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 딸기 모임 작업 알림 🔔
[🌞 날씨]
다음 주는 찬 대륙 고기압의 영향으로
기온의 변동 폭이 크겠고, 추울 때가 있을 예정입니다.
기온은 평년(-0.3~1.7℃)과 비슷할 전망입니다.
강수량은 평년(2.3~3.8㎜)과 비슷하거나 적을 것으로 예상돼
관수 관리에 신경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저수율: 67.9% (평년 70.2%의 96.7% / 12.05 기준)
<겨울철 자연재해에 대비하세요!>
1️⃣ 기존 규격 시설과 내재해형 규격 시설, 비규격 시설인지 확인하고,
기존 규격 시설과 내재해형 규격 시설의 경우 안전적설심을 확인하세요.
※ 농사로(nongsaro.go.kr) → 농업기술 - 농자재 → 시설설계도(참고용)
2️⃣ 사전 대책
- 하우스 밴드(끈)를 팽팽하게 당겨두고,
작물을 재배하지 않을 경우 외피복 비닐 제거와 천장 개방.
- 보온덮개·차광막을 걷어 두거나 비닐 덧씌우기, 보강지주 설치.
- 단동하우스 지붕 위와 하우스 동간, 연동하우스 곡부 눈 수시 제거.
3️⃣ 사후 대책
정전 등으로 가온 시설을 가동할 수 없을 땐,
숯·알콜 등을 연소시켜 가온·보온 피복 강화하고,
살균제 및 요소 엽면 살포로 생육을 촉진시킴.
(피해가 심할 경우엔 다른 작물로 대체)
4️⃣ 환경 관리
일교차에 의한 시설 내 안개가 발생하지 않도록
측창과 천창 개폐에 신경 써서 생육 저하 및 생리장해 현상을 방지.
5️⃣ 병해충 방제
조기 예찰 및 발생 초기에 방제를 철저히!
환기로 적정 습도 유지하고, 초기 적용 약제 방제.
해충 발견 시 3~5일 간격 3회 정도 성분이 다른 약제 교호살포 또는 천적 활용.
🔔 주간 작업 알림을 놓치지 않고 받아 보고 싶다면?
댓글로 “알림 신청”이라고 달아주세요.
22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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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Farmmorning
고추 지지대고정 줄치고 창고 허술해서 지붕 줄 묶고 단디 했읍니다
23년 6월 20일
곶감을 깍았습니다.
텃밭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대봉시를 심었습니다.
물감이라야 홍시가 더 맛있는데요.
떡감나무였습니다.
그래서 작년부터 설, 추석, 시제, 제사를 모시는데 쓸려고 곶감을 깍기 시작했습니다.
손도 많이가고,
시간도 오래동안 말려야 해서 힘들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감을 칼로 깍아서 싸리나무로 가운데 끼워 새끼로 둥그렇게해서 처마밑에 매달아서 제사때랑 썼죠.
날씨가 좋지 않으면 곰팡이가 생기고,
자칫 잘못하면 쌔까맣게 썩기도 했습니다.
깍은 감을 가운데 싸리나무로 꿰어서 말리는데 지금 생각하면 비위생적이라 할 수 있죠.
곶감을 깍고난 감껍질도 말려서 먹으면 하얀분이 나서 달작지근한 맛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기계화가 되어서 대량으로 생산한 농가에서는 기계로 깍더군요.
일반적으로 가정집에서는 감자칼 있죠.
그 필러로 깍기때문에 쉽게 감껍질을 벗길 수 있습니다.
또 싸리나무 대신에 철물점에서 곶감말리는 곶감곶이를 판매합니다.
곶감곶이 한개에 곶감 10개씩 끼워집니다.
꼭지를 집게모양으로 된 곳에 끼워서 햇볕 잘들고.
바람 잘통하는 곳에 걸어두면 됩니다.
시내에서 가끔씩 보면 베란다나 옥상에 빨래건조대에 달아매서 말리다가, 비라도 내리면 비닐을 씌워서 말리기도 하는 모습을 가끔씩 보기도 합니다.
감꼭지가 없는 감도 고리에 끼울 수 있게끔 곶감집게가 있어서 양쪽에 끼워서 고리에 끼울 수 있게 합니다.
나머지 감은 감말랭이를 만들어서 1년 내내 간식으로 먹으면 영양식으로도 좋습니다.
과일류는 말리면 당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물론 변비가 있는 사람은 많이 먹으면 자칫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탄닌이라는 성분때문에 변비를 유발할 수도 있답니다.
감말랭이도 깨끗하게 씻어서 꼭지를 칼로 도려내고 감자칼로 깍으면 간단하게 껍질을 벗겨낼수가 있습니다.
칼로 조각을 내서 말리면 되는데요?
너무 얇게 자르면 나중에 딱딱해집니다.
보통 크기의 대봉시라면 4 -5등분하시면 말랐을 때 곶감같이 말랑말랑한 감말랭이가 됩니다.
아주 큰 감이라면 조각을 더내야 겠죠.
보통 1cm정도로 잘라서 말리면 좋을듯 합니다.
중간에 하얀심과 씨를 빼서 말리셔야 먹기가 편리하고,
하얀심이 변비를 유발한다고 합니다.
자연건조는 시간이 너무 오래걸려서 힘듭니다.
식품건조기나 커다란 농산물 건조기에 말리면 되는데,
처음부터 온도를 높게 해서 말리면 짧은 시간에 말릴수가 있겠지만 감말랭이가 딱딱하게 말린답니다.
그래서 낮은 온도로 길게 말리는 것이 보드랍게 말릴수 있다고 합니다.
말련진 감말랭이는 조금씩 소포장해서 냉동고에 보관했다가 드시기전에 꺼내놓으면 하얗게 분이 생깁니다.
바로 먹으면 딱딱하기 때문에 미리 꺼내 놓으면 말랑말랑해 집니다.
감말랭이가 우리 몸에 꽤나 많은 좋은 성분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간식보다도 더좋은 간식꺼리가 되지 않을까?싶습니다.
감말랭이용은 큰감도 좋습니다.
너무 익은 감은 홍시로 먹어야겠죠?
옛날 시골에서는 닭을 가두는 덗가래라고 하나요?
거기다 감을 담아서 세가지로 갈라진 감나무나 지붕에 올려 놓았다가 홍시가 되면 꺼내 먹곤 했죠.
그때는 냉장고나 냉동고같은 시설이 없을 때니까요.
여름철에 우물에 김치통을 넣었다가 꺼내서 먹었습니다.
저희 고향에서는 우물을 시암이라고도 했습니다.
두레박같이 끈에 매달아서 우물에 담갔다가 꺼내서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곶감을 깍아서 옥상에 매달았습니다.
선풍기로 바람을 씌우고요.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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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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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나무결 살린 DIY 긴 다용도 탁자(W710*H720 *D2000) 완성하다.(10여명 한자리 할수 있을지)
이걸 만들어 볼려고 두꺼운 고재판재(40T)를 구입해놓은지 언 10여년
대표적 공정은 설계를 한뒤
¤ 철재(40T)를 용접하고, 도색, 타공, 마감작업(높이조절발, 마감캡)
¤ 목재를 자르고, 체결, 연마, 모서리 따내기, 도색(예정:오일스텐)
■사용한공구
용접기, 용접면, 절단기, 연마기, 트리머, 대패, 클램프 등
경험부족으로 단계별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완성!
※ 혼자 DIY로 만들기 위해 새로 구입한 공구들이 몇 가지인데 돈 낭비는 아닐지(다른 물건을 또 만들어 사용하면 본전 생각은 덜 나겠지만)
※ DIY 어려웠던점(용접부위 빵구 및 변형, 철재구멍 뚫기, 두판재 공백최소화 맞추기, 모서리 둥글게 따내기, 농촌소도시라 관련 부품구하기: 어쩔수 없이 온라인 구매) 등
♤ 이제 다음 목표는 컨테이너 창고 'DIY 지붕만들기' 도전 ♤
23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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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이번 폭우에 피해보신 농업인분들 화이팅 하십쇼!!
저희 지역도 많은 피해 때문에 이곳저곳 복구작업중이네요..ㅠㅠㅠ
논이며 밭이며 다들 토사가 장난아니네요..
인삼밭 지붕위에는 콘테이너가 있고..
저희 농가도 인삼밭에 토사며 자갈이 대단하네요..
