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를1300주 심었는데요
지금은 고추가 다리기한참됐는데요 고추나무가 차근차근 통채로
죽어가고있어요
지금 한300주 정도 시들어 죽어가고 있어요
어찌해야 살릴수 있은까요?
21년 6월 19일
3
포도입니다.
수확후 포도의 양분이 저장되는 시기와 과정에 대한 내용이 궁급합니다.
21년 2월 4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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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번 귀 잡아 당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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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혈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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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바퀴 뒤 움푹 패인 곳을 누른다. 
 
무리했거나 일시적 흥분이 원인이 되어 혈압이 높아 진 경우에는 귀 잡아당기기로도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다. 
 
귓바퀴의 위쪽 뒷면을 만져보면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이곳을 '강압구'라고 한다. 
 
우선 귀 뒤쪽에 있는 강압구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귀 표면을 검지로 눌러준다.
이렇게 누른 채 귓불의 밑부분까지
쓸어내리며 잡아 당겨 준다. 
 
양쪽 귀를 동시에 7~8회 반복한다. 
 
또 귓불을 당겨주면 뒷목 부위의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주고 고혈압 환자 특유의 뒷목이 뻣뻣해지는 증상을 부드럽게
해준다. 
늘 혈압이 높은 사람이라면 습관적으로 아침에 잠자리에서 귀 잡아당기기를 해주면 하루종일 맑은 정신으로 지낼수있다. 
 
▶ 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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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불을 잡아당긴다. 
 
간단한 습관성 두통이나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일 때는 귀 잡아당기기로
해결할 수 있다. 
 
두통은 혈관이 확장되거나 수축될 때
일어나는 현상 . 
 
고혈압으로 뒷목이 뻣뻣해질 때와 마찬가지로 귓불을 조금 세게 잡아당겨 주면
두통이 곧 사라진다. 
 
만성 두통으로 인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은 수시로 두 통의 반사구를
잡아당기는 것이 좋다. 
 
▶ 눈이 침침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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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볼을 늘려 아래로 잡아당긴다. 
 
눈이 침침해지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
노화현상에 의한 것과
피로에 의한 것이다. 
 
노화에 의한 눈의 피로는 
 심하면 백내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귀 잡아당기기를 습관화하면 눈이 침침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내장의 진행을 예방할 수 있다. 
 
또 장시간의 시험공부나 TV 시청,
컴퓨터 작업 등으 로 피로해진
눈을 회복시키는 데도 효과적이다. 
 
눈의 반사지점은 귓불의 한가운데 있다 . 
 
귓불 가운데를 엄지와 검지로 누른 후 밑으로 잡아 당긴다. 처음에는 약간 강한 듯하게 누르면서 약 50회 정도 계속해서 반복한다. 
 
▶ 정력감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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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볼 위 돌기를 얼굴 쪽으로 잡아당긴다. 
 
정력은 나이 들면서 감퇴되어 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피곤함이나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감소되는 경우도 있다. 
 
정력과 관계가 깊은 것은 고환의 반사지점이다. 남성의 경우에는 그곳을 자극함으로써 정력 이 증강 되고 스태미너가 생기게 된다. 
 
귓불의 위쪽에는 작은 돌기가 있는데 이 돌기의 안 쪽이 고환의 반사지점이다. 
 
이곳에 검지 손가락을 깊숙이 넣어 돌기 밑으로 손 가락을 거는 듯한 느낌으로 얼굴 쪽을 향하여 잡아당긴다. 
 
그런데 돌기 부분의 가장 아래쪽으로는 내분비와 난 소의 반사지점이 있다. 
 
따라서 이 지점을 자극하면 호르몬 분비가 원활해져 정력증강에 한층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피부를 윤택하게 가꾸어 주기도 한다. 
 
▶ 소화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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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륜각 위 오목하게 들어간 지점을 자극한다. 
 
귀의 색이 누렇고 귓구멍이 작으며 귀가 얇으면 만성 위장병의 위험이 있다고 한다. 
 
이런 상태가 아니라도 식욕이 없거나 트림을 하고 배에 가스가 잔뜩 차 더부룩하다면 장이 안 좋은 것이다. 
 
대장, 소장, 십이지장의 반사구는 귓구멍 위 꼬리처럼 생긴 이륜각 바로 위의 오목하게 들어간 지점이다. 
 
이 지점을 돌아가면서 자극한다. 귀 전체를 돌아가면서 자극해주는 것도 장을 튼튼하 게 하는 한 방법.  
 
▶ 어깨 결림·요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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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중앙 대이륜 주변을 자극한다. 
 
어깨 결림이나 요통은 건강 상태를 깨뜨리는 원인. 
 
이럴 때 귀를 통해 통증을 해소할 수 있다. 
 
