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교직생활을 35여년을 하던 중 가장 가슴아프고 힘들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1989년 4윌1일 만우절이었습니다. 교복과 두발 자율화 바람이 불어 학생들이 교복대신에 편한 복장과 바가지모양의 단발머리에서 퍼머를 제외한 자연스런 머리모양으로 학교생활을 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대부분이 청바지에 남방이나 티셔츠를 입고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1학년 신입생을 담임으로 배정받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학생들은 부푼 꿈을 안고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를 부르짖을 때라 자기소개를 마치고 학급실장을 직접선거의 방법에 따라서 실장선거를 했습니다. 그때는 학번이 키큰 순서대로 정했습니다. 복도에 한줄로 세워놓고 키순대로 학번을 정했습니다. 이런 방법이 키가 작은 학생들이 불이익을 당하며 인권문제다해서 성씨를 따라서 번호를 정했습니다. 그래서 김氏 성을 가진 학생들이 제일 앞번호가 됩니다. 진안여중을 졸업한 32번 김은경이라는 아이가 저희반 실장에 선출됐습니다. 실장을 하고 싶은 학생을 거수를 했고, 또 친구들의 추천을 통해서 실장후보들이 자기소개와 소견발표도 하였습니다. 쪽지에 뽑고 싶은 실장이름을 쓰게하고 걷어서 칠판에 후보들 이름에 바를정(正)자로 표기하면서 제일 많은 표를 얻는 아이가 실장이되고 차점자가 부실장이 되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반학생 정원이 60명이었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청바지와 단발머리에 무지개색 티셔츠를 즐겨 입었던 학생이었습니다. 진안여중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저희학교에 입학한 학생중에 상위권에 해당하는 연합고사 성적을 받은 학생이었습니다. 신입생이라 상담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께서 언니와 은경이를 키우셨더군요. 아버지께서는 서울로 올라가셔서 새엄마랑 살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은경이가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곱게 한복을 입고 졸업생 대표로 졸업장을 받았더군요.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할머니께 앞으로 3년만 도와주시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꼭 은행에 입사해서 할머니를 평생 모시겠다"고 큰절을 올렸다고 은경이 이모님한테 들었습니다. 진안여중 선생님들께서도 은경이는 인문학교를 진학해서 대학에서 공부를 했으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텐데 하면서 많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받아서 장학금을 받기로하고 제가 근무하던 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가정형편을 잘 아는 은경이는 실업학교를 택했고 저와 인연이 맺어졌습니다. 할머니께서 혼자 감당하기에 벅차서 은경이 이모님들과 같이 힘을 모아 남노송동에 골목안쪽에 있는 자그만 골방을 월세로 얻어서 친구랑 자취를 했습니다. 방문 앞 뚤방에 연탄 아궁이가 있었습니다. 은경이 언니는 군청에서 일하면서 전주여고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에 토요일에 수업을 받으러 나온다고 합니다. 언니는 지금같으면 업무보조라고 하는데 그때는 학교에 일하시는 소사아저씨같이 잡다한 심부름과 청소를 하면서 용돈을 벌어서 전주에 있는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매주 토요일에 수업을 받으러 진안에서 다니고 있었습니다. 토요일 종례시간에 모두들 조심해서 시골집에 잘 다녀오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그 때만해도 시골에서 전주로 나와서 자취를 하는 학생들이 절반이 넘었으니까요. "은경이는 진안 할머니한테 안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언니가 이번주는 방송통신고등학교 수업을 받으러 나오면서 김치를 가지고 온다고 모래내 시외버스 정류장에 가서 받으면 된다고 하더군요. 