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태 콩을 5톤 정도 수확을 하여
임대사업소 1차 선별
사람 손으로 2차 선별을 하고 있는데
너무 많은 양이라 2톤정도 밖에 못했습니다
2차 선별을 안한걸 상인에게 팔고
2차 선별 한걸 정부수매로 팔려고 하는데
원래 다 선별을 해서 팔아야 하는건가요?
21년 11월 30일
10
Farmmorning
✊지난 주 세상을 떠나신 “자연환경 먹거리 생산협회” 연구소장께서 남기신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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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치유농법(自然治癒農法)


자연치유(自然治癒)
농법(農法)

자연치유(自然治癒)는
"인위적인 치료를 하지 않고 신체의 회복 능력을 북돋워 질병이 저절로 낫거나 몸이 회복되도록 하는 일" 이라는 뜻 입니다.

농법(農法)의 뜻은
"농사를 짓는 방법" 입니다.

필자가
지난 3년동안 농업현장을 살피면서
"에너지 순환농법"을 정리하며
글도 쓰기도 하였습니다.

최근 필자와
이념이 비슷한 동역자와 융합하게 되면서
충북 옥천에서
"자연치유 농법" 세미나를 시작으로
"한국 자연환경 먹거리 생산협회"를
설립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함께 길을 걸어가야 하기에
필자가 지난 3년간
"에너지 순환농법"으로 사용한 명칭을
"자연치유 농법"이라는 명칭으로
하나의 뜻으로 전환 하기로 하였습니다.

지난 몇주간
농업현장을 살피면서
"자연치유농법 " 이 어떤 것일까?
뇌리에 떠나지 않으며
많은 생각속에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인위적인 치료를 하지 않고
작물의 회복능력을 북 돋어
질병을 낮게 하거나
작물이 본래의 생명력으로
에너지 가득한 소출물을 생산하도록
돕는 농법은
어디에서 출발 하여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나
작물이나
유전 정보속에 간직하고 있는
본래의
면역력(免疫力)을 어떻게 하면
잘 발현 시킬수 있는지?
많은 시간을
질문과 해답속에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대자연은 항상
생명을 살리는 상생(相生)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필자는
직접적으로 농업에 종사하지는 않았으나
자연에너지 가득한 농산물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사람에게 유익한 물질은
작물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은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질의 육(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루 2~3끼 농축산물
천기농축액 물, 공기,등의 물질 에너지를
보충해야 생명활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작물도
같은 물질의 에너지가 필요한 것 입니다.

햇빛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에너지 가득한 영양대사 물질이
본래의 면역력을 높여
건강한 생명활동을 유지할수 있게 하듯이
사람이나
작물이나
필요물질은 같다는 생각 입니다.

"자연치유 농법"에 적용되는
모든 자재는
비료허가에 필요한
최소 미량 첨가 미네랄을 제외하곤
나 자신부터 마음 놓고 먹을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작물을 재배하는
농업현장을 돌아보면서
필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첫째가 환경이고
두번째는 사용하는 물이고
세번째가 작물에 영양물질 입니다.

현재의 관행 농업현장에서는
영양물질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부분에
늘 안따까운 마음입니다.

작물의 대사 활동의 50%이상인
토양의 환경은 보이지 않기에
소홀하게 생각 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생명활동의 근본인
천기 농축액 물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영양대사 물질에 우선적으로
집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자연치유농법"의 핵심은
3가지로
천연물질을 사용한 재료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
토양 작물 뿌리부 환경을 좋아지게 하는
물질

둘째
사용하고 있는 물을
용존산소가 풍부하게 변환하여
생리활성 미네랄을 융합하여
작물의 생육을 도와주게 하는 물질

셋째
작물이 건강하게 잘 자라며
에너지 가득한 소출물을 생성할 수 있게
흡수가 잘 될수 있게
발효시킨 천연 대사 영양물질

이 3가지 재료만을 사용하여
화학비료, 농약 없는 농산물을
기존 관행농법보다
많은 소출량도 늘리고
농업활동에 일손도 줄이는
방법을 구현해 나가고 있습니다

작물별
농가별(시설농가, 노지 등) 환경은
모두 다릅니다.

태초 먹거리에 가까운
자연에너지 가득담은
고에너지 농산물을
눈에 보기도 좋으면서
소출량도 증가 시킬수만 있으면
그것도 애 많이 쓰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농민분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것이
즐겁고 보람된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속에 잠겨봅니다.

이렇게 시현되는
농가가 늘어가게 되면
자연도 살리게 되고
건강한 자연환경에서 수확한 농산물로
건강한 몸을 만들어 가게 되면
자연과
사람이
공생(共生)과 상생(相生)으로
스스로 자연치유(自然治癒)가 가능한
"자연치유농법"이 정립될수 있다는 확신에
오늘도 아직은 다소 멀게 느껴지는
생명살리기 사명에 한걸음 발자욱을
남겨 보려 합니다.

함께 하면
조금 더 빠르게
생산자인 많은 농민들이 함께 할수 있기에
아직은 부족하지만
전국 20여곳에 함께 참여하는
"자연치유농업" 전도사 분들이 있어
고마운 마음 전해봅니다.

올 한해는
"자연치유농법"의 시스템속에
많은 농민분들이 함께 해
웃음 가득 머금은
진짜 농민이 많이 늘어나길
두손모아 기원해 봅니다.

자연의 이치와
삶이 함께 아름답게 공존하는
농사의 도를 의미해 보며
순리의 삶의 의미를 헤아려 봅니다.

농사는 24절기 즉,
기후의 변화를 알아야하고
봄 . 여름 . 가을 . 겨울 이라는 계절의 변화를 알아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농사를 지으면
굶지 않고 잘 먹고 잘 살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심은 만큼 거두게 하여 하늘과 땅의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우리 조상님의 지혜가 담긴 글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입니다.

그러므로 농자의 도(道)를 천하에 최고로 큰 도(道) 라하여
대본야(大本也) 라고 한 것입니다.

