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설에서 8년이나 보내고 있는 외사촌 여동생을 만나고 왔습니다. 거의 9년전에 얼굴보고 지금까지 보지못했던 동생이 저를 알아 봤을 때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그 외사촌 여동생은 작년에 환갑을 맞이한 동생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론 돌지나고부터 경기가 심해지더니 소아마비와 풍이라는 병으로 지금까지 60평생을 살아온 동생입니다. 갑자기 넘어져서 현관 유리창에 깨지면서 유리조각에 얼굴과 온 몸에 상처투성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4남4녀 8남매중에 큰딸이었습니다. 외삼촌 4분이 계셨는데 큰외숙께서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셨고, 둘째 외숙께서는 교육장으로 정년퇴직하셨고, 막내 외숙께서도 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셨습니다. 셋째 외숙께서만 워낙 고집이 쎄시고 특이한 성격으로 공직생활을 못하셨습니다. 저희 아버님과 큰 이모부님께서 초등학교에 근무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가에 식구들 모임이 있으면 전라북도 교육청 이야기만 하시곤 했습니다. 떵떵거리면서 사셨던 분들께서 다 돌아가시고 둘째 외숙만 생존해 계십니다. 제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전주로 진학을 했습니다. 하숙은 못시키고 큰외갓댁에 저를 맏겼습니다. 그 때 큰외갓댁에는 4남1녀로 외사촌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3살이 많은 형과 동갑내기 동생과 아래로 3명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하숙비로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한달에 쌀 서말정도로 기억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친정에 자식을 맏기면서 농사지어서 쌀을 갔다드렸습니다. 그래서 남원집에 다녀갈 때마다 손에 늘 한보따리를 들려보냈습니다. 한번은 쪽파를 한다발까고 풋마늘을 까서 책보에 싸서 보냈는데 버스 양쪽에 있는 짐을 올러놓은 수 있는 선반에 올려놓았더니 주변사람들이 맵다고 야단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한번도 집에 다녀갈 때 빈손으로 간 일이 없었습니다. 그 외갓댁에 제 막내와 같은 저와 띠동갑인 여동생이 한명이 있습니다. 그 여동생이 갓 돌지나고부터 풍과 소아마비를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60년대 전주예수병원은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대단한 병원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예수병원에서 여러차례 뇌수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갈수로 동생몸이 차도는 없고 여자로서 성인이 되어가니 더 많이 동생한테 손이 가더군요. 태어나서 혼자 바깥출입을 한번도 하지못한 동생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매주 토요일에 시골집에 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시내버스를 타고 남원역까지 와서 완행열차를 타고 노송동 외갓집까지 걸어다녔습니다. 손에 책가방은 한번도 들러있지않고 어머니께서 책보에 싸준 푸성귀며 마늘, 풋고추, 상추, 호박 등 돈으로 따지면 몇푼되지않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저 또한 빈손으로 3년간 외갓댁에 한번도 들어간적이 없었습니다. 시내버스를 탈 때 꼭 어머니께서 "호랑이도 제 자식 이뻐하면 물지않고 좋아한단다. 가거든 보경이랑 잘 놀아주어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보경이는 제사촌 여동생입니다. 저는 저녁먹고 외숙모께서 설겆이를 편하게 하시라고 동생을 제가 맏았습니다. 모두들 잘 아시지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몸무게가 정상인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요. 저하고 띠동갑이니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네다섯살이지만 보듬기가 힘들어서 포대기로 등에 업어서 학교 운동장을 몇바뀌 돌고 들어가면 외숙모님께서도 설겆이를 마치시고 세탁기가 없을 때라 손빨래를 하시기도 했습니다. 다 아시지요? 60년대 상수도 문제를요?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밤새 물을 커다란 장독에 받았다가 쓰기도 했습니다. 저희 외가가 노송동이라 낮에는수도꼭지를 틀어도 쫄쫄 나왔습니다. 제 친구들이 운동장에서 뛰놀다 외갓댁에와서 씻을 때 외숙모님께 미안했습니다. 여동생을 포대기로 등에 업고 학교 운동장을 돌 때 친구를 만나면 부끄러웠습니다. 