어깨, 허리의 반사구는 귀 중앙에 크게 불룩 튀어나 온 대이륜 주변. 이곳을 바깥쪽으로 잡아당기면서 목을 위로 쭉 늘려 본다든지 전후 좌우로 돌리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김 길 용 의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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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7월 28일
19
6
Farm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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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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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사람마다 스승으로 알라.
세계 최대의 문학자로 꼽히는
괴테(Goethe)를 종합적 천재라고
일컫습니다.
괴테의 경구집(警句集)에 나오는
처세 교훈에 즐거운 생활을 하려거든 
지나간 일을 투덜거리지 말 것,
좀 처럼 성을 내지 말 것,
언제나 현재를 즐길 것,
특히 남을 미워하지 말 것,
미래를 신에게 맡기라고 했습니다.
83년의 긴 생애를 산 그의 생가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괴테의 생가를 꼭 방문해 보고 가기 때문에 너 나할 것 없이 강한 호기심과 깊은 감동 속에 생가를 찾습니다.
그는 하늘이 낸 위대한 인물이 었습니다.우리는 어떻게 하면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는가?
괴테는 그의 인생 교훈을 다섯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지나간 일을 쓸데없이 후회하지 말것.
잊어 버려야 할 것은 깨끗이 잊어버려라.
과거는 잊고 미래를 바라보라.
둘째는
될수록 성을 내지 말 것. 분노속에서
한 말이나 행동은 후회만 남는다.
절대로 분노의 노예가 되지 말라.
셋째는
언제나 현재를 즐길 것. 인생은 현재의
연속이다.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즐기고 그 일에 정성과 정열을 다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넷째는
특히 남을 미워하지 말 것.
증오는 인간을 비열하게 만들고
우리의 인격을 타락 시킨다. 될수록
넓은 아량을 갖고 남을 포용하여라.
끝으로 미래를 신에게 맡길 것.
미래는 미지의 영역이다.
어떤 일이 앞으로 나에게 닥쳐올지
알 수가 없다.
미래는 하늘과 신에게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현명하다.
괴테의 처세교훈은 뛰어난 지혜입니다.
우리는 삶을 영위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합니다.
다리 밑에서 깡통을 들고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거지부터 내노라하는
큰 회사의 회장, 그리고 박사나 정부의 장, 차관 등 덜 배우고, 많이 배운 친구들과
선, 후배들 그 모든 사람들을 스승으로
생각하면서 인생을 산 링컨 대통령의
본을 받아야 합니다.
"정보화 시대다."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보를 핸드폰으로 보내 오고 있습니다.
보내준 사람에게 자신이 보기 싫다고 해서 당신은 앞으로 그런 내용의 글은 보내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앞으로는 안 보내줄 것입니다.
싫든 좋든 다 읽도록 하는
인내가 절실합니다.
세상 살이가 그 안에 녹아서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글만 보내도록
주문한다면 그는 곧 우물안 개구리 신세가 될 것이 뻔합니다.
전체를 아울어 볼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지혜의 깊이나 넓이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지혜란 진정 숭고한 것입니다.곡식이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법입니다
오늘도 겸손의 미덕으로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좋은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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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5월 17일
11
8
Farmmorning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14 -
이제 우리들 기억속에서 조차도 사라져가는 새마을구판장을 우리는 어렴풋이 기억한다.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자 애환과 소비의 장이었던 곳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난지 오래전이다.
70~80년대 지역농협에서 운영하던 연쇄점도 이제는 하나로마트로 이름을 바꾼지 오래이고,
6-70년대 남원읍내에서 성업하던 동문상회, 남원상회들도 세월의 변천사에 따라 슈퍼와 마트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져갔다. 
마트, 슈퍼, 편의점과는 달리 이름부터 생소한 구판장이었다.
새마을구판장은 마을부녀회에서 생활물품을 공동구매하여 동네 주민들에게 저렴하게 판매하는 곳을 말한다.
70~80년대 각 마을마다 있었던 구판장은 동네 사람들이 쓸 생활필수품을 부녀회원이 돌아가며 판매했던 마을 점방이었고, 임대를 주어 임대료를 마을에 내고 운영하기도했다.
5일장에 나가야 생활필수품을 장만할 수 있었던 옛 시절 5일은 기본이고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 하루에 몇차례 오는 버스에 쉽거 농촌에서 나갈 용기조차 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이 같은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마을마다 구판장이 있을만큼 보편화된 소비장소였다.
100여호의 이상의 가구수가 있는 큰 마을에서는 2개의 구판장이 있기도했다.
100가구 이상인 마을에는 동네마다 이발소도 같이 있었다.
새마을 사업 이전에는 이같은 작은가게를 점방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자가용과 같은 교통수단이 널리 보급되고 마트 등 대형매장이 생활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구판장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 대부분의 구판장들은 문을 닫은지 오래이다. 
이제는 사라져간 구판장에 갔을 때 간단한 종류의 생필품과 음료수 빙과가 있다.
살 수 있는 물건의 종류도 마트나 편의점처럼 다양하지는 못하다. 
산업화 과정에서 시골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도회지로 떠나버려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수십명에 불과한데다 교통이 좋아져 필요한 물품을 시내에 나가 사다 쓰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과 달리 태어난 마을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웃는 말로 제비새끼 까듯 자식을 6~8명씩 낳아 기르던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교통이 불편하다보니 읍내에 서는 오일장에 장보러 가는 날 빼고는 마을 사람들이 필요한 물품을 사다 파는 마을 가게에서 사서 쓰곤 하였다.
시골마을 구판장은 명색이 가게라고 하지만 보잘 게 없었다.
읍내에 있는 가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니 가게라고 볼 수도 없는 시늉만 낸 가게였다.
그러니 파는 물건이 많을 리가 없었다.
겨우 몇 가지에 불과했다.
빨래비누, 국수, 사카린, 사카린처럼 단맛을 내는 당원, 비닐봉지에 땅콩 몇개와 멸치 대여섯마리를 넣은 술안주, 신선로 그림이 그려진 미원 몇 봉지, 바늘, 실, 머리핀, 참빗 정도였다.
담뱃집을 겸하고 있으면 '아리랑' 궐련담배 몇 갑에 말아 피우는 풍년초를 쌓아 놓은 봉초 정도였다.
이외에 동글동글한 하얀 독사탕(돌사탕)과 비과,캬라멜, 일본말로 '덴뿌라'라라고 부르던 꽈배기 정도를 아이들 간식용으로 팔았다.
이처럼 구판장은 막걸리, 담배, 국수를 파는 것 말고도 마을 내 소통의 중간자 역할도 톡톡히 하였다.
요즈음에는 마을마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회관이 없는 마을이 없지만 그때만 하여도 회관이 있는 마을은 거의 없었다.
마을회의를 할 경우에는 잘사는 집 사랑채나 제각 등을 이용하였다.
여름에는 마을 정자나무라 불렀던 느티나무나 팽나무 고목 아래 멍석이나 돌을 의자삼아 깔고 앉아 이장이 면에서 지시한 사항을 전달한 후 말 빨깨나 하는 몇 사람이 침을 튀기면 말 주변 없는 쑥맥들은 그저 하염없이 듣는 식으로 진행했다.
또한 구판장은 외지에서 마을에 사람이 오게 되면 주로 마을 입구에 있는 구판장을 찾게 되다보니 찾는 집을 안내하고 물건이나 편지를 맡겨 놓으면 가져다 주기도 하고 동네에 구판장에 비상용 전화가 1대 놓였을 때 자식들이 고향부모님께 긴급한 일이나 안부전화를 할 때면 마이크에다 "아아. 누구 아버님. 서울 큰 아들한테 전화왔습니다"라고 방송을 하면 행여 전화세가 많이 나올까봐 부리나케 달려와서 헐떡거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곤했다.
이렇게 마을구판장은 그 마을의 따뜻한 사랑방이었고 애환과 소비의 장이었다.
제가 2학년 담임을할 때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 때도 현충일을 가운데 두고 농번기방학이 있어서 시골에 내려가 들녘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는데 동네 등구나무에 달려있는 확성기에서 저를 찾는 방송이 나온겁니다.
부리나케 달려가서 전화를 받았더니 당직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신 겁니다.
저희반 아이가 대학병원 응급실에 입원해 있는데 학부형과 의사선생님께서 담임인 저를 꼭 만나야한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수학여행을 설악산으로 3박4일로 다녀왔는데 아침 일찍 출발하고 여주에선가 잠간 쉬었는데 그 때부터 아이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설악동 숙소에 도착해서 속초의료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심한 빈혈과 영양실조라 몸이 약해서 정신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쩔 땐 심한발작을 일으키고 있어서 병원에서 천질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심할 때는 입에 거품을 물고 떨기도 했습니다.
그 때마다 손을 주물러주고 처방된 약을 먹였습니다.
놀랐습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택시를 타고 시내를 벗어난 시골에 데려다주면서 그간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3박4일동안 그 아이를 떠니지않고 돌보게 된 일들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부모님께서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다큰 여자아이가 천질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에 상심이 크셨습니다.
집안 대대로 천질을 앓은 조상님이 안계셨는데 의아해 하셨습니다.
빨리 병원 치료를 받아보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바로 대학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아무말도없이 선생님만 찾는다고 학부형께서 학교로 오셔서 저한테 연락을 하신겁니다.
바로 올라와서 병원에 들렀습디다.
온 식구들이 다 모이셨더군요.
정신과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들 줄잡아 15명정도가 있었습니다.
여행중에 하던대로 손을 주물러 주면서 양볼을 손바닥으로 만지면서 "ㅇㅇ야. 선생샘이다"했더니,
눈을 뜨고 살며시 웃더니 다시 잠들더군요.
정신과 치료가 참 복잡합니다.
의사들과 언니, 형부, 부모님이 아무리 흔들고 때려보기도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제가 한번밖에 부르지 않았는데도 눈을 뜨고 다시 잠들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과 가족들한테 속초의료원을 두번가고 경주에서도 병원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의사선생님께서 왜 선생님만 찾은 이유를 알았다고 애쓰셨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에 결혼하고 전혀 아픈데없이 잘 살고 있다고 우연히 만난 형부가 말하더군요.
자취하면서 식사를 거르고 몸이 약해서 정신적으로 혼란을 가져왔나 봅니다.
1년중 담배가 가장 적게 판매하는 달이 1월이고 가장 많게 팔리는 달이 2월이라고 방금 아침마당에서 이야기하네요.
작심삼일(作心三日)을 잘 나타낸 말이네요.
금연을 실천하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못참고 다시 담배를 피기 시작한다는 뜻이겠지요.
6월 5일
15
8
1
올해 대추나무 농약 3회 5/31, 6/17, 7/5) 했습니다. 며칠전 보니까 대추나무 잎파리가 낙엽이 되어 우수수 떨어지고 대추열매만 덩그러니 매달려 있습니다. 순간 소름이 쭉 끼치더군요.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지 궁긍합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 개선할 방법이 있는지요?
21년 9월 5일
2
사무실에서 키우는 자귀나무 나무잎파리가 사진처럼 누렇게 변해가면서 우수수 떨어집니다. 그러다 잎줄기 통채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벌레 같은건 없습니다. 항상 실내에 두었던 분재여서 직사광선을 못쬐어서 그런가 싶기도하고. 겨울철이라 낙엽수종이어서 잎이 질때가 돼서 그러는건가 싶기도 하고. 죽어가는건지 살려고 발버둥치는건지 몰라서 님의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21년 12월 15일
2
Farmmorning
https://band.us/band/52070855/post/1266279969
★ #신소득아이템2 ★
인간은 늘 목말라 하며.
지금 보다는 더 나은 삶을 추구 하고자 발버둥치고
노력하며 욕심을 부려 왔습니다
열심히 사는것은 좋은일 이지만 욕심은 때로 큰
화를 불러오기도 했지요.
이번 글은 농업분야에 관한 글 입니다.
먼저1편 하고 연계성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정도 마진을 보고
사업하십니까?
다양한 산업중에 마진없이 사업하는 경우는
없읍니다.
사업이란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것 이니까요.
그런데, 과연 네가 하는 사업이 원하는만큼 이윤을
남기고. 남길수있는 사업 인가요?
아이러니 하게도 많은 사업가에게 물어보니
목표는 있지만 허구헌날 적자랍니다
물론 사회적인 다양한 요소가 적자를 불러잃으킨것도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깨닫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업 아이템 선정이 잘못 되었다는것을요.
아이템선정 당시 충분히 검토 해 봤겠지요?
그런데도 적자가 나는것은 바로 아이템 선정이
잘못 되었다는것이지요. 어떻한 변명도. 핑계도
누가 보상하여 주지않습니다.
저는 모든 강의에서 제 수업의 수강생 들께 수없이 말 합니다.
투자는 적게. 부가가치는 최고로...
누구나 쉽게 공감 하지요.
누구나 돈 적게들이고 많은돈 벌고 싶지요.
하지만 누구나 실천. 가능은 하지 않습니다.
바로 아이템선정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딱 맞는 아이템을 찾아놓고도 계산기 두드리며 이 핑계 저 핑계 되며 망설이다 결국
포기하는... 여기서 성공하는자와 실폐하는자 가 나뉩니다.
서론이길어 본론 으로 들어가서
100원 투자해서 1000원버는 사업이 있습니다.
돈 있다고 되는것은 아닙니다. 마진이 높을수록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즉 반도체. IT. 등 을 예를 들수있겠지요.
산업중에 표준마진표 라는 것이 있습니다.
업종별로 표준마진이 다를수 있습니다 만.
10원투자해서 1000원버는 사업도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사업인데도 아무나 할수 없고 특정인만 해 먹을수있는 사업이지요.
오늘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100투1000수
#100원투자해서1000원버는사업 이
#종자육묘사업 입니다
우리나라에 종자회사는 전부 외국계 회사입니다.
IMF때 외국으로 전부 넘어 가버렸지요.
종자(원예작물. 화훼작물.목본류. 초본류. 등) 도 90% 정도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육묘도 10~20% 정도 수입을 해마다 하고 있지요. 참으로 안타깝다 안할수 없읍니다.
다행이도 아직은 우리나라. 토종이나 자생종은
해외 유출이 그리많지 않기때문에 다행중 다행이지만 그동안 수십종이 해외로 반출되어 우리것을 빼앗겨 버린것이 안탑갑기는 합니다.
지금이라도 육묘기술을 익혀 토종. 자생종을
활성화 시킬 필요를 느낍니다
앞서 정원산업이 활성화 된다는 전제하에
지금이야 말로 토종. 자생식물 육묘사업을 할때입니다
기존의 육묘업체는 대다수 원예작물모종과
초화류(화훼) 또는 조경수용 뿐입니다..
틈새시장이며 시장이 아주큰 시장 입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문은 열려있고 들어가면 되는것 입니다.
#육묘사업 중
1)씨앗(종자)으로 번식하는것
2)종자(구근)으로 번식하는것
3)삽목을 하여 번식하는것
4)접목을 하여 번식하는것
5)뿌리 로 번식하는것. 등
#유성번식 과 #무성번식 을 통해 식물을 번식하는것이 #육묘사업 입니다.
나의 재정능력 과 시간. 기술을 검토하여 최소
비용으로 시작할수 있는 사업입니다.
또한 투잡. 재택사업도 가능한 사업 이기도 합니다.
시장성은 무궁 합니다.
전국농가. 화훼전문점. 온. 옾라인판매.
도. 소매. 기업. 관공서. 가정. 개인 등
무궁무진 합니다.
장문의 이글을 읽으신 여러분은 행운이 벌써 따른것 입니다.
상담신청은 방문 또는 문자로 댓글. 일창으로 간략하게 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음 연제글은 ★ #신소득작물선정 ★ 에
관하여 올려 드리겠습니다.
#사단법인한국약용작물산업교육협회장
김 종 군 드림
23년 2월 12일
3
세상에 이런일이 있나요
너무 황당합니다 (퍼온글)
결혼 시킨 아들의 행실