3월의 꽃샘추위가 내어 뿜는
아직은 아침 저녘으로
차가운 봄 바람에
대자연이 내어 주는 숨결을 느끼며
농자의 도(道)의 의미를
마음 속 깊이
다시 한번 되 새겨 봅니다.
23년 9월 4일
8
8
Farmmorning
같이 농사를 지어왔던 분 갑작스레 사망하셨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하려다보니 다 뒤로 쳐진다 양파를 캐고
양파 선별하다가
포도나무 손질하고
포도밭에 소독하고
농장주변 정리하다가 저만큼 떨어져있는 콩밭을 오랜만에 가보니
풀이?...
어마어마하게 자라 있었다
그냥 묵혀 버릴까 생각하다가
풀속에서 잘 자라고 있는
콩을보니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풀을 매주기 시작
장마철이다 보니
비가와서 못하고
바빠서 못하고..
꾸준히 하다보니 1000여평의 콩밭을 어느새 다 멨다
일찍 풀을 메준 콩들은 벌써 환하게 웃고 있는듯 하다..
22년 8월 3일
1
Farmmorning
안녕하세요 대구입니다 경산에 절대농지 가지고있는데 부모님께서 연세도있으시고 농사경험없습니다 농막에울타리까지해서 잘꾸며놓았는데 400평정도는 묘목이나 나무..(손많이안가는 )농사를 짓어서 살림에보탬면어떨까싶어서 올려봅니다어디물어볼곳도없고잘몰라서 못하겠네요 도움바랍니당~~
22년 2월 28일
4
600평 논을 올해부터 밭으로 해보려고
땅 작업 후 비닐 까지 작업해두었어요.
다른 본업이 있다보니 막상 하려니 바빠서 엄두가 안 나는 상황인데 그냥 두면 잡초만 무성해 질 것 같은데 어떻게 관리하면 가장 쉽고 손 많이 안가게 관리 할 수 있을까요??
22년 4월 9일
1
수정 떄문에 벌 이용하시는 분들 계신지요..
농약을 치고나면 이놈들이 제대로 벌통에서 나오지도 않고 비실비실한 경우가 많은데..
알고보니 농약의 잔류기간이있어 벌들이 제대로 힘을 못 쓴다고 합니다..
위 싸이트에서 농약별,작목별로 잔류기간과 적용병해충을 알려준다고하니 조회해보시고..자주쓰시는 것들은 제가 따로 정리를 해왔는데..빨간색은 잔류기간이 특히 길다고 하여 표시를 해두었으니 참고하시어
비싼 값 주고산 벌들 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사진은 손가락으로 확대하면 커집니다.
농약 잔류기간 조회링크
https://www.nongsaro.go.kr/portal/ps/psc/pscc/insectAgchApplcLst.ps?menuId=PS00207
21년 12월 10일
6
Farm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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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3월 24일
3
1
Farmmorning
우리들 이야기= 다섯
조선 영조 때 이사관
서울 정동에 고려 말 충신 이색의 14대손 이사관(1705~1776)이 살고 있었다.
승정원 동부승지 벼슬을 하다 물러나 한가한 생활을 하던 그는 급한 볼일이 생겨 고향인 충청도 한산에 가게 되었다.
갑자기 몰아치는 눈보라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예산 근처에 이르렀을 때는 유난히 기온이 떨어져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눈을 헤치며 걸음을 재촉하던 이사관이 어느 산모퉁이를 돌다보니
다 헤진 갓에 입성마저 추레한 한 선비가 쩔쩔매며 서있고 그 옆에는 부인인 듯한 젊은 여인이 무언가를 끌어안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사관이 다가가 보니 놀랍게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사관이 “뉘신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시오?”
라고 물으니
추레한 선비가 안절부절하며 
“아내가 해산일이 가까워 처가에 데리고 가려고 나섰는데 그만 여기서 몸을 풀었지 뭡니까.
이런 날씨에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고
이 험한 날씨에 산모와 어린 것이 생명을 부지할지 모르겠구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한다.
이사관은
“아이구! 저런! 큰일이구려!” 라고 한 뒤 자신이 입고 있던 값비싼 양털 가죽옷을 벗어 아기와 산모에게 덮어주고 선비를 재촉하며 마을을 찾아 나섰다.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급한대로
방 한칸을 빌리고 집주인에게 두둑히 돈을 주고 산모의 방에 군불을 뜨겁게 지피도록 하고 미역국을 끓여 산모의 허기를 면하도록 해주었다.
가난한 선비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며 이사관의 손을 잡고 
“노형께서 도와 주시지 않았다면 아내와 어린 것이 큰일을 당할 뻔 했습니다.
이 큰 은혜를 어떻게 갚아 드려야 할지모르겠습니다.” 라고 한다. 
“남의 곤경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아무쪼록 가시는데 까지 무사히 가시구료.” 
이사관이 길을 떠나려 하자 한사코 이름을 묻는다.
“정동에 사는 이사관이라고 하오.”
이후 이사관은 이 일을 잊어버렸지만 가난한 선비는 가슴속 깊이 이사관 이름을 새겨 넣었다.
가난한 선비는 몰락한 양반가 자손 충청도 면천의 생원 김한구(1723~1769)였다. 
그로부터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한구는 여전히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난에 견디다 못해 먼 친척 아저씨뻘 되는 당시의 세도 재상인 김흥경에게 의지하려 길을 나섰다.
김흥경은 친척 조카뻘 되는 김한구를 딱하게 여겨 이따금 쌀가마니 정도를 도와주곤 해서 겨우 연명하며
서울 생활을 견딜수 있었고
가끔 아저씨 사랑방을 찾아가 놀다 오곤 했다. 
마침 김흥경의 생일날 이 집의 사랑방에는 찾아온 축하객들이 아침부터 북적였다.
대부분 높은 벼슬아치거나 신분이 쟁쟁한 사람들이었는데
그 속에 김한구도 한쪽 구석에 여전히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는 관상을 잘 보는 것으로 장안에 유명한 문객도 섞여 있었는데 문득 주인대감 김흥경이 심심 파적으로 
“여보게 음식이 들어올 때까지 여기 계신 대감들의 신수나 보아 드리게."
라고 했다.
문객이 이사람 저사람 관상을 보아주었을 때 김흥경이 웃으며 말했다.
“여보게 저기 윗목에 앉아있는 김생원은 내 조카뻘되는 사람인데 언제쯤이나 사는 형편이 나아질지 보아 주게나.”
그 말을 들은 문객은 김한구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큰절을 하고 말했다.
“생원님의 고생은 이제 다 끝났습니다.
오늘부터 좋은 일이 시작되어 불과 10여일 안으로 대단한 벼슬 운이 트일겁니다.”
