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제

자유주제 · 자유게시판
경남거제김삼철
텃밭은 내 놀이터 ♡·
나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사법연수원 다니던 시절, 양쪽 다리가 불편한 여성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에서 푸른빛이 튀어 나올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판사가 됐다. 

어느 날 판사실을 찾아간 내게 그녀가 한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양다리만 성하다면 차라리 파출부나 창녀가 돼도 좋겠다'고. 

그녀는 걸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다고 했다.그녀에게 걷는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의 영역이었으며 행복의 기본이었다. 

뇌성마비로 육십 평생을 누워서 지낸 여성을 변론한 적이 있다.몸은 마비됐지만 머리가 비상하고 정신도 또렷했다.
그녀는 자살하고 싶어도 혼자서 죽을 능력이 없어 살아왔다고 내게 고백했다. 
약국으로 걸어갈 수도 없고 강물에 빠져 죽을수도 없었다고 했다.
혼자 방안에서 일어나 목을 매달 수도 없었다.그녀는 말도 못했다.
한마디 하기위해 죽을 힘을 다 한다.
그래도 말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 앉을 수만 있어도 더 큰 행복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한달에 한번 와서 그녀를 돌보던 여자는 “혼자 화장실을 가고 목욕할
수 있는게 큰 복인 줄을 전에는 몰랐다”고 내게 말했다.

내가 잘 아는 영화감독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소리가 사라졌다. 들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의사들은 귀의 기능에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됐다.그를 만났을 때 공허한 웃음을 흘리면서 그는 내 입술을 보았다. 내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채기
위해서였다.
옆에 있던 그의 부인은 내게 남편이 다시 들을수만 있다면 더 큰 행복은 바라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고교시절 혜성같이 나타난 맹인 가수가 있었다. 가요제에서 여러번 수상경력이 있는 타고난 뮤지션이었다. 나중에 그는 맹인이라 대중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고 방송 출연을 거부당했다.

세월이 흐르고 그는 바닷가 피아노가 놓인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늙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행복은 바라지 않았을것 같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죄수와 편지로 소통을 했던 적이 있다.그는 암흑의 절벽에 매달려서라도 살 수만 했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했다.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너무나 귀중한 것이다. 
돈 많이 줄테니 내 대신 죽어 달라면 응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목숨보다 중요한건 없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다고, 일자리가 없다고, 늙었다고, 외롭다고 불행해 하고있다. 보고 듣고 걸으면서 존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엄상익 변호사)
~~~~~~~~~~~


엄상익님의 글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매일매일의 일상이 기적임을 절감합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산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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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청주하은와송~♡♡♡~
좋은글 감사합니다
우리의 지체 하나하나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 한가요~
볼수있고 들을수 있고 걸을수도 만질수도 모든것
할수 있음에 늘~ 감사 하며 행복 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건강 하세요~~
경남김해출석 체크함
참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시네요.
오늘은 갑자기 사람은 누구나 영과육과혼으로 살아가는데 저의 영혼에 들어온 하나님

제가 뭘하고 살사가는지도 모르면서 거연 70세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수있는 특권에 깜짝 놀라며 당신의글을 읽고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천국백성임에 감사하며

갖가지의 처해진 상황에 애석해하며 절박한 글을 보고 저의 느낀심정을 보내드려봅니다.

살아있다는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자녀가 되어 천국에 간다는 것에 감사하며

당신도 영원한 생명주시는 주님을 믿고 천국에 가십시요.
낼부터 가까운교회에 나가시길 기도할께요.
경기연천Smcenter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듯합니다 요즘말로 소확행이 나름 행복을 가져다줄듯요
대전서구갑성이
'처서'
2024.8.22.목요일.14시02분이다.
방금, 민방공문자. 움직이지 말고 휴폰만 볼수있는 참 좋은 시1간이다.
무더운 여름이 이제는, 조금은 가려나 보다.
고마운 가을을 부르는 절기의 날이 매미소리와 함께 흐르고 있다.
이제 땀을 말리고 싶다.
수고로움을 많이 한 여름이였다.
