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만 농민이 선택한 1등 농사앱
아침에 자고나니
온 세상이 하얗다
올해 첫 눈이 왔다
밭에 나가보니 배추들이
흰눈속에 덮여 있다
바람이 차다 그리고 춥다
배추,쪽파,마늘,김,등을
씻고 자르고 준비한다
어제 포항서 과매기를 사왔다
가까운 동네분들과
나눠 먹으려 한다
초고추장,소주2병까지 담아
큰다라이에 담고 리어카에 싣고 마을분댁으로 갔다
과매기와 채소를
담아 냈다 모두들 맛있게 드신다 소주도 한잔씩 한다
어묵을 가져온 이웃.
추운 날씨에 따끈한 어묵탕도 참 맛있다
첫눈 내린 날
날씨는 추워지만
꼬들한 과매기와 따끈한 어묵탕은 이웃간에 훈훈함을 나눈것 같아 참 좋다
23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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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에 심은 대추나무 밑거름으로 유박 20kg을 3주당 1포씩 뿌렸다. 2포씩 리어카에 싣고가서 부삽으로 골고루 뿌린다고 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22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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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나이 50대에 어쩌다보니 열정만 가지고 뛰어든 농사!
초록의 청귤이 어느새 황금색 귤이 되어
나무에 황금 동전이 주렁주렁 달린 것 같은게
귤 수확하며 황금을 따는 기분 😆 😆 😆
🍊 은 또 얼마나 꿀 🍊 맛인지
먹어 봐야 아는 맛!
내게 행운과 행복을 주는 🍊
수확에 기쁨을 주시는 하늘에 감사합니다~^^♡
팔순의 꼬부랑 할머니가 된 울 어멍은 쪼그리 방석에 앉아 귤 따고 상자에 골라 담아 주시고 여동생들은 귤 따주고
남동생은 무거운 귤 콘테나 번쩍 들어 리어카에 날라 주고 구두쇠 울 낭군 농기구 스폰에 서울 올케는 귤 먹어 보고는 너무 맛있다며 판매 도와주고 화목한 가족간의 소확행 너무 감사한 일상! 므흣! 한 미소가 번지는 나의 작은 소확행!
23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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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시골집에 마굿간을 치웠습니다.
동네 목수아저씨께서 처음으로 지은 마굿간이고 올해 97세되시는 아버지께서 평생 관리하셨던 마굿간이라 버릴 것이 엄청 많았습니다.
소외양간은 겨울철엔 보름정도 지나면 마굿간에 지푸라기를 걷어내고 새지푸라기로 깔아주면 뽀송뽀송해서 소가 좋아했습니다.
육중한 소가 배설물과 섞인 지푸라기를 밟아 차곡차곡 쌓인 지푸라기는 다져저서 쇠스랑으로 한참을 걷어내야 했습니다.
수시로 지푸라기를 넣어주면 거름도 만들고 겨울에 차디찬 마굿간이 보온효과도 있습니다.
겨울에 마굿간을 치울 때는 소를 마굿간에서 몰고 나와야하는데 그 순했던 소가 오랫만에 밖에 나오니까 얼마나 날뛰는지요?
놓치지 않을려고 코투레를 잡고 실강이를 한참하고서야 진정되었습니다.
소가 소똥과 오줌을 뒤섞여 밟힌 지푸라기는 섞고 발효가되면 논밭에 좋은 퇴비가 되어서 봄에 리어카로 실어다 보리고랑에 깔았습니다.
옛날에는 화학비료 대신에 거의 퇴비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때 소를 키웠던 마굿간은 꽤나 넓고 높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큰 어미소가 송아지랑 같이 지낸 곳이었거든요.
머슴살이가 없어지면서 소마굿간을 창고로 쓰실려고 돌로 된 커다란 쇠구시를 들어내시고 세멘트로 바닥을 깔고 벽을 벽돌로 쌓았습니다.
소를 키울 때는 소가 뿔로 벽을 비벼서 흙이 많이 부서지고 벽에 구멍이 송송나서 겨울철에는 짚을 엮어서 벽을 둘러주곤 했습니다.
어릴적에 그렇게 넓게 보였던 마굿간이 좁게 보였습니다.
시골에서는 농기구와 잡다한 생활용품을 보관하는 장소가 꼭 있어야 합니다.
농사를 한다면 창고도 필요할텐데 이제는 필요가 없게 되어서 마당을 넓히고 집앞을 앞이 훤하게 만들려고 마굿간을 뜯기로 했습니다.
마당까지 승용차도 들어갈올 수가 있습니다.
집앞 텃밭 길가에 커다란 컨테이너박스가 있어서 곡물은 보관할 곳이 있습니다.
소마굿간에는 어린아이들 키만한 항아리가 몇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두분이 워낙 아까워서 버리시지 못하고 구석구석 뭉쳐서 쌓아 놓으셨습니다.
그 항아리 속에는 비닐봉투, 옛날 콤바인 나락푸대, 비닐멍석, 헌옷가지 등 수없이 나오더군요.
비닐 호스가 몇개, 주름관으로 된 호스 등은 터서 뻣뻣해 다 버려야했습니다.
베틀과 쟁기, 써레, 가마니틀, 홀태, 김매는 기계, 등잔대, 삼매는 기계, 새끼로 만든 꼴망태, 가마니를 찔러서 나락이나 쌀을 감정하는 삿대가 대.중. 소로 몇개, 짚으로 만든 쌀가마니를 들 때 썼던 쇠고랑, 소등에 얹는 굴레, 소코뚜레, 물레, 무쇠솥, 소죽을 끓였던 가마솥 뚜껑, 주걱, 절구대, 안반, 요강, 소나무 뿌리로 만든 깨끗한 채반 등은 사랑채 공로에 따로 보관했습니다.
주물로 된 요강과 반상기세트와 수저, 젓가락, 가마니를 짜는 바디, 떡모양을 누르는 떡사슬, 호롱과 등잔대, 커다란 함박과 바가지, 삼베를 짤 때 썼던 붘, 솔, 삼베를 말끔하게 누르는 붘, 솔나무 뿌리로 만든 도시락, 곡물을 재는 되와 말, 누룩을 만드는 누룩틀, 실타래, 인두, 숫을 넣어서 아버지 모시옷과 삼베를 다렸던 다리미, 할머니께서 피시던 곰방대 등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축제를할 때면 한쪽 코너에 옛날 물건을 전시하고 학생들에게 설명을 해주곤 했습니다.
