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무소주이생기심 ·
지난 토요일에는 막냇동생 밭에 콩잎을 따러 가기 위해 오랜만에 고속도로를 달리며 익어가는 가을을 느꼈고, 일요일엔 딸내미랑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기 전 장손과 몇 년 전 차와 빵을 먹기 위해 들렀던 수수밀소 카페에서 예전처럼 커피와 빵을 먹으며 추억을 더듬었다.
아장아장 걷던 손자는 어느새 세월이 흘러 초등학생이 되어 프라이버시가 생겼는지 망설이고 고민하다가 어쩌다 전화를 한 번 하면 "할아버지 지금 학원 차 안인 거 몰라? 빨리 끊어"라며 무안할 정도로 나무란다.
어제는 30여 년 전 생전 처음 성암산에 오르면서 코스로 잡아 수년간 다녔던 아기자기한 산길을 초행인 듯 그대로 걸어보리라 각오하고 베지밀 하나를 챙겨 올랐다.
정상까지 가는 동안 한 명도 보이지 않았는데 꼭대기 정자에서 옛날 내가 했던 것처럼 등산용 아기 캐리어에 세 살쯤 된 애를 태우고 올라온 부부를 만났다.
예전, 캐리어를 메고 올랐던 나를 보는 것 같아 "아이구 귀엽게 생겼네, 첫 등정 축하해"라고 했더니 아기 엄마가 "맞아요. 첫 등정이에요.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기에 팔공산으로 눈을 돌리니 구름 위에 얹혀 있는 모습이 경이롭다. 저 아래 초례봉에도 손자랑 같이 올랐었지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립다.
베지밀을 마시고 미련 없이 길 떠나는 나그네 마냥 정자를 뒤로하고 뒷길을 내려오는데 떨어져 있는 도토리들이 내린 비 탓인지 한결같이 윤기가 난다.
세 시간 반 동안의 산행을 끝내고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뻐근하며 피곤이 몰려온다.
그 대신 무의미하게 소일하지 않고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에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비가 오니 쉬고 내일은 밭에 보르도액 약을 치고 오후엔 위안을 받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먼 거리로 등산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