안녕하세요.
저는 60대 후반 할머니입니다.
제가 이렇게 사연을 이야기하게 된 이유는 며느리와 아들놈 때문입니다.
저희 부부는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몇 년 만에 어렵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가 생기지 않다가
몇 년 만에 생긴 아들이라 정말 귀하게 키웠습니다.
금(金)이야 옥(玉)이야 땅에 내려놓으면 다칠까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웠던 아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식을 그렇게
키운 저희 부부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아들을 키워서 2년 전에 결혼을 시켰습니다.
영감은 국장급 중앙 공무원으로
은퇴(隱退)하여 현재 집한 채에
연금(年金)이 나오고 있어서
둘이서 사는 데는 큰 불편함이 없이 살고 있고 아들이 결혼을 한다고 하니 반갑기도 했습니다.
빨리
손주를 보고 싶은 마음도 컸고요.
그렇게 결혼 전 며느리 감이라고 집으로
22년 9월 6일
1
1
사라호 태풍이 불고
들판의 복판에 홀로선 외딴집한채 뜨럭 위까지. 차올라. 마루 와 방으로 돌진해 오기 일보직전 온통 사방 물 천지 륿 피해 방천뚝 으로 피난 비는억수로 쏟아지고 몸을녹힐 방도없는 마을 은 멀고 비가그치도록 비를맞고 서있었던 소년 은 이제.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됐다
아마 피해는 그때보다 심할것 같다
부디 힘내세요!
비 그치고. 맑은 내일은 반드시 옵니다!
23년 7월 21일
- 고약(膏藥) -
옛날에 종기가 나거나 부스럼이 났을 때 어르신들께서 붙혀 주셨던 흑갈색이고 끈적끈적한 고약(膏藥)이 생각나시나요?
아마 복용하는 약 말고는 만병통치약 이었습니다.
특히 뒷꼭지 목부분에 왜 그렇게 종기가 많았던지요?
위생시설이 좋지 않았던 시절에 몸에 부스럼이나 종기는 많이 생겼습니다.
종기가 생기면 어김없이 새까맣고 끈적끈적한 고약을 잘라 불에 성냥불에 달구어서 기름칠한 문종이에 잘라 환부에 붙이면 고름이 고약에 녹아서 빠져 나왔습니다.
이 때 고약을 떼어내면서 머리카락이라도 고약이 붙으면 어찌나 아팠던지요?
또 고약이 녹아 흘러내리기도 했습니다.
고약은 장년의 나이에 있으신 분들이라면 고약에 관하여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추억의 상표 중 하나로 인지도가 높은 가정의 국민상비약이다.
지금처럼 약이 흔하거나 병원 문턱이 낮지 않았던 시절  몸에 커다란 종기가 나면 여간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욱신거리는 아픔이나 통증은 더할 나위 없고 종기가 빨갛게 부풀어 오르면서 열이 나거나 몸에 오한까지 겹치면  쉽게 낫지 않을까 봐 두려운 것이 사실이며,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이럴 때 고약의 효능은 매우 뛰어났습니다.  고약은 만병통치 약이었습니다.
고약은 까맣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고약을 불에 구슬려서 아픈 부위에 붙이고 하룻밤만 지나면 통증이 사라지고,
하루밤이 더 지나면 신기하게도 종기 안에 있던 고름이 쏙 빠져나옵니다.
이것이 고약의 특징입니다.
고약의 주원료는 바로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있는 쇠비름입니다.
쇠비름은 쇠비름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잡초입니다.
농사에는 아주 귀찮은 잡초입니다.
밭고랑이나 길가에 흔하게 자라며 생명력이 아주 강한 풀입니다.
뽑아서 밭두렁에 올려 놓아도 쉽게 죽지 않습니다.
뜨거운 여름 모든 풀잎들이 더위에 지쳐서 축 처져 있을 때도 태양볕 아래서도 유난히 반짝이는 두툼한 잎이 쇠비름입니다.
고약은 가정상비약이나 항생제를 구하기 힘들고 병원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70년대까지 가정치료제로 많이 사용되어 왔습니다.
종기를 치료하는데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에 고약을 붙이기만 하면 크게 곪았던 종기가 어느 새 농(膿)이 빠지는 놀라운 효능이 있었습니다.
어릴적 이마나 목에 고약을 붙이고 다닌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저희 사랑방에는 겨울에 머슴들이 모여서 멍석도 만들고 멱다리(멱서리)도 만들었습니다.
멱다리는 짚으로 촘촘하게 역어서 만든 곡식을 담은 그릇으로 바닥이 넓고 높이가 높아서 가마니보다 더 많은 곡식을 담을 수 있고,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농기구입니다.
이 때 목에 붙인 고약이 방이 뜨거워서 녹아 나무로된 토막 베개에 새까만 고약이 묻어 고약한 냄새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때 고약은 엄지 손가락 크기로 판매를 했습니다.
부스럼이나 종기의 크기에 따라 잘라서 붙였습니다.
"이명래 고약"이 그 중 대표였습니다.
일본군 대좌 사사키가 이명래고약으로 악성종기를 치료하고 이명래한약방을 찾아서 세번 놀랐다고 합니다.
첫째는 너무 더럽다는 것.
두번째는 치료비가 너무 싸다는 것.
세번째는 잘 낳는다는 것 때문에 세번 놀랐다고 합니다.
지금도 약국에서 판매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고약을 사용하는 가구는 없는 것 같습니다.
고약보다 더 효과가 빠른 연고와 항생제가 등장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새벽녘에 텃밭에 나갔는데 그제 쏟아진 비로 기온이 조금 달라진 느낌이더군요.
그래도 하우스에 참깨를 말릴 준비를 하는데 땀이 엄청 나더군요.
내일부터 2박3일로 남원으로 피서를 갈려고 합니다.
지리산 한바뀌돌고 잠은 시골집에서 잘려고 합니다.
남원에서 육모정으로 올라 정령치에서 바라본 지리산절경은 멎지거든요.
비라도 한바탕 내려주면 지리산 운해는 장관입니다.
달궁계곡과 뱀사골계곡을 거쳐서 인월과 운봉을 지나면 폭포가 몇군데 있습니다.
폭포에 물이 워낙 차가워서 발만 담가도 온몸이 시원합니다.
시골집 바깥채를 게스트하우스같이 모양을 내서 수리를 오래전에 했습니다.
한낮에는 뜨거우니까 차로 한바뀌돌려고 합니다.
오늘 텃밭에 다녀와서 맛있는 백도복숭아와 자두도 샀습니다.
내일 저녁은 고냉지인 장수에서 흙돼지 삼겹살로 할려고합니다.
예년같으면 8월15일 광복절이 지나면 찬바람이 있어서 시원했는데 올해는 늦더위가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 초등학교 다닐 때 여름방학 때면 지리산 천왕봉등반을 꼭 다녀왔습니다.
백무동코스로 올라가면 참새미야영장에서 1박을하고 장터목 야영장에서 새벽4시에 출발해서 천왕봉 일출을 보았습니다.
한신계곡으로 등산하면 세석야영장에서 1박을 하고 장터목에서 야영을 했습니다.
지금처럼 등산장비가 좋을 때가아니라 운동화에 반바지에 티셔츠와 모자만 준비했었지요.
텐트는 A형 텐트라고해서 텐트를 피면 A자같아서 A형텐트라고 불리었습니다.
야영장에서 된장에 감자와 호박만 썰어 넣었는데 그렇게 맛날까요?
고산이라 코펠에다 한 밥은 설어서 더글더글했었습니다.
8월15일전에 다녀오면 장터목야영장에서 침낭이 없이도 야영을 했는데,
8월15일 지나면 침낭없이는 추워서 잠을 못잤거든요.
몆번을 다녀왔는데 8월15일을 기준으로 분명 날씨가 변했습니다.
한 번 속으면 속인놈이 나쁜 놈이고,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나쁜놈이고,
세 번 속으면 그 때는 공범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순리대로 살아가는 지혜로움이 필요할 때라 생각합니다.
이까짓 더위 얼마나 더 가겠어요.
또하나 걱정거리가 생겼네요.
감기환자 중에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고생한다는 소식에 그 답답한 마스크를 착용해야지 않을까?염러스럽습니다.
8월 8일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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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11 -
우리는 밤엔 멀리 있는 측간에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방안에 놓아 둔 요강에다 소변을 보았다.
측간은 대소변을 배설하는 장소로 만든 집이나 시설을 말한다.
뒷간, 헛간, 북수간, 통세, 통시라고도 했다.
절에서는 절 입구나 대웅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해우소(解憂所)라는 이름으로 화장실을 알리고있다.
가파르고 높은 절벽에 해우소를 만들어서 무서움도 느낄 수 있었다.
측간은 시골집 담장 밖 한구석에 벽을 치고 웅덩이를 파서 독을 묻거나 한 것이 있고,
또는 제주도처럼 돌로 담을 쌓고 네모나고 길쭉한 노둣돌 2개를 양쪽으로 놓고 대소변을 받는 부분을 구축하는 것 등이 있다.
헛간에 부설한 것으로 농촌에서 퇴비를 만들 목적으로 풀이나 아궁이에 있는 재 등을 헛간에 쌓아두고 그 한쪽에 노둣돌을 놓아 용변을 보고 삽으로 풀이나 재로 덮는다.
이 배설물이 곧 재 등에 섞여서 퇴비로 사용했다.
사랑방 한쪽에는 간이용 변기가 있었다.
나무통, 장군, 커다란 독 등을 툇마루 한쪽 끝이나 골방 밖에 설치하고 소변을 보도록 했다.
우수운 일이지만 돼지막을 측간으로 사용했다.
계단을 올라가서 생리작용을 해결하면 돼지가 꿀꿀대면서 받아 먹기도 했다.
1976년에 군복무를 마치고 제주도 한라산 등반을 했다.
서귀포 시내에서 민박을 했는데 뒷뜰에 돼지를 키우는 곳에 화장실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서 돼지를 쫒아내고 볼일을 보곤했다.