23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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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에 올라가 실리콘으로 구멍을 모두 메꾸고 있습니다
23년 6월 20일
*두부 장수 노부부

새벽 별 보고 일어나
콩을 삶아 두부를 만드는 노부부는 이 일을 평생 해 오셨다는데요
자전거에 방금 나 온 뜨끈한 두부판을 차곡차곡 올려놓고 길을 나서는 할아버지를 보며
"영감 오늘 오후에 비 올 것 같으니 안 팔리면 일찍 들어와요"
"알았어"
퉁명스러운 대답 한 마디를 배웅 삼아 내뱉고는
((((땅그랑 ~ 땅그랑))))
골목길을 나서면서 부터 종을 흔들며
두~~부)))) 두~~부)))) 라는
할아버지의 외침이
동네 곳곳을 돌며
새벽을 깨우고 난 자리에
한 사람 두 사람 대문을 열고 나오더니
"두부 한 모만 주세요
"저는 두 모 주세요"
"오백 원 여깄어요"
"고맙습니다"
때론 하늘 한 번 올려다 보기 힘든 하루를 보내느라
서로의 굽어진 허리를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하늘을 막아줄
지붕 하나 있는 것만으로
행복이라고 말하는 노부부는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이집에서 숨쉬는 행복이 최고라는데요
"영감 이게 뭐예요?"
"오다가 주웠어"
"멀쩡한 붕어빵을 왜 버렸대"
능청 스러운 할아버지의 거짓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오물오물 먹고있는 할머니는
땀흘리고 움직인 만큼만 욕심을 부리며 살아온 세월속에
하루위에 하루를 더 포개 놓은 듯한 힘듦이지만 서로를 알뜰히 챙기는 마음 하나로 버틸 수 있었기에
세상 길 다 지워져도 이 길을 함께 걸어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잿빛 어둠이 그려진 다음 날
파란 하늘에 투명한 물감이 흘러 내리 듯 날리는 비를 야윈 두 어깨에 올리고 집으로 온 할아버지가
팔고 난 두부판을
부뚜막에 내려놓으며
얼굴에 핀 그늘을 본 할머니는
"어찌 오늘은 많이 못 팔았나 보네요?"
할아버지가 내려놓은 두부판에 얹힌 천을 걷던 할머니의 눈에 흙덩이들이 고명처럼 묻어있는 두부를 보며
"영감 두부가 왜 이래요?"
"차 길에서 넘어졌어"
"어디 다친데는 없슈?"
"멀쩡혀 걱정말어"
절뚝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할머니는 재빨리 수건 하나를 끓고 있는 솥에 담궈 뜨끈히 뎁혀 방으로 따라 들어 가는데요
"영감..
이쪽으로 누워봐요"
"거 괜찬타니까 호들갑이네"
내일 당장이라도 일하러 나갈 것 같이 큰소리를 쳐대던 할아버지가 해와 달이 바쁘게 오가는데도
모습이 보이질 않더니 보름이 다가도록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는데요
"영감 이러지 말고 자식들 오라고 할테니 병원에 갑시다"
"병원에 갈 돈이 어딨어"
"다락에 있는 상자에 매일매일 영감이 넣어둔 돈 있잖아요"
"그건 안뎌"
"알았어요...
영감 죽을때 같이 묻어 드릴테니
저승가서 실컷 쓰구료"
그렇게
시간을 약으로 집을 병원삼아 버티던 할아버지는
언제 아팠냐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임자..
오늘부터 장사 나갈테니까
콩 좀 넉넉히 삶아"
"괜히 무리하지 마시고
며칠 더 쉬어요"
"쉬면 누가 돈 준데...
몸뚱어리 조금이라도 성 할때 부지런히 벌어야지"
"그 놈의 돈..돈...돈....
쓰지도 못하는 돈 모아서
뭐 할려는지"
행복하자는 약속으로 남은 말을 지키려 오늘도 새벽안개를 헤치며
땡그랑~~ 땡그랑 ~~~
종소리에 맞춰 자전거 폐달을 밟는 할아버지의 뒷 모습을 보며 오늘분의 행복을 벌써 다 받은 듯 할머니 입가엔 미소가 흘러 넘치고 있었는데요
"이정도면 내일 장사하고도 남을 것 같구먼"
하루 온 종일 허리 한 번 못 펴보고 장작을 피워대며 두부를 만든
할머니는 거뭇 거뭇해지는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더니
"영감이 올 때가 되었는데
오늘은 늦네 그려..."
그때 저 멀리서
삐그덕....삐그덕..거리며
저물녁 새들이 건너는 하늘가를 따라
고물 자전거 폐달 밟는 소리가
할아버지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고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 다더니만..."

두부를 많이 팔았는지
적게 팔았는지
폐달 밟는 소리만 듣고도 안다는 할머니는
느려도 좋으니 그 소리가 멈추질 않기를 마음으로 기도하며 할아버지를 반기는데요
"영감. ,,
오늘 많이 팔았죠?"
"할멈..
두부 만들지 말고 돗자리 깔어"
이제는 서로의 발걸음 하나에
속깊은 마음까지 들여다 볼수 있다는 노부부의 오늘 분의 행복은 또 그렇게 쌓여만 가는것 같습니다
한 계절이 가고 또 다른 계절이우두커니 머물러 있는 창가만 들여다 보고 있던 할머니는
"영감..
집에가서 쉬지 왜 왔슈?"
늘 할아버지의 건강만 걱정하던 할머니가 굽어진 허리가 펴지질 않아
그만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는데요
"임자 좋아하는 순대 줄려고 왔지"
"영감이나 집에 가서 약주
한 잔하면서 먹으슈"
마주친 어쩔수 없는 슬픔 위로 챙겨온 순대를 할머니 입에 넣으주며 "꼭꼭 씹어.."
"영감도 좀 먹어요"
"난 거기서 많이 먹었어"
필요한 자리 그 자리를 지켜주는 서로가 있어 스치는 아픔을 이겨낼 수 있다는
할머니는 마주하는 똑같은 일상 앞에서도 병원과 집을 오가며
하루분의 행복을 퍼나르는
할아버지의 고마움에
병원에 있는 동안 눈시울이 마를 날이 없었다는데요
어느 날은 길가에 핀 야생화를 뜯어다 소주 빈병에 꽂아놓고 가는 날도 있고
또 어느 날은
잠든 할머니 머리에 예쁜 비녀를 꽂아 주고가는
할아버지가 주는 행복속에 머물던 할머니에게
"임자 ..
우리 두부장사 그만할까?"
"왜요 죽을때까지 할거라더니
왜 맘이 변했슈?"
"이제 임자 고생 그만 시키고 싶어서 그래"
"그럼 두부장사 그만하고
뭐 하실라고 그러우?"
"이제 임자랑 손잡고 쑥도 캐러 다니고 들판으로 꽃마실도 다니고
그러지 뭐"
"사람이 안하던 짓하면 죽는대요"
"죽긴 왜 벌써 죽어
오 백년은 더 살아야지"
가을바람에 입이 떨어지듯 한 마디 툭 내뱉어 놓고는 미안했는지 할머니의 손에 열쇠 하나를 건네는데요
"이게 뭐유?"
"다락방에 있는 돈 상자 열쇠야"
"이걸 왜 날 주우?"
"임자 퇴직금이야"
부부라는 직장에 아내라는 직함으로 근무한 댓가라며
손에 열쇠를 꼭 쥐어주고는
"이제 그만 퇴사 혀"
그리고 이건 상장이라며 두팔로 할머니를 꼭 안아주며
"임자..
퇴직하면 나랑 놀아줄 겨?
"그럽시다..."

새벽을 열고 나와
사람들의 아침을 깨워주던
쨍그랑~~ 쨍그랑~~

((((두부))))
라고 외치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지만

오늘도 부부라는 행복의 이름으로 두분만의 사랑이 넘쳐나는 곳에서 살아가고 계실거라고 믿으며 노부부의 두부장수 이야기를 끝마치려 합니다
이 세상 가장 큰 축복은
부부의 사랑이라며....
펴냄/노자규의 골목 이야기
👫同行하는 人生
https://youtu.be/x28XnN2QO-Y?si=wUMOqzppydCd-6W2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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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1 -
우리는 기다랗고 커다란 안테나가 달린 흑백TV에 리모컨이 없는 로터리식이어서 손으로 직접 채널을 돌렸던 걸 기억한다. 
로터리 손잡이가 프라스틱이라 오래 돌리다고면 망가지고 뻰치로 찝고 돌려서 채널을 맞췄다.