전북전주김종욱
느껴보면 압니다
경기시흥조남이
제.자신에 감사함을느낄수잇는 글 감사합니다
부산금정토마토17268
답변왕
취미로 소일하는 농부·
신체의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
어뜬 것으로도
극복하기 힘들다
다만 할수 있는것을 특별화 하는것이다
경북구미표고버섯18837
답변왕
샤인 3년차 초보농부 ·
알 면서도ᆢ 겪어봤으면서도 ᆢ지금 불편하지 않으니까 ᆢ잊어 먹는지 ?까먹는지?머리가 나빠서인지? 다시 느낄수있게 좋은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기안성한학수
먹거리에 진심을 담다·
갖고있지 않은자의 고통을 어찌이해하겠는가 이땅에 아프고 불편하신분들이 없기를 ᆢ ᆢ

자유주제모임의 연관글

🌹눈물 나도록 살아라. (Live to the point of tears) 이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은 잘 알고 계시는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입니다. (1913~1960년) 카뮈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라''는 의미로 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에 더욱 실감나게 삶을 살다 간 영국의 여류 극작가인 샬롯 키틀리의 (Charlotte Kitley) 인생 삶에서 진수(眞髓) 를 느끼게 한 그녀의 유언장 같은 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녀가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았는데, 그 후 암 세포가 간과 폐로 전이되어, 그녀는 종양 제거술 2회, 방사선 치료 25회, 화학요법 치료 39회 등 암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음에도 안타깝게도 남편과 5살, 3살짜리 자녀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죽으면서 블로그 에 마지막 글을 올렸는데 그 글 내용이 세상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고 싶은 나날이 이렇게도 많은데 저한테는 허락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는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 늙어 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안 주네요. 지금까지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매일 아침 아이들에게 일어나라고, 서두르라고, 이 닦으라고 소리지르는 나날들이 모두가 행복이었더군요. 살고 싶어서, 해보라는 온갖 치료 다 받아봤습니다. 기본적 의학 요법은 물론, 기름에 절인 치즈도 먹어보고, 쓰디 쓴 즙도 마셔봤어요. 한방에 가서 침(針)도 맞았지요. 그런데 모두 아니더라고요. 귀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장례식 문제를 미리 처리해 놓고 나니 매일 아침 일어나 내 아이들 껴안아 주고 뽀뽀해 줄 수 있다는 게 새삼 너무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얼마 후에 나는 남편의 곁에서 잠이 깬 이른 아침의 기쁨과 행복을 잃게 될 것이고, 남편은 무심코 커피잔 두 개를 꺼냈다가 커피는 한 잔만 타도된다는 사실에 슬퍼하게 되겠지요. 딸 아이 머리 땋아줘야 하는데 이를 누가....., 아들 녀석이 가지고 놀던 레고의 어느 한 조각이 어디에 굴러 들어가 있는지는 나만 아는데 그건 이제 누가 찾아 줄까요! 의사로부터 6개월 사망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22개월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1년 넘게 더 보너스로 얻은 덕분에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첫날 학교에 데려다 주는 기쁨을 가슴에 품고 떠나 갈 수 있게 됐어요. 아이의 흔들거리던 이가 빠져 그 기념으로 자전거를 사주러 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었습니다. 이것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보너스 1년 덕분에 30대 중반이 아니라 30대 후반까지 살다 가니 감사합니다. 감사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랍니다. 중년의 복부 비만 같은 거 늘어나는 허리둘레 같은 거 그거 한번 가져 봤으면 좋겠어요. 그 만큼 살아 남는다는 얘기잖습니까. 저는 한 번 늙어 보고 싶었어요. 부디 삶을 즐기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두 손으로 삶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샬롯 키틀리,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늘 감사합니다. 칠십이 넘은 나이, 물론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이렇게 일을 할수 있다는 게 어쩜 행복한 일이겠지요. 며칠전 형님의 사망소식에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음은 내 차례이겠구나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불과 몇년이 될지 몇달이 내게 주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애절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른 살아내려고 합니다. 또, 누가 아나요? 건강하게 80대로 연착륙 하게 될련지요. 문득 예전에 백두대간 종주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 태백산맥, 소백산맥을 무지원으로 종주를 했을 정도로 산에 미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주말만 되면 인수봉, 릿지 등반 등, 제사밥을 등에 지고 산 시절이 이렇게 촌노로 늙어가다 보니 그 시절이 그립기는 해요. 