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무소주이생기심 ·
오늘은 느지막이 밭으로 가 호박 구덩이에 물을 주고 집사람이 고추 고랑 옆으로 부직포를 덮는 동안 분사 호스 한 줄을 펴 놓고 부직포에 핀을 박았다.
쪼그려 앉아 오리걸음으로 100미터나 되는 고랑 한 줄을 덮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기에 아예 집사람에게 오늘은 이것만 덮고 나머지는 나중에 하자고 했더니 아직 몸살 기운이 남았는지 “쉽게 그러자.”라며 대답을 한다.
하우스로 나오는 길에 옆 밭 그물로 기어 올라가는 박주가리가 보여 걷어내고 있으니 “하는 김에 여기도 잠시 덮고 나가자.”라고 하기에 거절할 수가 없어 밭둑을 반쯤 덮다가 허리도 아프고 힘들어 못 하겠기에 이것도 다음에 하자고 했더니 순순히 응해준다.
4~5년 동안 걸리지 않았던 몸살이 해외에서도 에어컨을 틀어놓고 자고 귀가해서도 보일러를 켜지 않고 그냥 잠을 청했는데 왠지 새벽에 으슬으슬 조금 춥다 싶더니 면역이 약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결국 찾아들었나 보다.
대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약했는지 큰꽃으아리가 많이 달린 봉우리로 무거웠던지 넝쿨이 바닥에서 기고 있는 것을 보고 고춧대로 다시 만들어 주고 신비를 찬찬히 살펴보니 굵기는 대극천보다 작았으나 많이도 달렸다.
작년엔 냉해로 많이 안 달려 걱정을 시키더니 올해는 너무 많이 달려 솎기 작업을 어떻게 할지 지레 겁을 먹게 한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간사하다 싶어 겸연쩍은 마음에 한 개 남은 복사꽃처럼 발그레 얼굴이 달아오르며 갑자기 쿡 웃음이 났다.
“오후에는 쌀국수로 점심을 간단히 먹었으니, 카페에 가서 빵과 커피로 보충하자.”라는 집사람에게 그러자고 했으나 씻고 나니 몸도 축 처지고 혹시 감기 기운이 카페에 남겨질까 걱정이 되어 컨디션이 안 좋으니 집에서 그냥 쉬자며 눌러앉았다.
커피 머신으로 내린 커피와 쑥떡을 먹으며 영화 한 편 보고 나니 마침 시간을 맞춘 듯 며늘아기가 “내일부터 학교 안 가도 되어 좋아한다.”라며 춤추는 손자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왔다.한 달 동안 등하교를 시키며 걸어 다녔던 길이 영상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재잘재잘 끊임없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며 “할아버지 오늘은 마트에서 우리 뭐 사서 갈까?” 하던 손자의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며 꼭 쥐었던 손에서 전달되던 온기도 가슴으로 올라온다.
저녁을 먹으며 반주라도 한잔하면 붕 뜬 이 가슴 진정되련만 몸이 허락질 않으니, 밖으로 나가 동네 한 바퀴 돌며 심호흡 길게 내쉬어야겠다.
작물

금수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