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밖에서 놀다가 해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와서 쇠죽을 끓였다. 겨울철에는 오후 4시 반경인 것 같습니다. 커다란 가마솥에 여물을 넣고 부엌에서 나온 구정물을 붓고 마른나무를 불쏘시개로 불을 붙인다. 사랑방에 동네 일꾼들이 모여서 새끼도 꼬고, 멍석도 만들고, 심심할 때는 두부내기 화투도 쳤다. 그래서 사랑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생솔가지랑 통나무를 아궁이 깊숙하게 밀어 넣고 불을 지폈다. 그래야 다음날 새벽에 쇠죽을 끓일 때까지 구들이 따뜻했다. 사랑방 이불은 청색 이불 홋청이었고, 베개는 나무 토막이었다. 나무토막 베개는 기름이 쩌들어서 빤질빤질했다. 겨울철은 기압이 낮아서 둥네 골목마다 연기가 자욱하게 깔렸다. 시골에서만 볼 수 있는 산수화같은 풍경이었다. 요즘 소들은 영양이 골고르게 만든 사료를 먹고 자라는데 옛날 소는 오로지 여물밖에 없었다. 여름철에 논두렁에서 풀을 베서 말린 건초와 지푸라기를 작두로 썰고 섞어서 가마솥에 넣고 호박이나 씨래기, 콩깍지도 넣고 죽겨를 같이 넣어서 끓인다. 이렇게 끓인 쇠죽은 걸쭉했다. 기껏해야 여물에 호박이나 시래기 죽겨가 전부였다. 소 외양간에는 나무로 된 구시가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쇠죽을 커다란 나무바가지로 퍼서 구시에 넣어주면 머리를 흔들면서 쇠죽을 먹을 때 워낭소리가 평화롭게 들리면서 어미소는 뜨거운 소죽을 잘도 먹는다. 쇠죽이 다 끓고 뒤죽일 때는 구수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진다. 이렇게 하루 아침 저녁으로 쇠죽을 끓여서 소에게 먹였다. 그 때는 목욕탕에 가는 것은 시내에 나가야했기에 쇠죽을 끓인 솥에 발을 담가 굳은살을 벗겨내기도 했다. 암소는 새끼를 낳으면 송아지를 팔아서 살림에 보탰고, 숫소는 빠르게 크기 때문에 한해 키워서 팔았다. 물론 봄부터 농사철에는 논밭을 쟁기로 갈고 소없이는 농사를 하지 못했다. 겨울에는 소마구간을 자주 치우지 못했다. 오랫만에 마구간을 나온 황소는 엄청 날뛰었다. 소 코뚜레를 잡고 소를 진정시킬려면 등에 땀이 나기도했다. 마구간에 지푸라기를 자주 넣어주었다. 겨울철에 소를 따뜻하게도 하지만 소 배설물과 지푸라기가 퇴비를 만들기 때문에 자주 바닥에 깔아준다. 무게가 엄청난 어미소가 지푸라기를 차곡차곡 밟고 다져서 쇠스랑으로 한참을 긁어내야했다. 이것을 마당에서 썪히면 훌륭한 퇴비가 되었다. 마구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지푸라기로 새로 깔아주면 소들도 좋아했던 것 같았다. 고향에서 소를 팔거나 살려면 남원장날 우시장에 가야했다. 오십리길을 다녀와야 했는데 뭐하러 걸어서 따라 다녔나!싶다. 이번이 12번째 이야기입니다. 그 동안 앞뒤도 없이 써내려간 저의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저만의 이야기일 수 있었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짜증나실 때도 있었을 것이고 컨디션이 좋지 않으실 때도 메세지 알림소리가 짜증스러웠겠죠. 또 한편으로는 귀찮을 때도 있으셨겠죠? 제가 핸드폰에 제 이야기를 주로 새볔녘에 써내려갑니다. 그러다보면 환하게 날이 밝습니다. 그래도 한참을 기다렸다 메세지를 보내곤 했습니다. 옛날에 어쩌면 어른들께서는 새볔에 저렇게 잠이 없을까?했는데 이제는 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제 메세지가 어쩔 때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아닐까?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한테는 공감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사계절 중에 봄이 지나고 여름에 접어 들었습니다. 올 여름은 굉장히 무더운 날씨가 있을거라는 기상청 예보가 있습니다. 어떤이는 올해 60년만에 폭염과 45도의 날씨가 있을거라는 경고도 있습니다. 