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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광양안길원
퇴직후 농부로 삶·
(하트) 어머니의 여덟가지 거짓말.

이 이야기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시작(始作)
되었습니다.
저는 가난한 집의 아들 이었습니다.

우리는 음식(飮食)조차 충분(充分)하지 않았습니다.
식사(食事) 시간이 되면 어머니는 종종 제게 당신의 밥그릇에서 밥을 덜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더 먹어라 얘야. 나는 배가 부르구나!"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첫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제가 자랄 때, 인내심(忍耐心) 강한 어머니께서는 자주 시간을 내어 가까운 강에 고기를 잡으러 가셨습니다.

잡은 물고기로 제 성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영양가(營養價) 있는 음식(飮食)을 만들어 주시려 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잡은 고기로 끓인 신선한 생선국은 제 식욕(食慾)을 돋웠습니다.
국을 먹는 동안 어머니는 제 옆에 앉아 제가 먹은 생선(生鮮)의 뼈에 남은 살을 발라 드시곤 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젓가락을 사용하여
손대지 않은 다른 생선(生鮮)을 어머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님은 곧바로 그 생선(生鮮)을 저한테 넘기며 "네가 먹어라. 나는 생선(生鮮)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두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런 후, 제가 중학교(中學校)에 다닐 때였습니다.
학비(學費)가 필요하자 어머니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성냥공장에서 성냥갑을 가져와 풀로 붙이는 일을 하셨습니다.

겨울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저는 아직도 주무시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작은 양촛불 아래서 잠을 이겨가며 성냥갑을 붙이는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어머니, 이제 그만 주무세요. 밤이 늦었어요. 내일 아침에도 일 나가셔야 하잖아요." 이렇게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웃으시며 "얼른 자거라. 얘야, 나는 피곤(疲困)하지 않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세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마침내 입시가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회사에 요청해 하루 쉬고는 저를 시험장에 데려다 주셨습니다.

태양(太陽)이 몹시 뜨거운 날인데도
그 무더위 속에서 끈질긴 어머님은 몇 시간이나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어머니는 곧바로 저를 반갑게 맞이하시고는 시원한 물을 제게 따라주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땀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보고는 컵을 어머니께 건네 드리며 먼저 드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얘야 어서 마시렴. 나는 목마르지 않구나." 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네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병(病)으로 돌아가시자 불쌍한 어머님은 가장(家長)의 역할(役割)을 하셔야 했습니다.

우리가 필요(必要)로 하는 것을 어머님 홀로 해결(解決)하셔야 했습니다. 우리 가족(家族)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고통(苦痛)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家族)의 상태(常態)는 점점 악화되었고, 우리 집 가까이 살던 친절한 삼촌이 가끔 도와주었습니다.
이웃들은 종종 어머니에게 재혼(再婚)하시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고집스럽게 그들의 조언(助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저는 더 이상의 사랑은 필요 없어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다섯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제가 학업(學業)을 마치고 직장(職場)을 얻고 나니, 어머니께서도 이제 일을 그만두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시장(市場)에 가서
몇 가지 야채를 파시면서 필요(必要)한 돈을 버셨습니다.
다른 도시(都市)에서 일하고 있던 저는 종종 어머님께 필요하신 데 쓰시라며
돈을 보내드렸지만 어머니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심지어 돈을 제게 다시 돌려보내기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내겐 돈이 충분히 있단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여섯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학사 학위(學位)를 받은 후, 저는 석사(碩士) 학위를 받기로 했습니다. 회사의 장학 프로그램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는 마침내 그 회사에 입사(入社)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남은 인생(人生)을 즐길 수 있도록 모시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사랑스러운 어머니는 아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나는 혼자 사는 게 편하구나!"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일곱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노년(老年)에 위암(胃癌)을 앓게 되었고 병원에 입원(入院)해야 했습니다.
저는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지만, 제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필하기 위해 고향(故鄕)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수술(手術)을 받고 나서 쇠약해진 몸으로 침대에 누워 계셨습니다. 너무나도 늙어 보이는 어머니께서 깊은 생각에 잠겨 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미소(微笑)를 머금으려고 애쓰시는 어머님의 노력(努力)이 눈에 띌 정도였습니다. 병이 어머니의 몸을 약화시킨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연약하고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너무나 아팠습니다. 어머니는 간신히 힘을 모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거라. 얘야... 나는 아프지 않단다."

그것이 어머니의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거짓말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덟 번째 거짓말을 하시고는,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는 영원히 눈을 감고 소천 하셨습니다.

참외를 특별히 좋아하시던 어머니가 너무나 그리운 아침, 맛있는 참외를 깎아 드리고 싶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하루 되시기를 빕니다.
Farmmorning
전남여수문세열
글이
참나리를
달았네요.
잘~ 보고갑니다.
전남광양안길원
퇴직후 농부로 삶·
꽃은 참나리가 아니고 상사화 입니다. 항상 건강 하세요.
충북충주손종철
노은老隱 늙으막 농부·
사진 속 꽃이 상사화 아닌가요? 꽃이 피면 잎은 사라져 없고, 잎이 돋아나면 꽃은 보이지 않는 상사화.
어머님 살아계실 때는 어머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해 효도를 다하지 못하고, 효도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으니 어머님은 이미 이 세상 떠나고 안 계시니, 상사화의 꽃과 잎의 사연과 같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 모두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효도하도록 합시다.
전남광양안길원
퇴직후 농부로 삶·
감사 합니다. 부모님이 항상 같이 있을줄 알고
...
있을때 잘해
우리모두 같은 심정.. 항상 건강하세요.
전북순창귀농4년차
귀촌4년차귀농인·
그제가 어머님 기일인데 이글을보니 어머님이 더욱그리워 집니다.모든 어머님은 위대합니다.이글을보시고 어머님 아버님이 계시면 지극정성 다하시길 바랍니다
전남광양안길원
퇴직후 농부로 삶·
저역시 부모 없는 고아 입니다. 부 모 님께서 저에 곁을 떠나신지 10여년이 넘었습니다. 곁에 계실때 왜 조금만 더.. 이젠 후회 한들 무었하겠오.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경남양산김임규
참으로 어머니는 위대 합니다. 괜씨리 눈가에 이슬이 맺히네요.
전남광양안길원
퇴직후 농부로 삶·
우리 모두 같은 심정 아버지. 어머니를 다시한번 부를 수만 있다면... 폭염 속에 쉬엄하세요.
경북청송김철원,바람산인
고추를 주로 하고있네요·
길원님 가슴이 아픈 사연이네요 우리네 어머님들이 살아오신 모습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네요 그덕에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게 아닐까요 감사하고 또 감사할일 입니다 어머님 은혜
울산중구탱크로리유대식
귀농 10년차·
어머님 사랑해요
저의 엄마도 내가 9살에 이별했어요
지금도 그때가 생생하건만 모습이 기억나지 않네요
그립습니다 어머니!
전남곡성조용길
고향에 품으로 귀향·
"어머니"라는 이름은
사랑 이 요.
고귀함이 요.
위대함입니다
경남함안농촌사랑
정직하게 살자!·
이 세상에 모든 어머님 들이
그리하지 않아겠습니까

요즘 젊은이들 부모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젊은들이 많아서면

부모님 은덕에 감사 할줄 아는 그런 사회 풍토가
줄어 가는것 같아 아쉽다!
전북고창다둥이네농장
농사가 좋은 마녀 농부·
엄마의 사랑~
그 어떤 사랑도 따라갈수 없지요.
저는 지금 친정 엄마에게 제대로
효를 행하고 있는걸까?
뒤돌아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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