TV화면이 잘 안나오면 한사람이 대나무에 막대기를 엮어서 만든 사다리를 타고 긴 대나무를 잘라서 지붕위나 높은 감나무위에 실외안테나를 좌우로 돌려가면서 안테나 방향을 맞추고 화면을 조정해서 인테나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게 철사로 묶었다.
TV는 네개 다리에 양쪽으로 창문도 달렸고 가운데 열쇠가 있는 TV도 있었다.
요즘 장식장 같았다.
TV가 워낙 덩치가 커서 웃목을 다 차지했다.
흑백TV의 대표상품은 대한전선과 금성TV였던 것 같았다.
친구들과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레스링의 박치기왕 김일, 7전8기의 홍수환, 김기수 등의 경기와 그 유명했던 안방극장의 대표작 여로, 팔도강산, 아씨 같은 드라마와, 전투, 육백만불의 사나이, 소머즈, 원더우먼 등의 외국 드라마를 보았던 걸 기억한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가 달에 착륙하는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했다.
특히 밤이 긴 겨울철 저녁시간에는 동네 사람들이 안방 가득하게 모여서 드라마 등을 시청하고 돌아갔다.
동네 사람들이 다 나가고나면 할머니께서는 하드보드로된 장판을 나락잎으로 만든 빗자루로 모래를 쓸어내고 물걸레를 빨아서 방바닥을 깨끗하게 닦으셨다.
지금도 몸채 작은방 두곳에 기름칠을 해서 반질반질한 하드보드장판이 깔려있다.
지금이야 흙 밟을 곳이 없어서 하얀 운동화를 몇날을 신어도 깨끗하지만 그 때는 포장된 마을 길은 없었다.
눈이라도 내리고 얼었던 길이 녹고 질퍽거리는 날이면 땅을 밟고 와서 바지나 양말에 묻은 흙이 따뜻한 방에서 말라 다 떨어진다.
진짜 모래가 한 웅큼 나올 때가 있었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구들방에 모여서인지?벽지가 끕끕하기도 했다.
특히 문종이 하나로 바른 창호지는 물을 적셔놓은 것 같았다.
우리는 대중가요를 대표하는 이미자, 남진, 나훈아, 하춘화, 조미미, 배호, 펄시스터즈, 김상희, 윤항기, 패티김, 조영남, 이용복, 이현, 정미조, 김정호 등의 가요와 장현, 양희은, 어니언스, 서유석, 이장희, 남궁옥분, 소리새, 해바라기, 이문세, 이연실 과 같은 통기타 포크송을 좋아했고, 들고양이, 사랑과 평화, 산울림, 다섯손가락, 이치현과 벗님들을 비롯하여 대학 가요제에서 배출한 옥슨, 건아들, 송골매, 해오라기, 노고지리 등 그룹사운드 음악을 들었다. 
조용필과 이용과 전영록도 기억하며 묘하게 그때는 그 중 한명만을 좋아했다. 
년말이면 1년동안 국민들이 많이 좋아했던 가요대상 시상식이 방송사마다 날자를 잡아서 발표했다.
대상을 받은 가수는 최고의 한해였다.
그러다 이선희, 김현식, 이상은, 김광석, 유심초 등를 좋아했고 또 다시 90년대에 나타난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에서는 정말 큰 세대차이를 느끼는 획기적인 기회였다.
노랫말을 스님께서 불경을 읽드시 중얼중얼거리는 랲이라는 가요가 대중가요를 앞서기 시작했고 머리를 땅에 박고 뱅뱅돌리면서 서커스에서나 볼 수 있는 온갖 몸놀림은 우리를 헷갈리게 했다.
젊은 아이들이 테이블에서 담배피고 술 마시며 그 자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락카페가 참 신기했다. 
젊은 아이들이 그룹으로 춤을 추면서 무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저 남진이나 라훈아, 현철, 설운도, 송대관, 태진아, 이미자, 하춘화,주현미 등의 대중가요에 꽃혔던 우리는 어느 날 K-Pop이 전세계를 휩쓸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유럽뿐만 아니라 멀리 아프리카에서도 K-Pop이 선풍을 불러이르키기 시작했다.
요즘 젊은사람들 참 대단한 것 같다.
먼 타국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 쫒아다니는 열정은 어디서 나온걸까요?
하긴 우리나라도 외국 팝가수가 들어와서 공연을 할 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꼴불견이지만 일부 여성팬들이 브라와 속옷을 벗어서 던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제 6시 내고향이라는 시간에 시장에서 일을 하시는 어느 아주머니께서는 핸드폰을 3대를 갖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오로지 그가 좋아하는 임영웅의 사진뿐 아니라 그 가수의 일상을 담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힘들 때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로 위안을 삼기도 했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바라보면서 역경을 이겨낸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문화를 널리 전세계에 알린 우리 K-Pop가수들도 대한민국의 공로자인 것 같습니다.
지난 며칠 봄날씨였는데 어제부터 봄을 시샘한 듯 제법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밤공기는 조금은 쌀쌀하네요.
이 비가 그치면 논밭 삶의 현장으로 내달려가겠지요.
농기계의 안전사고를 늘 대비하셔야겠습니다.
4월 3일
17
15
오전내내 흐렸는데
점심시간에는 햇볕이
눈부십니다.
점심 식사들 시원하게 하시고
잠시 쉬었다가 하던일 하세요.
모든게 급하면 탈난다고 하는데
마음의 여유를 갖고서 한 번쯤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앞으로 좋은 일만 계획 하세요.
저도 임시로 현장에서 작업하고
있지만,현장 일이 곧
마무리 되면 평소에
하던 농사일에 가끔씩 지붕공사 하면서 세월 보내다가 우리마을
도로공사가 끝날무렵에는 도로변에 함바식당
하면서 부재료는
직접 생산한 농산물로 맛깔나게
해 볼 계획인데 집사람이 동의할지
의문스렵습니다.
노후에 무료하게 세월 보내는 것보다는 좋을것 같은데 ...
동대구 신세계 백화점 공사할때
식당 경험이 있는데
지금 밤산에 있는
하우스에 식당자재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 진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남은 점심시간 보냅니다.
무탈하고 성실한
인생 행복한 내일을
위해서 청사진을 그려봅니다.
23년 6월 15일
3
3
조금전 가입한 새내기 입니다.
어제 새벽엔 양철지붕 펑크낼듯이 소나기 쏟아붓드니만, 아침엔 쨍~ 합니다.
농부님들 모두 건강하시고, 저와함께 행운이 깃드길 바랍니다^^^
22년 8월 16일
배수로를 파고 지붕은단단히 고박을햇내요
23년 6월 23일
2022년 우리집 호박덩굴아 고맙다!

떨어진 씨앗에서 저절로 새순이 나온 호박 새싹!
솔직히 처음에는 너를 뽑아버릴까 하다가 어찌되나.. 지켜보기로 했단다.

그러던 니가 장마비속에서 옥상 난간을 점령하더니 아래층 태라스 지붕까지 침범하고….
지가 푸틴의 러시아 군대인지 마구마구 세력을 넓히면서도…

호박은 맺혔다가 썩어 떨어자고 또 맺혔다가 떨어저 버리는 사춘기 반항?
아닌 장마철 반항을 저지르는 만행을 계속하는 너….
증말 미워서 확 뽑아부릴까도 했었다…
미안하고 미안하다!!!

철들고나니 이렇게 이쁘디 이쁜 호박이 풍성하게 달려서 우리집 가계에 보탬이 되었구나…

가게에서 호박전에 막걸리 한잔하는 낮술의 즐거운 시간을 주고…..

조상님 추석차례상에도 올리고..

또 호박 해산물 찌게는 한냄비 끓이면 적어도 두끼는 반찬이 해결되니..
땡삼이가 그리도 너를 사랑하고 욕심내는게 이해가 팍!팍! 되더라..

오늘 너의 생을 마감하는 일요일!!!
너는 한무더기 쓰레기로 쌓였구나.
잘 마르면 어느 쓸쓸한 일요일 내가 고이고이 불살라 화장해줄께…
매운연기에 눈물이 날텐데 그건 너를 보내기 아쉬워하는 내 마음이려니 생각하고…. 잘가!!!
이렇게 너를 추억해보며….
22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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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4 -
대나무 스키와 시케토.
겨울에 하안눈과 동네 앞에 수렁논이 있어서 꽁꽁언 논 바닥에 얼음은 아이들 놀이터였습니다.
