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팜모닝에서주신정보로초보농부지식을더해갑니다
옆집에선배님이계시지만잘모르겠어요
그래서팜모닝을의지하며
농사하고있습니다
올해도매년그랬듯이
2월에축사.닭비료나르고3월비닐멀칭하고4월에파종합니다
올해도풍년을기약하며
팜모닝께감사합니다
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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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초제는 근사미는 강해서 오로지 제초제로만 쓸경우 좋지마는 타작물에 사이 제초를 하기에는 바스타 (제초제)와 전착제 를 섞어 약제가 나르지않게 잡초에만 살포 하는게 최고인듯
23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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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얼마전 이곳 영주 평은면에 큰 산불이ㅡㅠ
제 농지에서 빤히 뵈는 곳에 활활~~~
바람은 강하게 불고 곧 이 곳 으로 넘어올것 같아서 조마조마ㅡ
정황을 살피느라 밤새 한 숨도 못자고 토끼눈
되었네요
불 ㅡ 참 무섭네요
우리모두 불조심 ㅡ
하입시더
날이새니 온 통 날라온 재와 소나무 껍질이 가득했답니다
23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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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대추나무 낙엽이 거의 졌다. 아직 덜 껄어 진 것도 있으나 바람도 비도 안오는 하우스 이기에 그런 것 같다.
밑거름으로 유박을 주기 시작 했다. 나무당 20kg 1개 꼴로 주기 시작 했다.
오늘은 0동과 1동 하우스를 리어커로 날라서 부삽으로 뿌려 줬다. 0동 - 4포, 1동 - 8포
22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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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얼룩진 마음을
아름답게 ᆢ
어느 부자집에서 파티가 열렸습니다.술을 나르던 하인이 실 수로 포도주잔을 깨트리는 바람에 그만 깨끗하게 수리가 끝난 벽을 얼룩지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심한 꾸중과 더불어 화를 내고는 손님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스스로 남겠다고 자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안절부절 못하는 하인을 위로한 후, 갑자기 붓을 꺼내 들더니 얼룩진 곳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을 깜짝 놀랐습니다.
얼룩진 벽은 간데 없고 그 자리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벽화가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그림은
'쫓기는 사슴' 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얼룩진 모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허물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감추고 살 뿐입니다.
우리의 얼룩진 모습이 새로이 변화되길 바랍니다.
또한 얼룩진 곳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인생이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무례한 인간으로 살지맙시다.
자기보다
**약하다고 힘으로
누루고,
**권력으로 누르고,
**돈으로 누르며,
**이해심도 조금도 없는 그런 사람은 자기중심적이요,
**이기주의적인 인생입니다.
**이기주의에 빠지면 타인이 눈에 보이지 안습니다. 모든것에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있으면 참으로 피곤합니다.
우리는 안절부절하는 하인을 위로하고 소망의 웃음을 주듯, 사랑이 가슴으로 부터 피어 오르도록 만드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자기 자신에게도 떳떳하며,
**타인에게도
위로와 웃음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천국입니다.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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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대유나르겐을 구입했는데
어떻게 사용하나요 20리터 분무기로
작물에 분사하나요 아님 뿌리에 물과 함께 부어 줍니까
21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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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의 기도 - 김현승
22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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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올해 처음으로 텃밭에 고추500주 심어놓고 팜모닝 농선배님들의 조언 들어가며 나를대로 열심히 키워가는중인데 현재 까지는 아무탈없이 잘 자라주고 있는것 같아서 보람을 느낌니다.
오늘 2번째 비료주고 진딧물 방제하고 유인줄 3단째 매주고,어휴~~회사일 퇴근하고 저녁 어두워질때까지 하고나면 하루일과 끝.
23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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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5 -
우리는 모내기 할 때도 나락타작을 할 때도 학교에 가지 않고 부모님 일손을 도와 드렸습니다.
모내기 할 때는 못줄을 잡고 어른들이 지게 바자기로 모침을 날라서 논에다 뿌려 놓았는데 모심는 사람들이 모를 심기 좋게 모침을 뒤에서 적당하게 분배를 했다.
모판에서 모를 쩌내면 새참을 먹는 시간이었다.