자꾸 돼지가 가까이와서 불안하기도 했다.
안방에서 기거하는 아낙네들은 별채에 있는 측간을 나다니기가 불편해서 안방에 요강을 두고 소변을 해결했다.
측간을 깜깜한 밤에 다니기도 무섭기도했다.
옛날에는 온 식구들이 안방에서 오글오글 모여서 생활했기에 제법 큰 요강도 아침이면 거의 다 찼다.
새색시가 꽃가마를 타고 시집을 갈 때도 요강을 같이 가마에 실어서 용변을 보게했다고한다.
요강은 혼수품 중에 꼭 포함하였다.
사기로 된 요강도 있고, 놋쇠로 된 요강도 있었다.
얼마전에 KBS 토요일에 방송된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이라는 프로에서 MZ세대들이 요강을 꿀단지, 양념단지 등 보물단지로 알고 있었다.
이사를 할 때도 맨처음 솥과 요강을 안방 가운데 갔다 놓기도했다.
동네에 공동우물을 사용할 때라 수세식화장실은 엄두도 못했다.
제가 근무했던 학교도 퐁당퐁당 재래식 화장실이었는데 새 건물로 이사를 하면서 수세식 화장실이 막히는 경우가 있어서 화장지 검사를 한적도 있었다.
그때가 1984년도인데 지금 생각하면 참 웃픈 이야기다.
측간에 화장지는 신문지가 전부였다.
그 전에는 옥수수 껍질이나 지푸라기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안경점이나 라사점(양복점) 등에서 만든 낱장 일력을 구해서 측간에 걸어놓고 한장씩 뜯어서 화장지로 사용했다.
우리나라 관광공사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불편사항을 조사했는데 그 대답이 지저분한 화장실 문제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 고속도로 화장실뿐아니라 공중 화장실 등도 깨끗하게 정비되면서 두루마리 화장지가 걸려있다.
물론 우리나라 국민수준이 나아진 것도 한몫 한 셈이다.
특히 영동고속도로를 타다보면 강원도쪽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은 냉난방 시설을 물론이고 너무 깔끔했다.
호텔급 화장실 같았다.
지금은 상수도 시설이 다 되어 있어서 우물물을 이용하는 곳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도시에서 살던 아이들이 방학하면 제일먼저 시골 외할머니댁에 놀러가서 원두막에서 참외와 수박을 먹는 것이었는데 아이들한테 목욕하는 것과 화장실이 제일 걸림돌이었다.
불을 때는정지(부엌)에서 가스나 전기로 음식을 하는 입식부엌으로 바뀌고 화장실 및 샤워시설도 다 갖춰서 깨끗한 위생시설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명절 때마다 식구들이 다 모이면 비어있는 사랑방까지 불을 지펴서 사용했다.
오랫동안 비어 있어서 군불을 지피면 방바닥은 뜨거운데 웃풍이 심해서 감기에 걸리기가 쉽다.
설명절은 겨울이라 많이 불편했다.
어린아이가 딸린 가정은 더 지내기가 너무 불편했다.
집에서 1Km정도 거리에 지리산 일성콘도가 있다.
시골집에서 가까운 곳이라 회원권을 샀다.
설명절에 아가들이 있는 친척들을 콘도에서 자고 일찍 차례를 모시러 나오라고한다.
그래도 전국에 7개의 일성콘도가 있어서 친구들이나 가족모임을 할 때 가끔씩 사용한다.
저는 농사일 할 때나 태풍이 있을 때 유튜브에서 일기예보를 보곤합니다.
오랫동안 제가 많이 시청한 유튜버는 "소박사 TV"입니다.
기상예보나 태풍경로 등을 알기 쉽게 영상을 만들어서 즐겨보는 편입니다.
여러 유튜버들이 있는데 저 개인적으로 제일 정확하고 쉽게 설명을 한 것 같습니다.
기상특보나 일기예보를 필요로 하는분께서는 유튜브에서 "소박사 TV"를 시청하시면 날씨에 대한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농사일은 하늘이 70%이상 도와야 풍년을 기대합니다.
특히 태풍이나 기상이변일 때는 "소박사 TV"를 시청하시면 날씨에 대한 예보를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중부지방에는 비가 내리고 있나봅니다.
강풍이 있다는 예보인데
조용하게 작물에 보약같이 흡족하게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5월 26일
20
1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1 -
우리는 기다랗고 커다란 안테나가 달린 흑백TV에 리모컨이 없는 로터리식이어서 손으로 직접 채널을 돌렸던 걸 기억한다. 
로터리 손잡이가 프라스틱이라 오래 돌리다고면 망가지고 뻰치로 찝고 돌려서 채널을 맞췄다.
TV화면이 잘 안나오면 한사람이 대나무에 막대기를 엮어서 만든 사다리를 타고 긴 대나무를 잘라서 지붕위나 높은 감나무위에 실외안테나를 좌우로 돌려가면서 안테나 방향을 맞추고 화면을 조정해서 인테나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게 철사로 묶었다.
TV는 네개 다리에 양쪽으로 창문도 달렸고 가운데 열쇠가 있는 TV도 있었다.
요즘 장식장 같았다.
TV가 워낙 덩치가 커서 웃목을 다 차지했다.
흑백TV의 대표상품은 대한전선과 금성TV였던 것 같았다.
친구들과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레스링의 박치기왕 김일, 7전8기의 홍수환, 김기수 등의 경기와 그 유명했던 안방극장의 대표작 여로, 팔도강산, 아씨 같은 드라마와, 전투, 육백만불의 사나이, 소머즈, 원더우먼 등의 외국 드라마를 보았던 걸 기억한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가 달에 착륙하는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했다.
특히 밤이 긴 겨울철 저녁시간에는 동네 사람들이 안방 가득하게 모여서 드라마 등을 시청하고 돌아갔다.
동네 사람들이 다 나가고나면 할머니께서는 하드보드로된 장판을 나락잎으로 만든 빗자루로 모래를 쓸어내고 물걸레를 빨아서 방바닥을 깨끗하게 닦으셨다.
지금도 몸채 작은방 두곳에 기름칠을 해서 반질반질한 하드보드장판이 깔려있다.
지금이야 흙 밟을 곳이 없어서 하얀 운동화를 몇날을 신어도 깨끗하지만 그 때는 포장된 마을 길은 없었다.
눈이라도 내리고 얼었던 길이 녹고 질퍽거리는 날이면 땅을 밟고 와서 바지나 양말에 묻은 흙이 따뜻한 방에서 말라 다 떨어진다.
진짜 모래가 한 웅큼 나올 때가 있었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구들방에 모여서인지?벽지가 끕끕하기도 했다.
특히 문종이 하나로 바른 창호지는 물을 적셔놓은 것 같았다.
우리는 대중가요를 대표하는 이미자, 남진, 나훈아, 하춘화, 조미미, 배호, 펄시스터즈, 김상희, 윤항기, 패티김, 조영남, 이용복, 이현, 정미조, 김정호 등의 가요와 장현, 양희은, 어니언스, 서유석, 이장희, 남궁옥분, 소리새, 해바라기, 이문세, 이연실 과 같은 통기타 포크송을 좋아했고, 들고양이, 사랑과 평화, 산울림, 다섯손가락, 이치현과 벗님들을 비롯하여 대학 가요제에서 배출한 옥슨, 건아들, 송골매, 해오라기, 노고지리 등 그룹사운드 음악을 들었다. 
조용필과 이용과 전영록도 기억하며 묘하게 그때는 그 중 한명만을 좋아했다. 
년말이면 1년동안 국민들이 많이 좋아했던 가요대상 시상식이 방송사마다 날자를 잡아서 발표했다.
대상을 받은 가수는 최고의 한해였다.
그러다 이선희, 김현식, 이상은, 김광석, 유심초 등를 좋아했고 또 다시 90년대에 나타난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에서는 정말 큰 세대차이를 느끼는 획기적인 기회였다.
노랫말을 스님께서 불경을 읽드시 중얼중얼거리는 랲이라는 가요가 대중가요를 앞서기 시작했고 머리를 땅에 박고 뱅뱅돌리면서 서커스에서나 볼 수 있는 온갖 몸놀림은 우리를 헷갈리게 했다.
젊은 아이들이 테이블에서 담배피고 술 마시며 그 자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락카페가 참 신기했다. 
젊은 아이들이 그룹으로 춤을 추면서 무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저 남진이나 라훈아, 현철, 설운도, 송대관, 태진아, 이미자, 하춘화,주현미 등의 대중가요에 꽃혔던 우리는 어느 날 K-Pop이 전세계를 휩쓸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유럽뿐만 아니라 멀리 아프리카에서도 K-Pop이 선풍을 불러이르키기 시작했다.
요즘 젊은사람들 참 대단한 것 같다.
먼 타국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 쫒아다니는 열정은 어디서 나온걸까요?
하긴 우리나라도 외국 팝가수가 들어와서 공연을 할 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꼴불견이지만 일부 여성팬들이 브라와 속옷을 벗어서 던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제 6시 내고향이라는 시간에 시장에서 일을 하시는 어느 아주머니께서는 핸드폰을 3대를 갖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오로지 그가 좋아하는 임영웅의 사진뿐 아니라 그 가수의 일상을 담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힘들 때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로 위안을 삼기도 했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바라보면서 역경을 이겨낸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문화를 널리 전세계에 알린 우리 K-Pop가수들도 대한민국의 공로자인 것 같습니다.
지난 며칠 봄날씨였는데 어제부터 봄을 시샘한 듯 제법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밤공기는 조금은 쌀쌀하네요.
이 비가 그치면 논밭 삶의 현장으로 내달려가겠지요.
농기계의 안전사고를 늘 대비하셔야겠습니다.
4월 3일
17
15
고사리를 심었는데
올해가 4년차 입니다
우거져 있는 고사리 대를 태워야 하나요?
