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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6 -

우리는 국민학교 다닐 적 점심시간에 강냉이죽과 하얀 우유가루를 배식받아 먹었다.
우유가루가 요즘 말하는 유통기간이 지나서인지 딱딱하게 굳어서 돌멩이 같았다.
그래도 그 딱딱한 우유가루를 쪼개 입에서 녹는 우유맛은 달콤했다.
가루우유는 그 때 맛보고 또 기회가 없었다.
아가들 먹는 분유를 한 숫갈 훔쳐 먹었을 때 국민학교 때 얻어 먹었던 기억이 쑥 떠올랐다.
노란 강냉이 죽을 쑤어서 학생들에게 급식처럼 나누어서 먹었다.
남학생들은 네모난 양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고,
여학생들은 약간 타원형인 계란모양같은 양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도시락엔 까만 보리밥에 도시락 한켠에 콩자반과 단무지가 대부분이었고 고추장에 볶은 멸치와 계란후라이는 잘사는 집 아이의 반찬이었다.
도시락 검사도 했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국가차원에서 혼분식을 장려했고 집에서 밀주를 담는 것을 세무서에서 나와 단속을했다.
우리집은 나락타작을 할 때 나락가리 속에다 커다란 항아리를 묻고 쌀막거리를 담아서 일꾼들에게 쌀막걸리를 대접했다.
2모작으로 농사를 하기 때문에 보리나 밀을 심었기에 방앗간마다 밀가루를 빻는 기계가 있었고 밀가루를 빻을 때 나온 밀의 껍질인 밀기울로 누룩을 만들어 말렸다가 막걸리를 만들었다.
그 때 누룩을 만든 틀이 누룩틀이다.
동그란 소나무를 잘라서 가운데를 도려내고 누룩틀을 만들었다.
헛간에 매달아 놓았다가 매년마다 꺼내서 누룩을 만들었다.
네모나게 만든 누룩틀도 있었다.
누룩을 만들고 바같 기둥에 매달아 놓았다.
이 누룩틀로 메주도 만들기도 했다.
겨울철에는 난로위에 도시락을 뺑둘러서 얹어놓아 김이 모락모락나는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다.
맨 밑에 있는 도시락과 위에 있는 도시락을 뒤집어가면서 도시락밥을 따뜻하게 했다.
설 명절에 인절미를 만들고 남은 콩가루는 찬 식은밥을 버무려 먹으면 무지 고소했다.
콩가루에 식은밥과 콩가루를 지붕위에 달렸던 둥그런 박으로 만든 바가지에 손으로 버물러서 먹었던 하얀 쌀밥을 최고 맛집의 최애 음식맛이었다.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삐라를 보았고 그 삐라를 주어 학교에 갖다주면 공책 한권과 연필 한 자루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교실 마루바닥은 양초를 문지르고 마른 걸레로 닦아 반들거리고 미끄러웠다.
이 때 마루바닥을 문지르면서 구구단을 외웠다.
그 때 구구단 외우기가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우리나라 8도의 각도 도청소재지를 외우는 것도 만만치는 않았다.
특히 충청북도 도청소재지 청주시와 충주시는 늘 헷갈렸다.
위치로 볼 때도 다른도는 다 남북인데 충청도는 동서로 나누어졌다.
고학년에 올라가니 세계 각나라의 수도를 외우는 것은 고역이었다.
지구본을 돌려가면서 수도를 외우기도했다.
나무공이가 빠진 마루바닥에 구멍이 있으면 지우개나 연필 등이 그 구멍으로 빠졌다.
덩치가 작은 친구가 교실 밖에 있는 환기통으로 기어들어가서 머리에 하얀 거미줄을 듬뿍 묻히고 고무지우개와 연필을 한 웅큼들고 나왔다.
연필을 뾰쪽하게 깍아서 침을 묻혀가면서 글씨를 썼기에 가수나 유명배우 사진이 있는 책받침을 학교 앞 점빵에서 구입해서 받치고 썼다.