이 말을 들은 방안의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사람 팔자는 모른다는 말이 있지만 기적이 생기지 않는 한 가난의 때가 쪼르르 흐르는 보잘 것 없는 궁짜 낀 선비가 열흘 안에 높은 벼슬을 받게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때는 나라에서 과거를 보는 시기도 아니며 설사 과거에 갑자기 급제한다 해도 미관말직에서 벼슬이 시작되는 것이지 높은 지위를 부여받는 길은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조롱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문객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지금은 모두들 웃으시지만 며칠만 두고 보십시오.
여러 대감님들도 생원님께 절을 올려야 하는 처지가 되실 겁니다.”
나중에 문객이 한 이 말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때문에 가벼운 농담 정도로 생각하던 대신들이 웃음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는데
주인대감 김흥경이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고 마침 잔칫상이 들어오는 바람에 분위기가 겨우 수습되었지만 당사자인 김한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음식도 못 얻어먹고 황급히 자리를 떠야 했다.
자기 때문에 분위기가 망쳐질 뻔했기 때문이다.
“에이 참! 오늘 재수가 없으려니
그 점쟁이가 미쳤나?
왜 그런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해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나?
오랜만에 주린 뱃속에 고기구경좀 시켜주려 했더니 그놈 때문에
다 그르치고 말았네!”
투덜거리며 집에 돌아와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년 들어 열여섯 살인 딸이 왕비 간택의 대상으로 뽑혀 대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아이가 지난날 눈이 쏟아지던 길바닥에서 태어나 이사관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그아기였다.
아이가 용모가 뛰어나고 총명했기에 은근히 부잣집에 시집보내 그 덕을 좀 보려는 욕심도 있던 김한구였다. 
당시 영조는 이미 예순 다섯 이었으나 정정했고 늘그막에 중전인 정성황후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나라의 법도상 국모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 영조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간택령을 내리게
된 것이었고,
가난하지만 뼈대있는 가문이었던 김한구의 딸도 후보자 중 한명이 되었던 것이었다. 
간택일이 되자 백 여명의 후보 규수들이 대궐로 모였고 영조가 친히 접견하여 그 중 1명을 선택 하였다.
김한구의 딸의 미모에 혹한 영조가 그녀의 사주단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는 
“면천 태생인 김선비의 여식이라
애비는 김한구, 본관은 경주, 조상은 효종 때 바른 말 잘하기로 소문난 유명한 김흥욱이란 말이지?
흠! 이만하면 문벌도 괜찮구나!”
결국 간택을 받게 되었다. 
김한구는 문객의 예언대로 정일품 보국승록대부 오흥부원군의 작위를 받았고 신분이 하늘처럼 높아져 금위대장 병부까지 하게 되었으며 아들과 아우까지 벼슬을 얻었다.
오두막살이에서 1백여 칸의 고래 등 같은 집으로 옮겨 살게 되고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게 어려운 생활에서 초호화판 생활로 갑자기 바뀌었다.
문객의 말이 제대로 맞은 것이다. 
김한구는 잊지 않고 딸에게 청을 넣어 은인인 이사관은 호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영조 48년(1772년)에 우의정에 이어서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옛날 베푼 은혜가 큰 복이 되어 돌아온 셈이요,
김한구는 은인에게 제대로 된 보은을 하게 된 셈이었다. 
이래서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있는 듯하다. 
오늘날의 세상은 자기 배만 부르면 남이 어떠하든 관심없고
친척과 이웃과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 삭막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하늘이알고 세상이 아는법.
복을받는 사람은 넉넉한
마음으로 친척과 이웃을 잘 대접하는 사람인 것이 하늘의 이치 아니겠는가?
https://youtu.be/Hl44Q8IAa9U?si=g3U61QN9Ji1uh8Nz
2월 15일
39
17
3
안녕하세요
가입하고 들어와서 보니 조건 다갖춘 전문 귀농민들이셔서 엄두가 나질않아 눈팅만 하다
일도있어 자주와보지 못하다 유령회원탈퇴ᆢ하긴 아쉬워 눈팅만해도 좋아서 다시 들어왔네요 어중찮은 텃밭가꾸기 기계없이 쬐끔해보면서 농부 흉내내보니 엄청 힘들더라구요 손수손으로 다하고 밭아닌 임야(과수원옆이라 나작한산)라 밭만들기 20년 심어놓은편백나무들은 엄청 자랐는데 밭만들기 평수는 쬐끔 감자도 몇골 심어보고 고추몇개 토마토 오이 참외 몇개씩 고무마2줄 심었더니 고라니랑 반 갈라먹자 했더니 고라니가 다 먹더라구요 이제는 과실나무 종류별ᆢ욕심은 엄청내어봤네요 모든게 여건이 잘 맞지않아 이래도 해보고 저리도 해보고 아저씨 퇴직맞춰 별의별일을 다해봤네요 제대로된 땅은 너무 멀리(충북)
거주지는 경남창원 망설이다 앞주에 바람쐬듯 놀이삼아(말이 놀이삼아지요) 허허ᆢ700평중 600평에 고구마전용비료10포 뿌려서 밭갈이 골타기 멀칭 부탁해서 하고 비오는날 맞춰서 아저씨 어머니 저 고구마 80단 옥수수70개 두판 동네할머니들 3분 오셔서 도와주시고 해서 하고 끙끙앓으며 창원 내려왔다 다음날 창원에서 다시 충북올라가서 2일째 3분1남은곳 비 흠뻑맞으며 다 심어놓고 아저씨랑 마무리하고 내려왔습니다 애라 이제 몰것다 잘되어주기만 바래봅니다 최소 10일에 한번씩은 올라가리라 생각합니다 캐는거 파는거는 잘 모르겠습니다 1년사이 너무 많은일을 했어요
창원엔 밭으로 되어있는 임야 300평정도에 황칠나무 120그루 심어놨어요 22년에 임업인등록도 해놓고 올해는 농업인 등록 목푭니다 여유있는돈을 들여하는게 아니라 소박하게 하는거라 많이 배워보려합니다 길게 쭉 썼습니다 이해해주시고 초보자얘기 읽어주셔 감사해요
자주 엿보겠습니다 해놓고 동영상으로 찍었다보니 사진이 마땅찮네요 구경만 해주셔요
23년 5월 10일
5
4
Farmmorning
밭 200평을 구입했습니다. 처음으로 농사지어 ^^ 무엇을 심어야 하나요? 손이 덜가는 농작물이 무엇인가요? 언니가 참깨 심은 후에 들깨를 심으라고하던데 가능한가요?
21년 12월 28일
1
시골집에 마굿간을 치웠습니다.
동네 목수아저씨께서 처음으로 지은 마굿간이고 올해 97세되시는 아버지께서 평생 관리하셨던 마굿간이라 버릴 것이 엄청 많았습니다.
