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60, 70, 80세대들이 살아온 길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들이다!" 글을 읽으면서 아주 먼 이야기 같지만 얼른 머릿속에 생각이 많이나서 저의 생각을(●) 얹어 보았습니다. 참으로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었지만 정(情)만큼은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정으로 풍요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우리는 <호롱불> 세대였다. 90%는 전깃불이 없고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호롱불에 머리카락을 태우기도 했고 속옷에 기생하는 써캐를 태우기도 했다. 자다가 등잔을 발로차서 호롱에 있던 석유가 쏟아져서 석유기름 냄새가 온 방안에 몇날몇일 나기도 했다. 호롱심지를 높게하면 그으름이 생겨서 콧속이 새까매지기도 했다. 석유기름은 한되 두되 이렇게 병이나 양철통으로 담아서 구입했다. 호롱불 대신에 촛불을 키기도 했다.
2. 우리는 <뒷간> 세대였다. 90%는 실내 화장실이 없고, 엄동설한 한겨울에도 뒷 구석 재래식변소에서 볼 일을 봤다. 또 잿간이나 돼지막에 올라가서 생리작용을 해결하기도했다. ●지금같이 보드런 화장지는 없고 신문지나 책을 찢어서 사용했다. 그 중에 제일은 미렁지로 만든 일력자리 달력이었다. 라사점이나 안경점에서 주로 만들었다. 옛날엔 옥수수껍질이나 지푸라기를 비벼서 사용하기도 했다고한다. 측간을 갈 때 무서움을 타는 아이들은 측간 문앞에서 무섭다고 기다리라고했다. 외국인들한테 우리나라를 관광할 때 가장 애로가 뭐였나?를 문체부에서 설문을 받았습니다. 제일 많은 것이 냄새나고 지저분한 화장실 문제였다. 정부에서 즉각 공중화장실과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을 점검하고 감독한 결과 전국 어딜가나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3. 우리는 <우물> 세대였다. 상수도가 없어 동네 공동우물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 항아리에 담아 놓고 마셔야 했다. ●군대에서 철모속에 썼던 화이바로 물바가지를 대신해서 물을 퍼올렸다. 우물가엔 앵두나무와 향나무가 있었는데 제 사를 모실 때 향나무를 잘라 향을 피웠다. 우물은 냉장고 역할도했다. 전기시설이 없었고 냉장고가 없을 때라 열무김치를 담가서 빨간 항아리모양의 프라스틱통에 담아 우물속에 끈으로 묶어서 담갔다가 꺼내 먹었다.
4. 우리는 <가마솥> 세대였다. 98%는 목욕탕이 없어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목욕을 했다. ●설명절에나 돼야 읍내에 나가서 "다이얼"이라는 노오란 비누와 이태리 때수건으로 싹싹문질러 때를 벗겼다. 너무 벗겨서 쓰라리기도했다. 샴푸대신에 늘 빨래비누나 세수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요즘같이 매일 머리를 감는 일은 없었다.
5. 우리는 <손빨래> 세대였다. 100%가 세탁기가 없어 개울에 나가 추운 겨울에도 얼음장을 깨고 빨래를 했다. ●공동우물가나 시냇가에 널찍한 바위에서 빨래방망이로 두들겨서 빨래를 했다. 고무장갑이 없이 겨울철 빨래를 할 때는 손이 얼어서 시리다가 저렸다. 삼베나 광목은 양잿물에 담갔다가 찌든 때를 빼고 빨래를 했다.
6. 우리는 <보행/자전거> 세대였다. 95%는 자가용이 없어 대부분은 걷거나 일부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지프차나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부의 상징이었다. 멀리있는 교통이 불편한 학교를 다니는 여학생들도 자전거로 통학을했다. 유독 우리고장 남원여고 학생들은 많은 여학생들이 자전거로 통학을했다. 학교가 시내에서 조금 멀리 있어서 교통편의가 좋지 않았다. 교복은 치마지만 자전거로 통학할 때는 바지를 입고 다녔다.
7. 우리는 <고무신> 세대였다. 95%는 구두도 운동화도 없어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타이어표"검정 고무신은 어찌나 질긴지?발바닥쪽이 밀릉밀릉할 때까지 신어야했다. 여름엔 양말을 신지않아서 조금만 걸어도 까만 때꼬장물이 고무신 테두리에 보였다. 교복을 입으면서 얇은 천으로 된 검정운동화를 신게 되었다. 체육시간에 공을 몇차례 차면 운동화 가운데가 동그랗게 벗겨지기도 했다. 교복에 학교를 상징하는 뺏지와 모자에 교포를 달고 다녔다.