오늘 업로드한 글이 피가 뜨껍던 시절엔 남의 얘기처럼 느껴젔었는데 이제 죽음이란 상시 곁에 와있구나 하는 생각에 자신을 잠시 돌아보며, 글을 업로드 해보니 주어진 시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시어 멋지게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많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 이 잠자리에서 내일 깨지않았으면 하고 잠에 들지만 역시나 내일은 찾아오더군요. 각설하고... 꿀 꼬순 밤 보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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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동숙의 노래🍁 사연을 알고 계십니까? 🎋반세기(半世紀)도 훨씬 더 지나버린 1960년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가 무척 어려웠던 그시절, 그녀는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국민학교도 마치지 못한채, 서울에 올라와 구로동에 있던 구로공단 가발공장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받은 월급은 최소한의 내 생활비만 남기고 시골 부모님에게 모두 내려 보냈습니다 동생들 학비와 가사(家事)에 보탬이 되라고. 그러기를 십여년이 지나면서, 찌들게 가난했던 시골집 생활이 조금은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문득 자신을 돌아 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서른이 가까운 노처녀 나이가 되어 있었고 지나간 세월이 너무도 아쉬웠습니다. 이제라도 자신을 위해 투자(投資) 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검정고시 준비를 합니다. 대학에 들어가 글을쓰는 국어 선생님이되고 싶었던것입니다. 그래서 종로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고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고 중학교졸업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든 그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다니던 학원의 총각 선생님을 사모(思慕)하게 됩니다. 착하고 순진한 동숙은 총각 선생 자취방까지 찾아가 선생님 밥도 해주고 옷을 빨아 주며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두 남녀는 장래를 약속하며 몸과 마음을 그리고 가진 금전까지도 그에게 모두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가발공장은 세월이 지나면서 전자산업에 밀려서 그녀가 다니던 가발공장도 감원(減員)과 부도(不渡)로 직장을 잃은 그녀는 학원비 때문에 학원도 나가지 못하는 처지가 됩니다. 할 수 없이 동숙은 부모님 도움을 얻으려고 시골에 내려와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부모님에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야 아~ 여자가 공부는 무신공부냐?며 있다가 시집이나 가그라"며 냉대(冷待)합니다 10년 동안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동숙은 너무나 서운했습니다. 그녀는 부모님을 원망하며 울면서 서울로 다시 돌아옵니다. 동숙이가 만난 친구들은 모두가 "너가 사귀던 박선생 그분은 알고보니 약혼자도 있고 이번에 결혼한다더라. 너를 등처먹은 거나 다름없는기라, 가시나야!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동숙은 사실이 아니기를 바랬고 그를 만나서 확인을 하고싶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마음이 이미 싸늘했고 "너와 난 학생과 제자 사이 아니냐. 내가 어떻게 너를 내 아내로...... 그리고 니가 좋아서 날 따라 다녔지. 고등학교 검정고시나 잘 보라구......." "알았씸더 샌님예~........." 더이상 긴 이야기가 필요 없었습니다. 이미 농락 당한 여자임을 알게된 동숙은 복수를 결심하게 됩니다. 동생들과 부모님에게 희생만 당하고 그리고 또 한 남자에게 배신 당하고 그렇게 살아 온 동숙은 과연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어차피 내인생은 이런거야 하며 동숙은 처절하게 비관을 합니다. 그녀는 동대문 시장에서 비수(匕首)를 하나 구입해서 가슴에 품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수업시간 그 선생이 칠판에 필기를 마악 쓰고 돌아 서려는 찰나 원한에 찬 동숙은 선생님 가슴에 복수의 비수를 꼽습니다. "야, 이놈아! 짐승보다 못한 나쁜놈~" 순간적인 사건입니다. 비명 소리에 남자는 쓰러 졌고 동숙은 경찰조사를 받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남자 어떻게 되었어요? 제가 잘못 했어요. 형사님! 제발 그 선생님만 살아나게 해 주세요" 자신을 탓하면서 사랑했던 남자의 안부를 더 걱정하는 여지지만 동숙은 결국 살인 미수죄로 복역을 하게 됩니다. 가난 때문에 자신을 전혀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오직 가족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그녀가 뒤늦게 얻은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살인미수자(殺人未遂者)라는 비극으로 마무리한 "사랑의 생활수기"가 여성 주간지에 실려서 그때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를 모델로 하여 ' 영화도 만들어졌고 그 이름도 유명한 ''동숙의 노래''도 만들어 졌습니다. 