뽑기를 하는데 왜 그렇게 작은 풍선만 뽑히는지?
우리는 대한민국 교육의 지표를 담아 1968년 12월 5일 대통령령에 의해 반포한 문서 국민교육헌장을 달달외웠다.
우리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받들어"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아무뜻도 모르고 외웠고,
그렇게도 긴 393자의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체벌을 받기도 했다.
김영삼정부 출범 그 다음 해인 1994년 정부는 국민교육헌장을 학생들의 뇌리에서 지우기 시작했고,
그리고 2003년 노무현정권이 출범하면서 국민교육헌장선포일 자체를 역사에서 지웠다.
이제 국민교육헌장은 역사에서도 찾기 힘든 한 구석에 처박혔다.
군복무를 마친 남자라면 국민교육헌장은 물론이고 군인의 길, 군인 정신, 군인복무규정 등 10가지 정도를 단 며칠에 외웠다.
그렇지않으면 어떠한 댓가가 있어서였다.
그 때 그 정신으로 공부를 했다면 고시패스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밑물같은 대한독립만세~
하는 3.1절 노래를 외우고 불렀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무찌르자 공산당하는 6.25노래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티비에서는 영정사진이 몇 일동안 나왔던 것을 기억한다. 
하얀국화꽃으로 뒤덮힌 운구차가 지나갈 때 길가에서목 놓아 울부짖는 아낰네들도 있었다.
그 때는 무조건 뉴스를 시작하면서 첫머리에 대통령사진과 대통령의 하루 일과를 방영했다.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좋아하는 노래를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했고 팝송을 한글로 적어 따라 부르곤 했다. 
"소니"라는 일제 라디오 카세트를 갖고 있는 나는 친구들한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끼워서 계속 들었고 녹음도 할 수 있었다.
그 시절엔 폴앵카의 다이애나와 크레이지 러브, 엘튼 존, 폴 매카트니, 존 레논, 런던 보이스, 마이클 잭슨, 아바라는 외국 가수들을 통해서 고고댄스란 걸 알았다. 
친구들과 카세트를 어깨에 메고 모닥불 피워놓고 밤새도록 놀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썬데이 서울이나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와 같은 외국성인잡지를 친구들과 몰래 돌려보았고 어떤 불량한 녀석이 야한 그림이나 볼만한 페이지를 몰래 찢어가곤 했다. 
그 때 성인잡지 "선데이 서울"은 주간으로 발간되었으며 연예계 루머와 스캔들, 야설, 비키니를 걸친 연예인들 사진 등 최고의 인기있는 성인잡지였다.
고속버스를 타면 안내양이 주간잡지와 신문과 사탕을 나누어 주기도했고,
돌려가면서 지루한 시간을 때웠다.
그 때 고속버스 안내양을 비행기 스튜어디스같았다.
안내양 응모기준이 고졸이상, 키 크고 날씬하고 용모가 단정해야 했기에 제복을 입은 안내양은 이뻤다.
외국 성인잡지인 플레이보이와 팬트하우스는 길거리 노점에서 팔았다.
우리는 1970년부터 1981년 사이에 2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었고,
1997년 IMF라는 고비마다 닥쳐왔던 불리한 사회적 여건을 원망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
2024년 오늘 이제는 됐구나!싶었는데 사회불감증이 깔려있고 상위 1%라는 정치하는 사람들과 돈 많은 사람들이 지 욕심만 부리고 할일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던 본인들 모습에...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옛 추억이 스쳐 지나가는 당신은! 
우리들의 친구입니다...
비가 너무 잦습니다.
적당하게 가끔씩 내려주면 좋으련만.
농촌에는 농사철이 다가왔습니다.
이상기온으로 과수가 피해도 없고,
하우스에서 곱게 자란 고추모종도 냉해피해가 없고,
곧 논에 모내기가 시작되겠지요?