8. 우리는 <까까중> 세대였다. 100%가 이발비가 적게 드는 까까중 머리로 다녔다. ●고향 마을에 1년에 나락 한말과 껕보리 한말을 주고 양손 바리깡으로 머리를 빡빡 깍아주시는 어른이 계셨다. 한달 보름정도에 한번씩 이발을 하는데 바리깡에 머리카락이 씹히면 머리는 하늘로 치솟는다.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머리를 하도 감지 않아서 쇠똥같이 때가 낄 때도 있었다.
9. 우리는 <보자기> 세대였다. 98%는책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차고 뛰어 다녔다. ●어깨에 천이 미끄러운 나이론천인 다우다로 만든 책보로 책을 싸서 어깨에 둘러매고 뛰면 할머니께서 합천해인사에 다녀오시면서 선물로 사주신 나무로 된 필통을 사주셨는데 나무필통속에 연필이 얼마나 달그락 거리는지? 다우다천이 미끄러워서 풀리면 책이랑 필통속에 연필이 다 쏟아지기도했다. 양철로 만든 필통도 있었다.
10. 우리는 <고무줄> 세대였다. 100%가 장난감이나 놀이기구가 없어서 여자애는 고무줄 넘기하고, 사내애는 말타기 놀이도하고 새총을 만들었다. ●여자애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 면도칼로 고무줄을 자르고 도망치기도 했다. 남자애들은 자치기나 못치기 땅따먹기 등 놀이를 즐겼다.
11. 우리는 <강냉이> 세대였다. 100%가 쌀이나 보리쌀이 없어서 학교에서 주는 강냉이 가루로 강냉이 빵이나 꿀꿀이 죽을 만들어 끼니를 때워야만 했다. ●미국에서 원조식품으로 우유가루를 주었는데 유통과정에서 오래되어 우유가루가 돌뎅이가 되었는데 얼마나 딱딱한지? 우유가루 덩어리를 깨서 먹으면 달작지근하고 맛있었다. 우유덩어리에 삿카린을 조금넣고 끓여서 마실 때 그 맛은 신기루였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강냉이죽을 끓여서 나누어 먹었다. 옥수수가루로 만든 푸석푸석한 옥수수빵도 맛있었다.
12. 우리는 <주경야독> 세대였다. 98%가 낮에는 가사일, 농사일 돕기, 풀베기, 나무하기, 소먹이기, 동생돌보기 등을 하고서 밤이 되어야 학교숙제를 했다. ●집집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소를 먹였다. 학교갔다오면 소를 몰고 방천이나 냇가에가서 소에게 풀을 먹였다. 꼴망태를 메고 낫을 숫돌에 날이 서도록 잘 갈아서 깔을 한망태씩 매일 베기도했다. 집집마다 소를 키우기 때문에 소깔도 귀했다. 시내에서 바라구 등 많은 풀을 보면 소깔베는 생각이 나서 아깝다고 생각하곤 했다. 지금도 천변에 수북하게 자란 풀을보면 낫으로 베다가 소를 먹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소를 몰고 가다가 소가 맛있는 콩을 보고 논두렁에 콩잎을 뜯어 먹어 논주인한테 야단을 맞은적도 있었다.
13. 우리는 <주판> 세대였다. 100%가 전자계산기나 컴퓨터는 없고 다섯 알 짜리 주판을 굴리면서 셈을 했다. 급수를 따야 은행 등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 ●상업학교에 진학해서 주산급수를 따고 은행에 취업하면 동네잔치를 하기도했다. 은행에 취직을 할려면 2급이상은 따야했다. 주산은 아이들 지능을 키우는데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세계주산대회와 암산대회도 열리곤 했다. 시내에 주산학원도 엄청 많았다.
14. 우리는 <일제고사> 세대였다. 100%가 입학 / 졸업은 물론이고,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교생이 일제히 시험을 치르고 등수를 매겨 경쟁했다. ●일제고사에서 1등을하면 그 집안에 경사가났다. 일제고사 성적으로 등수를 매겼다.
