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초등학교 때 학교에 다녀왔는데, 집에 아무도 안계셨습니다. 어른들께서는 들에 나가셨습니다. 지금 같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었을텐데요. 부엌 살강에 보리가 섞인 식은밥 한덩어리가 상보에 덮혀 있었습니다. 여름철에 열무김치는 빨갛고 동그란 프라스틱통에 끈을 매달아서 우물속에 매달아 놓았다가 먹을 때마다 두레박같이 줄을 잡아 당겨서 꺼내 먹었습니다. 냉장고 같은 문화시설이 없을 때라 특별한 밑반찬이 있을 수가 없을 때죠. 깊은 우물속에 차가운 온도가 냉장고를 대신했습니다. 기껏해야 찬물에 식은밥을 말아서 된장에 풋고추를 찍어서 먹기도 했습니다. 이때 식은밥에 콩고물로 버물러서 먹기도 했습니다. 참 고소하고 맛있게 먹었거든요. 요즘 김을 뿌셔넣고 기름치고 깨소금 넣어서 주먹밥 만들어 먹듯이요. 그때 콩을 볶을 때 삭카린이나 당원같은 것을 넣어서 콩고물이 달보레 했습니다. 설탕은 귀하고 보기 힘들죠. 3k들이 설탕은 70년대까지 만해도 설, 추석명절 선물로 많이 쓰였죠. 그래서 깨진 유리알같은 삭카린과 당원으로 단맛을 낼수밖에 없을 때였거든요. 삭카린을 하나 통째로 입에 넣기도 했습니다. 그맛은 씁스레 했습니다. 해마다 어머니 제사를 모시면서 쑥인절미를 만들고 남은 고소한 콩고물을 보면서 옛날 콩고물에 식은밥을 버물러서 먹었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노란메주콩에 생강이랑 마늘을 첨가해 볶은 콩고물이 고소함에 약한 마늘냄새와 상큼한 생강냄새가 어우러저 맛의 앙상블이네요. 그때는 보리가 절반을 차지했죠. 할머니 밥그릇과 아버지 밥그릇에 하얀 쌀밥을 푸시고, 일꾼들과 나머지 식구들은 보리가 더 많은 밥을 퍼주셨습니다. 천천히 먹었습니다. 왜냐고요? 할머니나 아버지께서 남기신 쌀밥을 먹기위해서죠. 도시락 반찬에 멸치조림이나 달걀후라이를 갖고 온 학생은 부자집 아이였습니다. 콩자반에 단무지가 거의였거든요. 80년대 초반까지도 학생들 도시락검사를 했습니다. 점심시간에 교실에 들어가서 검사를 하고 통계를 보고해야 했으니까요. 상. 중. 하 이렇게 표시하고 %로 정리해서 교육청에 보고를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참 우수운 일이네요.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라 혼분식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장려할 때거든요. 시내 곳곳에 혼분식 장려 포스터가 나붙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이삭줍기랑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얼마나 된다고 그랬나!싶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자취를 했던 학생이 있었습니다. 6-70년대만해도 무주,진안,장수 등 시골에서 전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한 학생들은 유학을온 셈이었습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숙을 하는 학생들도 있긴하지만 거의 자취를 했습니다. 새까만 꽁보리밥을 싸온 그 학생이 창피하기도 하고 서글퍼서 눈시울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식생활 문화가 바뀌고 식단이 조절되다보니 남아도는 것이 쌀이 되었네요. 아침식사마저 근처 빵집에서 빵을 사가는 주부들 모습이 낯설지않은 식생활이 되었습니다. 어제 한바탕 세차게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덕분에 기온이 5도 이상 떨어지더군요. 밭작물한테는 한첩의 보약이었겠지요. 앞으로 열흘 정도는 폭염주의보와 열대야가 지속될 수 있고 9월 초까지 늦더위가 있을거라는 예보입니다. 오늘 새볔에 텃밭에 나가서 고추를 땄습니다. 한쪽은 빨갛게 익어서 땄는데 반대쪽이 덜 익은 멍든 고추였습니다. 그늘아래서 이틀 이상 숙성시키면 멍든 고추도 빨갛게 색이 변합니다. 그래서 고추를 따서 바로 건조기에 넣지않고 바람이 잘 통하고 그늘이 있는 곳에서 이틀이상 숙성시켜야 이쁜 고춧가루가 만들어집니다. 폭염과 열대야에 건강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