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무소주이생기심 ·
가을 소묘
어젯밤 깊은 시간
이른 저녁 탓이라며
허기진 배를 달래려
공원 옆 오뚝이처럼 선
즉석 김밥집에 들렀지.
보글보글 라면 끓는 냄새가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어디선가 시작된 귀뚜라미 소리는
내 낡은, 감정의 현을
팽팽하게 당겨 울려 버리더군.
오래도록 바르르 떨리던 감성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묘한 파동을 일으키더니
단전에서 격정 하나를 끌어올려
결국 목젖까지 밀어 올리더라.
울컥대는 목덜미를 잠재우기 힘들어
보던 신문을 밀쳐놓고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잠시 눈 감고 고개를 돌려야 했지.
간신히 재운 감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삼베 요에 몸을 뉘고
설핏 잠들었었는데
밤손님처럼 스며든 싸늘한 기운에 그만,
눈을 뜨고 말았네.
문득, 옆자리가 밑도 끝도 없이
광활한 벌판처럼 허전하더군.
아마 이 모든 움직임은
가을 앞에 벌거벗은(裸身) 채
고스란히 드러난
내 안의 쓸쓸한 부끄러움이고
손자를 향한 그리움이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