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국민학교 등교 길은 동네 앞에 모였다가 저학년부터 모아서 출발시켰다. 맨 나중에 6학년과 통학반장이 뒤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등교를 했다. 뒤에서 몰고 간 셈이지요. 마을마다 학교에서 6학년 중에 덩치가 있는 학생을 뽑아서 통학반장으로 임명을 했습니다. 저는 5학년 때부터 통학반장을 맡아서 했습니다. 동네에서 학교까지는 꼬빡 십리(4k)길이었다. 책과 필통을 책보로 싸서 등에 메고 뛰진 않았지만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1시간이 걸렸다. 나무로 만든 필통속에서 연필이 뛸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책가방은 중학교나 입학해야 들고 다녔고 그 때는 하나도 없었다. 거리도 워낙 멀기도했지만 구비구비 산모퉁이를 돌고 인가도 없는 외딴길도 있어서 몸이 약하거나 여자아이들은 입학 적령기인 8살을 지나 한두살 많게는 세살 더 자라서 입학을 시켰습니다. 비포장 도로인 신작로는 마을마다 면에서 구역을 정해서 장마철이 끝나면 냇가에서 자갈과 모래를 지게 바재기로 짊어지어 나르면서 장마에 푹 꺼진 신작로를 고르게 만들었다. 이장님께서는 면에서 할당된 신작로를 마을 가구수로 나누어 다시 말뚝을 박아가면서 집집마다 할당을 했다. 집집마다 할당받은 신작로 오른쪽에 갓길에 자갈과 모래를 냇가에서 퍼다가 길쭉하게 쌓아놓았다. 그렇게 쌓아 놓은 자갈과 모래를 장마철이 지나고 움푹 파인 곳을 군에서 땅고르는 커다란 기계가와서 신작로를 반듯하게 고르고갔다. 국민학교 등하교 길은 늘 굵은 자갈길이었고신작로 양쪽에 가로수로 커다란 포푸라나무가 있었습니다. 고목인 포푸라나무에는 버섯이 피기도 했고 가운데가 썩어 껍질만 있는 속이 텅빈 나무도 있었다. 신발은 기껏해야 타이어표 검정고무신이었다. 겨울철이 아니고는 양말을 신은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고무신을 신고 조금만 걷다보면 발에서 땀이나서 새까만 때꼬장물이 생기고 신발이 미끄러위서 벗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운동회나 체육시간에는 맨발로 달리기도하고 공도 맨발로 찼다. 등교길 중간에 괴일이라는 마을앞에 회(세멘트)다리가 있었다. 날씨가 따뜻한 5월부터 여름까지는 물이 있고 시원해서 괴일 다리밑에 나병환자(문둥병)들이 몇명이 비닐을 치고 양은솥을 걸고 살았다. 항아리에 뱀을 잡아 놓았다가 끓여 먹기도 했고, 그 옆에는 동냥으로 얻어 온 곡식자루가 있었다. 다리밑에 있는 나병환자들이 어린이 피를 빨아먹으면 문둥이병이 낫는다는 헛소문이 어린아이들을 공포에 떨게했다. 그래서 하교길에 그 회다리를 건널 때는 절대 뛰지말고 살살 기다시피 조심스럽게 건너라고 통학반장이 저학년 아이들에게 가르켰습니다. 혹시나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나병환자들이 깰까봐서 그랬지않나?싶습니다. 혼자는 무서우니까 여러명이 모여서 그 회다리를 건넜다. 눈썹이 없고 얼굴에 흉터가 있고 손가락이 없으며 중절모를 꾹 눌러 쓴 나환자는 정말 공포의 대상이며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 손이 없어서 쇠로 된 갈쿠리를 내밀면서 동냥을 달라고 할 때는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좀도리 쌀을 담아 놓은 단지에서 한바가지 떠다 주었다. 옛날엔 동냥을 하는 동냥아치들이 참 많았다. 동냥으론 쌀과 보리, 식은밥을 주기도했다. 또 스님들도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목탁을 두드리면서 시주를 받으러 다녔다. 나환자나 동냥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온 동네가 시끄러웠다. 그때는 거의 집집마다 개를 묶지않고 키웠고 그 많은 개들이 한꺼번에 짓어대니까 엄청 시끄러웠다. 