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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진주최순
답변 고수
유모 7탄 ㅋ ㅋ

어느 날 밤,
경찰이 유흥가를 순찰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비틀거리며
오던 여인이
갑자기 주저 앉더니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경찰은 미소를 지으며 여성에게 다가가 경범죄를 적용시켜
2만원의 벌금을 부과시켰다.

그 뒤에서는 남자가 일을 보고 있었다.
경찰은 남자에게 4만원의 벌금을 부과시켰다.

순간 남자는 화를내며 말했다.

"아니?
저 여자는 2만원이고 나는 왜 4만원이요?"

경찰은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은 흔들었잖아!"

여자 왈

왜 흔들었어

https://youtu.be/QLDDJOxXZJI?si=occ8U4iO1U-wQkZY 조회수208만회 여대생들
경기연천김옥자
흔들면 두배 ㅋㅋ
경북안동세미골곶감
남자는 흔들어서 따불이고 여자는 좌석인돼 남자는 입석 ㅋ
경북고령나미공주
맞네 ~~~♡♡♡
충북괴산오영
입석하고 좌석은 차이없나?
충남보령하루의행복
귀촌 11년차 소농사·
그~~래도 남자~~남자 ㅎㅎ 7탄 거시기 합니당
경북성주오여사
ㅋㅋ 웃기네~
전북전주최남옥
고스톱흔들면 두배~~~ 경찰아저씨 재미있는유머
충남부여장례지도사1급
방망이 흔들면 큰일나요
종식번식때만 흔들어야 되지요
경남산청박원재
고스톱이가
경북영천감자19385
웃으면 행복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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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10 - 우리는 야간통행금지와 장발단속 그리고 미니스커트 단속을 당했다. 통행금지령(通行禁止令) 또는 통금(通禁)은 일정 시간에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하는 제도로 주로 야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원칙적으로 분쟁이나 재난이 있을 때에 치안 유지를 위해 오직 제한적으로만 시행되었다. 어린이나 청소년의 보호를 위해 시행되기도 했다. 야간통행금지는 밤에 허락받지 않는 사람은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지금도 밤에 치안이 좋지 않는 곳이 있고 과거에는 더 심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범죄율을 낮추고자 과거에 많이 사용했던 규범이다. 그 당시에는 어차피 횃불이나 호롱불외에는 별다른 조명이 없고 해가지면 일반인들이 할만한 야외활동이 없어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1945년 시행되었다가 전방 휴전선부근과 해안 일부 군사시설이 있는 지역을 제외하고 1982년1월5일 전면 해제되었다. 밤 10시에서 다음날 4시까지는 일반인들이 시내를 다니지 못했다. 그 후 밤 12시부터 다음날 4시까지로 변경되었다. 12시가되면 싸이렌이 울리고 야간통행증이 없으면 즉결심판을 받고 경찰서 보호실에서 밤을 보내야했다. 신정연휴기간, 광복절, 크리스마스, 재야의 밤 등 특별한 날은 해제되었다. 1970년대 초중반의 장발 단속 정책은 1960년대 이후 서구에서 6.8혁명의 영향을 받은 문화가 한국에 수입되자 당시 정권에서 청년들의 문화를 막음으로써 통제 분위기를 활용하여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막으려 한 의도가 있었다. 6.8혁명이란 1968년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거대한 변혁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니스커트와 장발은 주류 문화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시대를 바라는 젊은이들의 열망이 함축돼 있었다. 1971년 9월 24일 정부는 퇴폐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를 10월 1일부터 단속한다는 방침을 발표했고, 미니스커트와 장발도 포함돼 있었다. 단속 첫 날인 10월 1일 전국적으로 2,600명이 적발되었다고 한다. 장발단속에 걸렸는데 머리깍기를 거부하면 경범죄로 즉결심판에 넘겨졌고 장발인 상태로 예비군훈련에 참가하면 불참처리됐다. 장발단속은 한국에 입국하는 외국인에게도 적용되었는데 1970년 홍콩 배우 성룡이 당시 우리나라에 입국하면서 단속에 걸린 적이 있었다. 한 때는 바가지를 엎어 놓은 바가지 모양의 머리가 유행하기도 했다. 장발단속은 80년대 들어서면서 없어졌지만 이를 단속하는 근거 법안의 장발에 관한 내용이 없어진 것은 1989년입니다. 한국에서는 가수 윤복희가 입은 것이 최초로 알려져 있지만 미니스커트는 당시 적령기 미혼 여성의 정장이 되어버렸다. 유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장발과 함께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당시 경찰들은 풍기단속 등의 이유로 대나무로 만든 30cm자를 가지고 다니며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성들의 치마 길이를 단속하기도 했다. 