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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5 -

우리는 모내기 할 때도 나락타작을 할 때도 학교에 가지 않고 부모님 일손을 도와 드렸습니다.
모내기 할 때는 못줄을 잡고 어른들이 지게 바자기로 모침을 날라서 논에다 뿌려 놓았는데 모심는 사람들이 모를 심기 좋게 모침을 뒤에서 적당하게 분배를 했다.
모판에서 모를 쩌내면 새참을 먹는 시간이었다.
새참은 국수를 삶아 양념장에 비벼서 먹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새참먹는 시간에는 들녘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아가를 키우는 아낰네들은 애기들 형제나 할머니께서 아가들 젖을 물릴려고 등에 업고 나오기 때문에 새참도 넉넉하게 준비를 해야했다.
또 지나가는 사람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새참을 나누곤했다.
그래서 점심 또한 저녁도 넉넉하게 준비해야했다.
저녁은 어르신들이 계신 집은 밥을 따로 싸서 드리기도 했다.
옛날 시골 인심이라 생각한다.
우리집 첫모를 심는 날은 찰밥을 해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산에 있는 논에 식구들이 다 모여서 새참과 점심을 해결했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은 우리집 갑골이라는 산비탈에 있는 자그마한 3개의 다랑논이 있는데 한마지기 반이었다.
맨위에 있는 논 윗쪽에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솟아나 1년 내 물을 가두어서 첫모를 식구들이 다 모여서 심었다.
워낙 굴곡이 있는 논이라 못줄을 잡지않고 흩어지게 모를 심었다.
천수답이지만 가뭄이 있어도 논바닥이 마르지 않아서 대대로 물려받은 소중한 논이었다.
모를 심는 날자는 마을에서도 서로 겹치지않게 잡았다.
한번 심을 때마다 20명 이상씩 모여서 모를 심어야해서 한 마을에서 두세집 이상은 모를 심지 않았다.
저희 동네는 가구수가 많은 제법 큰 마을이었다.
한 마을이지만 아랫 마을,
웃 마을,
잰몰이라고 불리면서 자연스럽게 구역이 나뉘어졌다.
우리집은 주로 아랫마을과 웃마을 아낙네들을 품삯을 주고 모내기를 했다.
모심는 날이면 새참도 날라야했고 모를 다심고나면 논두렁에 못줄 막대기로 구멍을 뚫고 메주콩을 심었다.
보리타작을 할 때도 조퇴내지는 결석을 하면서 부모님의 일 또는 농사일 등을 도와드려야했고 일이 끝나면 해가 넘어가 어두울 때까지 동네어귀에 모여서 형 누나들과 얼음땡, 딱지치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땅 따먹기, 자치기, 숨박꼭질, 간생을 하며 놀았습니다.
보리타작은 보리를 한 곳에 모아놓고 조그만 발동기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보리타작을 했다.
농로가 없고 논두렁이라 발동기를 장정이 지게로 옮겨가면서 보리타작을 했다.
보리타작은 금새 마쳤다.
보리타작을 할 때는 어찌나 꺼끄러운지?
보리 수염 때문에 온몸이 쓰라렸다.
보리를 베내고 논에 벼를 바로 심기 때문에 신작로 양옆이나 논두렁에 보릿대를 세워서 말렸다.
보리타작을 하기위해 보리를 한 곳에 모을 때 바짝마른 보리이삭이 떨어진다.
새벽녘에 비료포대를 들고 다니면서 이슬이 잔뜩 뭍은 보리이삭을 주으러 나갔다.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주워모아야 정작 껕보리는 한줌밖에 되지 않았다.
요즘 말하는 가성비가 없는 일이었다.
보리를 베난 논은 쟁기로 논을 갈고 물을 대서 발로 보리밭 사이에 깔아 놓았던 건초나 지푸라기 보릿대 등을 밟아 넣었다.
물신이 나오기전까지는 발이 나무가시에 찔려서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 다음 써레를 이용해 논바닥을 고르면서 거친 퇴비를 써레가 걸러냈다.
땅이 가라앉을려면 2-3일 정도 시간이 필요해서 며칠 후에 모내기를 했다.
논에 잡초는 초벌, 두벌, 세벌 지심을 맸다.
동네에서 품앗시로 돌아가면서 논고랑 사이를 기어다니면서 잡초를 뽑았다.
그 때 나락 품종은 키가 큰 품종을 심어야했다.
그 대표 품종이 팔광이라는 벼 품종이다.
그래야 그 키가 큰 지푸라기로 생활용품과 농기구를 만들었다.
나락이 키가 커서 비바람에 많이 쓰러지곤 했다.
태풍이라도 지나가면 논바닥에 벼가 다 쓸어졌다.
나락은 낫으로 베서 8주먹을 지그재그로 놓아 한단으로 묶어 논바닥에 세워서 2주정도 말렸다.
이 때 나락 20단을 한 가리라고 했다.
논 바닥에 세우고 몇가리인가?를 확인하고 작년보다 가리수가 많으면 풍년 적으면 흉년이라고 했다.
