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남원 시골집을 다녀왔습니다. 그 동안 마굿간을 뜯으면서 대충 정리를 다 마쳤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사랑방 아궁이를 치우지 못했습니다. 1976년 제가 군복무를 마치던 해부터 머슴살이가 없어졌습니다. 동네 머슴들이 10여명 이상 모여서 지냈던 사랑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방을 사용할 사람도 없고, 쇠죽을 끓였던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있는데 머슴들이 없어지면서 소를 키우지 않아서 쇠죽을 끓일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 때만해도 안채 부엌에도 큰 솥과 작은 솥이 아궁이에 걸려 있었습니다. 밥을 지을 때나 소죽을 끓일 때나 불쏘시개로 불을 지펴야했습니다. 불쏘시개는 가리나무였습니다. 산에서 갈퀴로 소나무잎을 긁어서 지게로 짊어지고 날랐습니다. 소나무가 많은 뒷산에 가을일을 마치면 머슴들이 한나절에 한짐씩 가리나무를 해서 날랐습니다. 저희 집은 상머슴, 중머슴 이렇게 두명이 머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네짐씩 가리나무를 했기에 작은 집채만하게 가리나무가 쌓였습니다. 가을에 나락가리같이 가리나무를 차곡차곡 쌓아 놓으면 부엌 헛간에 갔다놓고 불을 지필 때마다 불쏘시개로 사용했습니다. 마른 소나무잎을 불을 부치면 연기도 없이 파란불빛이 나면서 불이 잘 붙습니다. 가리나무가 불이 붙으면 마른나무 가지나 장작으로 밥도 짖고 국도 끓였습니다. 이렇게 가리나무로 불을 지피고 매일 아궁이에서 재를 긁어내서 거름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정구지(솔. 부추)밭에 뿌리면 정구지가 잘 자랐습니다. 어머니께서 가리나무를 아끼시느라 신문지나 박스를 찢어서 불쏘시개로 사용했습니다. 저도 주말마다 집에 다니러 갈 때마다 박스를 실고 갔습니다. 박스는 불이 잘 붙지 않지만 찢어서 불을 붙이면 불이 잘 붙습니다. 마굿간을 치우면서 박스에 찢어진 박스종이가 담긴 박스가 여러 박스가 있었습니다. 아끼시느라 소마굿간에 차곡차곡 쌓아 놓으셨습니다. 구판장에 재활용품을 모으는 곳에다 갔다 놓았습니다. 구판장 아저씨께서 왜 이렇게 박스를 찢었냐고 하시더군요.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제 기억으로 1990년도인가 입식부엌으로 바뀌면서 가스렌지를 사용했고, 난방도 기름보일러로 바꿨습니다. 할머니방만 구들방이어서 찬바람이 불면 늘 군불을 때서 온돌방을 뜨끈뜨끈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비닐 장판이 아닌 하드보드라고 딱딱하고 두꺼운 종이 장판입니다. 비닐 장판은 구들장이 뜨거우면 늘어나고 까맣게 타기도 하는데 하드보드는 아무리 구들장이 뜨거워도 50년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멀쩡합니다. 겨울이 오기전에 기다란 대나무 끝에 지푸라기를 묶어서 구들을 뜷었습니다. 불기가 잘 통하라고 구들밑을 청소를 한 셈이지요. 오직 자그마한 할머니방만 불을 지피는 방이었습니다. 사랑방 아궁이에 왕겨포대와 콤바인 포대, 크고 작은 포대로 여러개 가리나무를 담아서 보관하셨습니다. 머슴들이 사라지면서 가리나무를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랑방 아궁이에 쌓아 놓은 가리나무는 아마 30년이 훨씬 넘은 듯 합니다. 진즉부터 치워야지?했는데 오래된 가리나무이고 워난 많아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불쏘시개는 쓸 일이 없고 가져가서 텃밭에 생강 심은 곳이랑 덮어줄려고 했습니다. 오늘 제 텃밭 창고에서 왕겨포대 6개를 가지고 갔습니다. 나무가지도 몇 다발이 있었습니다. 나무가지는 좀이 슬어서 대부분 썩었더군요. 아궁이 앞을 치우고 아궁이에 있는 가리나무를 담았던 마대포대, 콤바인포대, 왕겨포대, 두꺼운 비료포대 등은 다 삭았더군요. 그래도 가리나무는 차곡차곡 쌓아놓아서 제가 가지고 간 왕겨포대 6개를 다 담았습니다. 사랑방 부엌에 오래 보관해서 먼지가 수북했습니다. 마스크 코 부분이 까맣더군요. 아직도 6포대는 더 될 것 같습니다. 어제 3포대만 실고와서 생강밭에 덮고 참깨고랑에 뿌렸습니다. 고랑에 뿌리면 풀도 덜 나고 썩으면 거름도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도 실어다 고랑에 뿌릴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아끼시느라 쌓아 놓았던 가리나무를 자식인 저는 밭에 거름으로 쓰고 있네요. 오늘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더 부모님께서 아끼면서 절약이 몸에 밴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올해 97세이신 아버지께서도 모자나 파리채 등을 걸려고 벼름박에 못을 박으실 때도 그 흔한 새 못을 박으신 일이 없었습니다. 