입학한지 한달밖에 안 되었지만 실장이기에 다를 아이들보다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처음 한달은 신입생이라 준비하고 정리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조용하고 조금은 과묵한 성격이었습니다. 어릴적에 엄마를 잃어서인지 밝고 명랑한 그런 소녀는 아니었습니다. 늘 제일 먼저 등교해서 담임인 제자리를 청소도하고 공부도 열심히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 해 1989년 만우절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일요일이라 일찍 아들을 데리고 목욕을 다녀왔습니다. 아침을 먹고 있는데 집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휴일 이른 아침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조금 의아했기도했고 시골에 부모님께서 계셔서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수화기 넘어로 어느 여자아이가 울먹이면서 "선생님 은경이가 죽었어요" 라고 은경이 중학교 선배가 전화를 한겁니다. 오늘이 만우절이라 장난치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었습니다. 어제 저녁 밤 10시까지 같이 놀다가 헤어졌는데 아침에 주인 아주머니한테 연락을 받았답니다. 달려갔습니다. 방문을 여는 순간 퀘퀘한 냄새가 났습니다. 은경이가 하늘색 체육복을 입은 상태로 엎드려 있는데 이미 몸둥이가 싸늘하게 굳어있었습니다. 옆에 또다른 아이가 한명 더 있었습니다. 같은 중학교 친구인데 다른 곳에서 자취를 하면서 다른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자취방에 언니가 와서 방이 좁아 은경이한테 놀러와서 자다가 변을 당한겁니다. 신고를 해서 경찰이 왔습니다. 경찰이 여러가지 창문이며 주변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타살 흔적은 발결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주인아주머니께서는 거의 실신한 상태로 지금까지 많은 학생들이 우리집에서 살았는데 연탄까스중독은 절대 아니라고 난리더군요. 어제 저녁 10시까지 놀다가 연탄불을 갈고 잤다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 몇일 동안 중앙뉴스와 지방뉴스에 연일 메인뉴스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대학병원 영안실로 옮겼습니다. 서울에 있는 은경이 아버지께서도 내려오시고, 할머니께서는 워낙 연로하셔서 장례식장에 오시지 못했습니다. 그 상황은 복잡하고 힘들었던 일이라 뭐라 글로 표현을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한줌 재로 변한 은경이를 한달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교정을 한바뀌 돌고 진안에 있는 엄마 옆에다 잘 보냈습니다. 몸도 불편하시면서 키운 손녀를 먼저 보낸 할머니댁에 위로를 드릴려고 목사님과 친한 친구들 몇명이서 함께 들렀습니다. 자식을 잃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잖습니까? 진안까지 1시간 가까이 걸리는 차속에서 "큰 슬픔에 계실 은경이 할머니께 어떻게 무슨 말씀을 드려야할까?" 도저히 정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마을 언덕위에 둥구나무 있는 쪽에 자그마한 함석으로 지붕을 이은 두칸짜리 홑집이 은경이네 집이었습니다. 방안에 몸이 많이 불편하셔서 힘드시게 앉아계시는 할머니께서 두손으로 저를 감싸주셨습니다. 언뜻 방문앞에 자그마한 상위에 전화기와 그 옆에 성경책과 찬송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 은경이는요? 하느님께서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갔을 겁니다" 하시면서 도리어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아! 종교의 힘이 이런거구나!했습니다. 할머니께서 신앙의 믿음으로 버티셨던 것이었습니다. 사고가 난 3일후에 학교에 출근을 했는데 교무실 전화가 계속 울렸습니다. 저는 항상 출근이 제일 빨랐습니다. 아마 거의 1등으로 출근을 했지않나?