자전거에 태우고 학교 운동장을 돌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갓댁에 들리면 누워있는 동생이 제손을 꼭잡고 놓아주질 않았답니다. 하루 종일 집에서 누어서 지냈던 동생은 사람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도 친정에 들리면 동생이 큰고모 손을 꼭잡고 놓아주질 않아서 어머니께서 큰외갓댁에 들리시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큰외숙과 외숙모께서 돌아가시기전에 시설로 보내자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부모가 두눈 부릅뜨고 계시는데 자식을 시설에 보내겠습니까? 큰 외숙모께서 아흔 연세에도 육중한 딸을 보듬어서 침대에 옮기시고 뒤집어서 기저귀를 갈아주셨습니다. 보듬어서 목욕을 시키셨습니다. 저희 큰외숙모님이힘이 장사여서였을까요? 그 것은 엄마라서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결국 큰 외숙모님께서 노환으로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동생도 요양시설로 보내야했습니다 그게 벌써 8년째더군요. 그동안 사촌형한테 전화로 안부만 들었습니다. 제 사촌들도 자랑스런 성공한 형제들입니다. 형이 초등학교교장으로 퇴임하셨고, 동갑내기는 서울대를 나와서 현대중공업 정몽준과 같이 졸업해서 현대중공업전무이사로 퇴직했고, 판공비가 서울시장 맞먹는다는 서울시 택시연합회회장을 한 동생도 있고, 전북대학교 공대교수로 퇴직한 동생도 있습니다. 출세하고 성공한 형제들이지요? 자랑이라고 푼수라고 하실런지요? 제 막내 외사촌 동생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전북대에서 퇴직한 동생이 여동생한테 한번도 거르지않고 매일 하루에 두차례씩 들렀답니다. 오늘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라 두서없이 끄적거려봅니다. 매일 동생한테 다닌다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한테 들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무릎수술을 받을때도 동생 절친이 전북대학교병원 정형외과에서 근무하다 자리를 옮겨서 동생친구한테 무릎수술을 받았습니다. 동생한테 가끔씩 오전 11시를 전후해서 전화를 하면 통화가 안되는거에요 오늘도 10시부터 11시반까지 여동생한테 있는 시간이라고해서 한번 가면 안되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더군요. 병문안 같이 조금 봉투도 준비를 했습니다. 이 메세지를 읽으신분들께서 장기입원해있는 요양병원을 아시지요? 요양병원은 많이들 조금은 꺼려 할 겁니다. 저는 거의 9년정도라 동생이 저를 알아볼까?조바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우였습니다. 제가 마스크를 벗는 순간 흐릿한 목소리로 "일기 오빠"하는거예요.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두손으로 하얀손을 꼭잡고 눈물을 참았습니다. 코에 호스를 꽂아서 영양죽을 넣어주는데 모든 기능이 약해서 종이컵으로 하나정도 양인데 20분간을 밀어 넣어야한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보호사님들이 한두명 관리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냥 10분정도로 밀어 넣는답니다. 그래서 대학교수 출신이 전주에 살고 있어서만이 아니거든요. 매일 오전 10시에 가서 핸드폰을 귀에대고 동요를 틀어주고 노래를 따라하게 하더군요. 그래서 병원에 가면 통화가 안되었나 봅니다. 11시에 죽이 수액봉지에 나오니까 호스에 연결해서 한방울씩 떨어지게 조정을 하더군요. 영양죽을 다 먹고 숭늉같은 물을 너무 능숙하게 호스에 꽂아서 주사기로 넣어 주더군요. 또 오후 3시에가서 같이 놀아주다가 4시에 죽을 천천히 넣어주고 물도 주고 돌아오곤 한답니다. 누어있는 동생보다 매일 다니면서 동생을 보살펴주는 동생이 너무 감사하고 훌륭했습니다. 오늘 너무 오랫만에 평생을 아프면서 지금은 요양병원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없는 외사촌 여동생을 만나고와서 두서없는 이야기를 올려봅니다 봄날같은 하루였습니다.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형제애도부럽지만 아픈 아이를 둔 부모마음을 감히 느껴보았어요. 저도 20년째 지적ㆍ뇌병변 장애1급 아이를 케어하며 살고 있어요. 늘 아이 위주로 생활 이돌아가다보니 많이 힘이 부칠때가 많았죠 멀쩡히 초등학교 다니다가 열로인해 아이를 잃어버릴뻔한아이가 감당이않되서 나쁜생각도 참 여러번했는데 이젠 아이와 늘 붙어서 다니며 열심히 살고 있어요. 비록 몸과 나이는 어른이지만 마냥해맑게 웃음을 주어서 행복할때가 더 많은것같아요. 저도늘 걱정이 더늙어서 우리아이도 시설로 가야하나가 큰숙제로 남았습니다. 모두모두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만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