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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9 -

호롱 또는 등잔은 석유기름을 채우고 문종이로 만든 심지에 불을 붙여서 빛을 낼 수 있게 만든 우리 옛날 조상님들의 조명도구로서 호롱에 밝힌 불을 호롱불 또는 등잔불이라 했다.
호롱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60년대 초반에 출생한 사람 정도까지일 것 같다.
저녁을 먹은 후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야 성냥을 당겨 등잔대위에 올려있는 석유가 담긴 하얀 호롱 심지에 불을 붙였다.
등하불명(燈下不明)?
"등잔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있다.
등잔 바로 밑이 오히려 어두운 것처럼 가까이에 일어난 일을 오히려 잘 모르거나 가까이 있는 것을 오히려 못 알아본다는 의미다.
호롱심지를 너무 많이 올리면 끄으름이 많기 때문에 손으로 높낮이를 조정해야했다.
이 때 손에 묻은 석유기름은 머리에 쓱 문질렀던 것 같았다.
호롱불 아래서 숙제도 하고 책을 읽었다.
호롱불 옆에는 겨울엔 화로가 있었다.
부엌에서 잔불이 있는 재를 담아 다독거려서 방가운데 놓았던 화로는 방안 공기를 따뜻하게 했다.
불젓가락 위에서 구워지는 가래떡이나 불속에서 익어가는 고구마나 감자,
할머니의 정을 함께 먹었던 그 옛날이 그립네요.
옛날에는 자주 목욕을 하지 않아서 몸에는 이, 머리에는 머릿니가 많았다.
이와 머릿니의 알을 서캐라고 한다.
참빗은 머리를 빗을 때 머리에 있는 서캐는 머릿니 빗과 서캐빗으로 빗어서 이와 서캐를 잡았다.
서캐빗은 더 촘촘했다.
옷에 있는 이는 잡아서 손톱으로 눌려 죽였다.
옷에도 서캐가 기생하는데 호롱불에 태우기도 했다.
이런 몸에 기생하는 이는 나일론이 등장하면서 사라졌는데 머릿니는 어린아이들한테 최근에도 나타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날개가 없으나 하루 저녁에 몇 사람을 건너갈 수 있다고 했다.
위생이 깨끗하지 못해서 이와 더불어 뛰어 다니는 벼룩도 있었고 갈라진 기둥 사이에 기생하는 빈대라는 기생충도 있었다.
제가 1973년에 군에 입대를 했는데 겨울 내복이 지급되면서 엄지 손가락만하게 주머니를 내복 한벌당 3개씩 만들었다.
상의 양쪽 겨드랑이에 2개를 달고 하의 가랑이 사이에 1개를 달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살충제인 DDT를 주머니에 넣어서 달았던 것 같다.
한 겨울에 모포를 밖에 널었다가 양쪽에서 먼지를 털어내면 추위에 얼어붙은 이가 모포에 굴러다녔다.
첫 휴가를 받아서 전날 깨끗한 내의를 입고 잤는데 아침에 사무실에가서 등이 가려워 웃옷을 벗고 런닝셔츠릍 들춰보니 하얀 런닝셔츠에 까맣게 이가 있었다.
그 때 런닝은 포제였는데 휴가를 간다는 들뜬 마음에 미리 깨끗한 런닝으로 갈아입었거든요.
징그러워서 얼른 벗어서 난로속에 집어 넣어 태워버렸다.
피부병을 전염시킨 매개체인 이와 벼룩, 빈대가 무명옷에서 나일론으로 바뀌고 한옥에서 양옥으로 주거시설이 바뀌고 위생시설이 좋아지면서 사라지고 있다.
제가 군복무 시절만해도 막사 자체가 나무로 만들어졌고 내무반 바닥은 거의 나무로 되었었다.
만원인 버스속에서 여학생 세라복의 하얀 카라에 까만 이가 기어다니는 모습도 있었고, 긴머리를 출렁거린 아가씨 어깨너머로 이가 기어다니는 모습도 있었다.
호롱불은 방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바람에 앵두보다 작은 불꽃이 흔들렸다.
불꽃은 거뭇해서 벽에 까맣게 그을리고 콧속도 까맣게 그으름이 끼기도했다.
석유는 워낙 귀해서 1되짜리 유리병으로 사와서 조금씩 등잔에 따라서 썼다.
제법 심지가 큰 호야등은 집안 대소사를 치룰 때나 넓은 장소에서 넓게 불을 밝혔다.
지금은 호롱이나 호야등은 인테리아 소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름에는 아예 호롱불을 키지 않았던 것 같다.