새참은 국수를 삶아 양념장에 비벼서 먹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새참먹는 시간에는 들녘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아가를 키우는 아낰네들은 애기들 형제나 할머니께서 아가들 젖을 물릴려고 등에 업고 나오기 때문에 새참도 넉넉하게 준비를 해야했다.
또 지나가는 사람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새참을 나누곤했다.
그래서 점심 또한 저녁도 넉넉하게 준비해야했다.
저녁은 어르신들이 계신 집은 밥을 따로 싸서 드리기도 했다.
옛날 시골 인심이라 생각한다.
우리집 첫모를 심는 날은 찰밥을 해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산에 있는 논에 식구들이 다 모여서 새참과 점심을 해결했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은 우리집 갑골이라는 산비탈에 있는 자그마한 3개의 다랑논이 있는데 한마지기 반이었다.
맨위에 있는 논 윗쪽에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솟아나 1년 내 물을 가두어서 첫모를 식구들이 다 모여서 심었다.
워낙 굴곡이 있는 논이라 못줄을 잡지않고 흩어지게 모를 심었다.
천수답이지만 가뭄이 있어도 논바닥이 마르지 않아서 대대로 물려받은 소중한 논이었다.
모를 심는 날자는 마을에서도 서로 겹치지않게 잡았다.
한번 심을 때마다 20명 이상씩 모여서 모를 심어야해서 한 마을에서 두세집 이상은 모를 심지 않았다.
저희 동네는 가구수가 많은 제법 큰 마을이었다.
한 마을이지만 아랫 마을,
웃 마을,
잰몰이라고 불리면서 자연스럽게 구역이 나뉘어졌다.
우리집은 주로 아랫마을과 웃마을 아낙네들을 품삯을 주고 모내기를 했다.
모심는 날이면 새참도 날라야했고 모를 다심고나면 논두렁에 못줄 막대기로 구멍을 뚫고 메주콩을 심었다.
보리타작을 할 때도 조퇴내지는 결석을 하면서 부모님의 일 또는 농사일 등을 도와드려야했고 일이 끝나면 해가 넘어가 어두울 때까지 동네어귀에 모여서 형 누나들과 얼음땡, 딱지치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땅 따먹기, 자치기, 숨박꼭질, 간생을 하며 놀았습니다.
보리타작은 보리를 한 곳에 모아놓고 조그만 발동기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보리타작을 했다.
농로가 없고 논두렁이라 발동기를 장정이 지게로 옮겨가면서 보리타작을 했다.
보리타작은 금새 마쳤다.
보리타작을 할 때는 어찌나 꺼끄러운지?
보리 수염 때문에 온몸이 쓰라렸다.
보리를 베내고 논에 벼를 바로 심기 때문에 신작로 양옆이나 논두렁에 보릿대를 세워서 말렸다.
보리타작을 하기위해 보리를 한 곳에 모을 때 바짝마른 보리이삭이 떨어진다.
새벽녘에 비료포대를 들고 다니면서 이슬이 잔뜩 뭍은 보리이삭을 주으러 나갔다.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주워모아야 정작 껕보리는 한줌밖에 되지 않았다.
요즘 말하는 가성비가 없는 일이었다.
보리를 베난 논은 쟁기로 논을 갈고 물을 대서 발로 보리밭 사이에 깔아 놓았던 건초나 지푸라기 보릿대 등을 밟아 넣었다.
물신이 나오기전까지는 발이 나무가시에 찔려서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 다음 써레를 이용해 논바닥을 고르면서 거친 퇴비를 써레가 걸러냈다.
땅이 가라앉을려면 2-3일 정도 시간이 필요해서 며칠 후에 모내기를 했다.
논에 잡초는 초벌, 두벌, 세벌 지심을 맸다.
동네에서 품앗시로 돌아가면서 논고랑 사이를 기어다니면서 잡초를 뽑았다.
그 때 나락 품종은 키가 큰 품종을 심어야했다.
그 대표 품종이 팔광이라는 벼 품종이다.
그래야 그 키가 큰 지푸라기로 생활용품과 농기구를 만들었다.
나락이 키가 커서 비바람에 많이 쓰러지곤 했다.
