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를 할 때입니다. 저한테도 가을걷이는 참 바쁘고, 힘들기도 했습니다. 저희집에는 76년까지 일하시는 분들이 두분 있었습니다. 그땐 시골에 농사좀 지으신 가정에서는 머슴이라고 하죠. 그분들을 한명을 두시고 농사를 하시는 농가도 있고요. 조금 많은 농사를 지으신 가정에서는 두명을 두시고 농사를 지으셨거든요. 저희집 사랑방에 한겨울이면 동네 머슴살이 하시는 아저씨들이 12명정도 와서 매일 같이 보내곤 했습니다. 겨울철이면 기나긴밤을 지내면서 새끼도 꼬고, 가마니도 짜고, 멍석도 만들곤 했습니다. 가끔씩 나이롱뽕이나 민화투를 치시기도 했습니다. 두부내기 화투죠. 조금 얻어먹는 재미로 졸린눈을 참으면서 시원한 두부한쪽에 김치걸쳐서 먹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가끔씩은 지붕에 닭가리에 감을 담아서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익은 감홍시만 골라서 꺼내 먹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에 상머슴은 백미 90k15가마니를 작은 머슴은 10가마니를 새경으로 받았습니다. 담배는 매일 1갑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담배를 갔다가 파시는 댁에 담배 나오는 날이면 매번가서 담배를 미리 사오기도 했습니다. 새경이란 1년동안 머슴살이 한댓가로 받은 임금이죠. 설과 추석에는 옷부터 신발까지 쪽 빼입혔고요. 어머니께서 광목으로 손수 한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동네 미싱이 없어서 바느질을 해주시면 품앗시로 저희집 일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1년 내내 머슴들 식사 준비하고, 새참 준비하고, 남의 식구 끼니 챙기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제가 군에서 76년에 전역을 했습니다. 그 다음해부터 머슴들이 없어졌는데 어머니께서 그 많은 일을 도맡아서 하셨습니다. 몸은 피곤해도 마음이 편하다 하시네요. 남의 식구 삼시세끼 따뜻한 국물에 끼니 챙기시기가 많이 힘드셨나봐요. 머슴들 있을 때도 들일이며, 밭일을 많이 하셨는데, 끼니때 식구들만 있으니까 마음이 편하셨나 봅니다. 아버지께서는 교직에 계셔서 식사하시고 출근하시면 그만이시죠. 물론 근무 마치시고 일손을 돕기는 하셨죠. 그렇다고 저희집 논이 그리 많은것도 아니었습니다. 저희마을은 논1마지가 150평입니다. 그때는 경지정리도 안되었죠. 산밑에 다랑다랑 논도 있고요. 장구뱀이라는 장구를 닮았다해서 붙여진 논빼미 이름이죠. 천수답이 있어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모를 심지 못한 논도 있었습니다. 수렁논도 있어서 소로 쟁기질할 때 수렁을 돌아서 다니는것을 보았답니다. 수렁논에는 정강이까지 빠져서 모를 심지 못했습니다. 그 수렁논에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배가 누런 미꾸라지를 얻을수 있었습니다. 제일 큰 논이 두마지기 크기였으니까 300평쯤 되는 큰논이었죠. 모두 28마지기 정도로 기억됩니다. 작은 논빼미가 띄엄띄엄 논이 있었습니다. 논 갯수로는 20개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저한테는 할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제가 대전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79년 2학기때 전주로 옮겼습니다. 그때부터 주말마다 남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군생활 할 때도 휴가를 농번기에 얻어서 모내기랑 가을걷이를 해드렸습니다. 좀 특수한 보직을 맡아서 모내기 할때랑 가을걷이 할때랑 1년에 두차례 20일씩 휴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2모작을 할때입니다. 보리 베내고, 논 갈아서 벼를 심었죠. 그 얼마나 된다고 보리 이삭을 주었는지요? 가을에 벼가 누렇게 익으면 낫으로 베서 8주먹씩 묶어 가래로 논에 세워서 1주일정도 말리면 지게나 리어카로 집으로 실어 날라서 공상으로 벼타작을 했습니다. 금주말에 벼를 베어서 세우고, 다음주에 벼타작을 했답니다. 발로 밟아서 공상을 돌리다가 모터를 달아서 나락타작을 했습니다. 종일 사람손으로 타작을해서 밤에 풍구로 돌려서 지푸라기를 없애고, 깨끗한 벼를 광에 가득 쌓고, 밖에 종일 훌터낸 짚을 쌓아놓았습니다. 농사일 할 때 가장 소중한 소먹이와 마굿간에 넣어서 소똥과 오줌으로 범벅이되고 소가 밟으면 아주 좋은 퇴비가 되죠. 80년대 이전까지는 10월에 쉬는날이 많았었습니다. 1일 국군의 날. 3일 개천절. 9일 한글날. 24일 UN데이. 농번기 방학. 그때는 모내기 할때랑 가을추수할때 농번기방학을 실시했습니다. 또 제가 근무했던 곳이 여학교라서 김장방학 이렇게 쉬는날이 많았죠. 벼베고, 논에서 말린 벼를 비포장도로인데 리어카로 가득실고 집으로 실어 날라서 타작을 했습니다. 논두렁에 심은 메주콩을 걷어드리고, 산에 밤도 털어야 했고, 밭에 들깨도 베고, 고구마도 캐야 했습니다. 어느땐가는 13번을 남원을 다녀왔더니 가을걷이가 마치더군요. 10월부터 11월까지는 쉬는날이면 다녀왔습니다. 그때는 남원가는 직행 첮차가 6시15분차였습니다. 남원에서 내려서 고향 마을가는 버스가 7시반차가 있었습니다. 그차를 놓치면 1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종일 일하다가 고향에서 남원나가는 7시15분차가 막차였습니다. 남원에서 전주가는 차는 저녁9시 직행이 막차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싸주신 보따리와 두자식들 데리고 전주에 도착하면 거의9시쯤 됩니다. 이렇게 열차례 이상을 다녀야 가을걷이가 끝났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참기름을 한병 주셨는데, 시내버스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짐보따리가 떼굴떼굴 굴렀답니다. 어머니께서 쪽파사이에 넣어서 주셨는데도, 워낙 세게 부딪쳐서 참기름병이 깨져서 버스안에 고소한 냄새로 진동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가고싶을 때 아무때나 나서면 다녀올수 있지만, 예전에는 참 복잡했습니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했기 때문에 챙길것이 많았죠. 차시간을 맞추는것이 제일 복잡했던것 같습니다. 아이들 어릴때는 더욱더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이맘때면 마음이 바쁩니다. 아까워서 산에 알밤도 주어서 나누어야 하고요. 좋지 않는 대추지만 털어서 말려드려야 하고요. 하시지 마시라고 했는데도 들깨를 이곳저곳에 심으셔서 베서 널어 드려야 합니다. 또 겨우내 주무시는 방에 군불때시라고, 간간이 패놓은 장작과 쏘시개 나무도 가까이 옮겨드려야 합니다. 이래저래 가을 한철이 바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산에 떨어진 알밤을 주워왔습니다. 벌레가 많이 먹었지만, 작은집, 외가댁, 이모님네 나눔을 했습니다. 옛날 가을걷이가 불현듯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다 아련한 추억거리인 것 같습니다. 모든것이 수작업으로 할 때라 힘들었다는 생각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