당시 단속 기준은 무릎 위 20cm에 걸리면 경범죄처벌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 "호황기에 미니스커트를 입는다"는 치마의 길이로 경제 상황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길거리에서는 보행법규를 위반한 사람을 단속하여 한쪽에 노끈으로 선을 만들고 그 선안에 세워두기도 했다. 횡단보도에서 한쪽발만 내려가면 괜찮았고 두발이 다 내려가면 교통단속반이 멀리서 지켜보다가 쫒아와서 적발되었다. 사회 분위기와 물가상승도 차갑게 느껴집니다. 웃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90년대까지만해도 자동차를 운전하시다보면 이런 일을 몇번은 격었을겁니다. 도로변에 화이바를 쓰고 멎진 오토바이를 타고 교통단속을 하는 교통순경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전주시내를 벗어나면 완주경찰서 소속의 교통경찰이 있었고, 완주군을 벗어나면 임실경찰서 소속의 교통순경이 있습니다. 임실군 경계를 지나면 남원경찰서 소속의 교통경찰이 나와있습니다. 남원 시내를 벗어나면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삼거리에 요천 검문소가 있습니다. 70k의 거리에 꼭 3-4차례는 교통단속을 거쳐야했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기준속도를 웃도는 속도로 운행하기도 하지요. 어김없이 한쪽에 살짝 숨어있다가 수신호로 차를 세웁니다. 그 시절에는 면허증 밑에다 5,000원권 지폐를 끼워놓고 다녔습니다. 접어진 5,000원권 지폐랑 같이 면허증을 제시하면 5,000원권 지폐만 꺼내고 면허증을 돌려주면서 "안전운전 하십시요"하면서 거수경례를 하였습니다. 다 그런것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동료들이랑 차한잔하게 해주십시요"하면서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습니다. 어느 날은 요천 검문소에서 안전띠를 안맸던가?해서 검문을 당했는데 호주머니에 현금이 없어서 면허증을 맏겨놓고 시내에서 현금을 인출해서 5,000원을주고 면허증을 찾기도 했습니다. 성실하게 교통업무를 보았던 교통경찰분들한테는 죄송합니다. 그 때는 국도지만 2차선이라 중앙분리대가 없어서 건너편에 교통경찰이 있으면 상대방 차에다 비상등을 깜박이면서 교통경찰이 단속을 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미덕아닌 미덕도 있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습니다. 건강관리를 잘 하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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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36 ♡ 공주의 남자 이야기 ♡ 조선왕조 세조에게는 정희왕후가 낳은 공주가 있었는데 어려서 부터 어질고 성품도 덕스러웠다. 공주는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절제 김종서가 사육신 및 충의를 지키려는 신하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 하려다가 순절하고, 그 가족들이 다 죽임을 당하기에 이르는 것을 보고, 일찍이 눈물을 흘리며 밥도 먹지 아니 하였다. 그리고 단종의 어머니 묘가 파헤져지는 참변을 당할 때는 울면서 간하기를 그치지 아니 하니, 세조는 크게 노하여 장차 화(禍)가 어디까지 미칠지 헤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비밀히 유모를 불러 가벼운 보물을 충족히 주면서 공주와 함께 그것을 가지고 멀리 피신하고, 왕(세조)에게는 공주가 요절한 것으로 알렸다. 마침내 유모는 공주와 함께 몰래 도망하여 충북 보은군에 당도하였고 깊은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는 배고품이 너무 심하여 길가에 앉아 잠시 쉴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한 총각이 쌀을 짊어지고 이곳을 지나다 발길을 멈추고 묻기를 "두 분은 시골 사람들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어찌하여 유독 이런 곳에 와 있습니까?" 하였다. 유모가 총각을 보니 의복은 비록 때가 끼고 남루하나 용모는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답하기를, "나와 이 낭자는 한양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이곳에 이르렀으니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서 지금 막 주저하고 있을 따름이요." 한즉 총각은 남 몰래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기를, "나 역시 화를 피하여 이곳에 와서 산 지가 벌써 1년이 지났소이다." 하였다. 유모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와 이 낭자는 그대와 함께 살았으면 하오" 라고 하자, 총각은 흔쾌히 이를 허락하였다. 그들은 함께 걸어서 깊은 골짜기를 지나 몇 리쯤 가니 토굴이 있어 거적문을 열고 들어갔다. 총각은 손수 밥을 지어 그들을 대접하였다. 며칠이 지난 뒤 유모가 행탁(여행용 자루)에서 가벼운 보물을 꺼내어 총각에게 주면서 이것을 장에 가서 팔아 오라고 하자, 총각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이 보물들은 궁중의 물건인데 아주머니는 어디서 이것들을 얻었 습니까?" 