싶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때만해도 시내 전학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전주시내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지 못한 많은 학생들이 임실, 진안, 김제, 고창, 정읍, 멀리는 남원 인월고등학교까지 왕복 너댓시간을 버스를 몇 차례나 갈아타고 다니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 학부모님들께서는 시내로 얼마나 전학을 시키고 싶었겠어요. 학부모 입장에서는 얼마나 애타셨겠어요! 수 많은 사람들이 멀리 통학을 하는 자식들을 시내로 전학을 시키고자 모든 인맥을 동원시키곤 했습니다. 전화를 받는 순간 "그 학교에 전학을 하고 싶다" 라는 문의 전화였습니다. 제가 답변을 했습니다. "지금은 자리가 없습니다" 라고 말씀 드렸더니 학부형께서 "뉴스에 그 학교 학생 한명이 죽었다는데 왜 자리가 없느냐고 하느냐" 하면서 성질을 내는 겁니다. 왜 하필 제가 전화를 받았을까요?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아직 은경이 제적처리도 안했거든요. 그후로 수 많은 전화문의가 있었습니다. 학교측에서도 은경이 자리는 담임인 저한테 일임을 했습니다. 은경이를 잃은 슬픈 마음이 정말 컸으니까요. 다른 선생님들께서 지인들한테 부탁을 왜 안 받았겠어요? 그러나 선생님들께서 많이 슬퍼하는 제마음을 알고 계시기에 전학을 받으라고 선뜻 말씀을 못하셨습니다. 은경이만한 아이를 저는 저희반 아이로 채우고 싶었습니다. 제적처리를 하고난 어느 토요일 하교길에 시내 기전여고 뺏지를 목에 건 학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한테 인사를 하더니 대학을 진학할려고 인문학교로 입학했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서 엄마를 도와드리고 싶다면서 저희학교로 전학을 오고싶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 나름대로 아직 정리를 못해서 대답을 못해주었습니다. 기회를 주시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겠다고 하면서 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학생을 돌려보내고 생각을 했습니다. 참 대단한 아이구나?싶었습니다. 어린 학생이 진로를 바꾸면서 직접 학교로 찾아온 용기와 그 마음이 대단했습니다. 바로 다음주 월요일에 그 아이 출신 중학교에 전화를 했습니다. 김제군에 있는 금산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했거든요. 중학교 3학년 때 그 아이 담임선생님한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아이에 대한 몇가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연합고사도 200점 만점에 170점 정도을 받은 우수한 학생이고 반듯한 학생이라고 칭찬을 하시더군요. 기전여고 그 아이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대학을 진학해서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해 공부해서 언론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는 학생이라고 저한테 전학을 받아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리하여 새로운 아이를 전학받아서 처음은 힘들었지만 나머지 학기를 행복하게 보낸 것 같았습니다. 전학한 첫날 반아이들한테 인사를 시키고 자기소개를 시켰는데, 얼마나 똘망지게 자기소개를 하는지? 다를 아이들이 꼼짝도 못하더군요. 기득권이라 할까요? 그래도 반아이들이 전학온 아이한테 지기싫어하는 오기? 그런 뭐가 있잖아요? 전학온 미정이는 활발하고 명랑한 아이었습니다. 인문학교를 다녔던 아이라 기능과목이 부족했습니다. 기능과목을 운영하는 학원에 수강을 부탁해서 빠른 시간에 실업학교 학과에 잘 적응하면서 반 아이들과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1학년을 종업식날 저희반으로 전학을 온 아이가 까만 비닐봉지로 싸맨 소주병을 한병 들고 교무실로 찾아왔습니다. 어머니께서 농사지으신 거라고 선생님 갔다드리라고 주셨다면서 들기름을 한병 보내주셨습니다. 병뚜껑을 열고 고소한 들기름 냄새를 선생님들 코에 대면서 자랑을 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남의 일이라 어느덧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연탄까스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이 가끔씩 일어나곤 했습니다. 