매와 전주에 살고 있는 사촌들이 함께 제사를 모셨습니다.
늘 어머니 제사 때 쑥인절미를 10k를 합니다.
메주콩에 마늘과 생강을 넣고 콩고물을 만들면 마늘 냄새와 생강냄새가 콩가루의 고소함과 향긋하니 맛있습니다.
평소에 버섯을 사서 먹을 때 버섯을 담은 까만 프라스틱 그릇이 있습니다.
그 것을 차곡차곡 모았다가 인절미를 만들어서 그 그릇에 담습니다.
그러면 나눔을할 때 깔끔하고 너무 좋습니다.
이틀전에 고춧가루 6k를 고추장을 담갔습니다.
육수를 끓인물에 고춧가루를 풀고,
엿기름을 고아서 조청을 만들어서 넣고,
메주가루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서 소주를 한병 넣더군요.
저으면서 수시로 손가락으로 찍어 보면서 간을 맞춥니다.
조청이 들어가서 쫀득하고 제가 농사지은 고추라서아지 고추장 색깔이 너무 이쁘더군요.
자그마한 항아리에 담고 꿀병으로 10개를 담았습니다.
미꾸라지를 한관사서 추어탕을 50인분 가스솥으로 두개를 끓였습니다.
지난 가을에 무청을 그늘진 곳에 줄을 매고 말렸거든요.
씨래기는 햇볕을 보면 색깔이 노랗게 변해서 꼭 그늘에 말려야 합니다.
음식점에서 쓰는 커다란 국자로 두개씩 10개를 담았습니다.
올해는 배추보다 무우가 훨씬 비싸더군요.
매년 이맘 때 천원 미만이었는데 올해는 세배가까이 하더군요.
텃밭에 묻어둔 무를 한포대 캐왔습니다.
제사를 모시고 떠나는 형제들한테 쑥인절미, 추어탕, 고추장, 무와 전을 골고루 싸서 보냈습니다.
시어머니 제사를 모시고 형제들한테 많은 나눔을 해준 애쓴 아내한테 오랫만에 애썼다고 감사의 말을 했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임실 피자마을에 가서 화덕피자와 해물파스타를 사준다고 했습니다.
날씨가 포근해서인지?
마음이 따뜻한 하루였습니다.
저를 팔불출이라고 나무라지 않았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아요 13 댓글 16
Farmmorning
자유주제·자유게시판
오은영 박사가 년말에 필요한 위로의 말을 옮겼습니다.
삶을 살다보면 어찌 좋은 일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때론 슬픈 일도 있었을 것이고,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었겠지요.
산행을 하다보면 오르막을 헉헉거리면서 오르다 내리막 길을 수월하게 내려가기를 반복하다보면 가고 싶었던 정상이 있습니다.
두팔을 벌리고 "야호"를 외치면서 심호흡을 하게 됩니다.
정상을 올랐다는 행복도 뒤로 하고
또 다시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을 달려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산행길이 운동화와 면바지에 면티였었고 나무가지를 꺽어서 지팡이로 썼고,
비라도 내리면 비닐을 뒤집어 쓰는 것이 다였는데
비가 내려도 물에 젖지 않은 고어텍스 등산화에 땀은 배출하고 바람은 쑝쑝 들어오는 등산복을 입고 스틱을 양손에 의지하고 비가 내리면 우비를 입고 산행할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풍족했고 행복했습니까?
새해가 밝았습니다.
아무렴 옛날만 하겠습니까?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바라면서 오은영 박사의 이야기를 되새겨봅니다.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어떤 해는 굵기도하고
어떤 해는 나이테가 가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 시간
그 많은 세월을 언제나 모두 잘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해는 버텨낸 것만으로 충분하고
어떤 해는 넘어졌어도 괜찮습니다.
그 긴 시간을 잘 살아 냈다면
우리 모두 해내는 사람들입니다.
좋아요 12 댓글 16
자유주제·자유게시판
추억의 배추전
작년에 아버지한테 들렀다가 동생네집에서 배추전을 부쳐 먹었던 이야기입니다.
오랫만에 배추전을 부쳐 먹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배추전이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후라이팬에 올해 농사지은 들깨로 새로짠 들기름을 두르고 새파란 배추잎을 후딱 부쳐 드렸습니다.
덕분에 저희들도 몇장 부쳐서 먹었습니다.
고소하고 약간 풋내음이 나는 배추전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참으로 추억의 배추전이었습니다.
옛날 배추는 겉이 두껍고 줄기가 질겼습니다.
올해는 도마토보다 라이코펜이라는 영양소가 10배나 많다는 고기능성 황금배추를 심었습니다.