모든 작물이 풍년이어서 애써 농사지은 농민들께 기쁨을 안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유
충남서산터치멘
정말 멎진글을 올리셨군요 오렌만에 어릴적 향수를 느끼게 하네요 요즘 젊은 사람들도 읽어보면좋게네요
감사합니다
경북청송김철원,바람산인
고추를 주로 하고있네요·
멘님 요즈음 젊은이들은 그런 배고픔을 전혀 모릅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감사합니다.
저희들 어렸을 적 이야기입니다.
날씨가 좋으네요.
어버이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경북청송김철원,바람산인
고추를 주로 하고있네요·
일기님 까맣게 잊고있던 살아있는 추억한마당 우리는 강냉이 죽이아니라 떡을 먹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면 구수한 냄새와 함께 정말 맛있게 먹었지요 우유도 사카린을 넣어서 끓여 먹었습니다 참고로 대구 남산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외국의 도움을 받던우리가 이만큼 살게 되었는데 이놈의 정치하는 인간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네요 안타까운 노릇 입니다 아무튼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소중한 추억을 일께워줘서~^~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감사합니다.
시골집에 다녀왔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참깨를 심으려고 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ㅂᆢ내시길 바랍니다.
대전서구낙엽교목류21691
무대포 반쪽농부·
혹시 70대 중반쯤 돼 보이는것 같은데요. 어쩌면 이렇게 조목조목 그시절 그때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는지 감탄할 일이네요. 제가 소띠 49년생인데요 딱! 제가 살아온 그대로를 활동사진을 보는것 같아 눈물이 고이네요. 글 너무너무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울산중구탱크로리유대식
귀농 10년차·
갑장님 방가방가----
일기님 글솜씨 영사기 되돌려 보는것 같소 .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선배님 되시네요.
52년생입니다.
깨복쟁이 친구들 만나면 늘 재미납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충북청주오영균
배고프던 시절 이맘때면 쌀이 떨어지고 보리는 나오지 아니할 보릿고개에 하루 세끼를 먹지 못하던 이웃집이 생각납니다.
정겨운 옛날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감사합니다.
오늘 참깨를 심고 늦게 들어왔습니다.
어버이날 잘 보내고 계시지요.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보릿고개를 젊은 세대들은 알런지요?
보리밭에서 고랑에 풀을 걷어서 보리타작도 재미나고 입주변이 까맣게 물들곤 했지요?
그 때가 정은 지금보다 더 깊지 않았을까요?
충남당진신춘희
벼농사 밭농사 평생을 ·
옛날에 이야기 정말 열심히들 살았는데 외국인 사다 쓰면서 젊은이들 이 쉽게 살려는것 같아 걱정 입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그렇죠.
외국인들은 싼맛에 일을 시켰는데
지금은 엄청 임금이 올랐더군요.
그래도 아쉬우니까 외국인을 쓸 수 밖에요.
큰 문제라 생각합니다.
경남창녕고구마22422
옛날생각나는이야기 지금은풀베고쟁기질하고 서리질하고못자리하는시기네요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옛날 첫모를 저희는 늘 현충일에 모내기를 했습니다.
산밑에 세다랑이논이 있는데 늘 물이 있어서 가물어도 모내기를 했습니다.
그 세다랑이가 150평 한마지기였습니다.
집에서 조금 멀어서 찰밥을 해서 머슴들이 모침을 지게바지기에 짊어 나르고 식구들이 다 모여서 못줄없이 흩어진 모를 심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모를 심어만 놓으면 가을에 추수를 했던 것 같습니다.
쟁기로 논갈고,
발로 보리밭에 깔았던 풀을 밟아넣고,
써리로 논바닥을 반듯하게 만들어서 모를 심었지요.
충북보은김윤숙
주말농부·
국민학교시절 노오란 강냉이빵이 그렇게 맛있었는데 난 받질 못 해 두살 위인 반 친구 가방을 들어다 주고 한번씩 맛 보았는데 지금도 그 맛을 잊을수가 없다. 그 빵을 다시 먹어보고 싶다. 동글동글 알갱이가 뭉쳐져 있는 것 처럼 그랬는데...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시내에서 가끔씩 옥수수빵과 술빵을 사서 먹습니다.