공로에서 물건을 들어내던 동생이 공로귀퉁이 안쪽에 세워져 있는데 뭔가 싸~한 느낌이 온다고 하더군요.
신문지와 세멘포대로 몇번을 둘러싸맨 모양이 대두병이었습니다.
신문지를 다 벗겨내니 역시 옛날 색깔이 어두운 대두병에 뱀으로 술을 담근 병이었습니다.
마개를 비닐로 싸매고 고무줄로 여러차례 동여맸습니다.
라벨지에 "1991년 10월 능사"라고 메모를 해놓으셨습니다.
카메라로 찍어 확대를 해봐도 술이 맑았습니다.
일단은 뱀이 부패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뱀은 징그럽지만 술이 깨끗해서 광 한쪽구석에 보관을 했습니다.
술을 담근지 30년이 넘은 술이라 어쩌면 귀한 물건이 아닐까?싶네요.
옛날 한옥은 지붕이 뾰쪽하고 높았습니다.
안방에 아래묵에서 오를 수 부엌과 천장사이가 워낙 높아서 벽장이라는 곳을 만들어서 잡다한 물건을 올려놓고 안방과 방마다 지붕과 천장사이에 공로라는 공간을 만들어서 사용하셨습니다.
6.25사변 때 소마굿간 위에 나무로 걸쳐서 공로를 만들어 식량과 놋쇠를 그 곳에 감추셨다고 합니다.
1976년 제가 군복무를 마칠 때부터 머슴살이가 없어졌습니다.
머슴들이 솔잎가리 나무를 해와서 부엌에서 불을 지피실 때 불쏘시개로 쓰셨는데 솔가리나무를 해올 사람이 없어서 신문지나 박스를 찢어서 불쏘시개로 쓰셨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신문지를 모아서 박스에 담아다 드렸고,
박스를 찢어서 박스에 담아드렸습니다.
아까워서 쓰시지도 않은 신문지가 담겨있는 박스에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날자가 있는 신문지가 여러박스가 쌓여 있었습니다.
동네 재활용 모으는 곳에 내다가 쌓아 놓았습니다.
기둥마다 녹슬은 철사며 자루가 빠지고 끝이 다달은 괭이와 삽, 호미, 양은 솥, 양은 냄비, 양은 그릇, 양은 주전자, 바닥이 녹슬어서 뻥 뚫린 화루, 쇠파이프로 만든 부지깽이, 녹슬은 다라이, 조개탄과 장작으로 불을 지폈던 녹슬은 난로, 등에 짊어지고 소독했던 약통, 금간 곳을 파란 테이프로 붙여서 쓰셨던 고무다라이, 바께스, 함석쪼가리 등 수없이 버릴 수 밖에 없는 물건이 엄청 많았습니다.
그 동안 모아두셨던 프라스틱 파이프는 어찌나 많이 모아놓으셨는지요?
튜브가 다 터져 바람이 다 빠진 리어카로 몇번을 실어 날랐습니다.
리어카도 할일을 다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리어카도 없앨 때가 되었습니다.
돼지와 염소를 키웠던 마굿간에는 장작을 쌓아놓으셨는데 아까워서 마당 한켠에 옮겨놓고 함석으로 잘 덮어 놓았습니다.
얼마나 많은지요.
가마솥을 걸은 뚤방과 지붕아래로 두줄이 되더군요.
아까워서 쌓아놓긴 했는데 쓸일이 있을런지?모르겠네요.
통나무를 장작을 팼는데 나무도 오래되면 좀이 쓸어서 화력이 없거든요.
화목보일러를 사용하는 이웃한테 가져가라고하면 바로 실어가는데 혹시나해서 쌓아 놓았습니다.
마당 앞쪽에도 알밤을 저장했던 그늘만 가리는 창고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 산림사업으로 산에 유실수인 밤나무를 군에서 심었습니다.
70년대부터 산에서 알밤을 송이채 털어서 멱다리에 담아 신작로까지 지게로지고 내려와서 리어카로 실어다 땅을 파놓은 곳에 넣고 물을 계속주면 알밤송이 가시가 썪어서 발로 문지르면 알밤이 나옵니다.
80년대 말까지 알밤을 대나무로 털어서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가을걷이 중에 가장 힘든 일이 알밤을 터는 일이었습니다.
부가가치, 가성비가 전혀 없는 알밤수확이었습니다.
그래서 개량종 4그루 정도만 풀도 깍아주고 알밤을 주어서 제사 때랑 씁니다.
가을이면 손톱만한 빨간알밤이 산에 즐비합니다.
그 알밤창고에도 장작이 얼마나 많은지요.
장작개비만 들어내는데 거의 한나절이 걸렸습니다.
이번에 알밤창고도 밀어낼려고 합니다.
농기구도 너무 많아서 몇개만두고 없앨려고 합니다.
안집 냉장고가 냉동이 안되어서 들어내고 별채에 냉장고와 김치냉장고가 있는데 김치냉장고를 갔다 놓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매직으로 2009년 10월이라고 구입날자를 적어 놓으셨습니다.
양문형으로 그때는 제일 큰 것으로 사다드렸는데 겉은 깨끗한데 형제들이 괜히 AS를 받지말고 사람들 있을 때 없애자고 하더군요.
마굿간을 치우느라 애쓴 동생들한테 농사지은 분께 방아를 찧어달라고 부탁해서 방금 방아를 쪄온 쌀을 실어주었습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누이와 여동생네도 수원사는 동생편에 실어 보냈습니다.
공직을 퇴직하고 서각으로 취미생활을 하는 막내동생 친구가 이번에도 와서 애를 많이 썼습니다.
서각에 필요한 송판과 나무토막, 절구통을 실어주고 쌀도 한포대 실어주었습니다.
먼지구덕에서 마굿간을 치우느라 멀리서 내려와서 애쓴 사촌동생과 형제들이 감사했습니다.
큰집일이라면 열일을 제치고 도와주는 사촌동생이 전주에 살고 있어서 집안일 뿐만아니라 큰집일에 너무 많은 덕을 보고 있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번주에 스레트를 걷어내고
마굿간을 철거하하고 마당을 치우는 일은 제 몫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TV프로에서 신체적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딛고 일어나는 어떤 젊은이가
"100% 만족보다는 2% 부족할 때가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응원하고 싶은 젊은이였습니다.