일반 배추보다 모종값이 조금 비싼편이지만 배추통이 그다지 크지 않고 배추속이 황금같이 노래서 먹음직스럽습니다.
황금배추로 백김치라도 담그면 김치색깔이 주황색이 나서 엄청 이쁩니다.
또 옛날에는 지푸라기로 배추를 묶어야 속이 찼습니다.
지금은 그냥 뵈게 심지 않고 물빠짐만 잘되고 수분만 적당하게 유지하고 영양만 충분하면 내버려둬도 배추 스스로 결구가 되도록 배추도 개량되었습니다.
작년에는 가을장마 때문에 배추 무름병이 있어 많은 농가에서도 밭에 배추가 썩어서 배추를 구입해 김장을 했습니다.
올해는 가을 가뭄이 심해서 물주기가 어려운 배추밭은 곳곳에 배추들이 속이 차지 않은 것을 많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밭에는 배추가 봄동같이 헤벌레하게 보였습니다.
옛날에 할머니께서 솥단지 뚜껑을 엎으시고 장작불을 지피셔서 새파란 배추잎을 돼지비게로 솥전을 문지르고 산초기름으로 둘러서 배추전을 부쳐 주셨습니다.
아마도 밀가루를 아끼실려고 그랬는지?
밀가루는 배추전에 별로 없고 새파란 배춧잎만 노릿하게 부쳐 주셨습니다.
그래도 돼지비게 기름의 고소한 맛과 들기름같이 고소하지는 않지만 산초기름의 특유의 냄새가 어우러져 가닥가닥 찢어 먹었던 배추전이었습니다.
산초기름은 야산이나 산에 있는 밭가장자리에 가시가 있는 나무에 초록색이었던 열매가 가을에 빨갛게 익으면 송이송이 달린 산초열매를 따다가 기름을 짜서 참기름과 들기름을 대신했습니다.
젠피(초피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젠피는 산초와 비슷하게 생겨서 구분이 쉽지 않은데 줄기에 난 가시를 보면 금방 구분이 되기도 한다
젠피는 對生이요 산초는 互生이다
젠피는 가시가 마주보고 나며, 산초는 서로 어긋나게 달립니다.
젠피가루는 동양의 허브였습니다.
열매를 따서 햇볕에 말리면 껍질이 벌어집니다.
산초는 열매로 기름을 짜지만 젠피는 껍질을 갈아서 가루로 씁니다.
젠피나무는 깊고 높은 산에서나 채취하였습니다.
추어탕에 젠피가루를 작은 티스푼으로 한스푼 넣으면 비릿한 냄새를 없애주기도 합니다.
저희 고향에서는 젠피가루를 넣고 열무김치를 담가 먹었습니다.
향긋하고 시원한 맛과 젠피의 아릿한 맛을 추가할 수가 있었습니다.
곡창지대에서는 젠피나무랑 산초나무는 구경하기가 힘들겠죠?
참기름과 들기름이 귀할 때였습니다.
가을에 근처에 있는 야산을 다니면서 산초를 따서 기름을 짰습니다.
지금은 산초기름이 한약재로 쓰여지고 있어 귀한 상품이 되었고 함양이나 산청같은 산간지방에서나 산초기름을 짜는 방앗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때는 먹거리는 물론이고 간식거리는 정말 없었습니다.
그래서 봄철에는 찔레순과 방천이나 산소주변에 나는 띠풀의 새순인 삐삐를 뽑아 먹었습니다.
특히 새로 자란 찔레순은 껍질을 벗기고 먹으면 연하고 달작지근 했습니다.
여름철에는 덜 익은 떫은 새파란 감을 따서 논 물구덩이에 묻어 두었다가 3-4일 지나서 꺼내먹으면 달작지근하게 울려집니다.
가을철에는 어른들이 캐고 간 고구마밭에 가서 고구마 이삭을 주어서 먹었습니다.
어쩌다 밭 가장자리나 고구마 두덕 끝자리에 못캐간 고구마를 횡재하는 일도 있습니다.
마을 대나무밭에 커다란 밤나무가 한그루 있었습니다.
그 때는 밤나무가 흔치 않았습니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새벽에 달려가서 알밤을 줍기도 했습니다.
늦게 가면 제 몫은 없거든요.
지금처럼 벌레가 먹질 않았고 크기도 재래종이라 똘밤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가운데 고염나무가 있었습다.
새마을사업이 있기 전 동네 안길은 꼬불꼬불한 골목길이었고 길바닥에는 돌계단같이 돌멩이가 많았습니다.
리어카가 못다녔기 때문에 모든 농작물을 지게로 날랐습니다.
잘 익은 고염이 땅에 떨어지면 깨지고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못먹지만 물이 고인 또랑에 떨어지면 물이 있어서 깨지지않은 고염이 뭉쳐 있습니다.