태풍이라도 지나가면 논바닥에 벼가 다 쓸어졌다.
나락은 낫으로 베서 8주먹을 지그재그로 놓아 한단으로 묶어 논바닥에 세워서 2주정도 말렸다.
이 때 나락 20단을 한 가리라고 했다.
논 바닥에 세우고 몇가리인가?를 확인하고 작년보다 가리수가 많으면 풍년 적으면 흉년이라고 했다.
모내기 할 때 심었던 콩은 걷어서 집마당으로 날랐습니다.
노란 메주콩이었습니다.
밭이 없어서 이렇게 메주콩을 심었습니다.
다 말린 나락은 지게로 마당으로 날라서 노적봉같이 높게 쌓고 종일 공상을 밟으면서 타작을 했다.
장정 한 사람이 바짝 마른 나락 한가리를 지게에 짊어질 수 있었다.
짚을 요긴하게 써야해서 나락단을 집으로 들여와야했다.
나락타작을 할 때는 공상 양쪽에서 나락을 한주먹씩 떼 주는 사람이 2명,
공상을 발로 밟으며 나락을 요리조리 돌리면서 나락을 훑어내리는 장정이 2명,
다 훑고 난 공상 뒤에서 지푸라기를 묶는 사람이 1명,
공상앞에서 갈퀴질로 검부적과 쌓이는 나락을 긁어내는 사람이 1명
이렇게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않고 일손을 도와야했다.
지금이야 벼를 거둘 때 트랙터가 다 해내지만 예전엔 사람이 일일이 낫으로 베어 홀태라는 기구로 훑어서 벼 알갱이를 털었습니다.
홀태는 길고 두툼한 나무 앞뒤 쪽에 다리 네 개를 달아 팔자(八字)모양으로 떠받치게 하고 빗살처럼 날이 촘촘한 쇠로 된 틀을 몸에 낀 형태로 되어 있지요.
이 빗살처럼 촘촘한 쇠틀 사이로 벼를 끼우고 잡아당겨 벼 낱알을 텁니다.
나는 짚단을 바깥 공터에 나르는 일과 나락가리에서 쌓아 놓은 나락단을 공상가까이에 갔다놓는 일을 했다.
저희는 주로 주말에 큰 일을 잡아서 일을 했다.
저는 군복무를 하는 동안도 보리베고 모심는 농번기 6월과 벼베고 보리 심는 농번기 10월에 한달씩 휴가를 맞춰서 일손을 도와드렸다.
군생활을 광주에서 끗발이 좀 있는 보직을 받아서 정기휴가와 포상휴가 및 기타 휴가를 모아서 농번기 때 1년에 두달 가까이씩 집안일을 도와드렸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휴가를 다녀오면 피부가 뽀앟고 이뻐지는데 저는 쌔까맣게 타서 부대에 복귀를 했습니다.
3년 복무기간에 훈련병과 쫄병시절 첫 해만 가을걷이 농사일을 도와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군대생활 할 때는 복무기간이 36개월이었습니다.
옛날 나락은 만생종이었습니다.
2모작을 했기 때문이 아니가?싶네요.
논바닥에 하얀 서리를 있을 때 벼베기를 했고 일손이 모자란 가정에서는 나락가리를 쌓아 놓았다가 눈을 맞고 타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늦 가을이라 해가 짧아서 나락타작을 하고나면 밤이 다가왔습니다.
마당에 횃불을 밝히고 하루종일 공상으로 훑은 나락을 풍구를 돌려 꺼스랭이와 쭉쟁이를 걸러내고 깨끗한 나락을 광에다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광은 문짝이 1번부터 8번까지 8개였으니까 제법 큰 광이었습니다.
맨 아래 1번부터 문짝을 닫기 시작해서 광안쪽부터 나락을 차곡차곡 다 채우면 마지막 8번째 문짝을 닫으면 광에는 나락이 꽉 찹니다.
타작한 나락이 광을 다 채우면 마당에 멍석을 둥그렇게 세우고 몰아서 임시로 나락뒤주를 만들어 그 곳에도 보관했습니다.