제과점 빵보다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강원원주원영국
많은 공감가는 이야기 입니다, 어렸을때 살던 시절 이 비슷해서 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글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감사합니다.
나이든 사람들이면 누구나 공감될 수 있는 이야기지요.
전남무안김 농부
무안 농부·
제 어릴때 딱 그모습
입니다 6,25 직후라
고아원에서 학교다니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점심을 못가져와 점심시간이면 나갑니다
물로 배를 채우고
들어와 오후공부하고
얼마나 배고팠을까?
그때는 먹는게 귀해
인심도 없을때였지요
어릴때가 주마등 처럼 떠오릅니다
감사하게 잘 읽었어요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그 시절에는 도시락을 못 싸온 친구들이 많았지요.
집에서 모내기를 하는 날은 저녁먹고 돌아갈 때 밥그릇에 듬뿍 담아 드리는 것이 정이었습니다.
지금은 집에서 끼니를 준비하는 것보다 배달음식이 더 가성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포장용기가 너무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행복한 5월 되시길 바랍니다.
세종세종딸기 미리내
우와ㅡㅡ같은 연배 이시군요.그리 힘들었던 그 시절이 그리울 때 가 있어요.그때는 왜 그리도 추웠던지 어린시절 그때가 주마등 처럼 휘ㅡ익 스치네요.옛 추억 떠올리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좋은 하루되시길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고맙습니다.
시골집에 다녀왔는데 고향에도 사람들이 많지 않답니다.
어버이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충북충주종댕이길농원
멋진글 감사합니다
모처럼 옛날생각에 흠뻑 취해봤습니다
멋진분 같네요.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텃밭에 마늘 쫑도 뽑고 완두콩도 올려주고 왔습니다.
오늘 날씨가 쾌청했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경기이천최응규
귀농 4년차 아하농부·
옛 향수를 불러 오는것 같네요
그시절엔 너나할것 없이 어렵고 힘든 시절이 생각나게 하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 츱고 배고프고 전혀 모르고 살지요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그러게요.
저희들이야 괜찮지만 어려움이없이 자란 젊은이들이 걱정입니다.
배달음식에 맛붙인 세대들이라 된장, 고추장 맛을 모르지요.
오늘 멸치젖갈을 6상자 담글려고 합니다.
오후에 비가 조용하게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경기용인땅땅
답변왕
가정 먹거리를 유통으로·
긴글 읽었는데 출생이 50년대인들은 기억이 새롭네요.
젊은이들은 뭔소린가 하겠지요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비바람이 세차다고 하네요.
비피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천옹진최용재
나도모범생돼어기뻐요·
잘보아습니다그때주식이감자고구마다그때방한촉애고구마퉁가리만들어고구마깍아머고하여는대이제는그때가그리워지내요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새벽에 물이 약간 빠진 고구마는 최애의 간식이었지요.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경북구미선영~~
농사공부 만점자
행복한 어버이날 보내셨는지요?시니어쌤 두분께 조그마한 선물을 드렸는데 참좋아하시는 모습에 많이 뿌듯했네요 ~~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잘하셨습니다.