얼마나 좋은 글귀입니까?
"100% 만족보다는 2% 부족할 때가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되새겨 봅니다.
24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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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작고 못생긴 사과 🍅
어느 마을 길 모퉁이에 한 과일 행상이 있었답니다.
손을 다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리어카를 마련해 자기 마을 어귀에서 사과를 팔기로 했대요
장사를 하던 어느날 한 손님이 다가와 묻더래요. "이 사과 어떻게 하지요?"
"예! 천원에 두개 드립니다."
그사람은 삼천원을 내고 사과를 고르는데...
작고 모나고 상처가 있는 사과만 여섯개를 골라서 봉투에 담아 가더랍니다.
며칠후 그 사람이 또 와서는 똑같이 그렇게 사과를 작고 모나고 상처난 것만 골라 담더랍니다.
그 사람이 세번째 오던날 행상이 말했답니다.
"손님 이왕이면 좋은 것으루 좀 고르시지요...!"
손님은 행상이 하는 말을 듣고도 그저 웃는 얼굴로 여전히 작고 시들고 모나고 못생긴 사과만 골라 담으며 말하더랍니다.
"그래야 남은 사과 하나라도 더 파시지요. 저두 어렵게 사는데 댁은 더 어려워 보이세요. 힘을 내세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행상은 숨이 멈춰지더랍니다.
그리곤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답니다.
아직은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렇게 있구나...
사과 봉지를 들고 돌아서 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더랍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더 이상 부끄러워 하지않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용기가 불끈 생기더랍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배려가 이 세상은 살맛나게 만드나봅니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오늘부터 실천해 봅시다. 아름다운 당신!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https://youtu.be/Uqlxi2KnXn8?si=EepQNKRht45ZVSe9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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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 대신 수확했습니다.
옆 밭 주인이 부산 동생 병간호 관계로 참깨 수확이 어렵다고 부탁하셔서 이틀동안 더운 시간대를 피해 낫으로 베고 묵어 운반하여 말리고 있습니다.
의자와 비닐하우스 자재 남은 것과 다라이 리어카등에 참깨단을 기대 놓았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새가 가만있질 않는군요...ㅠ
요즘 폭염이 심상치 않네요.
저도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지 옆구리가 콕콕쑤시네요...ㅠ
팜모닝 농부님들 폭염 잘 이겨 내시고 축복받으세요.
감사합니다.
23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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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눈을 밝게한다는 씨앗"
결명자를 아시나요?
저희 초등학교 때 학교의 온갖 일을 돌봐주시는 분을 "소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행정실 직원으로 공무직 관리원쯤 되는 일자리였습니다.
화단을 정리하시며,
학교 울타리를 정리하기도 하시고,
야간에는 학교에서 숙직을 하시면서 학교를 지켜주시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분이 화단에 결명자를 심어서 그 열매로 물을 끓여 드셨습니다.
아마 아흔쯤 되시는 연세이신데도 신문을 돋보기 없이 보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리 눈이 좋으시냐고 물어보면 "평생 결명자차만 마셨다"라고 말씀 하신답니다.
그분께서 지금은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이세상에 안계신 어머니께서 산모퉁이에 결명자를 심으셨습니다.
워낙 가파라서 다니시기가 아주 불편한 빈땅입니다.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를 짚고 기어다니다시피 다니면서 빈 공간에 결명자를 심곤 하셨습니다.
물론 자식들은 말렸죠.
워낙 가파른 길이라 위험했거든요.
길 아래는 낭떨어지고요.
빈땅이 있어서 아까우신거죠.
결명자는 노란꽃이 조그맣게 피고,
길쭉하게 열매를 맺는 답니다.
가을에 잎이 떨어지고,
익으면 낫으로 베어 지푸라기로 한주먹씩 묶어서 세워두었다가 한 열흘 정도 지나면 바짝 마른답니다.
지게로 조금씩 날라다가 마당에서 들깨를 털듯이 막대기로 두들겨서 알맹이만 걷어 들입니다.
털고난 결명자대는 군불 지피실 때 불쏘시개로 쓰기도 했습니다.
깨끗하게 손질한 결명자는 빤질빤질하게 빛이납니다.
자식들과 친척들에게도 나눔을 했습니다.
그러고도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께서 매년마다 결명자와 은행을 구해달라고 하십니다.
나머지는 제가 실고와서 시내 약재상에 갔다 줍니다.
한번은 시장 약재상에 갔다 주었는데
사장님께서 너무 깨끗하게 손질을 잘하셨다고 하면서 어머니께 음료수라도 사다 드리라고 음료수값을 따로 주시더군요.
다음에도 자기네 집으로 꼭 갔다 달라고 하면서요.
두드린 결명자를 바람에 검부적을 날리고 함박에 물을 붓고 조리로 모래와 티끌을 헹궈내면서 깨끗하게 말린 결명자는 빤질빤질하고 깨끗했습니다.
장사하시는분이 얼마나 결명자가 깨끗하고 상품성이 좋으면 웃돈을 더 주셨을까요?
얼마전에는 아버지께서 혼자 계시면서 집앞 텃밭과 좀 떨어진 논두렁에 결명자를 심으셨습니다.
결명자는 소독도 필요없고,
추비같은 것도 필요없어서 어느 작물보다 재배가 편하긴 합니다.
연세도 있으시고 하시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는데도 몰래 심으셨답니다.
그 때 눈에 황반변성 때문에 안과치료를 받고 계셨거든요.
그냥 혼자서 하실려고 하셨던 일이 지금 못하시게 되셔서 걱정을 태산같이 하시고 계시더군요.
주말에 가까이에 있는 사촌동생이랑 같이 내려가서 들깨랑 결명자를 다 베어서 마당에 널고 왔습니다.
논두렁에 언덕에 결명자가 꽤 많았습니다.
경운기를 빌려서 한가득 실고 왔거든요.
옛날 나락을 베어서 논에 세웠던 것 같이 세울려고 했는데,
잘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어설프게 마당에 세웠습니다.
오늘도 지금은 세상에 안계신 어머니를 생각을 하면서 가실거지를 했습니다.
저희집 텃밭에 아버지께서 은행나무를 뺑 둘러서 심으셨습니다.