그냥 그대로 나둔채 새순을 수확해야 하나요?
21년 2월 9일
4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5 -
우리는 모내기 할 때도 나락타작을 할 때도 학교에 가지 않고 부모님 일손을 도와 드렸습니다.
모내기 할 때는 못줄을 잡고 어른들이 지게 바자기로 모침을 날라서 논에다 뿌려 놓았는데 모심는 사람들이 모를 심기 좋게 모침을 뒤에서 적당하게 분배를 했다.
모판에서 모를 쩌내면 새참을 먹는 시간이었다.
새참은 국수를 삶아 양념장에 비벼서 먹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새참먹는 시간에는 들녘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아가를 키우는 아낰네들은 애기들 형제나 할머니께서 아가들 젖을 물릴려고 등에 업고 나오기 때문에 새참도 넉넉하게 준비를 해야했다.
또 지나가는 사람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새참을 나누곤했다.
그래서 점심 또한 저녁도 넉넉하게 준비해야했다.
저녁은 어르신들이 계신 집은 밥을 따로 싸서 드리기도 했다.
옛날 시골 인심이라 생각한다.
우리집 첫모를 심는 날은 찰밥을 해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산에 있는 논에 식구들이 다 모여서 새참과 점심을 해결했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은 우리집 갑골이라는 산비탈에 있는 자그마한 3개의 다랑논이 있는데 한마지기 반이었다.
맨위에 있는 논 윗쪽에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솟아나 1년 내 물을 가두어서 첫모를 식구들이 다 모여서 심었다.
워낙 굴곡이 있는 논이라 못줄을 잡지않고 흩어지게 모를 심었다.
천수답이지만 가뭄이 있어도 논바닥이 마르지 않아서 대대로 물려받은 소중한 논이었다.
모를 심는 날자는 마을에서도 서로 겹치지않게 잡았다.
한번 심을 때마다 20명 이상씩 모여서 모를 심어야해서 한 마을에서 두세집 이상은 모를 심지 않았다.
저희 동네는 가구수가 많은 제법 큰 마을이었다.
한 마을이지만 아랫 마을,
웃 마을,
잰몰이라고 불리면서 자연스럽게 구역이 나뉘어졌다.
우리집은 주로 아랫마을과 웃마을 아낙네들을 품삯을 주고 모내기를 했다.
모심는 날이면 새참도 날라야했고 모를 다심고나면 논두렁에 못줄 막대기로 구멍을 뚫고 메주콩을 심었다.
보리타작을 할 때도 조퇴내지는 결석을 하면서 부모님의 일 또는 농사일 등을 도와드려야했고 일이 끝나면 해가 넘어가 어두울 때까지 동네어귀에 모여서 형 누나들과 얼음땡, 딱지치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땅 따먹기, 자치기, 숨박꼭질, 간생을 하며 놀았습니다.
보리타작은 보리를 한 곳에 모아놓고 조그만 발동기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보리타작을 했다.
농로가 없고 논두렁이라 발동기를 장정이 지게로 옮겨가면서 보리타작을 했다.
보리타작은 금새 마쳤다.
보리타작을 할 때는 어찌나 꺼끄러운지?
보리 수염 때문에 온몸이 쓰라렸다.
보리를 베내고 논에 벼를 바로 심기 때문에 신작로 양옆이나 논두렁에 보릿대를 세워서 말렸다.
보리타작을 하기위해 보리를 한 곳에 모을 때 바짝마른 보리이삭이 떨어진다.
새벽녘에 비료포대를 들고 다니면서 이슬이 잔뜩 뭍은 보리이삭을 주으러 나갔다.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주워모아야 정작 껕보리는 한줌밖에 되지 않았다.
요즘 말하는 가성비가 없는 일이었다.
보리를 베난 논은 쟁기로 논을 갈고 물을 대서 발로 보리밭 사이에 깔아 놓았던 건초나 지푸라기 보릿대 등을 밟아 넣었다.
물신이 나오기전까지는 발이 나무가시에 찔려서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 다음 써레를 이용해 논바닥을 고르면서 거친 퇴비를 써레가 걸러냈다.
땅이 가라앉을려면 2-3일 정도 시간이 필요해서 며칠 후에 모내기를 했다.
논에 잡초는 초벌, 두벌, 세벌 지심을 맸다.
동네에서 품앗시로 돌아가면서 논고랑 사이를 기어다니면서 잡초를 뽑았다.
그 때 나락 품종은 키가 큰 품종을 심어야했다.
그 대표 품종이 팔광이라는 벼 품종이다.
그래야 그 키가 큰 지푸라기로 생활용품과 농기구를 만들었다.
나락이 키가 커서 비바람에 많이 쓰러지곤 했다.
태풍이라도 지나가면 논바닥에 벼가 다 쓸어졌다.
나락은 낫으로 베서 8주먹을 지그재그로 놓아 한단으로 묶어 논바닥에 세워서 2주정도 말렸다.
이 때 나락 20단을 한 가리라고 했다.
논 바닥에 세우고 몇가리인가?를 확인하고 작년보다 가리수가 많으면 풍년 적으면 흉년이라고 했다.
모내기 할 때 심었던 콩은 걷어서 집마당으로 날랐습니다.
노란 메주콩이었습니다.
밭이 없어서 이렇게 메주콩을 심었습니다.
다 말린 나락은 지게로 마당으로 날라서 노적봉같이 높게 쌓고 종일 공상을 밟으면서 타작을 했다.
장정 한 사람이 바짝 마른 나락 한가리를 지게에 짊어질 수 있었다.
짚을 요긴하게 써야해서 나락단을 집으로 들여와야했다.
나락타작을 할 때는 공상 양쪽에서 나락을 한주먹씩 떼 주는 사람이 2명,
공상을 발로 밟으며 나락을 요리조리 돌리면서 나락을 훑어내리는 장정이 2명,
다 훑고 난 공상 뒤에서 지푸라기를 묶는 사람이 1명,
공상앞에서 갈퀴질로 검부적과 쌓이는 나락을 긁어내는 사람이 1명
이렇게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않고 일손을 도와야했다.
지금이야 벼를 거둘 때 트랙터가 다 해내지만 예전엔 사람이 일일이 낫으로 베어 홀태라는 기구로 훑어서 벼 알갱이를 털었습니다.
홀태는 길고 두툼한 나무 앞뒤 쪽에 다리 네 개를 달아 팔자(八字)모양으로 떠받치게 하고 빗살처럼 날이 촘촘한 쇠로 된 틀을 몸에 낀 형태로 되어 있지요.
이 빗살처럼 촘촘한 쇠틀 사이로 벼를 끼우고 잡아당겨 벼 낱알을 텁니다.
나는 짚단을 바깥 공터에 나르는 일과 나락가리에서 쌓아 놓은 나락단을 공상가까이에 갔다놓는 일을 했다.
저희는 주로 주말에 큰 일을 잡아서 일을 했다.
저는 군복무를 하는 동안도 보리베고 모심는 농번기 6월과 벼베고 보리 심는 농번기 10월에 한달씩 휴가를 맞춰서 일손을 도와드렸다.
군생활을 광주에서 끗발이 좀 있는 보직을 받아서 정기휴가와 포상휴가 및 기타 휴가를 모아서 농번기 때 1년에 두달 가까이씩 집안일을 도와드렸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휴가를 다녀오면 피부가 뽀앟고 이뻐지는데 저는 쌔까맣게 타서 부대에 복귀를 했습니다.
3년 복무기간에 훈련병과 쫄병시절 첫 해만 가을걷이 농사일을 도와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군대생활 할 때는 복무기간이 36개월이었습니다.
옛날 나락은 만생종이었습니다.
2모작을 했기 때문이 아니가?싶네요.
논바닥에 하얀 서리를 있을 때 벼베기를 했고 일손이 모자란 가정에서는 나락가리를 쌓아 놓았다가 눈을 맞고 타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늦 가을이라 해가 짧아서 나락타작을 하고나면 밤이 다가왔습니다.
마당에 횃불을 밝히고 하루종일 공상으로 훑은 나락을 풍구를 돌려 꺼스랭이와 쭉쟁이를 걸러내고 깨끗한 나락을 광에다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광은 문짝이 1번부터 8번까지 8개였으니까 제법 큰 광이었습니다.
맨 아래 1번부터 문짝을 닫기 시작해서 광안쪽부터 나락을 차곡차곡 다 채우면 마지막 8번째 문짝을 닫으면 광에는 나락이 꽉 찹니다.
타작한 나락이 광을 다 채우면 마당에 멍석을 둥그렇게 세우고 몰아서 임시로 나락뒤주를 만들어 그 곳에도 보관했습니다.
이렇게 광에 있는 나락은 그 때마다 방아를 찧어서 쌀뒤주에 쌀을 넣어 보관했다가 꺼내서 밥을 지었다.
쌀뒤주는 두꺼운 송판으로 위에서 뚜껑을 열고 쌀을 꺼낼 수 있게 만들었고 보통 쌀 2가마니 정도는 들어가는 크기였다.
가끔씩 시내 인터리어 소품으로 볼 수가 있는 장식품으로 쓰이고있다.
우리집 쌀뒤주는 느티나무 원목으로 만들어서 무게 또한 대단했다.
나락타작도 3번은 했던 것 같습니다.
바깥에 지푸라기를 묶어서 쌓아 놓았는데 짚널이 웬만한 큰 집채만 했습니다.
지푸라기는 가마니도 짜고, 멱다리도 만들고, 멍석도 만들고, 산태미도 만들고, 꼴 망태도 만들고, 새끼도 꼬았습니다.
소 마굿간이나 돼지 우리에 넣어 소와 돼지를 따뜻하게 보온도 해주고 소 돼지 배설물을 섞어서 밟혀 퇴비도 만들었습니다.
또 소 여물로 사용했습니다.
지붕을 볏짚으로 이으기도 했습니다.
용머리를 틀어서 지붕 맨 꼭대기에 얹고 흙돌담위에도 용머리를 틀어서 올렸습니다.
이렇게 농촌에서는 볏짚이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평야지대에서는 볏짚을 땔감으로 사용했지만 저희는 산에 나무가 많아서 땔깜으로 사용하진 않았습니다.
지푸라기를 땔깜으로 사용하는 평야지방보다 솔가지나무로 사용한 산간지방은 훨씬 깨끗하고 화력 또한 쎄고 굵은 나무토막으로 군불을 때고 숯도 만들어서 장담글 때랑 사용합니다.
또 화로에 숯불을 담아서 방안의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기도 합니다.
싱그러운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4월보다 좀 더 나은 5월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월 1일
21
24
Farmmorning
1.흑색균핵썩음병
비늘줄기나 뿌리에 회백색 균사가
밀생해 조직이 물러지고,
병이 진전되면 비늘줄기
전체에 흑색의 균핵이 형성된 후
비늘줄기와 뿌리가 모두 썩습니다.
병든 잎은 아랫쪽부터
누렇게 되면서 심하면 포기
전체가 갈색으로 변해 말라 죽습니다.
연작 재배로 발생되는
토양 전염성 병해로 파속 작물
(마늘, 파, 양파 등)을
침입하며, 15~20℃에서 많이 발병합니다.
균핵 상태로 토양 속에서
여름을 휴면하고,
9~10월 마늘 파종과
함께 발아해 마늘에 침입하여
2월 상순~중순경부터 발생이 시작됩니다.