시골집에 다녀오면서 그렇게 아껴쓰시던 어머니의 마음을 읽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이따 정리하고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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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 - 오늘날의 60, 70, 80세대들이 살아온 길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들이다!" 글을 읽으면서 아주 먼 이야기 같지만 얼른 머릿속에 생각이 많이나서 저의 생각을(●) 얹어 보았습니다. 참으로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었지만 정(情)만큼은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정으로 풍요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우리는 <호롱불> 세대였다. 90%는 전깃불이 없고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호롱불에 머리카락을 태우기도 했고 속옷에 기생하는 써캐를 태우기도 했다. 자다가 등잔을 발로차서 호롱에 있던 석유가 쏟아져서 석유기름 냄새가 온 방안에 몇날몇일 나기도 했다. 호롱심지를 높게하면 그으름이 생겨서 콧속이 새까매지기도 했다. 석유기름은 한되 두되 이렇게 병이나 양철통으로 담아서 구입했다. 호롱불 대신에 촛불을 키기도 했다. 2. 우리는 <뒷간> 세대였다. 90%는 실내 화장실이 없고, 엄동설한 한겨울에도 뒷 구석 재래식변소에서 볼 일을 봤다. 또 잿간이나 돼지막에 올라가서 생리작용을 해결하기도했다. ●지금같이 보드런 화장지는 없고 신문지나 책을 찢어서 사용했다. 그 중에 제일은 미렁지로 만든 일력자리 달력이었다. 라사점이나 안경점에서 주로 만들었다. 옛날엔 옥수수껍질이나 지푸라기를 비벼서 사용하기도 했다고한다. 측간을 갈 때 무서움을 타는 아이들은 측간 문앞에서 무섭다고 기다리라고했다. 외국인들한테 우리나라를 관광할 때 가장 애로가 뭐였나?를 문체부에서 설문을 받았습니다. 제일 많은 것이 냄새나고 지저분한 화장실 문제였다. 정부에서 즉각 공중화장실과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을 점검하고 감독한 결과 전국 어딜가나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3. 우리는 <우물> 세대였다. 상수도가 없어 동네 공동우물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 항아리에 담아 놓고 마셔야 했다. ●군대에서 철모속에 썼던 화이바로 물바가지를 대신해서 물을 퍼올렸다. 우물가엔 앵두나무와 향나무가 있었는데 제 사를 모실 때 향나무를 잘라 향을 피웠다. 우물은 냉장고 역할도했다. 전기시설이 없었고 냉장고가 없을 때라 열무김치를 담가서 빨간 항아리모양의 프라스틱통에 담아 우물속에 끈으로 묶어서 담갔다가 꺼내 먹었다. 4. 우리는 <가마솥> 세대였다. 98%는 목욕탕이 없어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목욕을 했다. ●설명절에나 돼야 읍내에 나가서 "다이얼"이라는 노오란 비누와 이태리 때수건으로 싹싹문질러 때를 벗겼다. 너무 벗겨서 쓰라리기도했다. 샴푸대신에 늘 빨래비누나 세수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요즘같이 매일 머리를 감는 일은 없었다. 5. 우리는 <손빨래> 세대였다. 100%가 세탁기가 없어 개울에 나가 추운 겨울에도 얼음장을 깨고 빨래를 했다. ●공동우물가나 시냇가에 널찍한 바위에서 빨래방망이로 두들겨서 빨래를 했다. 고무장갑이 없이 겨울철 빨래를 할 때는 손이 얼어서 시리다가 저렸다. 삼베나 광목은 양잿물에 담갔다가 찌든 때를 빼고 빨래를 했다.   6. 우리는 <보행/자전거> 세대였다. 95%는 자가용이 없어 대부분은 걷거나 일부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지프차나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부의 상징이었다. 멀리있는 교통이 불편한 학교를 다니는 여학생들도 자전거로 통학을했다. 유독 우리고장 남원여고 학생들은 많은 여학생들이 자전거로 통학을했다. 학교가 시내에서 조금 멀리 있어서 교통편의가 좋지 않았다. 교복은 치마지만 자전거로 통학할 때는 바지를 입고 다녔다.   7. 