대나무 스키는 큰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어 공이 부분을 낫으로 납작하게 밀고 앞쪽은 불로 그을려 휘게 만든다.
스키봉은 따로 없어서 순전히 발로 중심을 조정해야 한다.
이렇게 앞머리가 살짝 구부러져서 눈을 헤치고 나가게 만든 대나무 스키는 요즘 스키와 비슷했습니다.
이 대나무 스키를 약간 경사진 골목을 지게 작대기 정도 크기의 막대기로 중심을 잡고 내려갈 때 기분을 정말 짱이었습니다.
논바닥에는 널판지로 만든 시케토라는 썰매를 만들어서 얼음판을 씽씽 달렸습니다.
두꺼운 철사나 창틀에 있는 레일을 구해서 스케토 바닥에 고정시키면 얼음판에서 신나게 놀 수가 있었습니다.
굵은 철사를 시케토날에 부착해야 하는데 그때는 참 귀했습니다.
집에서 목재나 금속 따위를 갈거나 다듬는 데 쓰는 공구인 야스리(줄)를 갖고 전봇대를 넘어지지않게 양쪽에서 묶어 놓았는데 전봇대를 묶는 철사가 굵어서 시케토날에 적합했습니다.
한사람은 망을보고 야스리로 몰래 한가닥을 위아래를 잘라와서 시케토날을 만들었다.
살짝 도둑질을 한 셈이었다.
옛날 교실 창문에 있는 레일이 두껍고 날이 넓어서 제일 좋은 시케토날이었다.
오늘날 스케이트날 역할을 한 셈이지요.
반듯한 막대기를 잘라서 손잡이도 만들고 지팡이 끝에는 뾰쪽한 못을 박아서 시케토를 탈 때 힘차게 밀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스키장에서 스틱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외발 시케토도 만들어서 한발로 얼음을 지치기도 했다.
외발 시케토는 신발보다 조금 큰 판자밑에 시케토날을 달고 시케토가 벗어지지않게 구멍을 뚫어서 끈을 매달아 시케도가 벗기지않게 발에 묶고 탔습니다.
요즘 쇼트랙선수같이 커브를 틀 때는 몸을 옆으로 수구리면서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비료포대는 엉덩이쪽에 폭신하게 지푸라기를 넣고 눈덮힌 비탈진 길을 미끄럼을 타기도 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신작로 내리막길이나 동네 비탈진 골목에 눈이 쌓이면 비료포대를 들고와서 미끄럼을 탔다.
얼음판에서 놀다보면 살얼음판이 깨져서 물에 빠지기도했고 엉덩방아를 쪄서 엉덩이가젖곤 합니다.
주변에 나뭇가지를 모아서 모닥불을 피우고 물에 빠진 양말과 젖은 엉덩이를 말리곤 했습니다.
모닥불에 젖은 양말과 엉덩이에서 김이 모락모락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양말은 나일론이 막 나오기 시작할 때라 나이론 양말은 불에 약해서 금새 빵구가 나기도 해습니다.
엉덩이를 불 가까이에 대고 있다가 바지가 노린내가 나며 눌기도 했습니다.
지붕 끝이나 나뭇가지에 매달린 고드름은 간식거리였습니다.
스레트나 양철같은 골골이 있는 처마밑에 고드름은 길쭉하게 달렸습니다.
막대기로 쭈욱 긁고 나가면 고드름이 두두둑 떨어졌습니다.
그 때는 정말 고드름이 많았습니다.
엄청 추운 날씨가 많았습니다.
시암가(우물가)나 골목에 얼어 붙은 얼음덩어리는 봄비나 내려야 녹았습니다.
밤새 하얀 눈이 장독대위에 버섯모양으로 쌓였습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면 바람도 없고 고요하고 포근한 밤이었습니다.
깨끗한 눈을 입으로 핥아 먹기도 했습니다.
햇볕에 살짝 녹은 눈은 잘 뭉쳐지기 때문에 눈싸움 하기에 좋았습니다.
하루는 하교길에 버스가 눈이 녹아 질퍽거렸는데 그냥 흙탕물을 튕기면서 지나갔는데 약이 오른 친구가 얼른 눈을 뭉쳐서 차에다 던졌습니다.
그 때는 비포장도로라 차들이 천천히 달렸습니다.
그런데 손에 낀 장갑이 녹은 눈에 휩쓸러 벗어지면서 열린 창문으로 딸려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장갑 한짝을 잃은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돌팔매를 많이 했지 않습니까?
전봇대에 있는 호롱을 맞추는 내기도 했습니다.
전선줄에 앉아있는 새를 맞추기도 했습니다.
잔잔한 웅덩이나 냇가에서 둥글고 얄팍한 옆으로 돌을 물위로 스치듯이 튀기어 가게 던졌을 때 그 튀기는 자리마다 생기는 물결 모양의 물수제비를 누가 많이 하나 내기도 했습니다.
나는 물수제비를 평균 7-8회는 기본이고 많게는 15번도 했었다.
납작한 돌이 통통통 튀는 거리가 짧을수록 물수제비 숫자가 많이 생기고 꼬르륵 물속에 돌멩이가 잠긴다.
아침 등교길에 언덕에 있는 신작로에서 냇가를 바라보면 냇가 가운데 커다란 바위에 자라들이 아침에 따뜻한 햇볕을 쬘려고 많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돌멩이를 던지면 자라들이 놀라서 우루루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 때는 냇가 모래밭에 자라들이 엄청 많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모내기철에 냇물을 끌어드릴려고 물이있고 모래가 있는 보(洑)또랑을 파다보면 손바닥 크기의 자라가 모래밭에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돌을 던져 냇가를 건너는 멀리 던지기 시합도 했습니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실기시험으로 공던지기를 할 때면 내가 제일 멀리 던졌습니다.
시내 아이들은 어깨넘어로 살포시 공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야구선수 투수들이 던진 공이 쉽게 보이기도 했다.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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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머스켓 키우고 싶은데 진짜아는게 없어요 ㅠㅠ 비닐하우스로 치고 싶은데짓기전에 땅에비료주고 좋은흙 주고 담에 지히수파고 전기도 설치하고 그담에 비닐하우스 치면 되나요? 비닐하우스는 지붕도 좀열리게 하고 양쪽 아래 방충망하고 올렸다 내렸다 하는거 있고 문 넓게 만들고 싶어요 임재한 땅에다 그렇게 해도 되나요?
200 ㅕㅇ정도만 함 해보고 싶은데.. 비용이 어떻게 들까요?
21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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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甲辰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甲辰年 푸른용의 해에 福많이 받으시고 더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집은 섣달 그믐날 저녁에 늘 있었던 일상입니다.
저녁식사 후에 과일과 간단한 음료를 준비해서 온 식구들이 좁은방에 둘러 앉아 아버지께서 저희집 유래와 덕담을 해주시는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어머니 살아계실적에는 유과와 콩강정, 깨강정, 콩과자와 꼭 냉장고가 없어도 밖에 놓은 살어름이 살짝 얼은 시원한 식혜를 내놓았습니다.
감나무와 지붕에 닭 덕가래에 담아 올려 놓았던 감홍시도 곁들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집 내력과 선조님들 말씀이 어릴적에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는데 이제는 제가 성묘를 다니면서 사촌들이나 조카들한테 우리 몇대 되시는 선조님 산소이라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제가 대신 하곤합니다.
바르고 건강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살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십니다.
그런다음 자식들이 준비한 복돈을 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신권으로 교환해드린 빳빳한 새돈으로 자식, 며느리, 손주, 손부, 증손주 순으로 복돈을 주십니다.
올 설명절은 단촐했습니다.
아들 삼형제만 모였습니다.
그렇게 북적이고 소란스럽던 명절이었는데,
때가 때인지라 저희 삼형제만 모였습니다.
지난 몇년 동안 추석 명절과 설 명절을 코로나19 속에서 보내다보니 이젠 이렇게 되나보다 싶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코로나19가 명절분위기를 바꾸는데 일조했지 않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제주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설 명절 연휴를 즐기고 있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얼마나 고향을 찾고 성묘하는 길이 즐겁기만 했겠습니까?
며느리들이 왜 명절때마다 꼭 시댁에서 지내야 하느냐?
명절 때 손목에 갑스를 한다느니~
추석에는 친정으로 설에는 시댁으로 나누어 다니자?라는 여자들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오잖습니까?
어린아이들 데리고 찾아온 시골에서 물갈이를 하기도 하고, 잠자리가 바뀌니까 밤새 보채는 어린아이도 있기도 합니다.