많이 염려스럽습니다. 며칠 전에 흡족하진 않지만 밭 작물에 보약같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 동안 날씨가 쌀쌀해서 움추렸던 고추랑 오이, 호박 등이 훌쩍 자랐습니다. 고추는 추비도 하고 곁순도 땄습니다. 주말 쯤 두번째 줄을 매도 되겠더군요. 이제사 땅속에 거름을 빨아들이기 시작해서 우리말로 고추순이 느클느클하더군요. 오이는 매일 물주기를 했더니 폭풍성장을 하네요. 매일 오이집게를 하나씩 오이망에 집어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있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는 것이 성공을 좌우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음식점에 주인장께서 이런 글귀를 서각을해서 걸어 놓으셨더군요. "맛 있으면 이웃에게 알리고 맛 없으면 주인에게 알려주세요." 괜히 맛있겠구나!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어떤 일을 하던 자긍심을 갖어야 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콩한조각도 나누어 먹어야했는데도 정이 듬뿍했었습니다. 제사를 모시면 아침 동트기전에 음식을 온 동네 나누었지요. 한조각 시루떡이 그렇게 맛있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희 고향이 장수 번암면 아래입니다. 마을 경계가 남원군과 장수군입니다. 그래서 보름에 쥐불놀이하면서 수작골아이들과 싸움을 했습니다.
동네 가운데 또랑이 있었는데 가재가 득실득실했고 피라미같은 물고기도 많았습니다. 어쩔 때는 빠가사리도 있었습니다. 저희는 붕어는 먹질 않았습니다. 꺽지, 메기, 뱀장어, 빠가사리 등 맛있는 고기가 많았거든요. 논에 물대은 물고에 고기들이 많이 모여 있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팜모닝회원님들께서는 옛날이 그리운 분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옛 것들이 자꾸 사라져가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치과에 다녀왔는데요. 본을 뜬다고하죠? 석고를 입안 가득넣고 다물고 있다보면 입가에 하얀 석고가 묻어 있었지요. 근데 이젠 컴퓨터로 그리네요. 세상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
고향 지키시는 오라버님한테 자주 들리세요. 부모님 대신하시잖아요? 저는 종갓집 종손이라 빈집을 자주 다닙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과도 잘지냅니다. 고향을 지키는 친구가 있는데 오늘도 전화로 안부도 묻고 들녘에 양파심은 곳 말고는 모내기를 다 했다고 하네요. 고향은 늘 포근한 엄마품속 같습니다. 친구가 좋아서님. 오라버니 자주 찾아뵈세요.
그러셨군요. 머슴들이 풀을 해오면 아버지께서는 작두에 풀을 넣으시고 저는 작두를 밟았습니다. 이번에 마굿간을 치우는데 작두가 있더군요. 작두날을 남원 장날 대장간에가서 날을 세워오곤 했습니다. 지금은 작두를 사용하는 곳이 있을까요? 여물을 작두로 썰고 구정물넣고 호박이나 배추잎 말린 것을 넣고 죽겨를 넣고 끓인 쇠죽~ 이젠 볼 수가 없죠?
아하 화투 육백을 많이 쳤지요 한참 치다보면 누군가 닭서리란 군침도는 단어를 꺼내면 이미 약속이라도 한것처럼 계획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지요 이짓도 자주 하다보면 결국 자기 친척집이나 자기네 집엣것을 서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삼양라면이 처음 나왔을때 라면내기 화투도 많이 쳤구요 아침이면 콧잔등위에 등잔불 그을음이 볼만했습니다 나올때는 검은 타이어고무신을 서로 바꾸어 신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때로 돌아갈수만 있다면ᆢ 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