할머니께서 대문앞이나 골목에서 맨 풀을 모아 마당에서 모깃불을 피고 멍석이나 와상에 둘러 앉아 부채질을 하면서 옥수수와 찐 감자를 먹었고 대형모기장을 치고 잠들기도했다.
그 때 모깃불이 왜 나만 따라오는지?
모깃불은 이쁜 사람한테 간다는 말에 위안을 삼는다.
모깃불이 재가 된 한밤에 눈을 떠서 바라본 하늘엔 영롱하고 초롱초롱하게 별이 빛나고 있었다.
지금도 고향 하늘에는 도회지에서 볼 수 없는 초롱초롱한 별을 볼 수가 있어서 고향하늘이 좋다.
아침 일찍 텃밭에 나가서 오이넝쿨을 만들었습니다.
노가오이5. 가시오이5, 사과참외8, 도마토5, 참외3개를 줄을 애주고 오이집게로 물려주었습니다.
4월 30일에 심은 고추가 심자마자 날씨가 쌀쌀해서 크질않다가 이제 크기 시작합니다.
1차 추비를 요소와 칼슘을 섞어서주고 물도 스프링쿨러로 돌렸습니다.
지인이 날씨 뜨거울 때 햇빛 가리라고 파라솔을 하나 던져주고 가네요.
쉴 때랑 고추 씻을 때 감사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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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포항수정농원(체리)
얼빵한농부(농경체등록)·
안녕하세요?
선생님 글 읽고 친구들 한데 전화하여 몇명 제외한 9명이 고향에 있는 친구 농막에서 모처럼 만남을 가졌습니다 친구네 농막은 길이 좁아 내심속으로 나올때도 조금 후들거리겠구나 생각하고
농막에서 준비한 음식들 삼겹살.쭈꾸미.잡어회 등 두루 두루 많이들 챙겨왔어 잘먹고 잘놀면서 어릴적 이야기로 웃기도 많이 웃고 오래토록 묻어두었던 빛바랜 이야기중 누구를 혼자짝사랑 했던 이야기도 하고 재미있게 놀았어요.헤어지는 오후 시간에는 다음을 약속하고 좁은 논두렁 길을 따라 큰 길로 한참을 차를 타고 나오는데 앞차를 보니까 바퀴가 길을 벗어날까 말까 할 정도로 조마조마 하여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속으로 잘놀고 막판에 왠 날벼락인가 했지요 그래도 30년 이상 운전 경력자 들이라 무사히 탈출하여 즐거운 날이 되었어요 "참고로 음주하면 못나와요" 경운기 겨우다니는 코스에 길이랑 논 높이가 1m정도 되었어요
선생님 덕분에 고향친구들 모처럼 만나 즐거운 시간 보냈어요
늘 좋은글 감사합니다 ^^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감사합니다.
깨복쟁이 친구들은 늘 만나면 재미있지요.
앞으로도 친구분들 건강하셔서 많이 얼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낮기온이 여름입니다.
어느새 그늘 아래가 좋으네요.
경남창원만당사
즐겁게 농사를짓고있어요·
추억의 옛파노라 영상을 보는것같았고
아련히 떠오르
감정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가는듯합니다
잠시 옛추억들을 생각할수 있는 기회를
주셨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건강들하시기 바랍니다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감사합니다.
날씨가 여름에 들어셨습니다.
더워지는 날씨에 건강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밤기온이 15도이상 오르니 고추도 잘 크고 있습니다.
옛날 이야기 많이 불러보겠습니다.
경북포항정성갑
참 농부가 되고 싶은.·
선생님 글 읽을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오릅니다.
마냥 재미지지만은 않아 고생스럽기도 했던 옛날의 삶을 오늘로 소환하니 시네마극장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되는군요.
때가되면 여기 올리신 글들을 모아 수필집 한권 내셔도 되겠습니다.
덕분에 오늘도 행복 한사발 들이키고 갑니다. ^^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좋으신 말씀 감사합니다.
글쓰는 방법도 순서도 모릅니다.
그냥 제 생활일기를 끄적거리고 있습니다.
제 칠순 때 자식들이 글을 모아 편집해서 한권 만들었답니다.
형제들 지인들 나눔했는데 팔순 때 기대한다고 하네요.
물질이 풍부하지만 옛날이 정도 듬뿍해서 힘들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더워지는 날씨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경기가평행복한일상
감회가 새롭네요
저도73년도에 군에 입대했었는데요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저도 73년에 입대했습니다.