어느새 나무가 자라서 은행이 더덕더덕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달린 은행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기다란 대나무 장대로 은행을 털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장대로 털면 은행나무에 은행열매순이 떨어져서 다음해에 은행이 열리지않는다고 하셔서 나무에 올라가서 은행을 털었습니다.
은행나무 아래에 그물망을 깔고 나무에 올라가서 발로 나무가지를 발로 구르면 은행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은행을 비료포대에 담아서 차곡차곡 창고옆에다 쌓았습니다.
은행이 기관지에 좋다고 몇개씩 구워 먹으면 좋다고 합니다.
비료포대에 넣어둔 은행이 껍질이 썩으면서 냄새가 지독하게 납니다.
이 때 비료포대에 있는 은행껍질에서 맑은 노란 은행물이 나옵니다.
이 은행을 담은 포대에서 나온 맑은 물이 천식에 좋으시다고 병에 받아서 천식을 앓고 있는 사람들한테 나눔도 했습니다.
10월초에 은행을 따서 포대에 담았던 은행이 껍질이 썩으면 냇가에 리어카로 실고가서 마대포대에 넣고 발로 밟으면 껍질이 잘 벗겨집니다.
집안에서 껍질을 씻으면 은행 특유의 구린내가 진동을 하기 때문에 두분이서 리어카로 냇가로 실고가서 씻었습니다.
깨끗하게 씻은 은행을 마당에서 말려서 여러곳에 나눔도 하시고 제가 실고와서 약재상에 팔아서 용돈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문제는 은행나무 가지가 결이 없어서 그냥 뚝 끊어집니다.
그래서 은행을 털 때는 전봇대에 공사하는 사람들이 착용하는 어깨띠 같은 것이 있어서 나무에 매달고 은행을 털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해마다 제가 내려가서 은행을 털어 드렸는데 내려가지를 못했습니다.
전화를 드렸습니다.
"다음주에 제가 내려가서 은행을 털어드릴께요"했더니 어머니께서 사람을 시켜서 은행을 털었다고 하시더군요.
어머니께서 사람을 사서 그까짖 은행을 털 분이 절대 아니시거든요.
다음 주말에 내려가서 확인했더니 어머니께서 사다리를 놓고 은행나무에 오르셔서 은행을 털으셨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등골이 오싹하더군요.
은행나무와 감나무는 나무결이 없어서 가지가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어지거든요.
제가 막 화가 나는 겁니다.
그까짓 은행 때문에 자칫 어머니를 다칠 수 있겠다?싶더군요.
은행나무를 없애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만해도 은행나무가 별로 없어서 은행나무 몇그루에서 쌀 한가마니값 정도의 수익이 있었습니다.
물론 절대 안된다고 하십니다.
그래도 은행을 따시다가 은행나무에서 떨어지시기라도 하신다면 큰 일이잖아요?
엔진톱을 빌려서 은행나무를 다 베어버렀습니다.
길 모퉁이에 아름들이 고목인 큰 은행나무는 산림청에 민원을 넣었더니 크레인을 몰고와서 전문가들이 높은 곳부터 꼭대기부터 차곡차곡 자르더군요.
은행잎이 단풍들면 노랗고 보기는 좋은데 골목에 떨어진 은행과 은행잎을 처리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거든요.
부모님들 덕분에
매년마다 결명자를 볶아서 결명자차를 끓여 먹었고,
은행을 까서 전자렌지에 돌려서 은행을 구어 먹었었는데
이제는 결명자차도
은행도 먹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내장산과 문수사 단풍숲을 다녀왔습니다.
올 단풍은 예년같지 않지만 문수사 단풍숲의 가새가새한 작은 형형색색의 단풍잎과 아름드리 단풍나무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날씨가 쌀쌀합니다.
옷 따뜻하게 하셔서 감기에 잡히시지 않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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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작고 못생긴 사과 🍅
어느 마을 길 모퉁이에 한 과일 행상이 있었답니다.
손을 다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리어카를 마련해 자기 마을 어귀에서 사과를 팔기로 했대요
장사를 하던 어느날 한 손님이 다가와 묻더래요. "이 사과 어떻게 하지요?"
"예! 천원에 두개 드립니다."
그사람은 삼천원을 내고 사과를 고르는데...
작고 모나고 상처가 있는 사과만 여섯개를 골라서 봉투에 담아 가더랍니다.
며칠후 그 사람이 또 와서는 똑같이 그렇게 사과를 작고 모나고 상처난 것만 골라 담더랍니다.
그 사람이 세번째 오던날 행상이 말했답니다.
"손님 이왕이면 좋은 것으루 좀 고르시지요...!"
손님은 행상이 하는 말을 듣고도 그저 웃는 얼굴로 여전히 작고 시들고 모나고 못생긴 사과만 골라 담으며 말하더랍니다.
"그래야 남은 사과 하나라도 더 파시지요. 저두 어렵게 사는데 댁은 더 어려워 보이세요. 힘을 내세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행상은 숨이 멈춰지더랍니다.
그리곤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답니다.
아직은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렇게 있구나...
사과 봉지를 들고 돌아서 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더랍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더 이상 부끄러워 하지않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용기가 불끈 생기더랍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배려가 이 세상은 살맛나게 만드나봅니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오늘부터 실천해 봅시다. 아름다운 당신!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24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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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근본적으로 베푸는것도 가려가며 베풀어야 한다.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내땅은 모두가 길목이다.
집 옆으로 길이 있는데 새마을 운동때 강제 양보하여 돌담을 1.5m 이상 들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양보한것은 사라지고 땅을 더 내놓으라며 이장을 비롯한 일곱 놈이 찾아와 땅을 내놓으라 협박을 했고 측량을 하여 집이라도 모조리 찾겠다며 돌아갔다. 측량 날 측량을 하기도 전 측량기사가 말했다,측량해도 좋은데,길막히면 어쩌시게습니까?
이말을 들은 사람들중에는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측량하러 왔으면 측량이나 하지 무슨 말이 많냐? 라며.
측량결과는 길 절반가량까지가 우리 집터로 증명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이장을 비롯한 일곱놈중 단한놈도 사과하지 않았다
당연히 막아야지.
그랬더니 군에 면에 민원을 제기하여 강제 수용했다.
더 큰 문제는 이후로도계속우리만 욕을 하며 사과하는 놈은단 한놈도 없었다.