내내 비웠던 사랑채에 방마다 불을 지펴서 비닐장판이 쭈글쭈글해도 이부자리를 깔아 놓아도 시골 찬공기는 어린아이들 감기를 안겨 주곤 했습니다.
명절 때 식구들 모이면 집이 좁아서 바로앞집에 방 세개를 게스트하우스같이 전기판넬을 깔아서 만들었습니다.
창문에 커튼을 달아도 빈집이라 바닥은 금방 뜨거워지는데 방안공기는 차갑습니다.
흙집이지만 오래 비어둔 집이라 온화한 방안공기가 없습니다.
이렇게 몇차례 설 명절을 보내다보니 앞으론 이렇게 가는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고향 마을에 차가 골목마다 빽빽하게 주차되곤 했는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오가면서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명절 쇠느라 몇시간씩 고생해서 꼭 다녀가야할까?
그냥 평소에 시간내서 성묘도 하고 인사도하고 다녀가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합니다.
식구들 모임도 어느날 날 잡아서 모이는것이 한가롭고 좋을 것 같습니다.
덕담과 복돈을 주시고나면 양말을 나누어 주십니다.
매번 시장에서 비닐에 싸인 양말을 식구들 숫자대로 준비하셔서 나누어 주십니다.
평생을 이렇게 설 명절을 맞이하면 준비하셨다가 일일이 나누어줍니다.
남자들은 까만색 양말,
여자들은 깨끗한 양말로요.
새해 첫날에 새 양말을 신고 무병장수하라는 마음으로 주십니다.
새 양말을 신고 세배도 드리고 차례도 모시고 성묘를 다녀옵니다.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양말은 시장에서 구입한 나이론 양말이 대부분이섰습니다.
젊은이들이 검정색 나이론 양말 신습니까?
저희 두아들도 성묘다녀와서 저희집에와서 벗어주고 갑니다.
올 설에도 역시 아들들과 며느리, 손주들과 손주며느리 숫자에 맞춰서 양말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20컬레이상을 준비하십니다.
올해는 여느해보다 오지 못한 손주들과 손부들이 많아서 남은 양말을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서 서랍속에 넣으시더군요.
다음 설에 자식들 다 모이기를 바라시겠지요!
몇년 전 설같이 다 모이지 못해서 아버지께서 조금은 서운하시는 느낌이 많이 느껴졌습니다.
내년 설에도 내후년 설에도 오래오래 양말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풍성했던 설 명절이 조금은 썰렁하다고 할까요?
이런 분위가 몇년 후에는 낯설지 않지 않을까?싶습니다.
작년 명절 끝에는 이혼율이 줄었다는 뉴스가 있네요.
제삿상과 차례상 제수음식을 차리고,
그렇게 많이 모이는 식구들 먹거리 준비가 얼마나 힘듭니까?
저도 자식들한테 제사와 차례를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때 시대가 바뀌고 너나나나 어떻게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도 많은 식구들이 모여서 북적대던 명절이었는데 아쉬움은 많습니다.
이웃 어를들께 세배를 다녔던 풍습이 사라졌습니다.
한 때는 고향에서 마을회관에 어르신들 모시고 공동세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아득한 먼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저희는 작년 가을부터 제사를 전주에서 모셨습니다.
이번 설 명절 차례도 전주에서 모셨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요?
차례를 모시고 아이들이랑 성묘를 다녀왔습니다.
진즉 이렇게 했어야하는데요?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동안은 남원에가서 제사나 차례를 모시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 것이지요.
평생 어머니께서 정성으로 준비하셨던 제수음식을 흉내는 내야지않나?하고 저희도 제수음식을 준비를 했습니다.
작년부턴가 성균관에서 제수음식을 차리는데 말도 많았던 상차림을 예시했습니다.
안동지방에서 성균장보다 시어머니가 더 무서운 집에서는 종전대로 제수음식을 준비하고, 종갓집에서도 과일과 전, 반찬을 모듬으로 제수음식을 차렸더군요.
저희도 다음 차례상에는 한번 시도해 볼려고 합니다.
굳이 홍동백서, 조율이시, 삼색나물, 과일은 홀수로 조기와 편은 조상님 숫자대로 차리는 관행을 이제는 포기해도 되지않나 싶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비대면 중심의 명절 문화를 경험했던 게 기름을 부은 것 같습니다.
성균관에서도 “무려 3년간 제사를 안 지내고, 친인척과의 교류가 단절됐다. 3년간 이런 문화가 이어지면서 ‘꼭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라고 학습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말로 간소화 되어야하고 없애야하는 문화는 없애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절 연휴가 하루 남았습니다.
올 한해는 아픈데 없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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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6 -
우리는 국민학교 다닐 적 점심시간에 강냉이죽과 하얀 우유가루를 배식받아 먹었다.
우유가루가 요즘 말하는 유통기간이 지나서인지 딱딱하게 굳어서 돌멩이 같았다.
그래도 그 딱딱한 우유가루를 쪼개 입에서 녹는 우유맛은 달콤했다.
가루우유는 그 때 맛보고 또 기회가 없었다.
아가들 먹는 분유를 한 숫갈 훔쳐 먹었을 때 국민학교 때 얻어 먹었던 기억이 쑥 떠올랐다.
노란 강냉이 죽을 쑤어서 학생들에게 급식처럼 나누어서 먹었다.
남학생들은 네모난 양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고,
여학생들은 약간 타원형인 계란모양같은 양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도시락엔 까만 보리밥에 도시락 한켠에 콩자반과 단무지가 대부분이었고 고추장에 볶은 멸치와 계란후라이는 잘사는 집 아이의 반찬이었다.
도시락 검사도 했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국가차원에서 혼분식을 장려했고 집에서 밀주를 담는 것을 세무서에서 나와 단속을했다.
우리집은 나락타작을 할 때 나락가리 속에다 커다란 항아리를 묻고 쌀막거리를 담아서 일꾼들에게 쌀막걸리를 대접했다.
2모작으로 농사를 하기 때문에 보리나 밀을 심었기에 방앗간마다 밀가루를 빻는 기계가 있었고 밀가루를 빻을 때 나온 밀의 껍질인 밀기울로 누룩을 만들어 말렸다가 막걸리를 만들었다.
그 때 누룩을 만든 틀이 누룩틀이다.
동그란 소나무를 잘라서 가운데를 도려내고 누룩틀을 만들었다.
헛간에 매달아 놓았다가 매년마다 꺼내서 누룩을 만들었다.
네모나게 만든 누룩틀도 있었다.
누룩을 만들고 바같 기둥에 매달아 놓았다.
이 누룩틀로 메주도 만들기도 했다.
겨울철에는 난로위에 도시락을 뺑둘러서 얹어놓아 김이 모락모락나는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다.
맨 밑에 있는 도시락과 위에 있는 도시락을 뒤집어가면서 도시락밥을 따뜻하게 했다.
설 명절에 인절미를 만들고 남은 콩가루는 찬 식은밥을 버무려 먹으면 무지 고소했다.
콩가루에 식은밥과 콩가루를 지붕위에 달렸던 둥그런 박으로 만든 바가지에 손으로 버물러서 먹었던 하얀 쌀밥을 최고 맛집의 최애 음식맛이었다.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삐라를 보았고 그 삐라를 주어 학교에 갖다주면 공책 한권과 연필 한 자루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교실 마루바닥은 양초를 문지르고 마른 걸레로 닦아 반들거리고 미끄러웠다.
이 때 마루바닥을 문지르면서 구구단을 외웠다.
그 때 구구단 외우기가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우리나라 8도의 각도 도청소재지를 외우는 것도 만만치는 않았다.
특히 충청북도 도청소재지 청주시와 충주시는 늘 헷갈렸다.
위치로 볼 때도 다른도는 다 남북인데 충청도는 동서로 나누어졌다.
고학년에 올라가니 세계 각나라의 수도를 외우는 것은 고역이었다.
지구본을 돌려가면서 수도를 외우기도했다.
나무공이가 빠진 마루바닥에 구멍이 있으면 지우개나 연필 등이 그 구멍으로 빠졌다.
덩치가 작은 친구가 교실 밖에 있는 환기통으로 기어들어가서 머리에 하얀 거미줄을 듬뿍 묻히고 고무지우개와 연필을 한 웅큼들고 나왔다.