처음 연탄을 갈고나면 매캐한 냄새와 연탄까스냄새가 많이 올라옵니다. 골목에 함석으로 된 연탄 아궁이 굴뚝에서 나온 연탄까스 냄새를 맏아보신 적 있으시죠? 하루 두번씩 갈아야 따뜻하게 난방을했고, 그 아궁이에 양은솥으로 밥을 짖고 국도 끓여먹었죠. 연탄을 갈때는 공기구멍을 전부 열었다가 새파랗게 불이 붙으면 공기구멍을 조금만 열어놓곤 했습니다. 연탄에 불이 붙어 파란 불빛이나고 연소가되면 가스피해는 없답니다. 오늘이 만우절이라 더 생각이 납니다. 신학기라 학생들 얼굴을 익히지 못할때라 아이들이 서로 교실을 바꿔가면서 선생님들을 놀리기도 했습니다. 35년이 지난 일이지만 불현듯 생각나서 그때 슬픔을 되새겨봅니다. 지금 그아이가 살았다면 50대 중년의 나눔의 봉사를 하는 훌륭한 여인이 되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4월 첫날 슬픈 이야기라 많이 망설여집니다. 농부님들은 땅살리기를 하셔야 할 때입니다. 옛날에는 두엄간에 쌓아 놓았던 퇴비를 논밭에 뿌렸습니다. 겨우내 부엌에서 긁어낸 재도 밭에 짊어지고 가서 땅에 뿌리고, 돼지막이나 소막에 깔아준 짚을 마구간을 치면서 나온 퇴비와 썩여서 논밭에 뿌리고 갈아엎어 땅을 살렸습니다. 요즘 화학비료를 주고 기른 작물보다 생산량은 못미치겠지만 모든면에서 우수한 작물이었겠다!싶습니다. 올 봄엔 잦은 비와 낮은 기온으로 과수농가에 착과가 즐어드는 피해가 염려스럽습니다. 또 벛꽃없는 축제가 곳곳에서 열리는 해프닝이 일어나네요. 우리나라 벚꽃축제의 대표인 진해군항제가 축제가 끌날 때쯤 일주일 늦게 벚꽃이 만개했다고 합니다. 벛꽃 꽃망울도 탐스럽지않고 숫없는 머리모냥처럼 헤성헤성하네요. 밭을 갈고 1년 내 먹거리를 심고 씨앗을 뿌려야하는데 땅이 질퍽거려서 밭갈이도 못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번 4월도 솟아나는 나무들 새순처럼 늘 기쁨이 솟아나는 달 되시기를 바랍니다.
글을 접하다가 긴글이지만 눈을 뗄수가 없는 글을 읽었습니다 매해 만우절이면 매해 생각나는 가슴저리는 제자이네요 그때의 시절 공감가는 부분도 많아서 더 가슴아픈 일입니다 제 동창 두명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에요 좋은 선생님으로 학교생활 잘 이어나가길 다시 바래봅니다 ㅎㅎ 건강조심하시고 만우절 오늘 지나면 좋은 추억으로 가득한 내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요즘 교직사회는 옛날 같지않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더 힘드시나봐요. 저는 손주가 이제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진급하고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 찾아뵈었느냐고 물었더니 5층으로 올라가셨다고 하더군요. 전화가 왔습니다. 2학년 때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선물을 받았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MZ세대들은 교직이 매력이 없답니다.
30여년 전의 아름다운 기억과 아쉬움을 간직하고 계시네요. 매년 4월1일 만우절만 되면 생각나게 되겠네요~ 저도 어릴땐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어린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었거든요 그러나 몇몇 선생님들로부터 좌절을 느낀후(용기는 커녕 자존심을 짓밟는 언행들) 희망을 버렸지요. 세월이 지난후 어느듯 70으로 공무원생활 퇴직후 선생님의 글을 잃고 다시한번 당신과 같은 선생님으로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생각해 봅니다. 당신의 글을 읽고 학생때의 그 시절이 생각나게 해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저희 친인척중에 초,중,고,대학에 한때는 13명이 있었습니다. 교육감도 계셨고, 장학사, 교장 선생님, 대학교수 등 교육자집안이어서 자연스럽게 교직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직생활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지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아내가 체질이라고 하더군요. 편안한 저녁 보내십시요.