방제방법
답전 윤환이나 이모작 재배로
벼를 재배합니다.
인경류 작물(양파, 파, 쪽파 등)의
이어짓기를 피합니다.
병든 포기는 일찍 제거하여
다른 포기로의 확산을 방지합니다.
파종・정식 전 흑색썩음균핵병
전문약제를 토양혼화처리합니다.

​2.고자리파리
유충이 작물의 뿌리나
비늘줄기를 가해하고,
피해를 받은 포기는 아래 잎부터
노랗게 색깔이 변하며 고사합니다.
피해받은 포기를 뽑아보면 뿌리의 중간이 잘라진 채 잘 뽑아지며,
그 속에서 구더기 모양의 유충을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1년에 3회 발생하고 남부지방에서는
4월 중순, 6월 하순, 9월 하순~10월 상순,
중부지방에서는 1주일 정도 늦게 가장 많이 발생합니다.
가을에 발생한 유충은 번데기로 월동하여 4월부터 성충이 됩니다.
알은 잎집 틈새, 주위 흙에 보통 50~70개를 낳습니다.
1세대 번데기는 성충이 된 다음 세대를 더 지낸 뒤
여름철을 땅 속에서 지내고
가을에 성충이 되어 양파 모판, 마늘 본밭 등에 산란합니다.