연필을 뾰쪽하게 깍아서 침을 묻혀가면서 글씨를 썼기에 가수나 유명배우 사진이 있는 책받침을 학교 앞 점빵에서 구입해서 받치고 썼다.
뽑기를 하는데 왜 그렇게 작은 풍선만 뽑히는지?
우리는 대한민국 교육의 지표를 담아 1968년 12월 5일 대통령령에 의해 반포한 문서 국민교육헌장을 달달외웠다.
우리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받들어"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아무뜻도 모르고 외웠고,
그렇게도 긴 393자의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체벌을 받기도 했다.
김영삼정부 출범 그 다음 해인 1994년 정부는 국민교육헌장을 학생들의 뇌리에서 지우기 시작했고,
그리고 2003년 노무현정권이 출범하면서 국민교육헌장선포일 자체를 역사에서 지웠다.
이제 국민교육헌장은 역사에서도 찾기 힘든 한 구석에 처박혔다.
군복무를 마친 남자라면 국민교육헌장은 물론이고 군인의 길, 군인 정신, 군인복무규정 등 10가지 정도를 단 며칠에 외웠다.
그렇지않으면 어떠한 댓가가 있어서였다.
그 때 그 정신으로 공부를 했다면 고시패스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밑물같은 대한독립만세~
하는 3.1절 노래를 외우고 불렀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무찌르자 공산당하는 6.25노래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티비에서는 영정사진이 몇 일동안 나왔던 것을 기억한다. 
하얀국화꽃으로 뒤덮힌 운구차가 지나갈 때 길가에서목 놓아 울부짖는 아낰네들도 있었다.
그 때는 무조건 뉴스를 시작하면서 첫머리에 대통령사진과 대통령의 하루 일과를 방영했다.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좋아하는 노래를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했고 팝송을 한글로 적어 따라 부르곤 했다. 
"소니"라는 일제 라디오 카세트를 갖고 있는 나는 친구들한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끼워서 계속 들었고 녹음도 할 수 있었다.
그 시절엔 폴앵카의 다이애나와 크레이지 러브, 엘튼 존, 폴 매카트니, 존 레논, 런던 보이스, 마이클 잭슨, 아바라는 외국 가수들을 통해서 고고댄스란 걸 알았다. 
친구들과 카세트를 어깨에 메고 모닥불 피워놓고 밤새도록 놀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썬데이 서울이나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와 같은 외국성인잡지를 친구들과 몰래 돌려보았고 어떤 불량한 녀석이 야한 그림이나 볼만한 페이지를 몰래 찢어가곤 했다. 
그 때 성인잡지 "선데이 서울"은 주간으로 발간되었으며 연예계 루머와 스캔들, 야설, 비키니를 걸친 연예인들 사진 등 최고의 인기있는 성인잡지였다.
고속버스를 타면 안내양이 주간잡지와 신문과 사탕을 나누어 주기도했고,
돌려가면서 지루한 시간을 때웠다.
그 때 고속버스 안내양을 비행기 스튜어디스같았다.
안내양 응모기준이 고졸이상, 키 크고 날씬하고 용모가 단정해야 했기에 제복을 입은 안내양은 이뻤다.
외국 성인잡지인 플레이보이와 팬트하우스는 길거리 노점에서 팔았다.
우리는 1970년부터 1981년 사이에 2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었고,
1997년 IMF라는 고비마다 닥쳐왔던 불리한 사회적 여건을 원망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
2024년 오늘 이제는 됐구나!싶었는데 사회불감증이 깔려있고 상위 1%라는 정치하는 사람들과 돈 많은 사람들이 지 욕심만 부리고 할일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던 본인들 모습에...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옛 추억이 스쳐 지나가는 당신은! 
우리들의 친구입니다...
비가 너무 잦습니다.
적당하게 가끔씩 내려주면 좋으련만.
농촌에는 농사철이 다가왔습니다.
이상기온으로 과수가 피해도 없고,
하우스에서 곱게 자란 고추모종도 냉해피해가 없고,
곧 논에 모내기가 시작되겠지요?
모든 작물이 풍년이어서 애써 농사지은 농민들께 기쁨을 안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5월 7일
20
33
고랑쪽 낙엽과 흙등을 치우고,지붕샘이 있는지 확인후 ,보수공사함
23년 6월 20일
한국춘란도 농사에 포함하는가요? 소규모 폭6m.길이10m정도로 이중하우스,지붕 그늘막,옆 통풍장치 실내 난초거치대등 제반시설을 갖추어 재배하는데 일천만원정도 소요됩니다. 보조지원 받을수는 없을까요?
22년 5월 18일
제가 교직생활을 35여년을 하던 중 가장 가슴아프고 힘들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1989년 4윌1일 만우절이었습니다.
교복과 두발 자율화 바람이 불어 학생들이 교복대신에 편한 복장과 바가지모양의 단발머리에서 퍼머를 제외한 자연스런 머리모양으로 학교생활을 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대부분이 청바지에 남방이나 티셔츠를 입고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1학년 신입생을 담임으로 배정받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학생들은 부푼 꿈을 안고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를 부르짖을 때라 자기소개를 마치고 학급실장을 직접선거의 방법에 따라서 실장선거를 했습니다.
그때는 학번이 키큰 순서대로 정했습니다.
복도에 한줄로 세워놓고 키순대로 학번을 정했습니다.
이런 방법이 키가 작은 학생들이 불이익을 당하며 인권문제다해서 성씨를 따라서 번호를 정했습니다.
그래서 김氏 성을 가진 학생들이 제일 앞번호가 됩니다.
진안여중을 졸업한 32번 김은경이라는 아이가 저희반 실장에 선출됐습니다.
실장을 하고 싶은 학생을 거수를 했고,
또 친구들의 추천을 통해서 실장후보들이 자기소개와 소견발표도 하였습니다.
쪽지에 뽑고 싶은 실장이름을 쓰게하고 걷어서 칠판에 후보들 이름에 바를정(正)자로 표기하면서 제일 많은 표를 얻는 아이가 실장이되고 차점자가 부실장이 되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반학생 정원이 60명이었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청바지와 단발머리에 무지개색 티셔츠를 즐겨 입었던 학생이었습니다.
진안여중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저희학교에 입학한 학생중에 상위권에 해당하는 연합고사 성적을 받은 학생이었습니다.
신입생이라 상담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께서 언니와 은경이를 키우셨더군요.
아버지께서는 서울로 올라가셔서 새엄마랑 살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은경이가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곱게 한복을 입고 졸업생 대표로 졸업장을 받았더군요.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할머니께 앞으로 3년만 도와주시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꼭 은행에 입사해서 할머니를 평생 모시겠다"고 큰절을 올렸다고 은경이 이모님한테 들었습니다.
진안여중 선생님들께서도 은경이는 인문학교를 진학해서 대학에서 공부를 했으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텐데 하면서 많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받아서 장학금을 받기로하고 제가 근무하던 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가정형편을 잘 아는 은경이는 실업학교를 택했고 저와 인연이 맺어졌습니다.
할머니께서 혼자 감당하기에 벅차서 은경이 이모님들과 같이 힘을 모아 남노송동에 골목안쪽에 있는 자그만 골방을 월세로 얻어서 친구랑 자취를 했습니다.
방문 앞 뚤방에 연탄 아궁이가 있었습니다.
은경이 언니는 군청에서 일하면서 전주여고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에 토요일에 수업을 받으러 나온다고 합니다.
언니는 지금같으면 업무보조라고 하는데 그때는 학교에 일하시는 소사아저씨같이 잡다한 심부름과 청소를 하면서 용돈을 벌어서 전주에 있는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매주 토요일에 수업을 받으러 진안에서 다니고 있었습니다.
토요일 종례시간에 모두들 조심해서 시골집에 잘 다녀오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그 때만해도 시골에서 전주로 나와서 자취를 하는 학생들이 절반이 넘었으니까요.
"은경이는 진안 할머니한테 안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언니가 이번주는 방송통신고등학교 수업을 받으러 나오면서 김치를 가지고 온다고 모래내 시외버스 정류장에 가서 받으면 된다고 하더군요.
입학한지 한달밖에 안 되었지만 실장이기에 다를 아이들보다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처음 한달은 신입생이라 준비하고 정리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조용하고 조금은 과묵한 성격이었습니다.
어릴적에 엄마를 잃어서인지 밝고 명랑한 그런 소녀는 아니었습니다.
늘 제일 먼저 등교해서 담임인 제자리를 청소도하고 공부도 열심히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 해 1989년 만우절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일요일이라 일찍 아들을 데리고 목욕을 다녀왔습니다.