과찬이십니다. 쬐끄만 장학금이라도 나오면 농촌에 거주하는 학생들에게 주었습니다. 농사지으시면서 자식들 전주시내로 유학을 보내시고, 소득이 일정치않은 농민들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자취생들은 빨간 프라스틱통에 김치를 담가서 일요일에 오면 목요일 쯤은 단무지와 콩자반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식량이 부족해서 80년대 초에는 도시락 혼분식 검사를 매일 했답니다. 참 웃픈이야기이지요~
같은 교직에 종사하다가 은퇴했기에 글에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사연이네요. 저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부촌 아이들이라 그런지 큰 말썽없이 잘 지냈지요. 그러다보니 잊어지지않는 사연은 부족한 듯 싶습니다. 큰 어려움없이 교직을 마치고 이제 여주에서 텃밭을 가꾸며 말년을 보내고 있어 나름 만족하며 삽니다.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잘 되길 기원합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교직을 퇴직하고 텃밭을 가꾸는 지인들이 많습니다. 많은 것을 공유하고, 씨앗도 나눔하고, 재미나게 가꾸고 있습니다. 교직을 퇴직하고 어디 경비를 하겠어요? 저는 후배교사들한테 제 경우를 전해 주기도 합니다. 자가소비용이라 비료도 덜하고, 소독도 덜하고, 깨끗하게 씻어서 말리곤 합니다. 손주들 다니는 어린이집 아이들 현장학습을 몇번 했습니다. 쑥개떡으로 간식도 준비하고, 구루마로 밭두덕을 책보를 깔고 태워주면 그렇게 좋아할까요. 유치원 선생님들이 학부형들한테 사진을 보냈나봅니다. 몇 학부형께서 고맙다고? 재현이 할아버지 몸살이나 안 앓았는지? 전화도 받곤 했습니다. 가을엔 고구마, 당근, 대봉시를 가방에 넣어서 보냈습니다.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좋은 일이 많으셔서 웃는 날이 많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러셨군요. 처음 몇해는 무주에 나갈일이 있을 때 큰길가에 있어서 몇차례는 들렀었습니다. 학생네 아버지께서 여자를 몰래 만나셔서 은경이 엄마께서 세상을 멀리했다고 들었습니다. 세상살이가 참 복잡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해야하는데 그리 쉽지가않습니다. 봄비가 너무 많네요. 어제 고추 심을곳에 경운기로 로타리를 쳤습니다. 이제부터 텃밭에 옥수수, 생강 등을 심어야겠습니다. 빗길 늘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죄송한데요.. 선생님 존함은 제 머리속에 박혀 있는데 계속 생각을 해봐도 기억이 나질 않네요 저는 모여상 야간졸업했어요~ 근데 고 3때부터 모여고 행정실에 한 9년정도 근무했거든요 그리고 저는 84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 했어요~ 지금은 이름도 개명했어요 예전 이름은 박선희예요~ 혹시 기억 나실려나 해서 이렇게 공개하에 글 올립니다~ 건강하시고 같은 곳은 아니지만 근교에 살고 계시다니 너무 방갑습니다~ 하긴 선생님이 기억 못하실지는 모르겠네요
공감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가슴이 참 따뜻한 훌륭한 분이십니다. 저도 학교가 체질이었고 눈만 뜨면 자동으로 출근해서 근무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에서 40년을 근무하고 정년퇴직을 하고 4년차입니다. 지금도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근무했던 학교를 바라보면 아직도 가슴이 뛰고 함께 생활하고픈 생각이 듭니다. 이게 바로 체질이란 걸....
작년에 올렸던 메세지입니다. 동창회를 하시면서 은사님을 찾아뵌다고 하시기에 이 글을 올려봅니다.