소외양간은 겨울철엔 보름정도 지나면 마굿간에 지푸라기를 걷어내고 새지푸라기로 깔아주면 뽀송뽀송해서 소가 좋아했습니다.
육중한 소가 배설물과 섞인 지푸라기를 밟아 차곡차곡 쌓인 지푸라기는 다져저서 쇠스랑으로 한참을 걷어내야 했습니다.
수시로 지푸라기를 넣어주면 거름도 만들고 겨울에 차디찬 마굿간이 보온효과도 있습니다.
겨울에 마굿간을 치울 때는 소를 마굿간에서 몰고 나와야하는데 그 순했던 소가 오랫만에 밖에 나오니까 얼마나 날뛰는지요?
놓치지 않을려고 코투레를 잡고 실강이를 한참하고서야 진정되었습니다.
소가 소똥과 오줌을 뒤섞여 밟힌 지푸라기는 섞고 발효가되면 논밭에 좋은 퇴비가 되어서 봄에 리어카로 실어다 보리고랑에 깔았습니다.
옛날에는 화학비료 대신에 거의 퇴비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때 소를 키웠던 마굿간은 꽤나 넓고 높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큰 어미소가 송아지랑 같이 지낸 곳이었거든요.
머슴살이가 없어지면서 소마굿간을 창고로 쓰실려고 돌로 된 커다란 쇠구시를 들어내시고 세멘트로 바닥을 깔고 벽을 벽돌로 쌓았습니다.
소를 키울 때는 소가 뿔로 벽을 비벼서 흙이 많이 부서지고 벽에 구멍이 송송나서 겨울철에는 짚을 엮어서 벽을 둘러주곤 했습니다.
어릴적에 그렇게 넓게 보였던 마굿간이 좁게 보였습니다.
시골에서는 농기구와 잡다한 생활용품을 보관하는 장소가 꼭 있어야 합니다.
농사를 한다면 창고도 필요할텐데 이제는 필요가 없게 되어서 마당을 넓히고 집앞을 앞이 훤하게 만들려고 마굿간을 뜯기로 했습니다.
마당까지 승용차도 들어갈올 수가 있습니다.
집앞 텃밭 길가에 커다란 컨테이너박스가 있어서 곡물은 보관할 곳이 있습니다.
소마굿간에는 어린아이들 키만한 항아리가 몇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두분이 워낙 아까워서 버리시지 못하고 구석구석 뭉쳐서 쌓아 놓으셨습니다.
그 항아리 속에는 비닐봉투, 옛날 콤바인 나락푸대, 비닐멍석, 헌옷가지 등 수없이 나오더군요.
비닐 호스가 몇개, 주름관으로 된 호스 등은 터서 뻣뻣해 다 버려야했습니다.
베틀과 쟁기, 써레, 가마니틀, 홀태, 김매는 기계, 등잔대, 삼매는 기계, 새끼로 만든 꼴망태, 가마니를 찔러서 나락이나 쌀을 감정하는 삿대가 대.중. 소로 몇개, 짚으로 만든 쌀가마니를 들 때 썼던 쇠고랑, 소등에 얹는 굴레, 소코뚜레, 물레, 무쇠솥, 소죽을 끓였던 가마솥 뚜껑, 주걱, 절구대, 안반, 요강, 소나무 뿌리로 만든 깨끗한 채반 등은 사랑채 공로에 따로 보관했습니다.
주물로 된 요강과 반상기세트와 수저, 젓가락, 가마니를 짜는 바디, 떡모양을 누르는 떡사슬, 호롱과 등잔대, 커다란 함박과 바가지, 삼베를 짤 때 썼던 붘, 솔, 삼베를 말끔하게 누르는 붘, 솔나무 뿌리로 만든 도시락, 곡물을 재는 되와 말, 누룩을 만드는 누룩틀, 실타래, 인두, 숫을 넣어서 아버지 모시옷과 삼베를 다렸던 다리미, 할머니께서 피시던 곰방대 등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축제를할 때면 한쪽 코너에 옛날 물건을 전시하고 학생들에게 설명을 해주곤 했습니다.
공로에서 물건을 들어내던 동생이 공로귀퉁이 안쪽에 세워져 있는데 뭔가 싸~한 느낌이 온다고 하더군요.
신문지와 세멘포대로 몇번을 둘러싸맨 모양이 대두병이었습니다.
신문지를 다 벗겨내니 역시 옛날 색깔이 어두운 대두병에 뱀으로 술을 담근 병이었습니다.
마개를 비닐로 싸매고 고무줄로 여러차례 동여맸습니다.
라벨지에 "1991년 10월 능사"라고 메모를 해놓으셨습니다.
카메라로 찍어 확대를 해봐도 술이 맑았습니다.
일단은 뱀이 부패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뱀은 징그럽지만 술이 깨끗해서 광 한쪽구석에 보관을 했습니다.
술을 담근지 30년이 넘은 술이라 어쩌면 귀한 물건이 아닐까?싶네요.
옛날 한옥은 지붕이 뾰쪽하고 높았습니다.
안방에 아래묵에서 오를 수 부엌과 천장사이가 워낙 높아서 벽장이라는 곳을 만들어서 잡다한 물건을 올려놓고 안방과 방마다 지붕과 천장사이에 공로라는 공간을 만들어서 사용하셨습니다.
6.25사변 때 소마굿간 위에 나무로 걸쳐서 공로를 만들어 식량과 놋쇠를 그 곳에 감추셨다고 합니다.
1976년 제가 군복무를 마칠 때부터 머슴살이가 없어졌습니다.
머슴들이 솔잎가리 나무를 해와서 부엌에서 불을 지피실 때 불쏘시개로 쓰셨는데 솔가리나무를 해올 사람이 없어서 신문지나 박스를 찢어서 불쏘시개로 쓰셨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신문지를 모아서 박스에 담아다 드렸고,
박스를 찢어서 박스에 담아드렸습니다.
아까워서 쓰시지도 않은 신문지가 담겨있는 박스에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날자가 있는 신문지가 여러박스가 쌓여 있었습니다.
동네 재활용 모으는 곳에 내다가 쌓아 놓았습니다.
기둥마다 녹슬은 철사며 자루가 빠지고 끝이 다달은 괭이와 삽, 호미, 양은 솥, 양은 냄비, 양은 그릇, 양은 주전자, 바닥이 녹슬어서 뻥 뚫린 화루, 쇠파이프로 만든 부지깽이, 녹슬은 다라이, 조개탄과 장작으로 불을 지폈던 녹슬은 난로, 등에 짊어지고 소독했던 약통, 금간 곳을 파란 테이프로 붙여서 쓰셨던 고무다라이, 바께스, 함석쪼가리 등 수없이 버릴 수 밖에 없는 물건이 엄청 많았습니다.
그 동안 모아두셨던 프라스틱 파이프는 어찌나 많이 모아놓으셨는지요?
튜브가 다 터져 바람이 다 빠진 리어카로 몇번을 실어 날랐습니다.
리어카도 할일을 다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리어카도 없앨 때가 되었습니다.
돼지와 염소를 키웠던 마굿간에는 장작을 쌓아놓으셨는데 아까워서 마당 한켠에 옮겨놓고 함석으로 잘 덮어 놓았습니다.
얼마나 많은지요.
가마솥을 걸은 뚤방과 지붕아래로 두줄이 되더군요.
아까워서 쌓아놓긴 했는데 쓸일이 있을런지?모르겠네요.
통나무를 장작을 팼는데 나무도 오래되면 좀이 쓸어서 화력이 없거든요.
화목보일러를 사용하는 이웃한테 가져가라고하면 바로 실어가는데 혹시나해서 쌓아 놓았습니다.
마당 앞쪽에도 알밤을 저장했던 그늘만 가리는 창고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 산림사업으로 산에 유실수인 밤나무를 군에서 심었습니다.
70년대부터 산에서 알밤을 송이채 털어서 멱다리에 담아 신작로까지 지게로지고 내려와서 리어카로 실어다 땅을 파놓은 곳에 넣고 물을 계속주면 알밤송이 가시가 썪어서 발로 문지르면 알밤이 나옵니다.
80년대 말까지 알밤을 대나무로 털어서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가을걷이 중에 가장 힘든 일이 알밤을 터는 일이었습니다.
부가가치, 가성비가 전혀 없는 알밤수확이었습니다.
그래서 개량종 4그루 정도만 풀도 깍아주고 알밤을 주어서 제사 때랑 씁니다.
가을이면 손톱만한 빨간알밤이 산에 즐비합니다.
그 알밤창고에도 장작이 얼마나 많은지요.
장작개비만 들어내는데 거의 한나절이 걸렸습니다.
이번에 알밤창고도 밀어낼려고 합니다.
농기구도 너무 많아서 몇개만두고 없앨려고 합니다.