이렇게 광에 있는 나락은 그 때마다 방아를 찧어서 쌀뒤주에 쌀을 넣어 보관했다가 꺼내서 밥을 지었다.
쌀뒤주는 두꺼운 송판으로 위에서 뚜껑을 열고 쌀을 꺼낼 수 있게 만들었고 보통 쌀 2가마니 정도는 들어가는 크기였다.
가끔씩 시내 인터리어 소품으로 볼 수가 있는 장식품으로 쓰이고있다.
우리집 쌀뒤주는 느티나무 원목으로 만들어서 무게 또한 대단했다.
나락타작도 3번은 했던 것 같습니다.
바깥에 지푸라기를 묶어서 쌓아 놓았는데 짚널이 웬만한 큰 집채만 했습니다.
지푸라기는 가마니도 짜고, 멱다리도 만들고, 멍석도 만들고, 산태미도 만들고, 꼴 망태도 만들고, 새끼도 꼬았습니다.
소 마굿간이나 돼지 우리에 넣어 소와 돼지를 따뜻하게 보온도 해주고 소 돼지 배설물을 섞어서 밟혀 퇴비도 만들었습니다.
또 소 여물로 사용했습니다.
지붕을 볏짚으로 이으기도 했습니다.
용머리를 틀어서 지붕 맨 꼭대기에 얹고 흙돌담위에도 용머리를 틀어서 올렸습니다.
이렇게 농촌에서는 볏짚이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평야지대에서는 볏짚을 땔감으로 사용했지만 저희는 산에 나무가 많아서 땔깜으로 사용하진 않았습니다.
지푸라기를 땔깜으로 사용하는 평야지방보다 솔가지나무로 사용한 산간지방은 훨씬 깨끗하고 화력 또한 쎄고 굵은 나무토막으로 군불을 때고 숯도 만들어서 장담글 때랑 사용합니다.
또 화로에 숯불을 담아서 방안의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기도 합니다.
싱그러운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4월보다 좀 더 나은 5월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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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친구야
    // 자부 정민영  230412
매화꽃 떨이진 그 곳도
연록 물결 넘실대는 
화사한 봄이겠지?
이곳도
눈뜨고 개화된 꽃을찾아
벌나비 드문이 나르는
봄이라네
보고싶다 친구야
코흘리개 어릴적 모습은
간데없고
봄처럼 활찍웃는 모습은
노년의 주름진 얼굴에
하얀서리 앉은 것이 
어릴적 할배보는 듯...
정감어린 묵직한 말 한마디
내맘에 남아
사라진 코흘리개 그 모습 떠올리네
친구야 게으른 꽃구경
오시게나
텁텁한 탁주잔 거들며
사라진 우리의 옛 모습 그리세나.
봄바람에 날개핀 어린날개 
꽃잎찾아 나르는
벌나비의 향연을 보면서
여간날을 헤어나 보세나
작은 도가니에 담근술
뽀로록 뽀로록 거품 내는
탁주향기 그윽하니
용수에 걸러
탁자에 올려놓고
거나이 들이키며
여간날을 헤어나 보세나
23년 4월 13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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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반차 실어나르게요들어나르려니힘드네요
22년 8월 11일
2
Farmmorning
오늘은 보리베기와 모내기가 시작된다는 절기 망종입니다.
망종의 의미는 벼나 보리같이 꺼끄락이 있는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할 적당한 시기라고 합니다.
"보리는 망종전에 베라"라는 속담이 있듯이 보리베기와 모심기에 알맞는 때였습니다.
보리베기와 모내기가 겹치는 이 때는 "발등에 오줌 싼다"라고 할만금 일년 중 가장 바쁜 때입니다.
다 옛날 이야기죠.
지금은 이양기로 모내기를 하기 때문에 몇일이면 그 넓은 들력에 모내기가 다 마치더군요.
보리는 들녘 기계화가 되는 곳이나 심을까?
좁은 평야에는 보리를 심지 않는답니다.
망종 때 보리 베기를 해보셨나요?
얼마나 뜨겁고, 무덥습니까?
보리를 낫으로 잘라서 몇일 말리고,
조그만 발동기를 지고 다니면서 보리타작을 했습니다.