육영수여사 저격당할 때 휴가증없이 서울에 갔다가 내려오는데 힘들었습니다.
근무는 광주 상무대에서 근무했거든요.
고향이 가까위서 집에 자주 들렀습니다.
일철에 휴가를 바꿔서 일을 도와 드렸습니다.
76년 제대하면서 머슴살이가 없어져서 어머니께서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평생 일만 하시다 5년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래도 요양병원에 안들어가시고 편안하시게 가셨습니다.
전남광양빛그린 김용화
ㄴㅐ일을향해 화이팅!!·
ㅇㅏ~옛날이여. 참으로 까마득한 옛시절.글을읽어가면서 그러때도있었지하며 회상을하네요. 60~70대분들은 공감하실겁니다.그립네요. 그때가...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감사합니다.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때는 싫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세월이 지난 지금 그리울 때가 많습니다.
경북구미선영~~
농사공부 만점자
고마운 지인이시네요 노란 파라솔 요긴하게 쓰시겠어요~~
전북전주유일기
텃밭 농부·
그늘이 없어서 고추를 씻고 건조기에 넣기전에 꼭지를 땁니다.
그 때 엄청 뜨겁거든요.
올해는 햇볕을 가릴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습니다.
노란색이 사진을 잘 받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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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 - 오늘날의 60, 70, 80세대들이 살아온 길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들이다!" 글을 읽으면서 아주 먼 이야기 같지만 얼른 머릿속에 생각이 많이나서 저의 생각을(●) 얹어 보았습니다. 참으로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었지만 정(情)만큼은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정으로 풍요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우리는 <호롱불> 세대였다. 90%는 전깃불이 없고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호롱불에 머리카락을 태우기도 했고 속옷에 기생하는 써캐를 태우기도 했다. 자다가 등잔을 발로차서 호롱에 있던 석유가 쏟아져서 석유기름 냄새가 온 방안에 몇날몇일 나기도 했다. 호롱심지를 높게하면 그으름이 생겨서 콧속이 새까매지기도 했다. 석유기름은 한되 두되 이렇게 병이나 양철통으로 담아서 구입했다. 호롱불 대신에 촛불을 키기도 했다. 2. 우리는 <뒷간> 세대였다. 90%는 실내 화장실이 없고, 엄동설한 한겨울에도 뒷 구석 재래식변소에서 볼 일을 봤다. 또 잿간이나 돼지막에 올라가서 생리작용을 해결하기도했다. ●지금같이 보드런 화장지는 없고 신문지나 책을 찢어서 사용했다. 그 중에 제일은 미렁지로 만든 일력자리 달력이었다. 라사점이나 안경점에서 주로 만들었다. 옛날엔 옥수수껍질이나 지푸라기를 비벼서 사용하기도 했다고한다. 측간을 갈 때 무서움을 타는 아이들은 측간 문앞에서 무섭다고 기다리라고했다. 외국인들한테 우리나라를 관광할 때 가장 애로가 뭐였나?를 문체부에서 설문을 받았습니다. 제일 많은 것이 냄새나고 지저분한 화장실 문제였다. 정부에서 즉각 공중화장실과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을 점검하고 감독한 결과 전국 어딜가나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3. 우리는 <우물> 세대였다. 상수도가 없어 동네 공동우물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 항아리에 담아 놓고 마셔야 했다. ●군대에서 철모속에 썼던 화이바로 물바가지를 대신해서 물을 퍼올렸다. 우물가엔 앵두나무와 향나무가 있었는데 제 사를 모실 때 향나무를 잘라 향을 피웠다. 우물은 냉장고 역할도했다. 전기시설이 없었고 냉장고가 없을 때라 열무김치를 담가서 빨간 항아리모양의 프라스틱통에 담아 우물속에 끈으로 묶어서 담갔다가 꺼내 먹었다. 4. 우리는 <가마솥> 세대였다. 98%는 목욕탕이 없어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목욕을 했다. ●설명절에나 돼야 읍내에 나가서 "다이얼"이라는 노오란 비누와 이태리 때수건으로 싹싹문질러 때를 벗겼다. 너무 벗겨서 쓰라리기도했다. 샴푸대신에 늘 빨래비누나 세수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요즘같이 매일 머리를 감는 일은 없었다. 5. 우리는 <손빨래> 세대였다. 100%가 세탁기가 없어 개울에 나가 추운 겨울에도 얼음장을 깨고 빨래를 했다. ●공동우물가나 시냇가에 널찍한 바위에서 빨래방망이로 두들겨서 빨래를 했다. 