15. 우리는 <입학시험> 세대였다. 100%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본고사 입학시험을 치러 상급학교에 진학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께서 마을회관이나 넓은 집을 빌려서 중학교 진학희망자들을 모아서 중학교입시를 위한 과외를 합숙을 하면서 했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2곳의 남자중학교가 있었는데 경쟁율이 평균 2:1이 넘었었다.
16. 우리는 <공돌이 공순이> 세대였다. 하도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하면 식모살이 아니면 구로공단 같은 공장에서 공돌이 공순이 버스차장을 하면서 땀 흘려 일을 하고 야간에는 교복입고 야간학교에 등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지게를 맞췄고 그 지게지기가 싫으면 검정고무신을 신고 야간 완행열차타고 서울로 올라가 요꼬공장 등에 취직을했다. 여자아이들은 지금은 도우미라고 하는데 부잣집에 들어가서 식모살이를 하기도했다. 추석과 설명절에 새옷에 새구두에 폼을 잔뜩내고 고향을 찾아와서 시건방을 떨고 다니고기도했다.
17. 우리는 <삯 월세> 세대였다. 80%가 신혼 살림집을 구할 돈이 없어 거의 모두가 사글세 단칸방부터 시작하여 전세로 옮겨 다녀야만 했다. ●처음엔 사글세방으로 시작해서 전세로 옮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단칸방이나 미닫이로 가운데를 막은 이간장방을 얻어서 살림을 시작했다.
18. 우리는 <월남전> 세대였다. 나라가 빈곤하여 목숨걸고 전쟁터에서 돈을 벌어 와야만 했다. ●지금은 비행기로 3시간 남짓이면 가는 베트남인데 부산항에서 배로 보름이 걸렸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갔던 파월장병님들께 많은 감사를 드립니다. 윌남전에 다녀온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도했다.
19. 우리는 <광부. 간호사> 세대였다. 최 빈곤국으로 독일에 가서 석탄 광부와 시체 닦는 일로 돈을 벌어 와야 했다. 그나마 고졸이상 경쟁이 치열했다. 평균 5:1이었다. ●서독에서 1,000미터 넘는 깊은 땅굴에 들어가 석탄을 캐고 서독의 병원에서 요양원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를 돌보고 대 소변을 치우고 시체를 닦고 염을 하면서 외화를 벌어들이고, 노무자를 담보로 차관을 얻어와 공장을 지으며 산업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이 진정한 애국자로 인정받고 국가보훈 자격을 드렸으면 한다. 이분들 때문에 독일에서 차관을 했고 경제개발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쥐나 개나 엉터리 국가유공자들이 많이 있는데 진정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충분한 국가유공자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20. 우리는 <중동 노동자> 세대였다. 열사의 나라 중동지역에서 가족과 자식을 위해 돈을 벌었다. 우리가 피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건재하고 있지 않는가? ●뜨거운 사막에가 건설현장에서 많은 돈을 벌어 가정의 경제는 물론이고 국가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국내에서 건설일을 하는 사람보다 몇곱은 더 임금을 받았던 것 같다.
젊은이들이 우리를 "꼰대"라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이다. 우리 중에는 지금도 재활용 폐품을 줍는 부모도 계신다. 작은 리어카에 폐지를 주어 폐지값이 헐값이라 몇푼밖에 받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과 가족을 위해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일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가난하고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와 열심히 캥거루 세대를 키워낸 죄밖에 없는 샌드위치 세대 들일 뿐이다. 곳곳에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네요. 요즘 곳곳에 화재가 많습니다. 재산피해도 이제는 그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날씨가 늦게까지 더위가 있더니 갑작스럽게 차가워졌습니다. 올해 독감이 유행일거라는 중대본부의 예상이니 독감예방접종을 하셔서 독감에 걸리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파독 광부나 간호사들한테 국가유공자 대우를 해주자는 생각입니다. 그분들 덕분에 독일에서 차관을해서 경제발전을 했습니다. 그분들 인건비를 담보로 차관을 해주었거든요. 간호사들 죽은 사람들 시체를 닦아주고 지하 100미터 200미터 아래서 탄을 캤던 분들입니다. 다이얼 비누를 기억하시네요. 1973년에 군에 입대했는데 보급품으로 노란 다이얼세수비누가 나오더군요. 사용하다 남아서 휴가나갈 때 슬쩍 한개들고 나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고향분이라 더 반갑습니다. 제 이야기 자주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