우리는 <고무신> 세대였다. 95%는 구두도 운동화도 없어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타이어표"검정 고무신은 어찌나 질긴지?발바닥쪽이 밀릉밀릉할 때까지 신어야했다. 여름엔 양말을 신지않아서 조금만 걸어도 까만 때꼬장물이 고무신 테두리에 보였다. 교복을 입으면서 얇은 천으로 된 검정운동화를 신게 되었다. 체육시간에 공을 몇차례 차면 운동화 가운데가 동그랗게 벗겨지기도 했다. 교복에 학교를 상징하는 뺏지와 모자에 교포를 달고 다녔다. 8. 우리는 <까까중> 세대였다. 100%가 이발비가 적게 드는 까까중 머리로 다녔다. ●고향 마을에 1년에 나락 한말과 껕보리 한말을 주고 양손 바리깡으로 머리를 빡빡 깍아주시는 어른이 계셨다. 한달 보름정도에 한번씩 이발을 하는데 바리깡에 머리카락이 씹히면 머리는 하늘로 치솟는다.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머리를 하도 감지 않아서 쇠똥같이 때가 낄 때도 있었다. 9. 우리는 <보자기> 세대였다. 98%는책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차고 뛰어 다녔다. ●어깨에 천이 미끄러운 나이론천인 다우다로 만든 책보로 책을 싸서 어깨에 둘러매고 뛰면 할머니께서 합천해인사에 다녀오시면서 선물로 사주신 나무로 된 필통을 사주셨는데 나무필통속에 연필이 얼마나 달그락 거리는지? 다우다천이 미끄러워서 풀리면 책이랑 필통속에 연필이 다 쏟아지기도했다. 양철로 만든 필통도 있었다.   10. 우리는 <고무줄> 세대였다. 100%가 장난감이나 놀이기구가 없어서 여자애는 고무줄 넘기하고, 사내애는 말타기 놀이도하고 새총을 만들었다. ●여자애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 면도칼로 고무줄을 자르고 도망치기도 했다. 남자애들은 자치기나 못치기 땅따먹기 등 놀이를 즐겼다. 11. 우리는 <강냉이> 세대였다. 100%가 쌀이나 보리쌀이 없어서 학교에서 주는 강냉이 가루로 강냉이 빵이나 꿀꿀이 죽을 만들어 끼니를 때워야만 했다. ●미국에서 원조식품으로 우유가루를 주었는데 유통과정에서 오래되어 우유가루가 돌뎅이가 되었는데 얼마나 딱딱한지? 우유가루 덩어리를 깨서 먹으면 달작지근하고 맛있었다. 우유덩어리에 삿카린을 조금넣고 끓여서 마실 때 그 맛은 신기루였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강냉이죽을 끓여서 나누어 먹었다. 옥수수가루로 만든 푸석푸석한 옥수수빵도 맛있었다.   12. 우리는 <주경야독> 세대였다. 98%가 낮에는 가사일, 농사일 돕기, 풀베기, 나무하기, 소먹이기, 동생돌보기 등을 하고서 밤이 되어야 학교숙제를 했다. ●집집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소를 먹였다. 학교갔다오면 소를 몰고 방천이나 냇가에가서 소에게 풀을 먹였다. 꼴망태를 메고 낫을 숫돌에 날이 서도록 잘 갈아서 깔을 한망태씩 매일 베기도했다. 집집마다 소를 키우기 때문에 소깔도 귀했다. 시내에서 바라구 등 많은 풀을 보면 소깔베는 생각이 나서 아깝다고 생각하곤 했다. 지금도 천변에 수북하게 자란 풀을보면 낫으로 베다가 소를 먹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소를 몰고 가다가 소가 맛있는 콩을 보고 논두렁에 콩잎을 뜯어 먹어 논주인한테 야단을 맞은적도 있었다. 13. 우리는 <주판> 세대였다. 100%가 전자계산기나 컴퓨터는 없고 다섯 알 짜리 주판을 굴리면서 셈을 했다. 급수를 따야 은행 등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 ●상업학교에 진학해서 주산급수를 따고 은행에 취업하면 동네잔치를 하기도했다. 은행에 취직을 할려면 2급이상은 따야했다. 주산은 아이들 지능을 키우는데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세계주산대회와 암산대회도 열리곤 했다. 시내에 주산학원도 엄청 많았다. 14. 우리는 <일제고사> 세대였다. 100%가 입학 / 졸업은 물론이고,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교생이 일제히 시험을 치르고 등수를 매겨 경쟁했다. ●일제고사에서 1등을하면 그 집안에 경사가났다. 일제고사 성적으로 등수를 매겼다. 15. 우리는 <입학시험> 세대였다. 100%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본고사 입학시험을 치러 상급학교에 진학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께서 마을회관이나 넓은 집을 빌려서 중학교 진학희망자들을 모아서 중학교입시를 위한 과외를 합숙을 하면서 했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2곳의 남자중학교가 있었는데 경쟁율이 평균 2:1이 넘었었다.   16. 