고무장갑이 없이 겨울철 빨래를 할 때는 손이 얼어서 시리다가 저렸다. 삼베나 광목은 양잿물에 담갔다가 찌든 때를 빼고 빨래를 했다.   6. 우리는 <보행/자전거> 세대였다. 95%는 자가용이 없어 대부분은 걷거나 일부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지프차나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부의 상징이었다. 멀리있는 교통이 불편한 학교를 다니는 여학생들도 자전거로 통학을했다. 유독 우리고장 남원여고 학생들은 많은 여학생들이 자전거로 통학을했다. 학교가 시내에서 조금 멀리 있어서 교통편의가 좋지 않았다. 교복은 치마지만 자전거로 통학할 때는 바지를 입고 다녔다.   7. 우리는 <고무신> 세대였다. 95%는 구두도 운동화도 없어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타이어표"검정 고무신은 어찌나 질긴지?발바닥쪽이 밀릉밀릉할 때까지 신어야했다. 여름엔 양말을 신지않아서 조금만 걸어도 까만 때꼬장물이 고무신 테두리에 보였다. 교복을 입으면서 얇은 천으로 된 검정운동화를 신게 되었다. 체육시간에 공을 몇차례 차면 운동화 가운데가 동그랗게 벗겨지기도 했다. 교복에 학교를 상징하는 뺏지와 모자에 교포를 달고 다녔다. 8. 우리는 <까까중> 세대였다. 100%가 이발비가 적게 드는 까까중 머리로 다녔다. ●고향 마을에 1년에 나락 한말과 껕보리 한말을 주고 양손 바리깡으로 머리를 빡빡 깍아주시는 어른이 계셨다. 한달 보름정도에 한번씩 이발을 하는데 바리깡에 머리카락이 씹히면 머리는 하늘로 치솟는다.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머리를 하도 감지 않아서 쇠똥같이 때가 낄 때도 있었다. 9. 우리는 <보자기> 세대였다. 98%는책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차고 뛰어 다녔다. ●어깨에 천이 미끄러운 나이론천인 다우다로 만든 책보로 책을 싸서 어깨에 둘러매고 뛰면 할머니께서 합천해인사에 다녀오시면서 선물로 사주신 나무로 된 필통을 사주셨는데 나무필통속에 연필이 얼마나 달그락 거리는지? 다우다천이 미끄러워서 풀리면 책이랑 필통속에 연필이 다 쏟아지기도했다. 양철로 만든 필통도 있었다.   10. 우리는 <고무줄> 세대였다. 100%가 장난감이나 놀이기구가 없어서 여자애는 고무줄 넘기하고, 사내애는 말타기 놀이도하고 새총을 만들었다. ●여자애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 면도칼로 고무줄을 자르고 도망치기도 했다. 남자애들은 자치기나 못치기 땅따먹기 등 놀이를 즐겼다. 11. 우리는 <강냉이> 세대였다. 100%가 쌀이나 보리쌀이 없어서 학교에서 주는 강냉이 가루로 강냉이 빵이나 꿀꿀이 죽을 만들어 끼니를 때워야만 했다. ●미국에서 원조식품으로 우유가루를 주었는데 유통과정에서 오래되어 우유가루가 돌뎅이가 되었는데 얼마나 딱딱한지? 우유가루 덩어리를 깨서 먹으면 달작지근하고 맛있었다. 우유덩어리에 삿카린을 조금넣고 끓여서 마실 때 그 맛은 신기루였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강냉이죽을 끓여서 나누어 먹었다. 옥수수가루로 만든 푸석푸석한 옥수수빵도 맛있었다.   12. 우리는 <주경야독> 세대였다. 98%가 낮에는 가사일, 농사일 돕기, 풀베기, 나무하기, 소먹이기, 동생돌보기 등을 하고서 밤이 되어야 학교숙제를 했다. ●집집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소를 먹였다. 학교갔다오면 소를 몰고 방천이나 냇가에가서 소에게 풀을 먹였다. 꼴망태를 메고 낫을 숫돌에 날이 서도록 잘 갈아서 깔을 한망태씩 매일 베기도했다. 집집마다 소를 키우기 때문에 소깔도 귀했다. 시내에서 바라구 등 많은 풀을 보면 소깔베는 생각이 나서 아깝다고 생각하곤 했다. 지금도 천변에 수북하게 자란 풀을보면 낫으로 베다가 소를 먹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소를 몰고 가다가 소가 맛있는 콩을 보고 논두렁에 콩잎을 뜯어 먹어 논주인한테 야단을 맞은적도 있었다. 13. 우리는 <주판> 세대였다. 100%가 전자계산기나 컴퓨터는 없고 다섯 알 짜리 주판을 굴리면서 셈을 했다. 급수를 따야 은행 등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 ●상업학교에 진학해서 주산급수를 따고 은행에 취업하면 동네잔치를 하기도했다. 은행에 취직을 할려면 2급이상은 따야했다. 주산은 아이들 지능을 키우는데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세계주산대회와 암산대회도 열리곤 했다. 시내에 주산학원도 엄청 많았다. 14. 우리는 <일제고사> 세대였다. 100%가 입학 / 졸업은 물론이고,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교생이 일제히 시험을 치르고 등수를 매겨 경쟁했다. ●일제고사에서 1등을하면 그 집안에 경사가났다. 일제고사 성적으로 등수를 매겼다. 15. 