-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동창회 - SBS에서 오랫동안 이어온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라는 프로가 있다.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일이 있구나?를 알리는 장수프로의 방송이다. 다재다능한 능력과 그야말로 희안한 일들을 제보받아 촬영을해서 방송되는 프로다. 엣날에는 목요일 저녁에 방송되다가 화요일 저녁으로 편성되었다가 최근에 토요일 저녁으로 방송시간대을 옮겼다. 우연찮게 TV를 시청하다가 이 시간대에 방송되는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라는 방송을 시청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선생님 묘소에서 50년동안 열리는 초등학교동창회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고 서이초 선생님 사건을 계기로 교단에서 각자 겪고 있던 아픔과 고충이 세상 밖으로 알려졌습니다. 심지어는 교육부 사무관이라는 작자는 지아이 담임한테 우리 아이는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기 때문에 왕자에게 말하듯이 듣기 좋게 돌려서 말해도 다 알아듣는다” 등 내용이 적힌 이메일을 보낸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교육부 사무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담임을 교체하고 갖은 갑질을 하고 있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교육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옛날에는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매를 맞으면 집에가서 부모님한테도 매를 맞았다. 엣날 이야기입니다. 오늘 세상에 하나뿐인 초등학교 동창회를 소개하는 시간에 요즘 교육계에 어떤 깊은 교훈을 안겨주는 시간이었다. 강원도 철원 어느 작은 마을에서 토성초등학교 22회 올해로 60살이되는 중년 아저씨들의 아주 특별한 동창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방송팀이 찾았다. 시간이 되자, 초등학교 동창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너무 편해 보이는 복장들이었고 심지어 낫과 갈쿠리 그리고 전기톱까지 꺼내 들었다. 그냥 시골에서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이동한 곳은 산이었는데, 산을 출입할려면 산림청의 허가를 받아 출입을해야 하는데 지역 군 담당부서에서도 출입을 할 수 있도록 열쇠를 제공했다. 무더운 날씨에 준비한 장비로 제초 작업을 시작하는 친구들 사이로 양지 바른쪽에 넓직한 공터 끝에 비석이 하나 보였다. 이곳은 이들의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인 이병덕 선생님의 묘소였다. 1974년 1월, 너무 추운 겨울날에 비워두었던 방에 연탄을 피다가 연탄가스 사고로 일찍이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님은 한창 예쁠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약혼자도 있었다고 기억한다는데 가족의 동의하에 학교 근처에 묘소가 마련됐다고 한다. 약 4년이 지나 중학생이 된 제자들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충격적인 모습을 봤는데 무슨 일인지 산소가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로 뒤덮여 있었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날부터 지금까지 선생님 묘소를 관리하기 시작했다고한다. 함께한 1년이란 시간은 짧지만 당시 선생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매년 때가 되면 벌초하고, 명절이면 성묘를 한다고 한다. 그 세월만 벌써 50년 가까이 됐다. 대체 제자들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선생님의 그리움 때문이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동창회, 고인이신 이병덕 선생님묘는 철원군에서 무연고 묘로 파묘를 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 선생님 언니 한분이 오셔서 모셔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자들이 어떻게 처리하실건지요?라고 묻자 화장해서 재를 뿌린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제자들이 "선생님을 우리가 잘 모시겠다"라고 선생님 언니한테 허락을 받았다. 무연고로 파묘를 할 지경까지 왔는데 제자들이 앞이 환한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묘비를 세우고 모시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매장문화라서 이장을 하기 위해서 파묘를 하는데 곱디고운 옷을 네벌까지 입혀서 매장되어 있었다. 아마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이쁘게 영면하시라고 이쁜 옷을 네벌이나 입히셔서 안장을 했나 싶다. 옷을 태우고 화장을해서 지금 산소에 모시고 매년 동창생들이 모여서 벌초를 하고 있는 시간을 소개했다. 