새 못을 아끼시느라 꼬부라진 못을 반듯하게 펴서 녹슨 부분을 대나무를 잘라 끼워서 기둥에 박았습니다. 이번에 마굿간을 치우는데 끝이 다 달은 괭이며 호미, 곡괭이, 쇠스랑 등 농기구가 수십개나 나오더군요. 옛날 사과는 나무상자에 담았습니다. 오늘 사과상자에 福 자가 그려진 옛날 그릇 아시죠? 하얀 색깔에 파란줄이 있고 가운데 福자가 쓰여진 중발과 대접, 초록색 접시가 한상자 있더군요. 너무 눈에 익어서 밥 먹을 때 쓸려고 몇개를 가지고 왔습니다. 요즘 주부들이 선호하는 영국산 덴비나 미국산 코렐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더 단단하고 멎저 보였습니다. 어제 어버이날에 밭고랑에 가리나무를 깔면서 6년전에 먼 세상으로 가신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은 하루였습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글귀에 옛 날 일이 많이 생각나요 1976년 군 제대를 하셨다구요 ㅋ 전 중학교 다닐때 수업마치고 보수동 뒷골목 헌책 찾아다녔는데 ㅡㅡ;; 헌책 사서 반친구들 다 돌려보고 ㅋ 저에게 돌아올때는 ㅜ 기억하고픈 줄거리는 다 찢겨서 ㅋ 것두 다시보려고 애지중지 숨겨놓으면 ㅋ 어느새 아궁이 불쑤시개로 변해있고 아 선생님 글귀에 옛추억에 잠겨봅니다 16살 나 친구 재숙이도 16살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옛 생각이 납니다 그리운 그시절! 년배가 비슷한가봐요 저도 36개월 꽉채우고 74년 1월 전역 했고요 이전에 머슴둘이 사는집이었는데 지금은 고향에 땅한떼기 없어요 울엄마 13남매 낳고 제가 9살에 임종을 보았죠 흘러간 옛시절 그리워요 어린시절 돌아보는 좋은계기가 되어 고마워요
아고. 일찌기 어머님을 여의셨군요. 어머니께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요? 저희는 육남매인데 제가 장손이라 집안에 할 일이 많답니다. 다행인 것은 형제들이 저를 잘 따르고 있답니다. 부모님께서 큰 아들과 큰 며느리의 위상을 확실하게 세워주셨거든요. 모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조금은 투박스럽지만 옛날 밥상이 생각나서 몇개만 아내가 들고 왔네요. 대접은 막걸리잔으로 좋은 듯 합니다. 말이 있지요. "옛것이 좋은거시여"라고요. 놋쇠로 만든 요강은 보관하고 있는더ㆍ 사기로 된 요강은 버렸습니다. 어제 오늘 날씨 너무 좋더군요. 고추고랑에 제초매트랑 깔았습니다. 편안한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렇더군요. 제가 아버지를 닮아가고 제 아들이 저를 닮아가고 있더군요. 어느날 회사에서 굴러다는 화물차에 짐 실을 때 동여애는 두꺼운 바를 가져왔어요. 창고에 보관하고 있지만 요긴하게 쓸 것 같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아마도 아이스크림하나를 사서는 안드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신 덕에 지금 자식들이 어려움없이 편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생존해 계시는데 올해 97세이십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고맙습니다.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충청도 에서는 그냥 갈퀴나무 라고 불렀습니다 ~ 그때는 나무조사(상감=산림감시원) 술조사(밀주단속) 엄청 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 온 동네가 벌벌 떨었죠 ~ 저희집도 자주 들켜서 아버지께서 벌금내려고 30리 떨어진 면 소재지까지 가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옛 추억 상상이 기억남니다 가을 벼수확하고나면 겨울에는 산에가서 나무하는 생각이 저절로남아있습니다 그때그시절 그리워지는군요 우리시골에서는 소나무 단뿡들어서 떨어져있는 낙엽을 가리나무라고합니다 소나무 가지말라있는 나무 알까지 나무라고합니다 큰 잡목나무 톱으로 절단해서 지개로 질머지고 내려오다가 상감에게 걸려서 돈조금주고 해결했습니다 예전에는 겨울에 땔감 나무하는일이많았지요 나무로 소죽 끌이고 밥해먹고 근불때고 그렇게 생활 했죠 지금도 시골 산에가면 산넘어 지게지고 나무하는생각이 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600평이면 많은 양이네요. 저도 항상 호주머니에 라디오를 갖고 다닙니다. 한두시간은 훌쩍 지나갑니다. 저는 KBS FM을 고정해놓고 애청합니다. 늘 음악이 종일 흘러보내주어서 즐겁습니다. 작년에 작은아들이 아이리버를 사줬는데 아주 좋습니다. 어쩔 때는 흥얼흥얼 따라부르기도 하고요. 저도 360평 텃밭인데 제 놀이터입니다. 쉬엄쉬엄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