방제방법
잘 썩지 않은 퇴비나 가축분을 사용하면 토양 속에서
부숙될 때 발생하는
냄새에 주위에 있는
어른 벌레가 유인되어 피해가 발생하므로
완전히 부숙된 퇴비를
사용해야 합니다.
정식・파종 전 토양 살충제를
뿌린 후 흙과 잘 섞어줍니다.
고자리파리의 산란을 방지하기 위해
3월 하순경에 등록약제를 살포합니다.

3.잎마름병
잎에서는 회백색의 작은
반점이 형성되고,
진전되면 병반 주위가
담갈색을 띠며
중앙부위는 적갈색으로 변합니다.
오래되면 병반이 위아래로
길게 확대되고,
검은 곰팡이가 밀생합니다.
병원균은 병든 부위에서 균사, 분생포자, 자낭각의
형태로 월동하고
1차 전염원이 됩니다.
생육 후기(5월 하순)부터 발병하기
시작하여 수확기(6월 하순)에 가장 많이 발병합니다.
4~5월경 강우 일수가 많아
다습한 환경이 계속되면
심하게 발병하며,
발병이 심한 포장에서는 인편 비대가 불량하여
수량이 크게 감소합니다.
질소비료를 과다하게 사용하거나
연작하는 포장에 많이 발생합니다.


방제방법
수확 후 이병 잔재물을
깨끗이 제거합니다.
건전 종구를 사용하고,
소독하여 파종합니다.
밀식을 피하고 통풍이 잘
되도록 합니다.
작물의 생육에 알맞게
고르게 시비하고,
토양・수분 관리를 철저히 합니다.
발병 초기에 등록약제를 살포합니다.

4.잎집썩음병
생육 중기에 마늘의 잎집이 담갈색으로 변해 썩어
들어가면서 심한 악취가 납니다.
심하면 식물체의 감염부위가 물러
썩어서 부러지고 말라 죽습니다.
심하게 발생하면 잎과
종구에도 발생합니다.
국내 일부 포장에서
발생하고 있으나,
발생생태 및 전염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5.뿌리응애
뿌리를 집단으로 가해하여 뿌리가 떨어지거나
구근 내부까지 썩습니다.
또한 저장 중에도 증식하여
큰 피해를 줍니다.
지상부의 잎이 황변되는 증상이 고자리파리 피해와 유사하나,
작물을 뽑아보면 뿌리가 썩어 쉽게 떨어져 나가고
수백 마리의 유백색 응애를
볼 수 있습니다.
유백색의 반투명한 타원형의 좁쌀 모양으로
0.6~0.7㎜로 매우 작고 1년에 10여회 발생합니다.
고온다습할 때 번식이 왕성하며,
겨울에 성충 또는 약충으로 인경과 토양 속에서
월동해 이른 봄부터 가해를 시작합니다.
성충은 구근의 표면이나 인편에 몇 개씩 알을 낳습니다.
미숙퇴구비 사용, 연작재배지 및 피해 입은 종구가 주요 원인으로
모래땅, 산성토, 유기질이 많은 토양에 다발생합니다.
​방제방법
건전한 종구를 심고, 미숙 퇴비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수확 후 건조를 잘 시키고 통풍이 잘 되는 곳에 저장합니다.
파종 전 종구를 침지소독하고 토양 살충제를
살포한 다음에 종구를 파종하면 응애의 밀도를 줄일 수 있습니다.
생육기 중에 발생하면 비닐을 제거하고 약제를 관주처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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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3월 7일
7
6
Farmmorning
감사합니다, 처음 직접고추농사를 재배해봅니다
재배지는당진입니다
면적은 120평정도 비닐하우스 입니다
지난 일요일(5월2일) 육묘장에서 고추구입해서 진딧물 입제를 뿌리고 심었습니다
향후 농약주기가 궁긍합니다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1.고추 지주대는 어느시기에 해야하는지요?
2.총채벌레/진딧물/응애/담배나방/파방나방 등 농약처방 시기와 농약종류 등에 대해 궁금합니다
알려주십시모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21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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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할매와 택시기사의
눈물나는 스토리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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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기사들은 흥미진진하거나
신기한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택시들은 "잠들지 않는 도시"
곳곳을 누비며 승객을 이곳 저곳으로
분주하게 실어 나릅니다.
어느 날, 택시기사가 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그에게 일어난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콜을 받고
해당 주소로 가서 경적을 울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경적을 울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었습니다.
이 손님이 그 날
교대 전 마지막 콜이었기에
그는 마음이 급해저 얼른 포기하고
차를 돌릴까하다가 일단 문으로 가서
다시 불러보기로 했습니다.
초인종을 누르자 노쇠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시간이 꽤 지나 문이 열렸고
90이상 되어 보이시는 작고 연로하신
할머니 한 분이 문가에 서 계셨습니다.
손에는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계셨고
문이 조금 열려 집 안이 보였는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집 안에는 사람 산 흔적이 싹 지워진듯
모든 가구는 천으로 덮여있었고 휑한 벽에는 아무 것도 걸려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진과 기념품이 넘쳐나는
상자 하나만 구석에 놓여 있었습니다.
"기사 양반!
내 여행 가방 좀
차로 옮겨 줄래요? 부탁해요!"
할머니의 요청대로
가방을 트렁크에 싣고
할머니에게 돌아가 천천히
차 까지 부축해 드렸더니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에요...
모든 승객을 제 어머니처럼 모셔야죠!”
"굉장히 친절하시네요!"
할머니는 택시에 탄 뒤 목적지 주소를
알려주며 시내를 가로 질러가지
말아달라고 하셨습니다.
"음!...
그럼 목적지까지 가는
지름길이 없는데요!
시내를 통과하지 않으면
많이 돌아가게 될 텐데 괜찮으세요?"
할머니는 저만 괜찮다면 급할 게 없으니
돌아가도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지금 요양원에
들어가는 길이랍니다.
사람들이 마지막에
죽으러 가는 곳이죠!"
할머니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 가셨습니다.
"의사가 말하길
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재빨리 미터기를 껐었습니다.
"어디 가 보고 싶은 데 없으세요?"
저는 그 후 두 시간 동안 할머니와 함께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분은 젊은 시절 일했던
호텔을 비롯해 고인이 된 남편과 함께
살았던 예전집 등등...
그 동안 인연이 있었던
시내의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그 동안 할머니는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 처럼 바라보시기도 하고
때로는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눈물을 보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피곤하네요!
목적지로 가주세요!"
도착한 요양원은 생각보다 작았고
차를 세우니 두 명의 간호사가 나와서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웠습니다.
나는 트렁크 속에 두었던
여행 가방을 꺼내 들었습니다.
"요금이 얼마죠?"
할머니는
핸드백을 열며 제게 물었습니다.
"오늘은 무료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아!
생계는 꾸려가야지!"
"승객은 또 있을테니까 걱정마셔요.
괜찮아요! 문제 없어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할머니를 꼬옥 안아드렸고,
그 분 역시 절 꽉 껴안았습니다.
"이 늙은이의 마지막 여행을
행복하게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저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할머니의 전송을 받으며
요양원을 나왔습니다.
교대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정처없이
차를 몰고 돌고 돌아다녔습니다.
누구하고도 만나거나
말을 하고싶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손님을 태우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 일은 인생을 살며
제가 해 온 것 중에 가장 뜻깊은
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삶 속에서 우리는 종종
크고 화려한 순간에만 집중합니다.
더 크게, 더 빨리, 더 멀리...
하지만 정작 인생에 의미있는
순간은 조용하고 사소합니다.
여유를 가지고
그런 순간을 맞이하면 어떨까요?
천천히, 또박 또박 진지하게 말입니다...
경적을 울리며 재촉하기 전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셔요.
정말 중요한 무언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바쁜 일상에서 잠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가치있는 인생에 대해 생각에 잠겨봅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나요?
바쁘다는 이유로 인생의 소중한 의미를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내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소중합니다.
좋은 사람을 찾지 말고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좋은 조건을 찾지말고
내가 좋은 조건이 되는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랑을 찾기 전에
좋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 줍시다.
 