아침을 먹고 있는데 집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휴일 이른 아침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조금 의아했기도했고 시골에 부모님께서 계셔서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수화기 넘어로 어느 여자아이가 울먹이면서
"선생님 은경이가 죽었어요" 라고 은경이 중학교 선배가 전화를 한겁니다.
오늘이 만우절이라 장난치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었습니다.
어제 저녁 밤 10시까지 같이 놀다가 헤어졌는데 아침에 주인 아주머니한테 연락을 받았답니다.
달려갔습니다.
방문을 여는 순간 퀘퀘한 냄새가 났습니다.
은경이가 하늘색 체육복을 입은 상태로 엎드려 있는데 이미 몸둥이가 싸늘하게 굳어있었습니다.
옆에 또다른 아이가 한명 더 있었습니다.
같은 중학교 친구인데 다른 곳에서 자취를 하면서 다른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자취방에 언니가 와서 방이 좁아 은경이한테 놀러와서 자다가 변을 당한겁니다.
신고를 해서 경찰이 왔습니다.
경찰이 여러가지 창문이며 주변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타살 흔적은 발결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주인아주머니께서는 거의 실신한 상태로 지금까지 많은 학생들이 우리집에서 살았는데 연탄까스중독은 절대 아니라고 난리더군요.
어제 저녁 10시까지 놀다가 연탄불을 갈고 잤다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 몇일 동안 중앙뉴스와 지방뉴스에 연일 메인뉴스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대학병원 영안실로 옮겼습니다.
서울에 있는 은경이 아버지께서도 내려오시고,
할머니께서는 워낙 연로하셔서 장례식장에 오시지 못했습니다.
그 상황은 복잡하고 힘들었던 일이라 뭐라 글로 표현을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한줌 재로 변한 은경이를 한달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교정을 한바뀌 돌고 진안에 있는 엄마 옆에다 잘 보냈습니다.
몸도 불편하시면서 키운 손녀를 먼저 보낸 할머니댁에 위로를 드릴려고 목사님과 친한 친구들 몇명이서 함께 들렀습니다.
자식을 잃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잖습니까?
진안까지 1시간 가까이 걸리는 차속에서 "큰 슬픔에 계실 은경이 할머니께 어떻게 무슨 말씀을 드려야할까?" 도저히 정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마을 언덕위에 둥구나무 있는 쪽에 자그마한 함석으로 지붕을 이은 두칸짜리 홑집이 은경이네 집이었습니다.
방안에 몸이 많이 불편하셔서 힘드시게 앉아계시는 할머니께서 두손으로 저를 감싸주셨습니다.
언뜻 방문앞에 자그마한 상위에 전화기와 그 옆에 성경책과 찬송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 은경이는요? 하느님께서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갔을 겁니다" 하시면서 도리어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아!
종교의 힘이 이런거구나!했습니다.
할머니께서 신앙의 믿음으로 버티셨던 것이었습니다.
사고가 난 3일후에 학교에 출근을 했는데 교무실 전화가 계속 울렸습니다.
저는 항상 출근이 제일 빨랐습니다.
아마 거의 1등으로 출근을 했지않나?싶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때만해도 시내 전학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전주시내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지 못한 많은 학생들이 임실, 진안, 김제, 고창, 정읍, 멀리는 남원 인월고등학교까지 왕복 너댓시간을 버스를 몇 차례나 갈아타고 다니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 학부모님들께서는 시내로 얼마나 전학을 시키고 싶었겠어요.
학부모 입장에서는 얼마나 애타셨겠어요!
수 많은 사람들이 멀리 통학을 하는 자식들을 시내로 전학을 시키고자 모든 인맥을 동원시키곤 했습니다.
전화를 받는 순간 "그 학교에 전학을 하고 싶다" 라는 문의 전화였습니다.
제가 답변을 했습니다.
"지금은 자리가 없습니다" 라고 말씀 드렸더니 학부형께서 "뉴스에 그 학교 학생 한명이 죽었다는데 왜 자리가 없느냐고 하느냐" 하면서 성질을 내는 겁니다.
왜 하필 제가 전화를 받았을까요?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아직 은경이 제적처리도 안했거든요.
그후로 수 많은 전화문의가 있었습니다.
학교측에서도 은경이 자리는 담임인 저한테 일임을 했습니다.
은경이를 잃은 슬픈 마음이 정말 컸으니까요.
다른 선생님들께서 지인들한테 부탁을 왜 안 받았겠어요?
그러나 선생님들께서 많이 슬퍼하는 제마음을 알고 계시기에 전학을 받으라고 선뜻 말씀을 못하셨습니다.
은경이만한 아이를 저는 저희반 아이로 채우고 싶었습니다.
제적처리를 하고난 어느 토요일 하교길에 시내 기전여고 뺏지를 목에 건 학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한테 인사를 하더니 대학을 진학할려고 인문학교로 입학했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서 엄마를 도와드리고 싶다면서 저희학교로 전학을 오고싶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 나름대로 아직 정리를 못해서 대답을 못해주었습니다.
기회를 주시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겠다고 하면서 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학생을 돌려보내고 생각을 했습니다.
참 대단한 아이구나?싶었습니다.
어린 학생이 진로를 바꾸면서 직접 학교로 찾아온 용기와 그 마음이 대단했습니다.
바로 다음주 월요일에 그 아이 출신 중학교에 전화를 했습니다.
김제군에 있는 금산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했거든요.
중학교 3학년 때 그 아이 담임선생님한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아이에 대한 몇가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연합고사도 200점 만점에 170점 정도을 받은 우수한 학생이고 반듯한 학생이라고 칭찬을 하시더군요.
기전여고 그 아이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대학을 진학해서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해 공부해서 언론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는 학생이라고 저한테 전학을 받아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리하여 새로운 아이를 전학받아서 처음은 힘들었지만 나머지 학기를 행복하게 보낸 것 같았습니다.
전학한 첫날 반아이들한테 인사를 시키고 자기소개를 시켰는데,
얼마나 똘망지게 자기소개를 하는지?
다를 아이들이 꼼짝도 못하더군요.
기득권이라 할까요?
그래도 반아이들이 전학온 아이한테 지기싫어하는 오기? 그런 뭐가 있잖아요?
전학온 미정이는 활발하고 명랑한 아이었습니다.
인문학교를 다녔던 아이라 기능과목이 부족했습니다.
기능과목을 운영하는 학원에 수강을 부탁해서 빠른 시간에 실업학교 학과에 잘 적응하면서 반 아이들과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1학년을 종업식날 저희반으로 전학을 온 아이가 까만 비닐봉지로 싸맨 소주병을 한병 들고 교무실로 찾아왔습니다.
어머니께서 농사지으신 거라고 선생님 갔다드리라고 주셨다면서 들기름을 한병 보내주셨습니다.
병뚜껑을 열고 고소한 들기름 냄새를 선생님들 코에 대면서 자랑을 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남의 일이라 어느덧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연탄까스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이 가끔씩 일어나곤 했습니다.
처음 연탄을 갈고나면 매캐한 냄새와 연탄까스냄새가 많이 올라옵니다.
골목에 함석으로 된 연탄 아궁이 굴뚝에서 나온 연탄까스 냄새를 맏아보신 적 있으시죠?
하루 두번씩 갈아야 따뜻하게 난방을했고,
그 아궁이에 양은솥으로 밥을 짖고 국도 끓여먹었죠.
연탄을 갈때는 공기구멍을 전부 열었다가 새파랗게 불이 붙으면 공기구멍을 조금만 열어놓곤 했습니다.
연탄에 불이 붙어 파란 불빛이나고 연소가되면 가스피해는 없답니다.
오늘이 만우절이라 더 생각이 납니다.
신학기라 학생들 얼굴을 익히지 못할때라 아이들이 서로 교실을 바꿔가면서 선생님들을 놀리기도 했습니다.
35년이 지난 일이지만 불현듯 생각나서 그때 슬픔을 되새겨봅니다.
지금 그아이가 살았다면 50대 중년의 나눔의 봉사를 하는 훌륭한 여인이 되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4월 첫날 슬픈 이야기라 많이 망설여집니다.
농부님들은 땅살리기를 하셔야 할 때입니다.
옛날에는 두엄간에 쌓아 놓았던 퇴비를 논밭에 뿌렸습니다.