안집 냉장고가 냉동이 안되어서 들어내고 별채에 냉장고와 김치냉장고가 있는데 김치냉장고를 갔다 놓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매직으로 2009년 10월이라고 구입날자를 적어 놓으셨습니다.
양문형으로 그때는 제일 큰 것으로 사다드렸는데 겉은 깨끗한데 형제들이 괜히 AS를 받지말고 사람들 있을 때 없애자고 하더군요.
마굿간을 치우느라 애쓴 동생들한테 농사지은 분께 방아를 찧어달라고 부탁해서 방금 방아를 쪄온 쌀을 실어주었습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누이와 여동생네도 수원사는 동생편에 실어 보냈습니다.
공직을 퇴직하고 서각으로 취미생활을 하는 막내동생 친구가 이번에도 와서 애를 많이 썼습니다.
서각에 필요한 송판과 나무토막, 절구통을 실어주고 쌀도 한포대 실어주었습니다.
먼지구덕에서 마굿간을 치우느라 멀리서 내려와서 애쓴 사촌동생과 형제들이 감사했습니다.
큰집일이라면 열일을 제치고 도와주는 사촌동생이 전주에 살고 있어서 집안일 뿐만아니라 큰집일에 너무 많은 덕을 보고 있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번주에 스레트를 걷어내고
마굿간을 철거하하고 마당을 치우는 일은 제 몫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TV프로에서 신체적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딛고 일어나는 어떤 젊은이가
"100% 만족보다는 2% 부족할 때가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응원하고 싶은 젊은이였습니다.
얼마나 좋은 글귀입니까?
"100% 만족보다는 2% 부족할 때가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되새겨 봅니다.
3월 25일
56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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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칼타이탄, 크기 20㎝ 극대과종 극조생계…초반 생육 뛰어나
신비너스, 이른 출하 농가 적합 분지수 적어 정식 간격 넙게해야 되다.
◆칼타이탄=탄저병·칼라병·역병에 강하다. 건과 품질이 매우 우수하며 신미가 강한 편이다.
크기가 20㎝에 달하는 극대과종으로 화건이 용이한 것도 장점이다.
극조생계로 초반 생육이 뛰어나 조기 수량성이 우수하다.
◆신비너스=이른 출하를 노리는 농가에 적합한 품종이다. 탄저병·칼라병·역병에 강하며 초기 착과량이 많다.
매운맛이 강하며 과형이 균일해 홍고추 출하용으로 추천된다.고춧가루용으로도 적합하다.
초형이 작고 분지수가 적은 품종이라 일반 품종보다 정식(아주심기) 간격을 좁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매운탄, 남자의자격
신젠타코리아
매운탄, 다습 토양서도 잘 견뎌 강한 신미·당도로 특유 맛 자랑
남자의자격, 말려도 모양 ‘빵빵’ 복합내병성 품종 … 작황 안정 
매운=매해 판매량이 급증하는 인기 품종으로, 탄저병에 강한 내병성 품종이다.
홍고추·건고추 모두 재배가 용이하지만 특히 고춧가루용으로 재배한 농가에서 반응이 좋은 편이다.
신미가 강하면서 당도가 있어 특유의 맛을 자랑한다. 다습한 토양에서도 견디는 힘이 뛰어나 올해처럼 긴 장마가 이어지는 조건에서도 양호한 수량성을 유지한다.
◆남자의자격=이상기후에도 안정된 작황을 보여 농가의 인기를 끄는 품종으로 CMV와 풋마름병에 강한 복합내병성 품종이다.
고추 모양이 좋고 표면이 매끈하다. 고추를 말렸을 때도 빵빵한 모양을 유지하는 만큼 제분율이 우수해 높은 농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신미도가 일반적으로 가장 선호되는 순한 매운맛이라 시장성이 높은 고추를 생산할 수 있다.
 (왼쪽부터) 칼탄퍼펙트, 슈퍼칼탄
아시아종묘
칼탄퍼펙트, 수량성·과형 강점 건과 품질 좋고 신미 강한 편
슈퍼칼탄, 후기까지 착과 많아 이틀 후숙해 말리면 품질 향상
칼탄퍼펙트=탄저병·칼라병·CMV·역병에 강한 복합내병계 품종으로, 일찍 출하가 가능한 조생계 품종이다.
대과종인 데다 착과율이 좋아 수량이 많이 달리고, 과형이 우수하고 균일한 것이 강점이다. 건과 품질도 좋아 건고추용으로도 적합하다. 신미는 강한 편이다.
◆슈퍼칼탄=탄저병·칼라병·역병에 두루 강한 복합내병계 품종이다.
숙기가 조금 늦은 중만생계지만 과형이 평균 16㎝ 이상인 큰 크기의 극대과종이다.
후기까지 많은 착과량을 보여 수량성이 우수하다. 신미도는 낮은 편이다.
수확 후 이틀 정도 후숙해 건조하면 건과 품질이 더 좋아진다.
(왼쪽부터) 티탄아트고추, 불칼라고추
팜한농
티탄아트고추, 생리 장해 적어 색택 매끈…건과 품질도 우수
불칼라고추, 토양 적응력 탁월 곡과 적어 홍고추 출하에 유리
◆티탄아트고추=탄저병과 바이러스에 강한 것은 물론 꼭지빠짐이나 석회결핍증처럼 고추에 발생하기 쉬운 생리 장해가 적은 내병성 품종이다.
초세가 강하며 숙기가 빨라 생육 후기까지 착과가 안정적이다. 마디 간격이 짧아 농가의 일손도 덜 수 있는 품종으로 추천된다.
신미도가 높은 품종으로 과형이 우수하고 색택이 매끈하다. 건과의 품질도 좋다.
◆불칼라고추=칼라병·역병 등에 강한 품종이다. 비가림 재배나 터널 재배를 하는 농가에 적합하다. 어느 토양에도 적응력이 뛰어나 관리가 쉬운 편이다.
착과력이 매우 우수하고 생육 후기까지 연속 착과돼 수량성도 좋다.
초세가 강하며 농가의 선호도가 높은 대과종 품종이다.
곡과가 적고 과형이 우수해 홍고추 출하에 유리하다.
23년 1월 15일
4
18
가을걷이를 할 때입니다.
저한테도 가을걷이는 참 바쁘고,
힘들기도 했습니다.
저희집에는 76년까지 일하시는 분들이 두분 있었습니다.
그땐 시골에 농사좀 지으신 가정에서는 머슴이라고 하죠.
그분들을 한명을 두시고 농사를 하시는 농가도 있고요.
조금 많은 농사를 지으신 가정에서는 두명을 두시고 농사를 지으셨거든요.
저희집 사랑방에 한겨울이면 동네 머슴살이 하시는 아저씨들이 12명정도 와서 매일 같이 보내곤 했습니다.
겨울철이면 기나긴밤을 지내면서 새끼도 꼬고,
가마니도 짜고,
멍석도 만들곤 했습니다.
가끔씩 나이롱뽕이나 민화투를 치시기도 했습니다.
두부내기 화투죠.
조금 얻어먹는 재미로 졸린눈을 참으면서 시원한 두부한쪽에 김치걸쳐서 먹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가끔씩은 지붕에 닭가리에 감을 담아서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익은 감홍시만 골라서 꺼내 먹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에 상머슴은 백미 90k15가마니를 작은 머슴은 10가마니를 새경으로 받았습니다.
담배는 매일 1갑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담배를 갔다가 파시는 댁에 담배 나오는 날이면 매번가서 담배를 미리 사오기도 했습니다.
새경이란 1년동안 머슴살이 한댓가로 받은 임금이죠.
설과 추석에는 옷부터 신발까지 쪽 빼입혔고요.