좋은 하루가 되길 바라지 말고
좋은 하루를 만들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말고
나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털어봐!
아프지 않은 사람 있나?
꾹 짜봐!
슬프지 않은 사람 있나?
찾아봐!
힘들지 않은 사람 있나?
건드려 봐!
눈물나지 않은 사람 있나?
물어 봐!
사연없는 사람 있나?
살펴 봐!
고민없는 사람 있나?
가까이 다가가 봐!
삶의 무게가 없는 사람이 있나?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사랑은 불타도 연기가 없습니다. 
 
장미가 좋아 꺾었더니 가시가 있고,
친구가 좋아 사귀었더니 이별이 있고,
세상이 좋아 태어났더니 죽음이
있더라! 
 
살만 하니
떠나는게 인생입니다...😭😭😭<좋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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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5월 29일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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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입고 요령>
1️⃣ 병해충 피해과, 압상을 받거나 부패한 과실 등은 빼고
저장에 적합한 과실을 선별해주세요.
2️⃣ 과실을 넣기 전, 저온저장고의 냉각기를 가동해
저온저장고 내부 온도를 떨어뜨린 다음에 입고해요.
입고 작업 중 냉동기를 작동하면
증발기에 성에가 많이 생기므로 냉동기 가동은 정지시켜야 해요.
<적재 요령>
팔레트와 벽면 사이는 최소 30~50cm
천장 사이에는 최소 1m 사이의 공간을 두고,
최대 적재량은 저장고 부피의 70~80% 수준을 유지해
공기 통로를 확보해 적재해야 해요.
이때, 유닛쿨러(증발기)의 냉기 출구 부근은
온도가 낮아 과실이 얼기 쉬우므로 비닐이나 부직포 등을 덮어주세요.
<온도 관리>
배의 적정 저장온도는 0℃~-0.5℃예요.
배 과실의 동결점은 -1.5℃ 이하에서 나타나지만
저장고 내의 온도를 균일하게 맞추기 힘들기 때문에
온도 분포를 고려해 안전범위인 0℃로 설정하는 게 좋아요.
※ 온도 설정 시 최고-최저온도 편차에 주의해 설정하고,
온도 센서는 저온저장고 전체를 대표할 수 있도록
공기 흐름이 잘 되는 위치에 설정해주세요.
저장고 내 온도는 위치에 따라 불균일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다점온도계 2~3개를 설치해 수시로 체크하는 게 좋아요.
<습도 관리>
배 저온저장고의 적정 습도는 85~90% 범위예요.
✔️ 배는 사과와 달리 과피에 왁스층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과피를 통한 수분증발이 빠르게 일어나므로 수분 손실에 유의해야 해요.
✔️ 스티로폼 망보다 종이에 싼 채로 저장하면 건조피해 방지에 더 효과적이에요.
✔️ 개별 상자나 팔레트 전체를 비닐 등으로 씌우면
장기 저장 시 과습 피해를 입을 수 있어요.
상자 내에 이슬이 맺히지 않도록 상단부를 열어두세요.
<환기 및 냉각기 관리>
환기창을 통해 주기적으로 환기하고,
환기창이 없는 저장고는 출입문을 열어 환기하되
외기온도가 0℃ 가까이 되는 시간에 열어주어 열 손실을 최소화해주세요.
냉각기 성에 제거는 한 번에 15~30분씩, 하루 3~6회 정도로 해주세요.
너무 자주 할 경우 저장고 온도편차가 많아지므로 불필요하게 자주 하진 않는 게 좋아요.
22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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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
한 가정이 해체 되는 모습을 보며-
※※※※※※※※※※※※※※※※※※※※※※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라인의 32층에 서울대 농대 학장을 역임한 오ㅇㅇ이란 교수님 이 살고 있었다.
19년 전 처음 신규 입주할 때 부터 함께 입주한 분이라 엘리베이터등에서 만나면 서로 인사하며 간단한 대화도 나누곤했다.
당시 나는 60대 초반을 갓 넘긴 초로였고 그분은 77세라고 하셨던 것 같다.
항상 웃음끼가 가시지 않고 정정해 보였다. 마나님과 함께 단지내 산책을 자주하고 두분이 손잡고 외출하는 모습 자주 보였다.
나와 같은 교회에 다녔는 데 매주 주일날이면 어느 대학 교수라는 사위가 와서 픽업을 해 모시고 다녔다.
그런데 한 7년 전 쯤에 마나님이 돌아 가셔서 비교적 넓은 집에서 홀로 사시는 것 같았다.
여전히 주일 날이면 사위와 딸이 픽업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갔다. 수원에 산다는 아들은 어쩌다 찾아와 함께 외출하는 모습을 한 번 본 것 같다.
그런데 언제 쯤인가 사위가 보이지 않아 궁금했는데 그 사위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혼자서 아파트 단지를 천천히 거니는 쓸쓸한 모습을 보며 인생 마지막의 행로가 누구에게나 다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우리 인생의 말년은 다 저렇겠지!
그런데
한 두어달 전부터 오학장 할아버지가 눈에 띄지가 않아 가벼운 궁금증이 들기는 했지만 남의 일이라 그냥 잊고 있었다.
근데 어제는 우리 라인의 주차장에 책이 가득 찬 왠 커다란 '탑'차가 보여 직감적으로 오교수님의 책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오전에
집사람이 쓰레기를 버리려 내려 갔더니-
아주 고급스런 책장들을 비롯한 꽤나 비싸 보이는 가구들이 한살림 한가득 나와 있더라는 거다.
값께나 나갈 만한 서양화와 액자들 그리고 오교수의 박사학위 학위모를 쓰고 찎은 사진과 가족 사진들이 널브러져 있더라는
거다.가구들은 중고 가구점에 연락하면
헐 값에라도 얼씨구하고 가져 갈만한 고급품이고 오교수 사진들과 가족 사진들은 다 태워버리지 않고- 왜 저리 내다버렸는지 자식들이 욕먹을 것 같더란다.
금년 95세로 서울 농대 학장까지 지낸 분이라 세상을 아쉬움 없이 빛나게 살다
가셨지만-인생의 끝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다 저렇게 쓸쓸히
허망히 다 버리고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내가 여기서 주제로 하고 싶은 말은
어느 노교수의 죽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 끝의 모습!
한 가정이 자연스레
解體되는 모습을 말하고 싶어서다.
젊은 시절 나도 그랬다!
우리도 그랬다!
한참 자식들이 태어나 자랄 때 식구들이 모여 웃고 울고 떠들고 먹으며 집안이 시끌쩍하게 들썩거리던 기쁨! 그 사랑!
좀 더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꾸며 놓고
만족해 하던 시절-
자식들 공부 잘해 가슴 뿌듯해 하고
공부 못해 가슴 조이던 시절-
세월따라 그런 오붓한 시절은 점차 사라지고 자식들은 제각기 자기 일, 자기 가정
을 찾아 뿔뿔 흩어지고 기둥 같던 엄마 아빠는 병들어 쇠잔해지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세상을 떠나면 그 가정은 허물어지 듯 해체 돼 버린다는 사실!
그 사실 그 사정이 지금 내 앞에도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비단, 내 이웃에 살던 오 교수의 문제가 아니고 바로 나의 현실로 내 코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회피할 수가 없다.
하나 하나 정리해야 하는데 아직도 붙들고 있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책이며 옷이며 가구들이며
모든 것이 한낱 쓰레기가 될 것인데-
젊은 시절 읽던 책들 더러는 읽지도 않고 허영으로 모은 것도 있고 내가 아껴 입던 옷들 드라이 크리닝해 놓은 채 비닐 커버를 쓰고 있는 입지 않은 옷들-
필요 없이 찎은 사진들-
나름 욕심 내서 산 가구들-
이 "브라운 톤 오크 가구들"은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요즘 애들은 트랜드에 맞지
않으니 그냥 버리라고 한다. 넘 아깝지만-
아! 그런데 아까운 것이 어디 있냐.
내가 세상 떠나면 나의 물욕과 함께
다 버려질 텐데.
결국 쓰레기가 돼버리고 말 텐데.
한낱 거품 같은, 연기 같은, 물리적인
世物에 목을 걸고 살아온 인생이여!
인생들이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반듯하게 깔끔하게
정리 정돈하자! <옮긴글>
23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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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