조금 깊은 또랑에는 고염이 오개오개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가재가 살고 있는 곳이라 또랑물은 깨끗했습니다.
서리와 눈을 맞은 고염은 쪼글쪼글하고 달작지근해서 요즘 건포도와 같았습니다.
왜 그리 고염은 씨가 많았는지요?
겨울철 간식은 작은방 웃묵에 수수깡으로 엮어서 동그랗게 만든 통속에 얼어서 썩지마라고 보관했던 고구마를 그냥 생으로 깍아 먹는 것이 유일한 간식이었습니다.
역시 겨울철 간식은 고구마였습니다.
물이 빠진 고구마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오늘 배추전은 밀가루에 육수를 내서 부침가루랑 섞고 갓짜온 들기름으로 부쳤는데도 옛날 아무것도 가미하지않은 할머니께서 부쳐준 배추전에 무언가 2%가 부족한 기분이더군요.
오늘 배추전을 부쳐 먹으면서 옛날을 추억을 되돌려 봅니다.
좋아요 8 댓글 2
자유주제·자유게시판
어른들을 닮아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향에서는 서울에서 결혼식이 있는 날이면 고향에서 서울까지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하객들을 모시고 다녀왔다.
서울까지 결혼식장에 오가는 길에 간식이며 술과 안주를 준비해서 축하해 주시러오신 하객들에게 하루종일 푸짐한 대접을 했다.
대부분 이른 새벽에 출발하기 때문에 오전에 먹을 간식과 오후에 먹을 간식과 술, 안주를 준비하는 것이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서울까지 결혼식을 하루 치르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기도했다.
술이 들어가니 흥을 살릴려고 노래와 춤을 추는 관광버스가 되었다.
음식이 조금 부족하고 흥이 조금 모자라면 그집 결혼식은 섭섭한 결혼식이 되었다.
서울까지 먼거리라 밤중에 도착하니 저녁 식사까지 해결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마지막 내릴 때는 박카스 한병에 피로회복제 한알을 곁들여서 까만 비닐봉지에 넣어 주기도 했다.
조금 더 신경을 쓴다면 다과와 떡까지 싸주기도 했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결혼식에 참석해주신 사람들에게 대접문화였다.
그때 서울에 자식들이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는 결혼식 대절버스 편에 쌀과 더불어 이것저것 많은 먹거리를 실고 올라가서 자식들한테 전달하셨다.
지금 같으면 택배로 부치면 될 일인데 그때는 기차역이나 화물로만 부쳐야만 했다.
그래서 대절한 관광버스에 짐이 한가득 실리기도했다.
저희 부모님께서도 결혼식에 가시면서 자식들한테 줄 먹거리를 실고 가시곤했다.
지난해 어느 토요일에 사촌네 조카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다.
올라가는 길에 서울에 거주하는 동생 둘과 누님이 한분 계시는데 고향에서 농사지은 쌀을 실어다 줄려고 한다.
한집당 쌀 한가마니와 찹쌀 5k씩이니까 쌀이 20k들이 12포대이고 찹쌀도 5k씩 3포대를 고향에서 실어다 제 텃밭 창고에 갔다놓았다.
토요일에 결혼식에 가면서 실고 갈려고 한다.
택배로 부치면 간단할거라 생각합니다만 제차로 아내와 둘이만 가는길이라 실고 가기로 했다.
그래서 간단하게 공기압도 확인하고 차량을 점검했다.
옛날에 어르신들께 귀찮게 뭐하러 짜증스러운 말투로 그렇게하셨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그때 어르신들이 하셨던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이제는 제가 따라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나봅니다.
아내랑 같이 텃밭에서 이것저것 하다보면 식사 때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아내가 저한테 "하는 일이 꼭 어머니를 닮았다"고 합니다.
이제 나이를 먹다보니 어르신들께서 하셨던 일들을 저도 모르게 제가 따라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다보니 변하더군요.
어디가서 젊은이들한테 한 이야기를 또 하곤한다고 아내가 말하더군요.
그래지나 봅니다.
지금까지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최근들어 차를 주차할 때나 좁은 골목길을 지날 때 차에 대한 염려가 조금 늘어나는 것을 느끼면서 조금씩 다르구나!만 했습니다.
지난 12월에 국가건강검진을 했습니다
제가 군복무 시절에 키가 179cm였습니다.
그래도 어디가서 키가 얼마냐?고 물으면 178cm로 대답을 했고 178cm로 알았습니다.
놀랬습니다.
건강검진을 하는데 175cm로 나오는거예요.
아니다?
다시 여러차례 올라가봐도 175cm로 나오는 겁니다.