한산도 선생이 이 동숙의 사연을 노랫말로, 백영호 선생이 작곡을 하여 1966년 신인가수 문주란이 동숙의 노래로 가수 데뷰를 합니다. 그때 문주란은 특이 한 허스키한목소와 어린 나이인 10대를 벗어나지 않은 앳된 소녀였다고 신문과 방송에서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결국 이 사연은 힛트! 대힛트 였습니다. 그래서 문주란은 가수의 길로 들어섰고 낙조, 타인들, 돌지않는 풍차등의 힛트곡을 내기도 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합니다. 문주란이 부른 <동숙의 노래> 가사입니다 1절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마음 원한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수 없는죄 저질러 놓고 흐느끼면서 울어도 때~는 늦어리 때는 늦어리~'' 2절 ''님을 따라 가고픈 마음이건만 그대 따라 못가는 서러운마음 저주 받은 운명에 끝나는 순간 님의 품에 안기운 짧은 행복에 참을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 뜨거운 눈물~.' 찟어지게 가난했든 우리의 1960년대 그당시 우리의 많은 10대 여공들은 배우지 못한 서러움과 냉대속에 동숙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든 숙명이었습니다. 동숙의 일생이 잘 표현된 이 노래를 듣고 또 다시 들어 보세요. 60~80년대 우리는 그때에 남자들은 독일 광부로, 월남전 파견과 중동건설 현장파견등으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여자들은 독일간호사 파견과 전국의 각종공단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여 번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식들이나 동생들 공부시켜가며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이루는데 공헌해 왔던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은 지금 70대 80대 90대 노년, 피땀흘리며 일하고 벌어서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세계 최빈국(最貧國)으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목숨을 연명(延命)하며 살아가던 우리나라를 세계10대 경제대국으로 만든 동력들인데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피땀흘려 일하기 보다는 정부에서 나눠주는 몇푼의 공짜 돈에 현혹되어 눈이 멀어있다는 말이 풍설이기를 믿고 싶을뿐입니다. 또한지금, 우리나라 경제발전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양 착각을 하면서 이들 경제 개발세대를 가르켜 꼴통, 들딱이라 하며 폄훼하는 현실이 정말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따라서 경제개발 주역들이 제대로 평가받는 교육과 인식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한가한 휴식시간 때 동숙의 노래 한곡 들으시면서 그 내력(內歷)을 알아 보는 시간 가져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동숙의 노래 🎤노래: 문주란 https://youtu.be/GYZ4BNs8Wp8 🍒🔔🍒🔔🍒🔔🍒🔔🍒🔔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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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사람 엄상익 변호사가 올린 글입니다. 읽다가 가슴에 닿아서 올려드립니다. 요즈음은 이따금씩 세상을 힘겹게 건너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상을 통해 본다. 새벽 1시반에 지하철역을 청소하는 60대쯤의 여성이 보인다. 플랫폼 벽 아래 의자 주위에 떨어진 쓰레기들을 빗자루로 쓸어내어 쓰레받기에 담는다. 수세식 변기를 세제로 닦고 반들반들하게 윤을 낸다. 저런 여성들의 수고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악취 없고 깨끗한 지하철역이 되는구나를 알았다. 노조가 파업할 동안 파리의 지하철역에 진동하는 지린내를 맡아본 적이 있다. 낙서가 가득하고 더러운 뉴욕의 지하철을 탄 적도 있다. 화면 속의 그녀는 밤일이 끝난 후 혼자 사는 단칸 지하방으로 돌아가 밥을 먹는다. 잠시 후 그녀가 다른 일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화점의 종이 쇼핑백들이 방바닥에 가득 쌓여있다. 그녀는 종이 쇼핑백에 플라스틱 손잡이를 끼우고 있다. 한 장 끼우는데 10원, 몇시간을 일하면 8000원을 번다고 했다. 그외에도 그녀는 공공근로나 일거리만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다 하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그녀가 방에 앉아 슬퍼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제 번 돈으로 오늘을 살고 생존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그걸 보면서 가슴이 찡하고 내가 편하게 사는 게 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변호사를 40년 하다 보니까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보았다. 소아마비로 어려서부터 다리가 불편한 여자 판사가 있었다. 명문 여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고시에 일찍 합격하고 판사가 되었다. 