어머니께서 광목으로 손수 한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동네 미싱이 없어서 바느질을 해주시면 품앗시로 저희집 일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1년 내내 머슴들 식사 준비하고,
새참 준비하고,
남의 식구 끼니 챙기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제가 군에서 76년에 전역을 했습니다.
그 다음해부터 머슴들이 없어졌는데 어머니께서 그 많은 일을 도맡아서 하셨습니다.
몸은 피곤해도 마음이 편하다 하시네요.
남의 식구 삼시세끼  따뜻한 국물에 끼니 챙기시기가 많이 힘드셨나봐요.
머슴들 있을 때도 들일이며,
밭일을 많이 하셨는데,
끼니때 식구들만 있으니까 마음이 편하셨나 봅니다.
아버지께서는 교직에 계셔서 식사하시고 출근하시면 그만이시죠.
물론 근무 마치시고 일손을 돕기는 하셨죠.
그렇다고 저희집 논이 그리 많은것도 아니었습니다.
저희마을은 논1마지가 150평입니다.
그때는 경지정리도 안되었죠.
산밑에 다랑다랑 논도 있고요.
장구뱀이라는 장구를 닮았다해서 붙여진 논빼미 이름이죠.
천수답이 있어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모를 심지 못한 논도 있었습니다.
수렁논도 있어서 소로 쟁기질할 때 수렁을 돌아서 다니는것을 보았답니다.
수렁논에는 정강이까지 빠져서 모를 심지 못했습니다.
그 수렁논에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배가 누런 미꾸라지를 얻을수 있었습니다.
제일 큰 논이 두마지기 크기였으니까  300평쯤 되는 큰논이었죠.
모두 28마지기 정도로 기억됩니다.
작은 논빼미가 띄엄띄엄 논이 있었습니다.
논 갯수로는 20개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저한테는 할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제가 대전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79년 2학기때 전주로 옮겼습니다.
그때부터 주말마다 남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군생활 할 때도 휴가를 농번기에 얻어서 모내기랑 가을걷이를 해드렸습니다.
좀 특수한 보직을 맡아서 모내기 할때랑 가을걷이 할때랑 1년에 두차례  20일씩 휴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2모작을 할때입니다.
보리 베내고,
논 갈아서 벼를 심었죠.
그 얼마나 된다고 보리 이삭을 주었는지요?
가을에 벼가 누렇게 익으면 낫으로 베서 8주먹씩 묶어 가래로 논에 세워서 1주일정도 말리면 지게나 리어카로 집으로 실어 날라서 공상으로 벼타작을 했습니다.
금주말에 벼를 베어서 세우고,
다음주에 벼타작을 했답니다.
발로 밟아서 공상을 돌리다가 모터를 달아서 나락타작을 했습니다.
종일 사람손으로 타작을해서 밤에 풍구로 돌려서 지푸라기를 없애고,
깨끗한 벼를 광에 가득 쌓고,
밖에 종일 훌터낸 짚을 쌓아놓았습니다.
농사일 할 때 가장 소중한 소먹이와
마굿간에 넣어서 소똥과 오줌으로 범벅이되고 소가 밟으면 아주 좋은 퇴비가 되죠.
80년대 이전까지는 10월에 쉬는날이 많았었습니다.
1일 국군의 날.
3일 개천절.
9일 한글날.
24일 UN데이.
농번기 방학.
그때는 모내기 할때랑 가을추수할때 농번기방학을 실시했습니다.
또 제가 근무했던 곳이 여학교라서 김장방학 이렇게 쉬는날이 많았죠.
벼베고,
논에서 말린 벼를 비포장도로인데 리어카로 가득실고 집으로 실어 날라서 타작을 했습니다.
논두렁에 심은 메주콩을 걷어드리고,
산에 밤도 털어야 했고,
밭에 들깨도 베고,
고구마도 캐야 했습니다.
어느땐가는 13번을 남원을 다녀왔더니 가을걷이가 마치더군요.
10월부터 11월까지는 쉬는날이면 다녀왔습니다.
그때는 남원가는 직행 첮차가 6시15분차였습니다.
남원에서 내려서 고향 마을가는 버스가 7시반차가 있었습니다.
그차를 놓치면 1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종일 일하다가 고향에서 남원나가는 7시15분차가 막차였습니다.
남원에서 전주가는 차는 저녁9시 직행이 막차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싸주신 보따리와 두자식들 데리고 전주에 도착하면 거의9시쯤 됩니다.
이렇게 열차례 이상을 다녀야 가을걷이가 끝났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참기름을 한병 주셨는데,
시내버스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짐보따리가 떼굴떼굴 굴렀답니다.
어머니께서 쪽파사이에 넣어서 주셨는데도,
워낙 세게 부딪쳐서 참기름병이 깨져서 버스안에 고소한 냄새로 진동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가고싶을 때 아무때나 나서면 다녀올수 있지만,
예전에는 참 복잡했습니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했기 때문에 챙길것이 많았죠.
차시간을 맞추는것이 제일 복잡했던것 같습니다.
아이들 어릴때는 더욱더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이맘때면 마음이 바쁩니다.
아까워서 산에 알밤도 주어서 나누어야 하고요.
좋지 않는 대추지만 털어서 말려드려야 하고요.
하시지 마시라고 했는데도 들깨를 이곳저곳에 심으셔서 베서 널어 드려야 합니다.
또 겨우내 주무시는 방에 군불때시라고,
간간이 패놓은 장작과 쏘시개 나무도 가까이 옮겨드려야 합니다.
이래저래 가을 한철이 바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산에 떨어진 알밤을 주워왔습니다.
벌레가 많이 먹었지만,
작은집, 외가댁, 이모님네 나눔을 했습니다.
옛날 가을걷이가 불현듯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다 아련한 추억거리인 것 같습니다.
모든것이 수작업으로 할 때라 힘들었다는 생각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11월 2일
6
♡♡♡♡♡♡♡♡♡♡♡♡♡♡♡♡♡
++++++
좋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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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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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라는 초등학교 여교사가 있었습니다.
​개학 날 담임을 맡은 5학년 반 아이들
앞에 선 그녀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둘러보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
고 말했던 것이죠.