왜 사과가 중요하냐 하면은
같은일이 또다시 발생했다.
2004년도에 산을 매입했는데,비포장의 리어카 길만한 길이 포함되었는데.주인인 내게 승낙이나 동의도 없이 확포장 공사를 했다.
이장놈은 공교롭게도 떼거지로 몰려와
협박을 하고 측량을 신청했던 놈이다.
이번에도 사과 따위는 없었다.
아마도 완주군에 죽림편백숲이라 들어보신 분들은 있으실지도 모르겠는데,그곳을 제치고 완주군제일의 부자동네를 만들어놓겠다 군관계자가 떠들었지만 중요한 것은 난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다.
내관심이 중요한 이유는 부자로 가는 길이 내땅이길이고 내가 열어 줘야만 하는데, 두번씩이나 공권력으로 강도질 하는놈들과는 타협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열어줘야할 생각은 전혀 없기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한다.길을 막으면 네앞길도 막힌다.라고.

실제로는 잘다녀.
특출나게 길문제로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이장놈의 통행도 막지 않았는데. 욕을 한다,
지들 욕심 채우기 위해 좀더 넓게 혹은 2차선 내놓으라는건데,난 내땅의포장도 철거하고 길 자체를 폐쇄할 예정인데 하늘이 두쪽이나도 그럴일은 절대로 없다.
24년 4월 2일
8
8
Farmmorning
그 옛날 국민학교 다닐 때 초승달과 그믐달을 구분하기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초승달은 음력 3일경부터 7일까지 오른쪽이 밝고 서쪽 하늘에서 저녁에 나타나고,
그믐달은 음력 24일경부터 말일까지 왼쪽이 밝고 새벽에 동쪽에서 볼 수가 있다.
손톱의 하얀 부분을 보고 초승달과 그믐달을 구분하기도 했었다.
오른쪽 손톱에 하얀 동그란 부분이 왼쪽으로 있어서 그믐달이고,
왼쪽 손톱에 하얀 동그란 부분이 오른쪽으로 있을 때 초승달이라고 알려주기도 했었다.
어제 새벽 하늘에 왼쪽이 밝은 그믐달을 보니 정월이 다지나가고 음력 2월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음력 2월 초하루는 영동할매가 내려왔다가 세상을 두루 돌아보고 2월 20일경에 올라간다는 음력 2월입니다.
그래서인지 음력 2월은 유난히 바람이 많고 쌀쌀한 날씨가 많은 달이기도 합니다.
영동이란?
靈(영묘할 영)
動(움직일 동)
영(靈)적인 힘이 동쪽에서 일어나서 온다.
영등할매.
영둥할매.
지역마다 다르게 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동할매는 바람과 비를 몰고 오는 신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 영동할매가 딸을 데리고 오면 너그러운 날이라 바람만 불고,
며느리를 데리고 오면 성질을 자주내 비와 바람이 같이 온다고 해서 예전부터 딸을 며느리보다 더 좋아했나 봅니다.
그래도 비와 바람이 같이오면 그해는 풍년을 기약할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이맘 때 보리고랑에 파란 새싹을 시샘이나 하듯이 진눈개비가 내려 꽃샘추위가 있기도 합니다.
또 이날은 머슴날이라고도 했습니다.
옛날 농경사회때 1년동안 새경을 받고 고용되어 농사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머슴이라 불렀습니다.
상머슴은 90k들이 백미 15가마니를 작은머슴은 10가마니를 새경으로 받고 한해동안 사랑방에서 지내면서 집안일과 농사일을 맡아서 했습니다.
가을일이 끝나면 겨우내 군불을 지필 수 있는 나무를 하고,
사랑방에서 멍석과 가마니, 산태미 등 농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저희집 사랑방에는 동네 머슴들 여러명이 모여서 화투로 두부내기도 하면서 기나긴 겨울밤을 같이 지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때 쌀가마니는 볏짚으로 짠 가마니 기억나시나요?
마대포대가 나오기전까지는 지푸라기로 가마니틀에서 짜낸 가마니를 사용했습니다.
가마니에 대나무를 찔러 넣어서 쌀을 한웅큼 빼먹기도 했습니다.
대나무 끝을 사선으로 뾰쪽하게 만들어서 가마니를 찔러 쌀을 빼고 가마니를 위아래로 당기면 구멍이 메꾸어지는데 이것을 삿대라고 했습니다.
보리나 나락을 공판할 때면 농산물 검사원이 삿대로 찔러서 수분과 품질을 비교하면서 등급을 매겼습니다.
검사원의 지시에 따라서 등급 도장을 가마니에 먹물을 묻혀서 찍었습니다.
이때 삿대로 뺀 보리와 나락은 모아서 술값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리어카로 나락가마니를 실고 면소재지 공판장에 나와서 1등급을 받으면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과일의 당도를 체크하는 기계가 있듯이 습도를 재는 기계가 있어서 습도를 체크하지만 그 옛날에는 검사원 손으로 습도를 체크하고 수분이 많다고 지적당하면 햇볕이 잘드는 곳에 멍석을 빌려서 잠시 널었다가 다시 검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리어카가 없는 집에서는 십리길을 지게로 짊어지고 공판장으로 나락가마니를 날랐습니다.
저희 고향에서 서울까지 쌀 한가마니를 철도 수화물로 부치면 지푸라기로 만든 가마니라서 새끼로 꿰맨 사이로 쌀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쥐가 먹기도하고 수화물로 옮겨 실을 때 꼬챙이에 구멍이나서 쌀이 새어나오기도해서 가마니가 홀쭉 했다고도 했습니다.
90k들이 쌀가마니를 재는 저울은 커다란 막대저울로 달았습니다.
가마니를 저울 갈쿠리에 끼우고,
큰 막대를 양쪽에서 들어 올리면 저울추를 근대에 맞춥니다.
저울추가 올라가면 덜어내고,
저울추가 내려가면 바가지로 더 퍼 넣어서 추를 수평되게 맞추는 저울입니다.
동네마다 1개씩 있어서 사용하고나면 바로 마을회관에 갔다 놓았습니다.
그러다 추가 달린 앉은뱅이 저울로 방앗간에서 달아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농사를 많이 지은 부자집에선 두명의 머슴을 고용했습니다.