우리는 <공돌이 공순이> 세대였다. 하도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하면 식모살이 아니면 구로공단 같은 공장에서 공돌이 공순이 버스차장을 하면서 땀 흘려 일을 하고 야간에는 교복입고 야간학교에 등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지게를 맞췄고 그 지게지기가 싫으면 검정고무신을 신고 야간 완행열차타고 서울로 올라가 요꼬공장 등에 취직을했다. 여자아이들은 지금은 도우미라고 하는데 부잣집에 들어가서 식모살이를 하기도했다. 추석과 설명절에 새옷에 새구두에 폼을 잔뜩내고 고향을 찾아와서 시건방을 떨고 다니고기도했다. 17. 우리는 <삯 월세> 세대였다. 80%가 신혼 살림집을 구할 돈이 없어 거의 모두가 사글세 단칸방부터 시작하여 전세로 옮겨 다녀야만 했다. ●처음엔 사글세방으로 시작해서 전세로 옮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단칸방이나 미닫이로 가운데를 막은 이간장방을 얻어서 살림을 시작했다.   18. 우리는 <월남전> 세대였다. 나라가 빈곤하여 목숨걸고 전쟁터에서 돈을 벌어 와야만 했다. ●지금은 비행기로 3시간 남짓이면 가는 베트남인데 부산항에서 배로 보름이 걸렸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갔던 파월장병님들께 많은 감사를 드립니다. 윌남전에 다녀온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도했다.  19. 우리는 <광부. 간호사> 세대였다. 최 빈곤국으로 독일에 가서 석탄 광부와 시체 닦는 일로 돈을 벌어 와야 했다. 그나마 고졸이상 경쟁이 치열했다. 평균 5:1이었다. ●서독에서 1,000미터 넘는 깊은 땅굴에 들어가 석탄을 캐고 서독의 병원에서 요양원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를 돌보고 대 소변을 치우고 시체를 닦고 염을 하면서 외화를 벌어들이고, 노무자를 담보로 차관을 얻어와 공장을 지으며 산업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이 진정한 애국자로 인정받고 국가보훈 자격을 드렸으면 한다. 이분들 때문에 독일에서 차관을 했고 경제개발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쥐나 개나 엉터리 국가유공자들이 많이 있는데 진정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충분한 국가유공자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20. 우리는 <중동 노동자> 세대였다. 열사의 나라 중동지역에서 가족과 자식을 위해 돈을 벌었다. 우리가 피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건재하고 있지 않는가? ●뜨거운 사막에가 건설현장에서 많은 돈을 벌어 가정의 경제는 물론이고 국가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국내에서 건설일을 하는 사람보다 몇곱은 더 임금을 받았던 것 같다.   젊은이들이 우리를 "꼰대"라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이다. 우리 중에는 지금도 재활용 폐품을 줍는 부모도 계신다. 작은 리어카에 폐지를 주어 폐지값이 헐값이라 몇푼밖에 받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과 가족을 위해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일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가난하고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와 열심히 캥거루 세대를 키워낸 죄밖에 없는 샌드위치 세대 들일 뿐이다. 곳곳에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네요. 요즘 곳곳에 화재가 많습니다. 재산피해도 이제는 그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날씨가 늦게까지 더위가 있더니 갑작스럽게 차가워졌습니다. 올해 독감이 유행일거라는 중대본부의 예상이니 독감예방접종을 하셔서 독감에 걸리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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