그러나 바로 첫 줄에 구부정하니 앉아
있는 작은 남자 아이 철수가 있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K 선생은 그 전부터 철수를 지켜보며
철수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옷도 단정하지 못하며, 잘 씻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철수를 보면 기분이 불쾌할
때도 있었지요.

끝내는 철수가 낸 시험지에 큰 X표시를
하고 위에 커다란 빵점을 써넣는 것이
즐겁기까지 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K 선생님이 있던 학교에서는,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의 지난 생활기록부를 다 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철수 것을 마지막으로
미뤄 두었다. 그러다 철수의 생활기록부를 보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수의 1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잘 웃고 밝은 아이임.
일을 깔끔하게 잘 마무리하고
예절이 바름. 함께 있으면 즐거운 아이임.”

2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반 친구들이 좋아하는 훌륭한 학생임.
어머니가 불치병을 앓고 있음.
가정생활이 어려울 것으로 보임.”

3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함. 최선을 다하지만
아버지가 별로 관심이 없음.
어떤 조치가 없으면 곧 가정생활이
학교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임.”

철수의 4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내성적이고 학교에 관심이 없음.
친구가 많지 않고 수업시간에
잠을 자기도 함.”

여기까지 읽은 K선생은
비로소 문제를 깨달았고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반 아이들이 화려한 종이와 예쁜 리본으로
포장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왔는데,
철수의 선물만 식료품 봉투의 두꺼운 갈색 종이로 어설프게 포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부끄러워졌다.

K선생은 애써 다른 선물을 제쳐두고
철수의 선물부터 포장을 뜯었습니다.

알이 몇 개 빠진 -- 팔찌와
사분의 일만 차 있는 -- 향수가 나오자,

아이들 몇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팔찌를 차면서 정말 예쁘다며
감탄하고, 향수를 손목에 조금 뿌리자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 들었습니다.
철수는
그날 방과후에 남아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 꼭 우리 엄마에게서 나던
향기가 났어요.”

그녀는 아이들이 돌아간 후
한시간을 울었다.

바로 그날 그녀는 읽기, 쓰기, 국어, 산수
가르치기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진정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K선생은 철수를 특별히 대했습니다.

철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줄 때면
철수의 눈빛이 살아나는 듯했다.

그녀가 격려하면 할수록
더 빨리 반응했다.

그 해 말이 되자

철수는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겠다는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가장 귀여워 하는 학생이 되었다.
1년후에 그녀는 교무실 문 아래에서 철수가 쓴 쪽지를 발견 했다.