퇴행성관절염 때문에 연골이 닳아서 키가 줄어들 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3cm가 줄어든겁니다.
며칠 뒤에 결과를 보러가면서 다시 한번 올라가봤습니다.
176cm로 측정되더군요.
간호사가 나이를 먹으면 척추사이도 좁아지고 자연스럽게 키가 줄어든다고 하더군요.
이제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인가?싶습니다.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들더군요.
세밑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겠구나!
받아드려야겠습니다.
좋아요 20 댓글 23
자유주제·자유게시판
고봉(高捧)밥
MZ세대들에게는 고봉밥이란 낯선 고유명사겠지요?
6-70년대를 살았거나 시골에 고향을 둔 사람들한테는 익숙하고 정겨운 단어이겠습니다.
몸으로 농사일을 하다보면 배를 든든하게 채워야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고봉(高捧)은 곡식을 말이나 되로 되질하거나 그릇에 밥 등을 담을 때에 그릇의 전 위로 수북하게 가득 담는 방법입니다.
옛날에 사용했던 홉과 되와 말은 곡식의 부피를 표시하는 도량형중 척관법의 단위였습니다.
되는 1.8리터이고 말은 되의 10배인 18리터에 해당되며 홉은 되의 10/1의 단위입니다.
쌀 한 섬(石)은 180리터로 10말이 됩니다.
되는 거의 집집마다 있었는데 말은 동네에 막대저울과 함께 한개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곡식을 재고 바로 회관에 갔다 놓아야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바로 제자리에 갔다 놓았습니다.
요즘 아파트 입구에 카트가 준비되어서 참 편리하더군요.
사용하고난 후에 바로 제자리에 갔다 놓아야 다른 입주민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희 집에 할머니 때부터 사용했던 되와 말, 누룩틀이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들깨 한말은 5-6k이고,
참깨 한말은 7-8k이고,
콩 한말은 16k정도로 무게가 나갑니다.
콩종류는 1되를 2k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도 저희 고향에서는 팥, 메주콩, 녹두 등 콩 종류와 들깨와 참깨는 되와 말로 판매하기도 합니다.
되나 말로 곡식을 계량할 때 틀위에 수북하게 올려서 담습니다.
고봉밥은 밥그릇 위로 수북하게 높이 쌓은 밥을 말합니다.
머슴밥이라고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밥그릇 전위에 올린 밥이 무너지지않게 손바닥에 물을 묻히시면서 꾹꾹누르고 토닥거리면서 고봉밥을 밥상에 올렸습니다.
밥상을 받은 일꾼들은 놋수저로 이리저리 고봉밥을 누르며 밥이 무너지지않게 용케도 잘 먹던 옛 모습이 그립습니다.
옛날 보릿고개시절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고봉밥은 소망이자 희망사항 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모자랄 때에 보리밥이든 무우밥이든 고봉밥상을 받을 수만 있다면 더없이 행복했을 때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적에 주말에 시골집에 내려가면 어머니께서는 늘 고봉밥을 주셨습니다.
먹을게 넘쳐나는 세상에 무슨 고봉밥이냐?고 하시겠지만 당신은 굶어도 자식들한테는 배부르게 먹이고 싶은 우리 부모님 마음이 고봉밥 한그릇에 담겨 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정겨웁니까?
고봉밥의 유래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양반들은 밥을 두 그릇을 못먹는다해서 한번에 고봉밥을 올렸답니다.
그릇 전위에 소복한 밥을 먹고나면 남은 밥은 하인들이 먹었다고 합니다.
옛날 머슴들한테는 옷과 새경만해도 그렇지만 머슴이 먹는 삼시 세끼 끼니마다 단지만한 밥 사발에 꼬깔봉우리를 한 고봉밥을 내놓았고, 샛거리 먹을 것도 배고프지 않게 내 놓으셨습니다.
새경은 농가에서 한 해 동안 일을 한 대가로 머슴에게 주는 댓가로 돈이나 물건을 말하는데 저희집은 상머슴은 백미 15가마니, 어린 작은 머슴한테는 10가마니를 섣달에 지급했습니다.
머슴들은 새경을 받으면 동네 주막에 그 동안 밀린 외상값을 갚았습니다.
저희집에는 두명의 머슴이 있었습니다.
제가 군에서 제대할 때 1976년에 머슴살이가 사라졌습니다.
이때부터 어머니께서 두사람의 머슴이 했던 논밭일을 다 하셨습니다.
물론 소먹이는 없어지고 농사가 줄었습니다.
그래도 힘쎈 두 장년이 농사를 맏아서 지었는데 그 일을 어머니께서 도맏아서 하셨습으니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그래서 주말마다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일을 도와 드렸습니다.