지난 가을걷이를 마치고 여유롭게 겨울을 보내다가 서서히 농사일을 시작할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머슴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하루를 쉬게 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날이 지나면 농사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머슴들은 "썩은 새끼줄에 목을 맨다"는 속설이 있었습니다.
영동할매가 오는 날은 쑥떡을 해 먹었습니다.
마당에서 안반에다 잘 삶은 찹쌀을 떡메로 떡을 치고,
콩고물은 볶은 콩을 절구통에 넣고 빻아서 가는 채로 걸러서 만들었습니다.
냉장시설이 없던때라 둥그렇게 만들어서 살짝 말렸다가 조금씩 뜯어서 콩고물에 버물러서 보름정도까지 먹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쑥을 뜯어 새끼줄로 묶어서 말렸습니다.
그래서 쑥인절미가 쓴맛도 있고 쑥색깔도 까맣고 질겼습니다.
지금은 쑥 새순을 뜯어서 소다를 넣고 삶아 냉동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서 사용하니까 쓴맛도 질기지도 않고 쑥인절미 색깔도 얼마나 이쁩니까?
또 콩을 볶아서 콩주머니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날은 산에가서 빨간 황토흙을 퍼와서 대문밖에 양쪽으로 한웅큼씩 10여군데에 놓기도 했습니다.
사립문 양쪽에는 대나무 가지를 꺽어다 꽂아 놓았습니다.
아마도 잡귀를 쫒아낸다는 속설이었겠죠?
또 지난 겨우내 날렸던 연을 정지에 있는 살강에 한쪽에 오색실과 함께 매달아 놓았습니다.
정한수를 떠놓고 어머니께서는 두손을 합장하고 가화만사성을 소원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부엌 부뚜막에 정한수도 떠놓지 못했고 사립문 앞에 황토흙도 뿌리지 못했지만 날마다 이렇게 하시면서 자식들 출세와 건강 그리고 부자되기를 바라셨던 어무이를 생각하면서 영동할매가 오는날 텅빈 집을 한번 둘러보러 다녀올려고 합니다.
어느 회사에서 전직원들 대상으로 교육을 하는 연사가
"태어나서는 엄마의 말씀을~
결혼하면 아내의 말을~
운전할 때는 네비게이션의 여자 말을~
이렇게 세 여자의 말을 듣고 살면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어찌보면 세상살이가 맞지 않나!싶습니다.
박목월 시인은
"2월의 봄은 베개밑으로 온다"라고 했습니다.
올해 봄은 조금 빠르고 따뜻할거라는 기상청예보입니다.
벚꽃의 개화시기는 "600도의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2월1일부터 낮 최고기온을 합계해서 600도에 도달해야 벚꽃이 핀다는 법칙이 있어서 벚꽃 개화시기를 600도 법칙이라 한답니다.
겨울이 길어서 봄꽃의 개화시기가 늦지나 않을까?했는데 3월과 4월에 따뜻한 날씨가 일찍 찾아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년보다 6-7일 봄꽃의 개화시기가 앞당겨질꺼라는 예보가 있더군요.
봄은 꽃의 계절이고 희망의 계절입니다.
봄은 가장 많은 시인들이 시를 쓰고 모든 사람들이 가장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웠던 세시풍습이 사라져가는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봄에 농부들은 땅을 새로 일구어 씨앗을 뿌릴 준비를 할 때입니다.
오늘 아침도 영하의 기온이지만 낮부터는 기온이 올라가서 주중에는 15도 이상 올라간다고 하네요.
주말에는 봄을 재촉하는 비소식도 있습니다.
2월 24일
18
1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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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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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 길 모퉁이에 한 과일 행상이
감을 팔고 있었습니다.
손을 다쳐 할 수 없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리어카를 마련해 실원리에서 '감'을 사다가 자신의 마을 골목에서 팔고 있었습니다. 이 중년 남자가 감 장사를
하던 어느날 한 손님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이 '감'은 얼마에 파시나요?"
"예... 천원에 두개 드립니다."
그 사람은 삼천원을 내고 '감'을 고르는데, 작고 모나고 상처가 있는 '감'만 여섯개를 골라서 봉투에 담아 갔습니다.
며칠 후, 그 사람이 또 와서는 똑같이
그렇게 작고 모나고 상처나고 터진 것만 담더랍니다.
그 사람이 세번째 오던 날 행상이
손님에게 말했습니다.
"손님, 이왕이면 좋은 것으로
좀 고르시지요..."
손님은 행상이 하는 말을 듣고도 그저
웃는 얼굴로 여전히 작고, 시들고 모나고 터진 '감'만 골라담으며 말하더랍니다.
"그래야 남은 '감' 하나라도 더 파시지요. 저도 어렵게 사는데 댁은 더 어려워 보이시네요. 힘을 내세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행상은 숨이
멈춰지더랍니다. 그리곤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답니다.
"아직은 세상에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있구나..."
'감' 봉지를 들고 돌아서 가는 그 사람의
뒷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와 보일 수가
없더랍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더 이상 부끄러워 하지 말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용기가 불끈 생기더랍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배려가 이 세상을 살맛 나게 만듭니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생각이 아름다운 당신이 오늘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좋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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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8월 5일
8
13
Farmmorning
추억의 배추전
작년에 아버지한테 들렀다가 동생네집에서 배추전을 부쳐 먹었던 이야기입니다.
오랫만에 배추전을 부쳐 먹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배추전이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후라이팬에 올해 농사지은 들깨로 새로짠 들기름을 두르고 새파란 배추잎을 후딱 부쳐 드렸습니다.
덕분에 저희들도 몇장 부쳐서 먹었습니다.
고소하고 약간 풋내음이 나는 배추전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참으로 추억의 배추전이었습니다.
옛날 배추는 겉이 두껍고 줄기가 질겼습니다.
올해는 도마토보다 라이코펜이라는 영양소가 10배나 많다는 고기능성 황금배추를 심었습니다.
일반 배추보다 모종값이 조금 비싼편이지만 배추통이 그다지 크지 않고 배추속이 황금같이 노래서 먹음직스럽습니다.
황금배추로 백김치라도 담그면 김치색깔이 주황색이 나서 엄청 이쁩니다.
또 옛날에는 지푸라기로 배추를 묶어야 속이 찼습니다.
지금은 그냥 뵈게 심지 않고 물빠짐만 잘되고 수분만 적당하게 유지하고 영양만 충분하면 내버려둬도 배추 스스로 결구가 되도록 배추도 개량되었습니다.