모내기 할 때 심었던 콩은 걷어서 집마당으로 날랐습니다.
노란 메주콩이었습니다.
밭이 없어서 이렇게 메주콩을 심었습니다.
다 말린 나락은 지게로 마당으로 날라서 노적봉같이 높게 쌓고 종일 공상을 밟으면서 타작을 했다.
장정 한 사람이 바짝 마른 나락 한가리를 지게에 짊어질 수 있었다.
짚을 요긴하게 써야해서 나락단을 집으로 들여와야했다.
나락타작을 할 때는 공상 양쪽에서 나락을 한주먹씩 떼 주는 사람이 2명,
공상을 발로 밟으며 나락을 요리조리 돌리면서 나락을 훑어내리는 장정이 2명,
다 훑고 난 공상 뒤에서 지푸라기를 묶는 사람이 1명,
공상앞에서 갈퀴질로 검부적과 쌓이는 나락을 긁어내는 사람이 1명
이렇게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않고 일손을 도와야했다.
지금이야 벼를 거둘 때 트랙터가 다 해내지만 예전엔 사람이 일일이 낫으로 베어 홀태라는 기구로 훑어서 벼 알갱이를 털었습니다.
홀태는 길고 두툼한 나무 앞뒤 쪽에 다리 네 개를 달아 팔자(八字)모양으로 떠받치게 하고 빗살처럼 날이 촘촘한 쇠로 된 틀을 몸에 낀 형태로 되어 있지요.
이 빗살처럼 촘촘한 쇠틀 사이로 벼를 끼우고 잡아당겨 벼 낱알을 텁니다.
나는 짚단을 바깥 공터에 나르는 일과 나락가리에서 쌓아 놓은 나락단을 공상가까이에 갔다놓는 일을 했다.
저희는 주로 주말에 큰 일을 잡아서 일을 했다.
저는 군복무를 하는 동안도 보리베고 모심는 농번기 6월과 벼베고 보리 심는 농번기 10월에 한달씩 휴가를 맞춰서 일손을 도와드렸다.
군생활을 광주에서 끗발이 좀 있는 보직을 받아서 정기휴가와 포상휴가 및 기타 휴가를 모아서 농번기 때 1년에 두달 가까이씩 집안일을 도와드렸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휴가를 다녀오면 피부가 뽀앟고 이뻐지는데 저는 쌔까맣게 타서 부대에 복귀를 했습니다.
3년 복무기간에 훈련병과 쫄병시절 첫 해만 가을걷이 농사일을 도와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군대생활 할 때는 복무기간이 36개월이었습니다.
옛날 나락은 만생종이었습니다.
2모작을 했기 때문이 아니가?싶네요.
논바닥에 하얀 서리를 있을 때 벼베기를 했고 일손이 모자란 가정에서는 나락가리를 쌓아 놓았다가 눈을 맞고 타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늦 가을이라 해가 짧아서 나락타작을 하고나면 밤이 다가왔습니다.
마당에 횃불을 밝히고 하루종일 공상으로 훑은 나락을 풍구를 돌려 꺼스랭이와 쭉쟁이를 걸러내고 깨끗한 나락을 광에다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광은 문짝이 1번부터 8번까지 8개였으니까 제법 큰 광이었습니다.
맨 아래 1번부터 문짝을 닫기 시작해서 광안쪽부터 나락을 차곡차곡 다 채우면 마지막 8번째 문짝을 닫으면 광에는 나락이 꽉 찹니다.
타작한 나락이 광을 다 채우면 마당에 멍석을 둥그렇게 세우고 몰아서 임시로 나락뒤주를 만들어 그 곳에도 보관했습니다.
이렇게 광에 있는 나락은 그 때마다 방아를 찧어서 쌀뒤주에 쌀을 넣어 보관했다가 꺼내서 밥을 지었다.
쌀뒤주는 두꺼운 송판으로 위에서 뚜껑을 열고 쌀을 꺼낼 수 있게 만들었고 보통 쌀 2가마니 정도는 들어가는 크기였다.
가끔씩 시내 인터리어 소품으로 볼 수가 있는 장식품으로 쓰이고있다.
우리집 쌀뒤주는 느티나무 원목으로 만들어서 무게 또한 대단했다.
나락타작도 3번은 했던 것 같습니다.
바깥에 지푸라기를 묶어서 쌓아 놓았는데 짚널이 웬만한 큰 집채만 했습니다.
지푸라기는 가마니도 짜고, 멱다리도 만들고, 멍석도 만들고, 산태미도 만들고, 꼴 망태도 만들고, 새끼도 꼬았습니다.
소 마굿간이나 돼지 우리에 넣어 소와 돼지를 따뜻하게 보온도 해주고 소 돼지 배설물을 섞어서 밟혀 퇴비도 만들었습니다.
또 소 여물로 사용했습니다.
지붕을 볏짚으로 이으기도 했습니다.
용머리를 틀어서 지붕 맨 꼭대기에 얹고 흙돌담위에도 용머리를 틀어서 올렸습니다.