그렇게 온동네 개가 짖으면 숨기도했다. 도심지에는 넝마주이들이 있었다. 넝마주이는 양아치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5.16군사혁명 이후까지 있었다. 서울의 경우 40∼50곳에 거지들이 모여 살았으며, 동냥뿐만 아니라 넝마주이를 하기도 했다. 넝마주이는 "사설막"(대원들을 거느린 주인인 ‘조마리’가 관리하는 막), "자작"(개인 또는 가족단위로 만든 막) 방식의 조직을 갖추고 등에 짊어진 망태기와 집게를 사용하여 폐품을 수집하여 판매하면서 생활했다. 넝마주이도 떼지어 다닐 적엔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늘 날 페품수집의 원조가 아닐까?싶다. 구불구불하고 자갈이 깔려있던 신작로가 반듯하게 만들어지고 아스콘으로 포장되면서 포푸라나무는 사라졌다. 담양 메타쉐콰이어길과 진안 메타쉐콰이어길이 사진작가들의 출영장소가 되듯이 커다란 포푸라나무가 양 옆으로 있는 반듯한 신작로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셨군요. 저도 운동회 때 맨손달리기, 장애물경주, 손님모시고 달리기, 청백계주, 마을단위로 계주 나가면 무조건 1등을해서 공책 10권이상은 기본이었습니다. 학교가 멀어서 거의 뛰다싶이 학교를 다닌 덕분에 달리기는 자신있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체육대회에서도 달리기는 늘 선수로 뛰었습니다. 관임 갖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날씨는 엄청 좋으네요. 어제 내린비로 참깨가 잘 올라오고 있더군요.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장미의 계절입니다. 시내 울타리에 빨간 넝쿨장미가 이쁘네요. 저도 텃밭이 제 놀이터입니다. 아내는 우리 슈퍼마켓이라고 하고요. 라디오 하나 호주머니에 넣고 이것저것 하다보면 한두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요즘 고추가 예년에 비해서 더디게 크네요. 아마 밤기온이 차가워서 그런가 봅니다. 두분이서 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고향은 쪽구름 먼지가 물신풍기는 신작로 길을 따라 2km정도가면 속칭 한내(큰물길이라는 뜻)가 있지요 서쪽에는 전주팔경 비비정(지금은 완주 팔경 )이 있고요 또 익산평야와 옥구평야의 젖줄 이며 금빛 은빛 출렁이는 한내 모래무치 메기 빠가 실뺌장어 민물게 등등 갖가지의 물고기가 많이 서식했던 곳 국민학교 다닐적엔 매일 나의 놀이터도 되었고 또한 익산과 전주의 뭇 사람들이 해수욕 물놀이 장소가 되는 곳이기도 했고요 옛날 어릴적 고향 생각이...
그때 그시절로 잠시 돌아갑니다. 지금은 옛시절 다니던 국민학교와 중학교가 폐교되고 면내에 학교들이 통폐합되어 그마져도 학생수가 손에 꼽을정도라니 격세지감을 느낌니다. 한때 한학교 국민학교 학생수가 6~7백명쯤 되었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운 시절 회상의 글 감사합니다. 햇볕은 따사로우나 바람은 차갑습니다. 여긴 또 비올바람이 부는듯 합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부산강서 내 사랑색소폰님. 감사합니다. 52년생인 저도 초등친구들은 많이 멀리 간 친구들이 많답니다. 저희 고향 섬진강 상류인 요천이라는 냇가에도 나라꽃이 필 때면 은어들이 올라왔습니다. 냇물을 막아서 대발로 그물을 쳐서 은어를 잡기도 했습니다. 맨손으로 은어를 잡아보기도 했습니다. 글을 올려주심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너무 옛이야기를 잘 표현하셨네요. 항상 조심하시고 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편안한 저녁 보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