작년에는 가을장마 때문에 배추 무름병이 있어 많은 농가에서도 밭에 배추가 썩어서 배추를 구입해 김장을 했습니다.
올해는 가을 가뭄이 심해서 물주기가 어려운 배추밭은 곳곳에 배추들이 속이 차지 않은 것을 많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밭에는 배추가 봄동같이 헤벌레하게 보였습니다.
옛날에 할머니께서 솥단지 뚜껑을 엎으시고 장작불을 지피셔서 새파란 배추잎을 돼지비게로 솥전을 문지르고 산초기름으로 둘러서 배추전을 부쳐 주셨습니다.
아마도 밀가루를 아끼실려고 그랬는지?
밀가루는 배추전에 별로 없고 새파란 배춧잎만 노릿하게 부쳐 주셨습니다.
그래도 돼지비게 기름의 고소한 맛과 들기름같이 고소하지는 않지만 산초기름의 특유의 냄새가 어우러져 가닥가닥 찢어 먹었던 배추전이었습니다.
산초기름은 야산이나 산에 있는 밭가장자리에 가시가 있는 나무에 초록색이었던 열매가 가을에 빨갛게 익으면 송이송이 달린 산초열매를 따다가 기름을 짜서 참기름과 들기름을 대신했습니다.
젠피(초피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젠피는 산초와 비슷하게 생겨서 구분이 쉽지 않은데 줄기에 난 가시를 보면 금방 구분이 되기도 한다
젠피는 對生이요 산초는 互生이다
젠피는 가시가 마주보고 나며, 산초는 서로 어긋나게 달립니다.
젠피가루는 동양의 허브였습니다.
열매를 따서 햇볕에 말리면 껍질이 벌어집니다.
산초는 열매로 기름을 짜지만 젠피는 껍질을 갈아서 가루로 씁니다.
젠피나무는 깊고 높은 산에서나 채취하였습니다.
추어탕에 젠피가루를 작은 티스푼으로 한스푼 넣으면 비릿한 냄새를 없애주기도 합니다.
저희 고향에서는 젠피가루를 넣고 열무김치를 담가 먹었습니다.
향긋하고 시원한 맛과 젠피의 아릿한 맛을 추가할 수가 있었습니다.
곡창지대에서는 젠피나무랑 산초나무는 구경하기가 힘들겠죠?
참기름과 들기름이 귀할 때였습니다.
가을에 근처에 있는 야산을 다니면서 산초를 따서 기름을 짰습니다.
지금은 산초기름이 한약재로 쓰여지고 있어 귀한 상품이 되었고 함양이나 산청같은 산간지방에서나 산초기름을 짜는 방앗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때는 먹거리는 물론이고 간식거리는 정말 없었습니다.
그래서 봄철에는 찔레순과 방천이나 산소주변에 나는 띠풀의 새순인 삐삐를 뽑아 먹었습니다.
특히 새로 자란 찔레순은 껍질을 벗기고 먹으면 연하고 달작지근 했습니다.
여름철에는 덜 익은 떫은 새파란 감을 따서 논 물구덩이에 묻어 두었다가 3-4일 지나서 꺼내먹으면 달작지근하게 울려집니다.
가을철에는 어른들이 캐고 간 고구마밭에 가서 고구마 이삭을 주어서 먹었습니다.
어쩌다 밭 가장자리나 고구마 두덕 끝자리에 못캐간 고구마를 횡재하는 일도 있습니다.
마을 대나무밭에 커다란 밤나무가 한그루 있었습니다.
그 때는 밤나무가 흔치 않았습니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새벽에 달려가서 알밤을 줍기도 했습니다.
늦게 가면 제 몫은 없거든요.
지금처럼 벌레가 먹질 않았고 크기도 재래종이라 똘밤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가운데 고염나무가 있었습다.
새마을사업이 있기 전 동네 안길은 꼬불꼬불한 골목길이었고 길바닥에는 돌계단같이 돌멩이가 많았습니다.
리어카가 못다녔기 때문에 모든 농작물을 지게로 날랐습니다.
잘 익은 고염이 땅에 떨어지면 깨지고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못먹지만 물이 고인 또랑에 떨어지면 물이 있어서 깨지지않은 고염이 뭉쳐 있습니다.
조금 깊은 또랑에는 고염이 오개오개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가재가 살고 있는 곳이라 또랑물은 깨끗했습니다.
서리와 눈을 맞은 고염은 쪼글쪼글하고 달작지근해서 요즘 건포도와 같았습니다.
왜 그리 고염은 씨가 많았는지요?
겨울철 간식은 작은방 웃묵에 수수깡으로 엮어서 동그랗게 만든 통속에 얼어서 썩지마라고 보관했던 고구마를 그냥 생으로 깍아 먹는 것이 유일한 간식이었습니다.
역시 겨울철 간식은 고구마였습니다.
물이 빠진 고구마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오늘 배추전은 밀가루에 육수를 내서 부침가루랑 섞고 갓짜온 들기름으로 부쳤는데도 옛날 아무것도 가미하지않은 할머니께서 부쳐준 배추전에 무언가 2%가 부족한 기분이더군요.
오늘 배추전을 부쳐 먹으면서 옛날을 추억을 되돌려 봅니다.
12월 29일
8
4
설 명절 연휴 잘 보내고 계신지요?
을사년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고 가정의 평화와 더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님을 모시고 설 명절을 보냈던 이야기가 이번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2025년 새해 들어 아흔여덟이 되시면서 24일 새벽 집에서 편안하시게 아주 멀리 떠나셨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께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셔서 40년 전에 양지바른 선산에 아름다운 집을 손수 장만하셨는데 당신이 만드신 곳에 7년전 1월에 어머니를 먼저 보내셨고 어제 같은 달에 어머니곁으로 모셨습니다.
두분이 같이 계실 수 있어서 혼자 계셨던 어머니께서 좋아 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일주일 전 16일에 자식들이 아버지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우리 아버지는 백수(白壽)하실거"라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좋아하시는 회덥밥을 저희랑 같이 비벼서 드셨거든요.
잘 드시고 정신력이 흐트려지심 없이 대단하셨거든요.
오래전부터 내려온 저희집 설 명절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소개드립니다.