이렇게 농촌에서는 볏짚이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평야지대에서는 볏짚을 땔감으로 사용했지만 저희는 산에 나무가 많아서 땔깜으로 사용하진 않았습니다.
지푸라기를 땔깜으로 사용하는 평야지방보다 솔가지나무로 사용한 산간지방은 훨씬 깨끗하고 화력 또한 쎄고 굵은 나무토막으로 군불을 때고 숯도 만들어서 장담글 때랑 사용합니다.
또 화로에 숯불을 담아서 방안의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기도 합니다.
싱그러운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4월보다 좀 더 나은 5월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Farmmorning
경북칠곡이성민
답변 고수
5직2농·
새참막걸리 주전자 심부름을 유난히 좋아했던 철부지가
어느덧 노인이되어 추억속 고향의 구수함을 막걸리에서 다시 느낍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막걸리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한참을 먹고 모자라면 또랑물을 더 붓곤 했습니다.
된장에 풋고추가 안주였고요.
세종세종이윤미
얼마전 일 같은데 너무나 달라진 지금에서는 소설속 얘기 같기만합니다~조목조목 하시는말씀이 그시절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합니다~추억속으로 여행 잘 다녀왔습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감사합니다.
추억여행을 다녀오시게 자주 올리겠습니다.
오늘 도마토랑 오이, 가지, 노각오이랑 심고 범죄도시4를 보고 왔습니다.
범죄도시4가 흥행이 되겠던데요.
경북포항정성갑
참 농부가 되고 싶은.·
눈에 익고 귀에 익숙해서 정겨운 단어들이 많아 같은 세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써 깊은 공감과 동지애 마저 느껴집니다. 토지의 평사리 정경인듯도 하구요. 요즘 세대들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울듯한 용어 문장들을 친근히 대할수 있다는 점에서 왠지모를 뿌듯한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올려주시는 글들 매번 감동하며 읽고 있습니다.
유년의 기억을 마치 어제일 말씀하시듯 펼쳐 내시는
그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하면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토지를 탐독하셨군요.
그냥 저의 이야기를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좋은 추억으로 안고 있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경북포항수정농원(체리)
얼빵한농부(농경체등록)·
추억속으로의 일상을 빠짐 없이 글로 잘 옮겨 놓으셨습니다. 다시 올수 없는 그시절로 잠시나마 돌아갔다 왔어요. 글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Good Day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저희 어릴적 농사는 정말 힘들었지요.
150평 한마지기에서 쌀 90k 3가마니를 생산했지요.
동네에 저울이 하나 있었는데
양쪽에서 긴 막대기로 들어올리면 저울추에 따라서 쌀 무게를 쟀지요.
경기양주자연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자...·
코흘리게 어린시절
추억이 새록새록한
긴 글입니다.
아련한 추억으로의
초대 감사합니다.
오월도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감사합니다.
배부르게 먹고사는 지금보다 정이 듬뿍했었지요.
대구수성상훈경영체등록5년차
주말농장포도.거봉.싸인·
옜날.이야기내요.좋은.추억.생각.하면서.긴~새월.아득한.보리고개.장내.땡기먹든.억척.같은.새월.생각.해봅니다.아~아득한.추억의삶이여.지금.농사는.그때.생강하면.좋은.새상이지요.모두.건강하시고.행복.하새요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저희집은 150평 25마지기인데 머슴이 둘이 있었습니다.
큰머슴은 90k 백미 15개. 작은 머슴은 10개를 새경으로 지급했지요.
삼시세끼 밥챙겨주신 어머니께서 1976년부터 머슴들이 없어졌는데 더 편하셨다고 하시더군요.
남의 식구 삼시세끼 챙기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전남장성김동주
천천히 선택 체계적집중·
제가 68년도 전주 35사단 훈련소 출신이랍니다 그시절 우리네 농촌현실을 보는 다큐 단편을 읽는 기분이네요 문장 표현력이 탁월하십니다 아련하지만 가슴이 먹먹한 그때가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 지네요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아고.
대선배님이시네요.
68년엔 저는 고1 때였네요.
저희집은 그래도 시골 부잦집이라 머슴이 둘이나 있었는데도 농사일을 많이 도와드렸습니다.
경남창원봉림동 태진농장
비스싼시절인것같아요!공감이갑니다 대단하십니다!건강하세요,
경북성주가야산 상선불
옛날 그 사연많던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사연 눈앞에 선하고 귓가에 들리는듯 눈물이 핑 도네요 어린시절 그때는 왜 그리 힘들었던지~~~~~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정말 일하기 싫었습니다.
보리밭에 보리를베는데 어찌나 덥던지요?
그 때는 새참으로 국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경남진주부유단감11776
저희집엔 새참도 밥으로 줬는데요
일꾼들 잘먹여야 된다고
반찬도 여러가지 참 맛있었네요
새참 얻어 먹을려고 물주전자 들고 낑낑대면서
따라갔던 생각나네요 ㅎ
경남창원봉림동 태진농장
비슷한 오타가나오옵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하시다보면 오타도 많답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깡아리를 머리에 이고 새참을 날르셨던 어머니께선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새삼 돌아가신 어머니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