겨우내 부엌에서 긁어낸 재도 밭에 짊어지고 가서 땅에 뿌리고,
돼지막이나 소막에 깔아준 짚을 마구간을 치면서 나온 퇴비와 썩여서 논밭에 뿌리고 갈아엎어 땅을 살렸습니다.
요즘 화학비료를 주고 기른 작물보다 생산량은 못미치겠지만 모든면에서 우수한 작물이었겠다!싶습니다.
올 봄엔 잦은 비와 낮은 기온으로 과수농가에 착과가 즐어드는 피해가 염려스럽습니다.
또 벛꽃없는 축제가 곳곳에서 열리는 해프닝이 일어나네요.
우리나라 벚꽃축제의 대표인 진해군항제가 축제가 끌날 때쯤 일주일 늦게 벚꽃이 만개했다고 합니다.
벛꽃 꽃망울도 탐스럽지않고 숫없는 머리모냥처럼 헤성헤성하네요.
밭을 갈고 1년 내 먹거리를 심고 씨앗을 뿌려야하는데 땅이 질퍽거려서 밭갈이도 못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번 4월도 솟아나는 나무들 새순처럼 늘 기쁨이 솟아나는 달 되시기를 바랍니다.
3월 31일
55
75
Farmmorning
가을걷이를 할 때입니다.
저한테도 가을걷이는 참 바쁘고,
힘들기도 했습니다.
저희집에는 76년까지 일하시는 분들이 두분 있었습니다.
그땐 시골에 농사좀 지으신 가정에서는 머슴이라고 하죠.
그분들을 한명을 두시고 농사를 하시는 농가도 있고요.
조금 많은 농사를 지으신 가정에서는 두명을 두시고 농사를 지으셨거든요.
저희집 사랑방에 한겨울이면 동네 머슴살이 하시는 아저씨들이 12명정도 와서 매일 같이 보내곤 했습니다.
겨울철이면 기나긴밤을 지내면서 새끼도 꼬고,
가마니도 짜고,
멍석도 만들곤 했습니다.
가끔씩 나이롱뽕이나 민화투를 치시기도 했습니다.
두부내기 화투죠.
조금 얻어먹는 재미로 졸린눈을 참으면서 시원한 두부한쪽에 김치걸쳐서 먹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가끔씩은 지붕에 닭가리에 감을 담아서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익은 감홍시만 골라서 꺼내 먹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에 상머슴은 백미 90k15가마니를 작은 머슴은 10가마니를 새경으로 받았습니다.
담배는 매일 1갑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담배를 갔다가 파시는 댁에 담배 나오는 날이면 매번가서 담배를 미리 사오기도 했습니다.
새경이란 1년동안 머슴살이 한댓가로 받은 임금이죠.
설과 추석에는 옷부터 신발까지 쪽 빼입혔고요.
어머니께서 광목으로 손수 한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동네 미싱이 없어서 바느질을 해주시면 품앗시로 저희집 일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1년 내내 머슴들 식사 준비하고,
새참 준비하고,
남의 식구 끼니 챙기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제가 군에서 76년에 전역을 했습니다.
그 다음해부터 머슴들이 없어졌는데 어머니께서 그 많은 일을 도맡아서 하셨습니다.
몸은 피곤해도 마음이 편하다 하시네요.
남의 식구 삼시세끼  따뜻한 국물에 끼니 챙기시기가 많이 힘드셨나봐요.
머슴들 있을 때도 들일이며,
밭일을 많이 하셨는데,
끼니때 식구들만 있으니까 마음이 편하셨나 봅니다.
아버지께서는 교직에 계셔서 식사하시고 출근하시면 그만이시죠.
물론 근무 마치시고 일손을 돕기는 하셨죠.
그렇다고 저희집 논이 그리 많은것도 아니었습니다.
저희마을은 논1마지가 150평입니다.
그때는 경지정리도 안되었죠.
산밑에 다랑다랑 논도 있고요.
장구뱀이라는 장구를 닮았다해서 붙여진 논빼미 이름이죠.
천수답이 있어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모를 심지 못한 논도 있었습니다.
수렁논도 있어서 소로 쟁기질할 때 수렁을 돌아서 다니는것을 보았답니다.
수렁논에는 정강이까지 빠져서 모를 심지 못했습니다.
그 수렁논에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배가 누런 미꾸라지를 얻을수 있었습니다.
제일 큰 논이 두마지기 크기였으니까  300평쯤 되는 큰논이었죠.
모두 28마지기 정도로 기억됩니다.
작은 논빼미가 띄엄띄엄 논이 있었습니다.
논 갯수로는 20개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저한테는 할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제가 대전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79년 2학기때 전주로 옮겼습니다.
그때부터 주말마다 남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군생활 할 때도 휴가를 농번기에 얻어서 모내기랑 가을걷이를 해드렸습니다.
좀 특수한 보직을 맡아서 모내기 할때랑 가을걷이 할때랑 1년에 두차례  20일씩 휴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2모작을 할때입니다.
보리 베내고,
논 갈아서 벼를 심었죠.
그 얼마나 된다고 보리 이삭을 주었는지요?
가을에 벼가 누렇게 익으면 낫으로 베서 8주먹씩 묶어 가래로 논에 세워서 1주일정도 말리면 지게나 리어카로 집으로 실어 날라서 공상으로 벼타작을 했습니다.
금주말에 벼를 베어서 세우고,
다음주에 벼타작을 했답니다.
발로 밟아서 공상을 돌리다가 모터를 달아서 나락타작을 했습니다.
종일 사람손으로 타작을해서 밤에 풍구로 돌려서 지푸라기를 없애고,
깨끗한 벼를 광에 가득 쌓고,
밖에 종일 훌터낸 짚을 쌓아놓았습니다.
농사일 할 때 가장 소중한 소먹이와
마굿간에 넣어서 소똥과 오줌으로 범벅이되고 소가 밟으면 아주 좋은 퇴비가 되죠.
80년대 이전까지는 10월에 쉬는날이 많았었습니다.
1일 국군의 날.
3일 개천절.
9일 한글날.
24일 UN데이.
농번기 방학.
그때는 모내기 할때랑 가을추수할때 농번기방학을 실시했습니다.
또 제가 근무했던 곳이 여학교라서 김장방학 이렇게 쉬는날이 많았죠.
벼베고,
논에서 말린 벼를 비포장도로인데 리어카로 가득실고 집으로 실어 날라서 타작을 했습니다.
논두렁에 심은 메주콩을 걷어드리고,
산에 밤도 털어야 했고,
밭에 들깨도 베고,
고구마도 캐야 했습니다.
어느땐가는 13번을 남원을 다녀왔더니 가을걷이가 마치더군요.
10월부터 11월까지는 쉬는날이면 다녀왔습니다.
그때는 남원가는 직행 첮차가 6시15분차였습니다.
남원에서 내려서 고향 마을가는 버스가 7시반차가 있었습니다.
그차를 놓치면 1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종일 일하다가 고향에서 남원나가는 7시15분차가 막차였습니다.
남원에서 전주가는 차는 저녁9시 직행이 막차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싸주신 보따리와 두자식들 데리고 전주에 도착하면 거의9시쯤 됩니다.
이렇게 열차례 이상을 다녀야 가을걷이가 끝났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참기름을 한병 주셨는데,
시내버스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짐보따리가 떼굴떼굴 굴렀답니다.
어머니께서 쪽파사이에 넣어서 주셨는데도,
워낙 세게 부딪쳐서 참기름병이 깨져서 버스안에 고소한 냄새로 진동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가고싶을 때 아무때나 나서면 다녀올수 있지만,
예전에는 참 복잡했습니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했기 때문에 챙길것이 많았죠.
차시간을 맞추는것이 제일 복잡했던것 같습니다.
아이들 어릴때는 더욱더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이맘때면 마음이 바쁩니다.
아까워서 산에 알밤도 주어서 나누어야 하고요.
좋지 않는 대추지만 털어서 말려드려야 하고요.
하시지 마시라고 했는데도 들깨를 이곳저곳에 심으셔서 베서 널어 드려야 합니다.
또 겨우내 주무시는 방에 군불때시라고,
간간이 패놓은 장작과 쏘시개 나무도 가까이 옮겨드려야 합니다.
이래저래 가을 한철이 바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산에 떨어진 알밤을 주워왔습니다.
벌레가 많이 먹었지만,
작은집, 외가댁, 이모님네 나눔을 했습니다.
옛날 가을걷이가 불현듯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다 아련한 추억거리인 것 같습니다.
모든것이 수작업으로 할 때라 힘들었다는 생각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1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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