그래도 남의 식구 삼시세끼 식사와 샛거리를 챙기는 것보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생을 삼시세끼 상차림을 하시면서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우리 식구끼리는 대충차려서 식사를 때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의 식구가 있을 때는 그렇게 하진 못하잖아요?
먹던 밥상을 그대로 내줄 수는 없잖아요?
식구들은 수저와 젓가락만 내놓고 그 밥상에서 먹어도 되는데 일꾼들 밥상은 새로 차려야했습니다.
어찌보면 고봉밥은 정(情)이 듬뿍 담긴 밥그릇이 아니었나?싶습니다.
고봉밥은 1970년대에 정부에서 식량부족 사태가 일어나면서 공기밥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음식점에서 공기밥제공을 단속했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단지만한 하얀 밥그릇과 파란색 사발이 나무로 만든 사과상자에 담아서 창고 한켠에 쳐박혀있습니다.
날씨가 겨울답게 차갑습니다.
주말까지 더 차가운 날씨가 있다고 합니다.
날씨만큼이나 우리네 삶도 점점 차가워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로 아쉬었지만 성탄절과 년말에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아요 21 댓글 40
Farmmorning
자유주제·자유게시판
잠시 함박눈이 내리는 주말 아침입니다.
KBS에서 매주 토요일 아침에 방영된 황금 연못이라는 프로를 시청했습니다.
60대 이상인 분들께서는 많은 공감을 하는 프로라 가끔씩 즐겨보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노래하는 시인 박인희가수님께서 심순덕 시인의 시를 낭독하더군요.
황금연못에 출연한 사람은 물론이고 많은 시청자들이 눈시울을 적시더군요.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나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이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아......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들어도 가슴이 아파옵니다.
내 아이들에게 후회없는 아버지가 되어야 겠습니다.
심순덕 시인의 이야기는 하늘나라에 계신 저희 어머니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정말 늘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같이 시청하던 아내가 "꼭 당신 어머니 이야기네요"하더군요.
남들은 일하시다가 마무리 하시고 쉬시는데도 계속일을 하시고 계시는 어머니한테 부하가 나서 큰소리로 이제 그만하시라고 소리만 질렀던 제가 많이 부끄럽습니다.
남들은 동네 어귀에 있는 둥구나무 아래서 쉬시고 계시는데 그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를 짚으시면서 산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 하셨습니다.
특히 머슴살이가 사라진 후에는 일꾼들 밥상을 차릴 일이 없으셔서 어머니 식사 시간은 정해 있지 않았습니다.
해가지고 깜깜해서야 집에 들어 오셨습니다.
제가 주말에 내려가서 일을 도와드리면 이제 그만하자!라고 집에 들어 오셨습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떠난 것을 보신 후에 다시 논밭으로 나가셨습니다.
저를 보내시고 또 호미를 들으셨습니다.
그렇게 자식들 위해서 애쓰셔서 지금 저희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께서 너희 엄마 때문에 잘먹고 살 수 있잖느냐?하시면 듣기가 싫었었습니다.
참외껍질을 벗겨서 속살은 자식들 먹이시고,
울 어머니는 껍질을 드셨습니다.
빨간 수박속을 자식들 먹이시고,
껍질에 붙은 하얀속살을 숫가락으로 긁어 드셨던 어머니였습니다.
그 옛날 식량이 부족해서 보리밥을 혼식으로 정부에서 장려를 했지만 거의 강제였습니다.
밥솥에서 위에 쌀이 섞인 밥을 자식들 퍼서 먹이고 당신은 맨 바닥에 있는 보리만 퍼서 드셨습니다.
겨울철에 무우를 썰어서 넣은 무우밥을 해먹었습니다.
약간 질퍽하기도 했지만 무우밥을 싫어하는 저희들한테는 밥솥위에서 밥을 퍼주고 밥솥바닥에 있는 무만 퍼서 드셨습니다.
저희형제들은 부모님 모시고 해외여행을 몇차례 다녀왔습니다.
그러던 중 학년말 방학을 이용해서 일본 벳부쪽으로 온천여행을 가게되었습니다.
저희 6남매 부부와 부모님.
시간되는 조카들해서 20명이 넘게 부산항에서 비틀이라는 배를 타고 출발했죠.
제 막내 동생이 일본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일본생활을 해서 그 동생이 부모님과 형제들 조카와 사촌 동생네도 같이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이드없이 동생이 부모님을 위주로 여행계획을 준비했습니다.
가족여행이 빠듯하지도 않고 여유로워서 좋더군요.
그땐 일본에 들어갈려면 입국수속에서 지문인식을 해야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지문이 안나오는거예요.
여권 만들때도 어렵게 만들었거든요.