우리는 <입학시험> 세대였다. 100%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본고사 입학시험을 치러 상급학교에 진학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께서 마을회관이나 넓은 집을 빌려서 중학교 진학희망자들을 모아서 중학교입시를 위한 과외를 합숙을 하면서 했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2곳의 남자중학교가 있었는데 경쟁율이 평균 2:1이 넘었었다.   16. 우리는 <공돌이 공순이> 세대였다. 하도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하면 식모살이 아니면 구로공단 같은 공장에서 공돌이 공순이 버스차장을 하면서 땀 흘려 일을 하고 야간에는 교복입고 야간학교에 등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지게를 맞췄고 그 지게지기가 싫으면 검정고무신을 신고 야간 완행열차타고 서울로 올라가 요꼬공장 등에 취직을했다. 여자아이들은 지금은 도우미라고 하는데 부잣집에 들어가서 식모살이를 하기도했다. 추석과 설명절에 새옷에 새구두에 폼을 잔뜩내고 고향을 찾아와서 시건방을 떨고 다니고기도했다. 17. 우리는 <삯 월세> 세대였다. 80%가 신혼 살림집을 구할 돈이 없어 거의 모두가 사글세 단칸방부터 시작하여 전세로 옮겨 다녀야만 했다. ●처음엔 사글세방으로 시작해서 전세로 옮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단칸방이나 미닫이로 가운데를 막은 이간장방을 얻어서 살림을 시작했다.   18. 우리는 <월남전> 세대였다. 나라가 빈곤하여 목숨걸고 전쟁터에서 돈을 벌어 와야만 했다. ●지금은 비행기로 3시간 남짓이면 가는 베트남인데 부산항에서 배로 보름이 걸렸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갔던 파월장병님들께 많은 감사를 드립니다. 윌남전에 다녀온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도했다.  19. 우리는 <광부. 간호사> 세대였다. 최 빈곤국으로 독일에 가서 석탄 광부와 시체 닦는 일로 돈을 벌어 와야 했다. 그나마 고졸이상 경쟁이 치열했다. 평균 5:1이었다. ●서독에서 1,000미터 넘는 깊은 땅굴에 들어가 석탄을 캐고 서독의 병원에서 요양원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를 돌보고 대 소변을 치우고 시체를 닦고 염을 하면서 외화를 벌어들이고, 노무자를 담보로 차관을 얻어와 공장을 지으며 산업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이 진정한 애국자로 인정받고 국가보훈 자격을 드렸으면 한다. 이분들 때문에 독일에서 차관을 했고 경제개발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쥐나 개나 엉터리 국가유공자들이 많이 있는데 진정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충분한 국가유공자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20. 우리는 <중동 노동자> 세대였다. 열사의 나라 중동지역에서 가족과 자식을 위해 돈을 벌었다. 우리가 피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건재하고 있지 않는가? ●뜨거운 사막에가 건설현장에서 많은 돈을 벌어 가정의 경제는 물론이고 국가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국내에서 건설일을 하는 사람보다 몇곱은 더 임금을 받았던 것 같다.   젊은이들이 우리를 "꼰대"라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이다. 우리 중에는 지금도 재활용 폐품을 줍는 부모도 계신다. 작은 리어카에 폐지를 주어 폐지값이 헐값이라 몇푼밖에 받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과 가족을 위해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일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가난하고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와 열심히 캥거루 세대를 키워낸 죄밖에 없는 샌드위치 세대 들일 뿐이다. 곳곳에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네요. 요즘 곳곳에 화재가 많습니다. 재산피해도 이제는 그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날씨가 늦게까지 더위가 있더니 갑작스럽게 차가워졌습니다. 올해 독감이 유행일거라는 중대본부의 예상이니 독감예방접종을 하셔서 독감에 걸리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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