거기에는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교사"였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6년이 흘러
그녀는 철수에게서 또 쪽지를 받았다.
고교를 반2등으로 졸업했다고
쓰여 있었고,

아직도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선생님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4년이 더 흘러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이번에는 대학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쓰여 있었다.

이번에도 그녀가 평생 최고의 선생님이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라
쓰여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름이 조금 더 길었다.
편지에는 ‘Dr. 박철수 박사’ 라고
사인되어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해 봄에 또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철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으며,
K선생님에게 신랑의 어머니가 앉는
자리에 앉아주실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기꺼이 좋다고 화답했다.

그런 다음 어찌 되었을까?

그녀는 가짜 다이아몬드가 몇 개 빠진
그 팔찌를 차고, 어머니와 함께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어머니가
뿌렸었다는 그 향수를 뿌렸습니다.

이들이 서로 포옹하고 난 뒤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된 박철수는
K선생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선생님,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그리고 제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K 선생은 또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철수 너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구나.
내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너란다.
널 만나기전 까지는 가르치는 법을 전혀 몰랐거든.”

꼭 아이들에게 해당되는 말만은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를 믿어주고 칭찬해준다면
어른일지라도 분명 큰 일을 해내리라
믿습니다.

내 입술이라고 상대방을 내 잣대로 판단해
주변의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았는지 K선생님을 보며 다시 한번
나를 점검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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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8월 29일
17
12
Farmmorning
39살 주부인데요...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고 관리가 수월한 작물 추천 부탁드려요. 하우스 부추를 해봤는데 너무 손도 많이 가고 힘들더라구요ㅜㅜ
21년 12월 9일
3
572평 처음으로 농사를 지어보려고하는데요..아무래도 처음이다보니 수확양보다는 손많이 안가고 관리가 쫌 쉬운작물이 있을까요?ㅜㅜ도와주세요~~
22년 4월 16일
6
🧅 본포 관리
▶ 관수
정식한 다음에는 반드시 물을 충분히 줘야합니다.
정식 후에는 뿌리와 토양 사이에 공간이 생겨
물을 주지 않으면 뿌리가 건조하여 말라 죽거나
뿌리가 잘 뻗지 않아 활착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입니다.
겨울을 지나는 동안 가뭄이 심하여
토양이 건조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찬 공기가 토양 속에 있는
뿌리까지 쉽게 들어가 얼어 죽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겨울이라도 토양이 건조하면 물을 주어야 해요.
▶ 물을 줄 때는 따뜻한 날을 택하여 일찍 주고
오후에는 햇빛에 의해 땅 온도가 올라갈 수 있도록 합니다.
골에 물을 댈 경우에는 물이 어느 정도 골에 차면
바로 물을 완전히 빼주세요.
겨울이 지나고 온도가 올라가면 잎의 생장이 다시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양파는 물 요구량이 많아지므로 수시로 물을 줍니다.
양파는 생육이 왕성한 시기에도 많은 물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구 비대가 시작되는 시기에 건조하면
수량이 현저히 감소하므로
7~10일 간격으로 30~40mm 정도의 물을 충분히 주세요.
▶ 그러나 물을 너무 많이 주어 토양이 지나치게 습하게 되면
뿌리가 숨을 쉬지못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생육과 구가 비대하는 데 장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생육이 왕성한 시기인 3월과 4월에
계속 습하게 관리하면 뿌리의 기능이 약해지고
결국 뿌리가 죽어 수량이 현저하게 적어집니다.
이러한 피해는 배수가 잘 되지 않는 토양에서 많이 발생하나
물을 잘못 주어 생기는 경우도 잦아요.
물을 고랑이 잠길 정도로 준 후 물을 빼지 않고 두면
멀칭에 의해 수분 증발이 억제돼
너무 습한 상태가 유지되어 습해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 물을 줄 때는 분수호스나 스프링클러 등으로
이랑 위로 주는 것이 좋은데요, 이런 관수장치를 사용하면
물을 주는 것뿐 아니라 물 비료로 웃거름도 겸할 수 있어
노동력이 절감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관수장치가 되지 않아
고랑에 물을 대는 방법을 이용할 경우는
고랑에 물이 잠긴 상태로 장시간 계속 두지 말고
일찍 물을 빼 줘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비가 많이 오거나
며칠 동안 계속 비가 오는 경우에도
토양이 습하여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전에 배수구 정비를 철저히 해 주세요.
▶ 유용 미생물제 사용
양파 생육기인 3월 상순부터 7일 간격으로
유용 농업미생물(Pseudomonassp., Kluyvera sp.)
100배액(109cfu/mL기준)을 3톤/10a씩 5회
토양 관주할 경우 처리하지 않는 것보다 수량이 늘어납니다.
🧅 제초
▶ 잡초 방지를 위해 정식하기 전에 제초제를 뿌리는데,
대부분의 제초제는 살포 후 3~4일간은 가스가 발생합니다.
제초제 살포 후에 바로 비닐을 덮으면
가스의 피해를 받기 때문에 멀칭 3~4일 전에
제초제를 살포하여 가스를 발산시키는 것이 좋아요.
제초제를 사용할 때는 먼저 정식할 포장에
어떤 종류의 잡초가 많이 발생하는지 파악한 뒤에
그에 맞는 제초제를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 제초제는 사용 시기와 방법이 모두 다르고
제초제에 따라서는 후작물에 영향을 미치는 종류도 있으므로
사용 전에 유의사항을 잘 읽어야 합니다.
정식할 때 살포한 제초제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그 효과가 떨어져 잡초가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양파 뿌리의 주요 활동 부위가
땅속 10~15cm여서 잡초로 인한 피해가 큰 편입니다.
잡초의 발생이 많으면 양파 수량이 감소하고
저장성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조기에 제초하고
작업 시에는 뿌리나 잎이 손상되지 않도록 해주세요.
▶ 양파 친환경 재배에서 흑색 비닐 피복 전 정식 상 표면에
옥수수 글루텐 가루 200kg/10a를 고르게 살포 시,
정식 5개월 후에 92.3%, 정식 6개월 후에 62.8%의
잡초방제 효과를 보였으며
수량성은 옥수수 글루텐 200kg/10a 살포 후
1회 제초 시 손제초에 비하여 수량은 다소 떨어져
92% 수준이었습니다.
22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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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제주 성읍리에 약3500평정도 토지가 있는데 귀농해서 농사를 지을까 하는데 소득 있고 손이 많이 가지않는 과수작물이 무엇이 있을까 조언 듣고 싶어 올립니다
21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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