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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제

자유주제 · 자유게시판
경북구미표고버섯18837
샤인 3년차 초보농부 ·
오늘 새벽에 가보고싶었지만 참았다 잘못되면 황천길 간다고 가지 말란다 가본들 어떻게 할수 있는것이 없기에 6시에 가보니 난장판이다 미치고 환장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ㆍ마치 한탄강 직탕폭포 물 내려오듯 도로에서 둑아래로 물이 내려온다 ㆍ포도밭은 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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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당진심상화
네ㅡ 맞습니다. 급하시더라도 기다렸다가 장마 비가 끝나고 더 열심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전남구례화엄사 아래
에고ᆢ 속상하시겠어요. 힘내세요!
경남밀양임영심
출석왕중왕
항상 왕초보 ·
속상하시겠어요 빠른 복구 되면 합니다 남의 일이 이닌거 같아 더 마음이 쓰이네요 ~~
충북증평김규현
네 잘 하셨습니다
위험은 피해 가는게 가장좋은 방법입니다
경기화성해민농장
아로 접고 포도 불베리·
힘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안전한게 우선이라 생각 합니다
경기화성최병우
장마철에 급하다고 급하게 가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모든 장마 지나고 고칠것 고처야 합니다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세종세종김유숙
초보농부 아줌마·
이번 비가 너무왔어요.
비 피해 입으신 농부님들 힘내세요.
장마 끝나고 빨리 복구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배수로를 많들어놨는데 비가 그처 가보니 배수로는 흙으로 메워져있고 밭으로 흘러들어가 밭 고랑에 물이 흥건하네요.
삽으로 흙을퍼서 다시 물길은 만들어놨는데 모래부터 또 비가온다네요.
더 피해 입지 않도록 빠른 복구와 예방하셨으면 좋겠습니다.ㅇ
경북의성욕심내지말자
아무일 없다는듣 해가 쨍쨍 하네요 해라도 나주니 고마워 했어요 힘내시고 복구 하세요 좋은 날 옵니다
경기파주북극성짱
사람이 먼저 입니다
잘하셨구요 힘내세요
마음으로 나마 응원 합니다
전남여수돌산갓스타
돌산에서 갓 재배중·
에휴 정말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경남창원동읍초보임화영
3년차 쫄보병아리농부·
에고 애타는 속을 누가알꼬... 맘이 아픕니다. 그래도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부산금정토마토17268
취미로 소일하는 농부·
사람이 먼저다
사람살려고 하는일
사람이. 먼저 라는 생각은 어느곳에나 적용됩니다
힘들지만 사람이 안전한게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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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머니 *******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1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를 씌워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3일 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 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30살 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 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서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 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하시며 우셨다. 그 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 글 속의 “어머니”는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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