출입국관리소에서 지문이 안나오니
입국을 안시키는거예요.
결국은 사무실까지 들어가셔서 바듯이 통과했답니다.
얼마나 일을 하셨으면 손가락이 다 닳아서 지문이 안나왔을까요?
주무실 때도 발뒤끔치가 벌어지고 다헤져서 이불에 부프러기 생긴다고 버선을 신고 주무셨던 어머니였습니다.
발바닥에 궂은살이 박히고,
몇군데 갈라져서 양말이나 버선을 꼭 신고 주무셨습니다.
바세린을 듬뿍 바르시고요.
어쩌다 등이 가려워서 "등좀 긁어주셔요"하면서 등을 내밀면 어머니 손바닥은 너무나 꺼끄럽다기 보다는 아프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손바닥이 쇠수세미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손주들 얼굴한번 만지시지 못하셨습니다.
여린 손주들 피부에 그 억센 손바닥이 행여나 상처를 주지나 않을까?해서요.
정말 우리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침에 박인희 가수님께서 심순덕 시인의 시를 낭독하는데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어머니를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열흘남짓 지나면 여섯번째 제사를 모시기에 더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좋아요 21 댓글 13
자유주제·자유게시판
동짓날의 팥죽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틀 후면 동지(冬至)가 돌아옵니다.
동지날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팥죽을 먹는 날로 기억됩니다.
이달 21일이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입니다.
동짓날이되면 많은 사람들이 팥죽을 찾게 되는데 그 유래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동짓날 팥죽을 쑨 유래는 중국의 "공공"이라는 사람에게는 늘 말썽을 부리고 속을 썩이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한테 속썩이는 자식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도 H그룹의 회장이 아들 때문에 깡패들과 주먹다짐까지 해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정치권에서는 잘나가는 부산 출신인 J모씨도 음주운전과 공무집행을 방해한 자식 때문에 많은 곤욕을 치루고 있지 않습니까?
또 N그룹의 회장님은 마약을 손댄 손녀딸 때문에 속썩고 있죠.
트롯 열풍과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한테 인기를 안고 있는 태진아도 아들 음주운전 때문에 곤혹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공공도 그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 동짓날 그 아들이 죽었는데 우연하게도 죽은 아들이 그만 역질 귀신이되고 말았습니다.
역질이란 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그 당시 역질이 마을에 돌면 대부분이 꼼짝없이 않다가 죽어버리니 공공은 자기 아들이었다해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공공은 생전에 아들이 팥을 무서워했다는 것을 알고는 팥죽을 쑤어서 대문간과 아들이 놀던 마당 구석구석에 뿌렸다고 합니다.
그 것이 효과가 있었던지 그 날 이후로 역질은 사라지고 이를 본받아 마을 사람들은 역질 귀신을 쫒아내기 위해서 동짓날 팥죽을 쑤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붉은 색은 귀신들이 싫어하는 색이라고 생각했기에 곡식 중에서 유난히 붉은색을 지닌 팥을 그런 용도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도 팥죽을 끓여 먹는 유래가 있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상(喪)을 당하면 지금같이 장례식장이 아니라 집에서 초상을 치렀습니다.
초상집은 새볔녘에 팥죽을 끓여서 광앞과 정제앞, 대문앞에 뿌리고,
그리고 조문중인 사람들에게 간식으로 김이 모락모락나는 팥죽과 콩나물국을 같이 대접을 했습니다.
동지가 드는 음력 날짜에 따라 동지 이름이 애동지 중동지 노동지로 명칭이 달라집니다.
양력 동지가 음력으로 초순(음력 11/1~11/10)에 들면 애동지라 부르고 음력으로 중순(음력 11/11~11/20)에 들면 중동지라 부릅니다.
그리고 음력으로 하순(11/21~11/30)에 들면 노동지라 부르게 됩니다.
올해 동지는 음력으로 11/21일입니다.
따라서 2024년 동지는 노동지가 됩니다.
애동지 때는 팥죽을 먹으면 귀신인 삼신할미가 아이들을 돌봐주러 오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팥죽이 아닌 팥시루떡이나 팥밥을 먹는다.
중동지 때는 팥떡과 팥죽 둘 중 하나를 해 먹었으며 노동지 때는 팥죽을 주로 먹었습니다.
올해 동지는 양력 12월21일로 노동지에 해당되니까 팥죽을 먹는 날이지만 내년 동지는 애동지가 드는 해입니다.
애동지가 들면 그해는 아이들에게 좋고, 
노동지가 들면 노인들에게 좋다는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동짓날 동지가 드는 시간이 있습니다.
