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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1 -

우리는 기다랗고 커다란 안테나가 달린 흑백TV에 리모컨이 없는 로터리식이어서 손으로 직접 채널을 돌렸던 걸 기억한다. 
로터리 손잡이가 프라스틱이라 오래 돌리다고면 망가지고 뻰치로 찝고 돌려서 채널을 맞췄다.
TV화면이 잘 안나오면 한사람이 대나무에 막대기를 엮어서 만든 사다리를 타고 긴 대나무를 잘라서 지붕위나 높은 감나무위에 실외안테나를 좌우로 돌려가면서 안테나 방향을 맞추고 화면을 조정해서 인테나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게 철사로 묶었다.
TV는 네개 다리에 양쪽으로 창문도 달렸고 가운데 열쇠가 있는 TV도 있었다.
요즘 장식장 같았다.
TV가 워낙 덩치가 커서 웃목을 다 차지했다.
흑백TV의 대표상품은 대한전선과 금성TV였던 것 같았다.
친구들과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레스링의 박치기왕 김일, 7전8기의 홍수환, 김기수 등의 경기와 그 유명했던 안방극장의 대표작 여로, 팔도강산, 아씨 같은 드라마와, 전투, 육백만불의 사나이, 소머즈, 원더우먼 등의 외국 드라마를 보았던 걸 기억한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가 달에 착륙하는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했다.
특히 밤이 긴 겨울철 저녁시간에는 동네 사람들이 안방 가득하게 모여서 드라마 등을 시청하고 돌아갔다.
동네 사람들이 다 나가고나면 할머니께서는 하드보드로된 장판을 나락잎으로 만든 빗자루로 모래를 쓸어내고 물걸레를 빨아서 방바닥을 깨끗하게 닦으셨다.
지금도 몸채 작은방 두곳에 기름칠을 해서 반질반질한 하드보드장판이 깔려있다.
지금이야 흙 밟을 곳이 없어서 하얀 운동화를 몇날을 신어도 깨끗하지만 그 때는 포장된 마을 길은 없었다.
눈이라도 내리고 얼었던 길이 녹고 질퍽거리는 날이면 땅을 밟고 와서 바지나 양말에 묻은 흙이 따뜻한 방에서 말라 다 떨어진다.
진짜 모래가 한 웅큼 나올 때가 있었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구들방에 모여서인지?벽지가 끕끕하기도 했다.
특히 문종이 하나로 바른 창호지는 물을 적셔놓은 것 같았다.
우리는 대중가요를 대표하는 이미자, 남진, 나훈아, 하춘화, 조미미, 배호, 펄시스터즈, 김상희, 윤항기, 패티김, 조영남, 이용복, 이현, 정미조, 김정호 등의 가요와 장현, 양희은, 어니언스, 서유석, 이장희, 남궁옥분, 소리새, 해바라기, 이문세, 이연실 과 같은 통기타 포크송을 좋아했고, 들고양이, 사랑과 평화, 산울림, 다섯손가락, 이치현과 벗님들을 비롯하여 대학 가요제에서 배출한 옥슨, 건아들, 송골매, 해오라기, 노고지리 등 그룹사운드 음악을 들었다. 
조용필과 이용과 전영록도 기억하며 묘하게 그때는 그 중 한명만을 좋아했다. 
년말이면 1년동안 국민들이 많이 좋아했던 가요대상 시상식이 방송사마다 날자를 잡아서 발표했다.
대상을 받은 가수는 최고의 한해였다.
그러다 이선희, 김현식, 이상은, 김광석, 유심초 등를 좋아했고 또 다시 90년대에 나타난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에서는 정말 큰 세대차이를 느끼는 획기적인 기회였다.
노랫말을 스님께서 불경을 읽드시 중얼중얼거리는 랲이라는 가요가 대중가요를 앞서기 시작했고 머리를 땅에 박고 뱅뱅돌리면서 서커스에서나 볼 수 있는 온갖 몸놀림은 우리를 헷갈리게 했다.
젊은 아이들이 테이블에서 담배피고 술 마시며 그 자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락카페가 참 신기했다. 
젊은 아이들이 그룹으로 춤을 추면서 무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저 남진이나 라훈아, 현철, 설운도, 송대관, 태진아, 이미자, 하춘화,주현미 등의 대중가요에 꽃혔던 우리는 어느 날 K-Pop이 전세계를 휩쓸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유럽뿐만 아니라 멀리 아프리카에서도 K-Pop이 선풍을 불러이르키기 시작했다.
요즘 젊은사람들 참 대단한 것 같다.
먼 타국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 쫒아다니는 열정은 어디서 나온걸까요?
