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침대로 향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난 주일에 만난 분으로부터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제안받은 일과 어제 동네 형님으로부터 들은 조합장 출마 권유가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법인 경영에 대한 걱정도 여전히 무거운 부담으로 남아 있다.
잠 못 이루는 시간을 그냥 보내기보다, 내가 조합원으로 있는 벌교농협의 미래를 생각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인구소멸 위기 시대, 벌교농협의 생존과 도약을 위한 경영혁신 전략」
벌교농협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해결 방안 등 31가지 과제를 기록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했다. 그러다 한 가지 중요한 과제를 빠뜨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농촌을 살리고, 사람들이 농촌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영농형 태양광 제도다.
정부가 12월 17일 시행령을 공표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농촌 현실에 맞는 제도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무엇보다 영농형 태양광이 농업시설로 인정받고, 복잡한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운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농협 경영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출근을 서둘렀다.
그러나 출근길에 들어서자마자 법인 경영에 대한 중압감이 밀려왔다. 평소처럼 윤항기님의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오늘도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가사를 바꿔가며 몇 번이고 불렀지만, 오늘은 그 말들이 마음 깊이 와닿지 않았다.
오전에는 미수금 회의를 하고, 생존을 위한 점심 식사를 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속도 편하지 않았다.
오후 2시에는 계열사 영업을 위해 하동에 (주)창원 최 대표와 함께 율촌산단의 ㈜다온테크를 방문했다. 다온테크 박 대표님과 레미콘 납품을 약속받은 뒤, 미수금 문제로 장흥에 있는 ㈜디에스를 찾아 류 대표님과 마주 앉았다.
11년이나 연상인 류 대표님은 늘 평안한 모습이다.
기존 거래처였던 ㈜디에스산업이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면서 약 1억 7천만 원의 매출채권이 미수금으로 남아 있고, ㈜디에스에도 약 1억 6천만 원의 매출채권이 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였다. 어떤 형태로든 매월 일정 금액 이상을 상환받는 방안을 제안하고, 자금 관리에 대한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후 4시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했을 때 오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율촌산단에서 마케팅을 진행했던 레미콘과 연계한 파일 공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지난주 미팅때 박대표님께 여쭸더니 시공사가 직접 발주하고 업체도 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는데, 오너는 시공사가 어디인지 알아보고 접촉해서 파일 공사까지 수주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따지듯이 말했다.
아는 지인을 통해 계열사 영업까지 도왔는데, 순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나의 부족함으로 받아들이고 말을 아꼈다.
오너는 의사표현을 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상처와 부담을 주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사실 일에 대한 욕심과 열정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 법인의 경영을 맡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난 선거에서 낙선한 뒤 스마트팜 운영을 하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서 지부장의 열정을 사고 싶다는 말에 여러 날 고민한 끝에 법인을 맡기로 했었다.
그러나 농협중앙회에서 근무하던 때와는 상황이 너무나 달랐다.
거래처를 방문했을 때 농협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두 달이나 버티나 봅시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법인 생활이 어느덧 26개월째다. 이제는 나름대로 많이 버텨 왔다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업무 자체보다 오너와의 소통에 있다.
나는 그나마 덜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법인 대표들과 직원들은 오랜 기간 겪어 온 스트레스를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고 한다.
약 20분간 이어진 통화에서 여러 차례 대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꾹꾹 참았다. 감정적으로 맞서는 것보다 내가 맡은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류 대표님과의 미팅에서는 매월 1천만 원씩 상환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미수금 회수에 대한 작은 진전이지만, 자금 부담을 덜기 위한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미팅을 마친 뒤에는 인근 창조콘크리트를 방문해 방 전무를 만났다. 쌍용시멘트 광양 슬래그 공장이 10월 말 폐쇄되고, 앞으로는 쌍용의 계열사인 대한시멘트 제품으로 공급된다는 내용을 안내하고 동의를 구했다.
하루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퇴근 시간이 지나 박 부장에게 전화해 곧바로 퇴근하겠다고 알렸다. 집에 도착하니 오후 6시 45분이었다. 아내에게 퇴근했음을 알리고,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모처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함께하는 저녁 한 끼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34년 동안 농협에서 일했다. 돌이켜보면 단순히 금융 업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농업인과 농촌을 위해 일하는 협동조합 운동가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때의 시간과 공간은 내 삶에서 가장 큰 보람으로 남아 있다.
농업과 농촌은 우리에게 소중한 산업이자 삶의 터전이다. 인구가 줄고 농촌이 어려워지는 현실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농업과 농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물어야 할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어디에 얼마만큼의 삶을 내어주어야 할까.
책임감만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지쳐 가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쌓아 온 경험과 농업·농촌에 대한 애정을 외면하고 싶지도 않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잘할 수 있고 보람을 느끼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 살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농업과 농촌을 위해 살아온 지난 34년의 보람을 소중히 간직하면서도, 앞으로의 삶에서는 나 자신과 가족의 평안도 함께 지켜 가고 싶다.
오늘 새벽부터 이어진 수많은 생각이 아직 정리되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농업과 농촌을 향한 마음은 변함없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 나 자신의 삶도 돌봐야 할 때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