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무소주이생기심 ·
여름방학 차 내려온 손자와 일주일간 동화 속 얘기 같은 추억들을 만들고 역에서 제 엄마에게 고사리 같은 손을 건넨 후 초저녁이었지만 비 예보가 있기에 익은 고추를 따고 탄저병 예방약을 치기 위해 밭으로 향했다.
바로 집으로 왔으면 손자의 잔영을 따라서 밀려오는 그리움을 잊고자 술을 찾았을 텐데 밭이라서 조금은 덜 했지만 그래도 토마토와 오이, 옥수수를 따기도 하고 민달팽이와 각종 벌레를 찾아다니며 이리저리 다녔던 기억이 떠올라 북녘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봐야만 했다.
귀가하여 있는데 며느리로부터 친정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연락과 더불어 손자의 귀여운 사진들을 첨부하여 온 사진을 보노라니 목젖이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잠시 숨이 턱 멎는다.
다음날이 대학병원에 건강검진이 예약된 터라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온 방 안에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쩌고저쩌고하는 손자의 재잘거리는 소리만 벌의 날갯짓처럼 윙윙댈 뿐 도대체 잠이 오지 않는다.
새벽에 비몽사몽 겨우 잠들었는가 싶었는데 06:30에 맞춰둔 알람이 울린다.
서둘러 씻고 병원에 도착하여 검진을 받고 마지막으로 내시경을 했는데 용종도 없고 일차적으로 아직은 쓸만하다는 구두 통보를 받고는 술을 끊을 때가 도래하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다가 뒤이어 심신이 나른해진다.
20시 이후 굶었으니, 당이 떨어졌다는 신호인가 싶어 병원을 나서다가 출입문 옆에 있는 스타벅스를 보며 커피나 한잔 사주라 했더니 “간호사 선생님이 죽 먹으라 하더라.”라며 거절한다.
이 사람아, 어떻게 시키는 대로 다 하노? 가다가 순두부로 점심 먹고 시원한 카페에 가서 커피나 한잔하자고 했더니 그때야 “그러면 그럽시다”라고 한다.
카페에 앉아 있으니, 물놀이를 즐기는 손자의 사진이 카톡, 카톡 쉴 새 없이 온다.
시아버지의 현재 심리 상태를 잘 파악하고 있는 며느리의 마음 씀씀이 고맙다.
귀가하여 저녁을 먹기 위해 거실에 들어서니 간이 건조기에서 뿜어내는 고추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작물

홍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