그녀가 있는 판사실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녀는 내게 다음 번 세상에는 청소부가 되더라도 매춘부가 되더라도 정상적으로 걸을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그 말의 진정성이 내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천만명의 기독교 신도들이 애창하는 찬송시를 지은 여성 시인을 여러번 만났다. 심한 뇌성마비로 그녀의 몸은 작동기능을 거의 잃었다. 물체같이 굳어버린 몸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두 손가락과 높은 아이큐의 두뇌뿐인 것 같다. 혼자서는 무엇도 할 수 없다. 이따금씩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그녀에게 가서 목욕시켜주는 봉사를 하는 여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목욕을 시켜 주고 돌아갈 때 혼자 몸을 닦을 수 있는 것만도 행복이라고 느꼈어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뇌성마비의 그녀는 유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카톡을 통해 내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변호사님 한번 입을 테이프로 막고 손발을 꽁꽁 묵고 사람들 사이에 쳐 박혀 있어보세요. 그게 60년 넘은 일생을 지내온 제 상태랍니다.’ 나는 그 머리 좋은 찬송 시인이 다리를 절더라도 혼자 일어나 걸을 수 있다면, 혼자 목욕을 하고 밥을 먹을 수 있다면, 분명 행복해 할 것 같았다. 나는 가난하고 험한 삶의 밑바닥에서 맑은 샘물같은 행복을 퍼 올린 사람을 보기도 했다. 노동자 출신 시인인 그는 폐암 말기였다. 달동네 꼭대기 어두컴컴한 임대아파트 방에 혼자 누워 있는 그를 찾아갔다. 세상의 고난은 모두 그를 찾아와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난과 고독, 병과 늙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의 마지막 파도에 그는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같은 죽어가는 환자가 하루종일 누워있을 수 있는 방이 있다는 게 감사해요. 이웃의 중학교에서 급식에 남은 누룽지를 가져다줘요. 성당에서 나물 반찬을 가져다 냉장고에 넣어줘요. 목욕 봉사를 하는 분이 더러 와서 몸을 씻겨줍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투명한 이슬이 맺힌 호박꽃이 보입니다. 누가 호박꽃을 밉다고 표현하나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저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시인은 내가 만난 후 죽을 때까지 몇 달 동안도 매트리스 아래 공책과 연필을 놓고 시를 쓰다가 죽었다. 그는 내가 그의 마지막 시집을 내줬으면 하는 것 같았다. 어젯밤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환한 달빛 띠가 펼쳐진 번들거리는 밤바다를 보았다. 하늘에는 총총한 별들이 떠있었다. 멀리서 색색으로 반짝이는 보석같은 부둣가의 불빛들이 검은 바다 위에서 물결쳤다. 걸으면서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하루하루에서 작은 성취와 기쁨을 발견해 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번 폴라산이 많은 비를 뿌리고 물러난 뒤 하늘에 가을이 왔습니다. 새벽엔 홑이불을 끓여당기게 되더군요. 엄상익 변호사의 글을 읽고 제가 본 한사람이 생각납니다. 제가 안과를 많이 이용하는데 그 병원에 청소를 하시는 아주머니 한분 이야기입니다. 병원이 개원한지가 40년이 넘어서 이제는 호남에서 규묘가 제법 큰 안과병원이 되었습니다. 안과 종합병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이 병원에서 개인병원으로 개원하면서부터 지금까지도 병원 청소를 하시고 계십니다. 지금은 7층의 건물이라 여러명이 나누어서 하십니다. 제가 자주 다니는 병원이라 인사를하고 지냈습니다. 올해 73살이고 저와는 동갑이더군요. 30대부터 병원 청소를 하기 시작했더군요. 슬하에 2남1녀가 두었습니다. 삼남매를 다 서울대학교를 보냈답니다. 큰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세종시에서 부부가 같이 근무를 하고, 둘째는 광주에서 부부가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딸은 시내 종합병원에서 과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흔히 자식들 잘 키웠으니까 이젠 일을 그만 둬도 되지않느냐?라고 말한답니다. 지금이니까 탕비실도 있고 휴계실이 있지만 옛날에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 입고 창고 같은 한쪽 청소용품을 모아둔 구석진 곳에서 점심도시락을 먹었지 않았을까요? 또 지금이야 자식들 다 잘키웠고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지만 30대 젊은 새댁 꽃다운 나이에 얼마나 힘들고 무시당하고 애로사항이 많았을까요? 그 때는 자식들 키우느라 어쩔 수 없이 일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핸드폰을 옛날 폴더을 쓰고 계시더군요. 또 얼마나 성실하시게 일을 하셨으면 지금까지 한곳에서 일을 하고 있을까요? 이런 경우를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자식들 삼남매를 서울대학에 보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제가 그랬습니다. 이제 그만하셔도 되지않느냐? 자식들이 제발 일좀 그만 하시라고 한답니다. 지금은 100명이 넘은 직원들이 실장님으로 불리더군요. 웃으시면서 "놀면 뭐하느냐?"하시더군요. 긴글 읽으시느라 애쓰셨습니다. 군산 아버지한테와서 아침 드시고 주무시는 아버지옆에서 끄적거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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