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무렵 밭에 도착하니 아침 공기는 아직도 차가워 점퍼를 입은 채 고추와 파 고랑에 분사 호스를 틀어 놓고 하우스로 들어와 채비를 갖추는데 집사람이 "아예 아침을 먹고 일을 시작하자."라고 한다.
"밥과 쌀국수 중 뭘 먹겠냐?"라고 하므로 국수를 선택하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어제 혼자서 네 그루 했으니 오늘은 둘이서 여섯 그루만 하고 가자."라고는 '낫토'를 내어 놓는다.
쌀국수에 물을 붓고 불기를 기다리며 낫토를 먹었다. 혈류 흐름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나토키나제 성분이 들어있는 낫토를 지난번 오키나와 여행 때부터 다시 먹기 시작하였는데 집사람은 효과를 보고 있는 모양이다.
밖으로 나가면서 "당신은 커피 한잔 마시고 천천히 나오고 호박에 물이나 좀 줘라."라고 한다.
난 청개구리 심보가 들었는지 쉬라고 하면 일을 더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래서 집사람 뒤를 바로 따라 나와서는 호박 구덩이에 물을 주고 솎기 작업에 동참했다.
한 나무에 붙어 먼저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하다가 집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바늘 꽂을 만큼의 땅도 없다며 땅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데 당신은 땅도 있지, 쉴 공간 하우스도 있지 그런데 일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데?"라며 따지듯 묻는다.
담배라도 있으면 한대 피우며 한숨 돌린 후 과거 즉 이유를 설명하겠건만 금연한 지 35~6년이 되었으니 그럴 수도 없고 헛기침만 몇 번 하고는 얘기를 시작했다.
국민학교 2~3, 4학년 시절 할아버지가 오늘은 열 마지기 당근 밭에 돌 주워내는 날이다.내일은 '놉'들이 나락 논을 매는 날이니 쇠파리를 쫓아야 한다는 등 여러 이유를 들어 학교를 쉬라고 하여 하는 수 없이 소쿠리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돌을 주워 밖으로 내다 버리고 이태리포플러 나뭇가지를 꺾어 일꾼들이 엎드려 골무 낀 손으로 논을 매고 있으면 등허리에 붙는 쇠파리를 휘휘 쫓았는데 그때부터 농사는 짓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래서 밭에 오는 자체가 싫다고 했더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귀여운 손자를 결석시키면서까지 일을 시킨 할아버지가 아니면 육십여 년 전의 일을 아직 가슴에 담고 있는 나를 이해 못 하겠다는 뜻인지 감이 안 잡혔다.
서서 작업을 하다가 허리가 아플 때쯤엔 의자에 앉아 하단부에 오밀조밀 붙어 있는 복숭아를 한두 개만 남기고 솎아냈다.
계획대로 여섯 나무를 하고는 토요일을 즐기기 위해 귀가하는데 머릿속으론 대극천은 많이도 달렸던데 일주일 만에 끝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일손을 사려니 그것도 썩 내키지 않고.
상담 심리학 공부를 해보니 어릴 때의 상처 때문에 상대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상대가 불편할까 봐 내 감정은 참고, 나는 힘들어도 상대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현재의 모습이 할아버지에게 잘 보여 학교에 가야겠다는 경험과 상처가 성격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 것은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튼 내일은 쉬고 모레부터 하기 싫어도 열심히 해야 한다.
왜냐면 농지법 개정으로 비농업인은 농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한다니 안 그래도 거래가 없는데 현재보다 더 할 것 같고 그 취지는 맞는 것 같으나 좀 더 늙으면 이 땅 팔아먹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농사를 짓지 않으면 농어촌공사에 위탁해야 하는데 임대료는 제대로 받을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