섣달 그믐날 저녁식사 후에 부엌과 모든 것을 새해를 맞이 할 준비를 마치고 과일과 간단한 음료를 준비해서 온 식구들이 좁은방에 구들장이라 따뜻한 아랫묵에 두분이 앉으시고 삥 둘러 앉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집 유래와 덕담을 해주시는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바르고 건강하게 살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십니다.
자식들한테 제가 신권으로 준비해 드린 복돈을 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순서가 어머니한테 복돈을 주시고 며느리들 먼저 그리고 자식들, 손부, 손주, 증손주 순서였습니다.
그 다음엔 아들과 손주들이 신권으로 복돈을 봉투에 담아서 순서대로 드렸습니다.
며칠전에 신권으로 바꾼 복돈도 이제는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슬하에 저희 육남매와 손주와 손부가 25명, 증손주가 18명으로 슬하에 55명을 두셨습니다.
설 명절과 추석 명절은 북적이고 소란스럽던 명절이었습니다.
2019년 11월 17일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전세계가 혼란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코로나19가 명절분위기를 지금처럼 바뀌게 되는데 일조(一助)했지않나?하는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젊은이들이 고속도로가 평소보다 두세배 어떤 날은 다섯배가 더 걸리고 기차표예매를 몇달 전부터 해야했는데 고향을 찾고 성묘하는 길이 즐겁기만 했겠습니까?
또 며느리들이 왜 명절때마다 꼭 시댁에서 지내야 하느냐?
추석에는 친정으로 설에는 시댁으로 나누어 다니자?라는 여자들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오잖습니까?
어린아이들 데리고 찾아온 시골에서 물갈이를 하기도 하고, 잠자리가 바뀌니까 밤새 보채는 어린아이들이 있기도 합니다.
저희집은 내내 비워두었던 사랑채에 아버지께서 방마다 장작불을 지피고, 이부자리를 깔아 놓아도 비어 있던 집이라 시골 찬공기가 어린아이들 감기를 안겨 주곤 했습니다.
명절 때 식구들 모이면 집이 좁아서 별채에 방세개를 게스트하우스같이 전기판넬을 깔아서 만들었습니다.
젖먹이 아이가 있는 식구는 가까운 곳에 있는 지리산 일성콘도를 예약해서 자고 새벽에 차례를 모시러 오기도 했습니다.
좁은 시골집이라 저희 삼형제와 조카들이 다 모이면 도시에서 살다 내려온 젊은 조카며느리들은 엄청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오로지 설과 추석 명절에 이용할 수 있게 일성콘도 회원권을 구입했습니다.
가끔씩 시설은 낡았지만 전국에 여러개 콘도가 있어서 아버지 생신때는 평수가 큰 콘도를 몇개 얻어서 전 식구들이 모여서 지내기도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까짓 차례와 성묘가 뭣이라고 모시려고 다 내려왔을까요?
한번 쯤 건너뛰면 어때서요.
그런데 꼭 참석를 해야하는 것이 불문법같이 해야하는 것으로 저희는 알았습니다.
창문에 커튼을 달아도 빈집이라 바닥은 뜨겁고 방안공기는 차갑습니다.
흙집이지만 오래 비어둔 집이라 온화한 방안공기가 없습니다.
이렇게 두번의 명절을 보내다보니 앞으론 이렇게 가는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고향 마을에 차가 골목마다 빽빽하게 주차되곤 했는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오가면서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명절 쇠느라 몇시간씩 고생해서 꼭 다녀가야할까?
그냥 평소에 시간내서 성묘도 하고 인사도하고 다녀가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합니다.
식구들 모임도 어느 날 날잡아서 모이는것이 한가롭고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덕담과 복돈을 주시고나면 양말을 나누어 주십니다.
매번 시장에서 양말을 식구들 숫자대로 준비하셔서 나누어 주십니다.
평생을 이렇게 설 명절을 맞이하면 준비하셨다가 일일이 나누어줍니다.
남자들은 까만색 양말,
여자들은 깨끗한 양말로요.
새해 첫날에 새 양말을 신고 무병장수하라는 마음으로 주십니다.
새양말을 신고 세배도 드리고 차례도 모시고 성묘를 다녀옵니다.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양말은 시장 노점상 리어카에서 구입한 나이론 양말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검정색 나이론 양말 신습니까?
저희 두아들도 성묘를 다녀와서 벗어 놓으면 제차지가 됩니다.
매년 설마다 아들들과 며느리, 손주들과 손주며느리 숫자에 맞춰서 양말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다보니 20컬레 이상을 준비하십니다.
올해는 여느해보다 오지 못한 손주들과 손부들이 많아서 남은 양말을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서 서랍속에 넣으시더군요.
작년 설같이 다 모이지 못해서 아버지께서 조금은 서운하시는 느낌이 느껴졌습니다.
내년 설에도 내후년 설에도 오래오래 양말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했는데 이제는 머나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풍성했던 설 명절이 조금은 썰렁하다고 할까요?
이런 분위기가 몇년 후에는 낯설지 않지 않을까?싶습니다.
이번 명절끝에는 이혼율이 줄었다는 뉴스가 있네요.
제삿상과 차례상 제수음식을 차리고,
그렇게 많이 모이는 식구들 먹거리 준비가 얼마나 힘듭니까?
저도 자식들한테 제사와 차례를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때 시대가 바뀌고 너나나나 어떻게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봅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첫해 명절 쯤 급속도로 전염을 불러일으킬 때 고향을 찾는 것을 중대본부가 반강제로 자제하라는 정부발표가 얼씨구나 좋다가 되었습니다.
한 두번 고향을 찾는 것을 자제하다보니 이제는 당연시 되었습니다.
명절 때 주부들이 가장 어려운 차례상 차림을 간소화해도 된다는 성균관에서 발표도 있었습니다.
가장 힘들어하는 전을 올리지않고 마른 음식으로 차례상을 준비해도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연세드신 어르신들께서 용납이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만해도 차례상 간소화는 남들 이야기였습니다.
오래전 설 명절 이야기가 동화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번 명절 때 많은 눈과 한파가 곂쳐서 귀성객들은 많은 조심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탈도 말도 많았던 지난 한해였습니다.
해뜨기전 새벽이 가장 어둡습니다.
해가 뜨면 환한 세상이 오는 것처럼 푸른 뱀의 해 을사년에는 하시고자 하는 일 소원성취 하시길 바랍니다.
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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