하자 유모는 말하기를, "굳이 그 출처를 묻지말고 가져가서 팔아 주오" 하였다. 그러나 그 총각은 끝내 그 뜻을 따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의로운 일을 거행할 때 관가에서 화를 피한 자취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1년 남짓 사는 동안에 총각은 공주와 정을 통하고 혼례를 올렸다. 그제서야 총각이 비로소 공주에게 피난한 까닭을 물으니, 공주는 울면서 대답하지 아니하고, 유모가 대신 그 전말을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 총각은 슬피 울며 말하기를, "나는 절재 김종서의 손자입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함께 화를 입던 날 온 집안이 다 죽임을 당했으나 나만 홀로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른 것이나, 어찌 공주가 그 어린 나이로서 능히 이렇게 의로운 마음을 분별할 줄 뜻하였으리오!" 하였다. 이로부터 두 사람은 서로 공경하며 온정을 나누는 것이 더욱 깊어졌다. 세월이 오래 흘러 그때 화의 법망이 좀 풀리게 되자, 총각은 보물들을 전부 팔아서 많은 돈을 얻어, 산 밑으로 내려와 넓은 전지를 마련하고 몸소 밭을 갈고 책을 읽으며 아들 딸을 낳아 기르면서 살았다. 세조는 말년에 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부처님께 지난 날을 참회하는 기도를 하였는데, 속리산(충북 보은군 북쪽에 있는 산 ) 으로 향하다가 마침 공주가 사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한 어린 아이가 길가에 있었는데, 세조가 그 아이의 용모를 살펴보니 꼭 자기와 닮았다. 세조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수레를 멈추게 하고 애를 앞으로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우는 소리가 울타리 사이에서 들려왔다. 세조는 마음이 흔들려 좌우의 신하들에게 묻기를 "이 어인 울음소리 인가? " 하자, 어린 아이가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어머니의 울음소리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세조가 곧 좌우 신하들을 물리치고 어린 아이와 함께 걸어서 그 사립문에 이르니, 한 부인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었다. 세조는 놀라서 묻기를, "너는 누구인고?" 하자, 공주는 눈물을 거두며 대답하기를, "못난 소녀는 지난 날 아버님의 엄한 책망을 받았는데 어머님의 분부로 유모와 더불어 대궐을 떠나 멀리 피하여 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죽지 못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나이다." 라고 하였다. 세조는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너를 일찍이 이미 요절한 것으로 여겼구나. 어찌 지금까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줄 알았겠느냐! 너의 남편은 어디에 있느냐?" 하였다. 공주가 답하기를, "그는 죽은 영상 김종서의 손자입니다. 그도 역시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왔는데 우연히 길가에서 상봉하여 곧이어 짝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님의 행차가 이곳을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몸을 피해서 지금 집에 있지 아니합니다." 라고 하니 세조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김종서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내일은 마땅이 나오너라. 가마와 말을 보낼 것이니 나와 함께 대궐로 돌아가자. 아울러 네 남편에게도 봉작(작위)를 가하리라." 하고, 세조는 드디어 수레를 돌렸다. 다음 날 세조는 승지를 파견하여 그들을 맞아 오게 하였으나, 공주는 밤을 틈타 그 남편과 함께 가족을 거느리고 몰래 어디론지 숨어버리니 그 거처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전하는 소문에 의하면 당시 세조가 지나가는데 정이품송(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가는 길에 서 있는 수령 600년의 소나무 ) 아래서 두 아이가 놀고 있어 그들의 부모이름을 묻자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마골로 도망을 가길래 그냥 지나쳤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다음날 찾아 보았으나 그들의 부모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세조는 본인의 외손자임을 직감하고 정2품 품계를 적은 문서를 당시의 정이품송 아래에 놓고 왔는데 그들은 끝내 찾아가지 않았으며, 그 후에 문서를 발견한 어느 사람에 의하여 '왕이 손수 소나무에게 정이품의 품계를 내리셨다'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 옮겨 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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