머리에 흘리는 땀을 닦을려고 수건을 동여매고 벌초를 마치고 준비해간 제수를 돗자리를 깔고 놓고 모두 재배를 하고난 뒤 준비해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담소하는 60대의 중년이 된 초등학교 동창회가 너무 아름답고 따뜻했습니다. 74년에 20대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신 선생님을 60이되는 중년의 10여명의 남녀 졸업생들이 선생님묘에서 동창회를 하는 모습은 오늘 날 높게 평가받는 최고의 아름다운 초등학교 동창회가 아닌가요? 어쩌면 요글래 정말 감명깊고 마음 따뜻한 이야기를 소개한 시간같아서 저 또한 기분이 흐믓한 시간이었습니다. 요즘 코로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7만명을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고 하네요. 웬만한 감기로 생각할 정도로 크게 느낌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지요. 저도 갑자기 두통이 조금 있고 얼굴에 열이 있어서 동네의원엘 갔습니다.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라고 감기 몸살약만 처방 받았습니다. 그까짓 것으로 병원에 가느냐고 하시겠지요? 제가 아침마다 어린 손주들을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있거든요. 그래서 많이 걱정을 했답니다. 만약에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면 차속에서 많은 시간을 같이하고 있는데 얼마나 걱정이겠어요? 그런데 코로나 진단카드를 5,000원에 구입해서 자가에서 진단하는 것 보다 병원에서 검사를 하니까 더 저렴하게 할 수 있더군요. 그냥 기본 진료비만 지급했습니다. 이번 태풍 카눈이 더위를 물리쳤나 봅니다. 한낮에도 폭염은 없는 것 같습니다. 환절기에 건강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과찬이십니다. 어려울 때 좀더 도와주었더라면 더 좋은 추억으로 제자들이 기억할텐데요. 아이들과 잘 지내는 편이었습니다. 체육대회 때는 저희반 아이들이 경기를 많이 이겼습니다. 같이 많이 뛰었거든요. 나이들어서 자식들 키우면서 선생님을 찾는 제자들이 많습니다. 편안한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제가 70년대 전학을 가서 진안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진안중학교를 다니다가 1학년 5월초에 군산으로 전학을 가던 때가 엊그제인 것 같네요 고향인 전주에서는 입시였던 때여서 고교부터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뒤로 진안중학교와 진안여중이 통합되었고, 진안여중자리에는 신설된 진안공고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희도 진안에 살던 진안등기소 관사에서도 툭하면 연탄가스에 중독되고 했습니다 연탄보일라가 활성화되던 70년대 중후반부터는 연탄가스가 많이 줄었지만 기름보일라가 대중화되던 이전까지는 연탄가스뉴스가 나오곤 했지요 요즘은 화목보일라 일산화탄소중독이 어쩌다 보도되고 있지요 그 시절 아련한 추억입니다
70년대 진안은 오지였지요. 요즘 시골엔 화목보일러가 많습니다. 들녂은 나무를 조달하는데 힘들겠지만 제고향 남원만 하더라도 야산에 쓰러진 나무들이 많답니다. 이번에 마굿간을 뜯고 나온 나무는 장애가 있는 집에 실어다 주었습니다. 옛날 고향의 추억은 늘 아름답답니다. 감사합니다.
그렀죠? 아궁이에 불을 지펴도 구들장사이로 연기가 나오기도했지요. 환경이 참 어렵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화장실 문화는 아마 세계 최고가 아닐까!싶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나 국립공원 화장실은 정말 깨끗하잖아요. 연탄으로 난방을할 때 가스에 양철로 된 연통이 삭아서 망가지잖아요. 지금은 얼마나 살기편한 세상입니까? 그러나 옛날 자연스럽던 환경이 많이 아쉽습니다.
연탄난로로 난방을 하는 시절엔 가스사고가 빈번했던거 같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객지생활 했는데 80년도 초에는 서울에도 꽤 많은 집들이 연탄을 사용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직장선배와 쪽방을 얻어 숙식을 하였는데 하마터면 20도 안되어 하늘나라에 갈뻔 했지요. 다행스럽게 이웃에 사는 친구가 들르러왔다가 발견하고 어찌어찌 살아났답니다. 서울의 신도림동이란 동네였는데 지금은 개벽을 했더군요. 연탄이 싸서 좋긴해도 잘못하면 큰 피해를 주더군요.
참으로 훌륭하신 진정한 선생님이셨군요. 저도 아직까지 잊을수 없는 선생님 한분이 계시답니다. 6학년 담임선생님이셨는데 중학교 2학년때 유행성 출혈열로 돌아가셨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이튼날 몸이 아파 학교도 못갔던 적이 있답니다. 존경스럽습니다.지금도 제자를 제자같이 스승을스승같이 마음으로 배우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있을까요?
고맙습니다. 과분한 칭찬에 부끄럽습니다. 학생주임이라는 업무를 을 오래동안 담당해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여학생들도 지리산 천왕봉을 데리고 다녀왔습니다. 백무동 야영장에서 식사당번이 아닌데도 늘 아이들 식사를 준비하는 학생도 있고, 늘 선생님먼저 드시라고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참 이쁘게 자랐구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