하긴 우리나라도 외국 팝가수가 들어와서 공연을 할 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꼴불견이지만 일부 여성팬들이 브라와 속옷을 벗어서 던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제 6시 내고향이라는 시간에 시장에서 일을 하시는 어느 아주머니께서는 핸드폰을 3대를 갖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오로지 그가 좋아하는 임영웅의 사진뿐 아니라 그 가수의 일상을 담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힘들 때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로 위안을 삼기도 했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바라보면서 역경을 이겨낸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문화를 널리 전세계에 알린 우리 K-Pop가수들도 대한민국의 공로자인 것 같습니다.
지난 며칠 봄날씨였는데 어제부터 봄을 시샘한 듯 제법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밤공기는 조금은 쌀쌀하네요.
이 비가 그치면 논밭 삶의 현장으로 내달려가겠지요.
농기계의 안전사고를 늘 대비하셔야겠습니다.
 
경북성주성주 농업인
출석왕 축하해주세요 ·
예전생각 나네요
우리는 TV없어서 작은집에
가서 보고 앞에 않아 보려고.저녁 일찍 먹고 가고 동그란 구멍있는 토큰도사용 하곤 했답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겨울에는 질퍽거리는 흙으로 된 마당에서 바지가락에 흙이 묻어서 TV를 시청하고 돌아가면 방바닥에 얼마나 많은 흙이 있는지?
할머니께서 차디찬 물로 걸레를 빨아서 방바닥을 딱았습니다.
드라마와 스포츠중계를 할 때면 좁은 방안에 가득 모여서 시청하고 애국가가 마지막으로 나올 때 돌아들 갔습니다.
한겨울엔 오후 6시부터 모여서 거의 12시가 되어서야 돌아갔죠.
할머니께서는 엄청 귀찮게 생각하셨어요.
방청소를 하셔야해서요.
경북성주성주 농업인
출석왕 축하해주세요 ·
그래서 우리 작은 어머님도
좀 싫은 얼굴 하셨답니다
그런데도 연속극 여로 보려고 매일 찾아가서 애먹인 생각이 납니다그때 생각 하면 죄송 스러워요 너무 멀리있다 보니 강릉에 계시는데 몇년전에 함 찾아뵙고 안부인사만 한답니다
경남밀양최동구
사과농사 6년차 학생·
그시절 은 지금처럼
자가용 차가 없었지요
오래기다려 뻐스를
탈땐 토큰이라는
차표를 사용했지요
아침등교길은 그냥
전쟁통이였지요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차장이 몸으로 밀어넣고,
운전수 아저씨가 한번씩 사정없이 꺽으면 한쪽으로 쏠리면서 다음 정거장에서 또 태윘죠.
직행이나 고속버스는 어쩔 때는 2-3명태우고 운행하고 있더군요.
시골은 버스표로 승차를 했고,
서울 등 대도시는 토큰을 사용했지요.
서랍속에 시내버스토큰이 몇개 있습니다.
창문넘어로 차를 타기도 했었습니다.
참 좋은 세상이 돌아왔습니다.
상위 1%의 부자들과 권력을 가진자들이 배려하는 마음만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경북구미표고버섯18837
답변 고수
샤인 3년차 초보농부 ·
선생님이셔서 글을 잘쓰시나요?국어 선생님 ᆢ?읽으면서 공감하는데ᆢ난 생각은 나지만 글로는 못쓰는데ᆢ가끔 올려주시는 글이 옛 추억과 감동을 되새겨주네요ᆢ감사합니다 ㆍ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국어를 전공하진 않았습니다.
그냥 일상을 써내려가니까 두서없는 글이됩니다.
제가 살았던 시절을 잊지않을려고 기록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6,70대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공감하실거라 생각합니다.
농경사회 때는 모든 것이 힘들었습니다.
편하시게 옛 생각하시면서 읽어보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연일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텃밭에 옥수수랑 생강을 심어야하는데 자꾸 미뤄지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충북충주대박0825
너무 열심히 살다·
옛날 생각 많이 나네요
호롱불켜고 공부했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싶을만큼 세상 참 좋아졌습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호롱불 심지를 높게하면 그으름이 나고요.
화롯불에 써깨랑 이를 잡아서 태우기도했지요.
지금 뭐가?부족합니까?
그래도 불만은 그 때보다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공감되시는 글을 많이 올려드릴께요.
그냥 제가 생활했던 농촌일기처럼 쓴 글입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그렇죠?
정이 없어서 그런가봅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70년대 여로는 엄청났죠?
그 때 구들방에 하드보드라는 딱딱한 것을 방바닥에 깔았죠.
지금도 저희 고향집 할머니방엔 하드보드로 되어있습니다.
아무리 방을 뜨겁게 불을 때도 비닐장판같이 눌거나 색이 변하지도 않는답니다.
가끔 큰솥에 끓일일이 있으면 불을 많이 땔 때 방바닥이 엄청 뜨거워서 찜질방 같습니다.
전북무주김정기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충북충주대박0825
너무 열심히 살다·
더 메마르고 인정이 없는것 같아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