올해 동짓날 2024년 동지 시간은 12월 21일 오후 6시 21분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동짓날 동지 팥죽을 쑤어 동지가 드는 시간에 맞추어 팥죽을 먹고 집안 곳곳에 팥죽을 뿌렸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습이지만 요즘도 동짓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설날은 떡국,
대보름날은 오곡밥,
추석은 송편,
동지는 팥죽,
이렇게 대표적인 우리나라 절기음식입니다.
동지가 지나면 동장군의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고 물가 상승 등으로 경제가 어려운 이 때 모든 어려움이 싹 물러가기를 기원하면서 가족과 이웃들이 모두 모여 따끈한 팥죽 한 그릇을 나누는 훈훈한 세모가 됐으면 합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웃는 사람이 계속 웃지
안 웃는 사람이 웃지 않습니다.
어제 행복한 사람이 오늘도 행복합니다.
행복도 습관이라고 합니다.
많이 웃고
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이 제일 차가운 것 같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 날씨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따뜻하시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좋아요 18 댓글 14
Farmmorning
자유주제·자유게시판
"단자(單子)요"
이게 무슨 말인가?하시겠지요?
6-70년대 배고플 때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마을에 대사(大事)가 있는 날이 최고였습니다.
대사는 자식들 결혼이나 어르신들 환갑잔치를 치르는 것을 대사를 치른다고 했습니다.
혼인(婚人)날은 온 마을 잔칫날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마을 어르신의 환갑잔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어도 분위기는 초상집이지만 음식이 많아서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잔치날이면 집에서 키운 돼지를 잡고 음식을 잔뜩 준비해서 손님 접대를 했습니다.
결혼이나 환갑잔치 등 대사를 치를려면 그날에 맞춰서 미리 돼지를 키웠습니다.
요즘 말하면 뷔페에서 각자가 음식을 덜어다 먹는데 그때는 상차림을 하기 위해서 떡, 한과, 고기, 전 등을 담당하는 아낙네들이 과방이라는 창고에서 접시에 담아 내놓으면 행여나 음식 가짓수가 빠지지않게 접시 숫자를 세면서 상차림을 했습니다.
마당 한켠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 놓고 떡국과 밥을 해서 손님들 접대를 했습니다.
그때 떡은 노란 콩고물을 묻힌 인절미였습니다.
마당에 두꺼운 커다란 안반(案盤)을 놓고 느티나무로 만든 떡메로 인절미를 만들었습니다.
남정네는 떡메질을 하고 아낙네는 손에 물을 묻히면서 찹쌀을 게속 뒤집었습니다.
기계로 빼는 떡보다 덜 으깨진 쌀알이 있어서 매끈하지 않고 거칠었습니다.
특히 대사 때나 환갑잔치 때는 몇날 몇일을 걸쳐서 음식준비를 했습니다.
찹쌀로 만든 유과와 깨강정, 콩강정, 쌀로 튀밥을 튀겨서 만든 쌀강정, 그리고 짭잘하고 약간 매콤한 연사, 무나 호박을 조청에 고아 정과를 만들어서 상에 내 놓았습니다.
또 양은냄비에 그날 잡은 돼지뼈를 고아서 만든 돼지찌개나 해산물 탕을 올렸습니다.
누룩으로 막걸리를 빚기도하고 엿기름을 고아서 엿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때 술은 집에서 빚은 막걸리는 밥알이 둥둥 떠있고 노란 양은 주전자에 담아서 내놓았습니다.
어른 키만한 항아리에 집에서 술을 빚어서 손님들 상에 음식과 같이 올렸습니다.
이웃 마을 잔치집에 가신 할머니께서는 인절미와 유과 그리고 돼지고기를 드시지 않으시고 손수건에 싸 가지고 오셔서 먹으라고 내놓으셨습니다.
할머니께서 안드시고 손수건에 싸온 음식이 정말 맛있었습니다.
돼지고기와 한과, 떡, 전 등이 합쳐서 짭잘하기도했고, 달작지근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우리는 잔치집에 종일 들락거리면서 고기며 전 등 음식과 떡국을 배부르게 얻어 먹었습니다.
대사를 치르는 집이나 환갑잔치를 하는 집은 그릇이나 상(床)이 모자라서 집집마다 그릇을 빌려다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집은 읍내 시장에가서 모자란 접시와 그릇, 양은냄비, 젓가락과 수저, 커다란 상을 임대를 해서 사용하고 반납했습니다.
잔치를 마치고 시장에 빌린 물건을 반납하러갈 때 처음 빌려간 숫자와 틀리면 현금으로 갚았습니다.
자식들이 많은 우리집은 워낙 잔치를 버릴 일이 많아서 그릇은 많이 있었고 커다란 접이식 상은 여러개를 구입해서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창고에 그 때 썼던 상이 그대로 있고
파란색으로 테두리를 한 사기로 된 접시나 하얀 밥그릇 국대접 등이 나무로 된 사과상자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福자 그릇 아시죠?