한낮에는 너무 더워서 그랬는지?횃불을 들고 밤에 보리 타작을 했던 것 같습니다.
또 얼마나 된다고 포대를 들고 다니면서 보리이삭을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비생산적 이었습니다.
포대로 가득 주어담아야 한됫박도 안나오거든요.
그래도 보리가 노랗게 익기전에 고랑에 깔아놓은 퇴비를 모아서 보리타작을 해 먹을때는 재미있었습니다.
불에 익은 보리를 손으로 비벼서 알갱이만 입으로 불어서 먹으면 맛있었습니다.
입주변이 까맣게 거스름이 묻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여름철에 산에서 연한 나뭇잎이나 풀을 베다가 논에 깔아서 퇴비를 했기 때문에 흙이 좋았습니다.
지금처럼 비료는 귀해서 많이 쓰지도 못했습니다.
예전에는 동네에서 비료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종류도 요소와 유안비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름철에는 퇴비증산이라는 표어와 포스터도 있었습니다.
저도 여름방학 때면 밤나무 밑을 깍아서 지게로 날랐습니다.
작두로 썰어서 몇차례 뒤집으면 하얗게 발효가 되면서 기름진 퇴비가 되었습니다.
퇴비를 많이 만들어서 쌓아놓으면 면에서 나와서 포상도 했던 것 같습니다.
옛날 어르신들께서는 참 힘드시게 사셨습니다.
논빼미가 다랑다랑 붙어 있어서 기계가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저희 논중에 제일 큰 논이 너마지기 였으니까요.
오로지 소를 이용해서 쟁기로 갈고,
써래질해서 손으로 둘레를 다 붙여서 모를 심었습니다.
보리밭에 퇴비로 깔아 놓은 나무가지가 썩지 않아서 발은 찔리기도 했죠.
지금은 논에 볏짚도 다 걷어가더군요.
오늘 망종이라는 절기가 예전 망종이 아닌 것 같습니다.
6월 5일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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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초제 맞았습니다.
길건너편 콩밭정지하면서
뿌린 제초제가 길건너 제 고추밭으로
날라와 거의 대부분이 피해를 봤네요.
그럼에도
조심해서 쳤는데 이렇게될줄 몰랐다며
미안하게됐다는 말 외엔 어떻게 보상해주겠다는 말도 없네요.
12월초까지 끌고가는 고추밭이 이렇게되어
의욕상실입니다.
익어가는 고추도 제초제 맞아 검은점들이
수두룩 박혀있습니다.
어쨌거나
남신경 안쓰는 그집은 저 말고도
다른집 참깨도 전멸시키고 휀스너머
남의 두릅밭도 제초제를 날렸더라구요.
그럼에도 자기는 조심해서 쳤으니
별반 잘못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무럭무럭 커가는 피해 안입은 고추들에
위안이 됩니다.
어제 첫물 수확했습니다.
같은품종인데 지난해보다 갸름합니다.
고추두둑 끄트머리에 땅콩호박을
심어뒀는데, 앙증맞게 생겼네요.
23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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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Farmmorning
한적한 시골마을의 여름날
모처럼 북적되는 마을행사에
갔다가 점심까지 얻어먹는 횡재를 맞앗네요
농협조합원 마을별 좌담회에
주민 약50여명이 마을회관에 모였다.
여성지점장님의 농협운영 간단보고후 둘러앉은
밥상에 앉으다보니
어느새 입구자리 다섯이 앉게되고
서로 인사하며 만찬을 즐긴다.
딱봐서 젊다 생각한 나와 다른 둘이가
찬나르고 밥상챙겼어유
행여 둘러보니
엥~~~
우리자린 다 떠내기라네요
모두 귀농.귀촌한 사람에
나이가 60대이네요
다른자리 포함해서 60대는 6명으로
겨우 10%뿐이고 대부분 70대 중반 이상이네요
역시나 여기마을도 늙어갑니다.
근디 마음들은 착하고 예쁘답니다.
난 마을에서도 외딴곳이라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고
나를 알아보는 몇몇이 인사하는
아직은 낯설지만 마을 공동체에 쬐끔
발들여놓은거 같아유
23년 7월 19일
5
4
Farmmor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