그 옛날 마을에서는 설 명절과 추석 명절에 돼지 한마리를 잡았습니다.
지게 바작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추달린 저울로 잘라서 회푸대종이(세멘트포대)에 싸서 대부분 한근 내지는 두근씩 팔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명절 때나 고기를 먹는 날이었습니다.
닭은 집집마다 키웠기 때문에 생일날이나 명절 때마다 잡아서 미역국이나 떡국을 끓여 먹었습니다.
그냥 마당에 풀어서 키웠기 때문에 잠시 집을 비우면 마루에 닭똥이 많이 있었습니다.
밥상위에 아차하고 상보를 덮는 것을 잊었을 때에는 닭들이 난리를 쳤습니다.
이렇게 음식을 얻어 먹을 수 있는 기회가 그 다음이 단자(單子)였습니다.
단자라?
단자놀이는 제사가 있는 집에 빈소쿠리를 마루에 던저놓으면 그 소쿠리에 제수음식을 나누던 옛 풍습입니다.
보통 제사를 지내는 집은 떡과 과일, 고기를 풍족하게 준비하고 제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 복이 들어온다고 여겼습니다.
단자놀이는 음식을 주는 쪽과 받는 쪽 모두 함께 나눔을 실천하며 기분 좋게 즐겼던 아름다운 풍습입니다.
아마 생소한 단어라고 의아하게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 제사 때 단자를 보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전라도 산간지방과 경상도 지방에 있는 풍습인 것 같습이다.
그 옛날에는 동네 집집마다 살강에 숟가락이 몇개인지도 알고 지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제사는 음력으로 모시는데도 마을 제사 날자를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사를 모실 때는 조상님께 대한 예의를 갖추는 뜻에서 음식을 정성껏 많이 장만했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이웃을 모셔다 식사를 같이 하기도 하고,
새벽에 떡과 음식을 집집마다 나누곤 했습니다.
새벽에 차디찬 음식이지만 얻어 먹었던 떡과 전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동네 제사날을 다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음력으로 제사를 모시는데 어떻게 기억하시고 계시는지?
달력에 표시를 하신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제사는 저녁 9시부터 진솔하고 11시경에 모시는데 마루에
"단자요"하면서 소쿠리가 던져졌습니다.
사랑방이나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놀다가 "오늘 누구네 제사날인데 단자나 하자"하면서 소쿠리를 챙겨서 제사를 지내는 집에 단자를 보냈습니다.
제사날을 기억하지 못해도 전과 음식을 준비할 때 기름냄새가 나기 때문에 제사날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사를 모실 때는 꼬막을 제삿상에 올렸습니다.
꼬막을 학독에 넣고 씻는 소리에 "저집이 오늘 제사날이구나"하고 제사날을 짐작했다고합니다.
기나긴 겨울에 밤참으로 단자를 많이 했습니다.
여름보다 밤이 긴 겨울에 제사를 모시는 어느 날은 소쿠리가 2-3개가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저희 집은 섣달 22일과 23일에 제사를 연이어 지냈습니다.
동지 섣달 기나긴 밤이라 그 날은 어김없이 단자 소쿠리가 마루에 던져졌습니다.
어머니께서 대나무로 엮은 소쿠리에 준비한 음식을 골고루 듬뿍 담아서 술과 함께 내놓으면 살금살금와서 소쿠리를 가져갑니다.
그래서 밤이 긴 섣달에 모시는 제사 때는 더 많은 제수음식을 장만하신 것 같습니다.
연이틀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인절미를 만들어서 제사를 모셨습니다.
나머지 제사 때는 절구통에 쌀가루를 도굿대로 빻아서 팥시루떡을 하셨습니다.
나도 사랑방에서 머슴들이 단자를 해온 음식을 얻어 먹은 추억도 있습니다.
단자는 사랑방에서 동네 머슴들이 모여 놀다가 주로 했습니다.
먹거리가 절대 부족할 때 동네 대사 때나 환갑잔치를 할 때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고,
단자를 해서 기나긴 밤에 밤참으로 먹었습니다.
이번주에 한파가 있다는 예보입니다.
오늘 오후부터 찬공기가 내려와서 내일부터 영하의 날씨가 어어진다네요.
영하의 날씨여도 눈비만 없으면 일상생활에 어려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제 시골집 안채에 보일러는 외출모드로 설정해 놓았고 별채에 전기온수기는 떼어 놓고 변기랑 수도는 열선으로 감았습니다.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서 동파방지를 하고 왔습니다.
따뜻하시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좋아요 17 댓글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