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접하다가 긴글이지만 눈을 뗄수가 없는 글을 읽었습니다 매해 만우절이면 매해 생각나는 가슴저리는 제자이네요 그때의 시절 공감가는 부분도 많아서 더 가슴아픈 일입니다 제 동창 두명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에요 좋은 선생님으로 학교생활 잘 이어나가길 다시 바래봅니다 ㅎㅎ 건강조심하시고 만우절 오늘 지나면 좋은 추억으로 가득한 내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요즘 교직사회는 옛날 같지않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더 힘드시나봐요. 저는 손주가 이제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진급하고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 찾아뵈었느냐고 물었더니 5층으로 올라가셨다고 하더군요. 전화가 왔습니다. 2학년 때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선물을 받았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MZ세대들은 교직이 매력이 없답니다.
30여년 전의 아름다운 기억과 아쉬움을 간직하고 계시네요. 매년 4월1일 만우절만 되면 생각나게 되겠네요~ 저도 어릴땐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어린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었거든요 그러나 몇몇 선생님들로부터 좌절을 느낀후(용기는 커녕 자존심을 짓밟는 언행들) 희망을 버렸지요. 세월이 지난후 어느듯 70으로 공무원생활 퇴직후 선생님의 글을 잃고 다시한번 당신과 같은 선생님으로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생각해 봅니다. 당신의 글을 읽고 학생때의 그 시절이 생각나게 해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저희 친인척중에 초,중,고,대학에 한때는 13명이 있었습니다. 교육감도 계셨고, 장학사, 교장 선생님, 대학교수 등 교육자집안이어서 자연스럽게 교직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직생활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지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아내가 체질이라고 하더군요. 편안한 저녁 보내십시요.
과찬이십니다. 쬐끄만 장학금이라도 나오면 농촌에 거주하는 학생들에게 주었습니다. 농사지으시면서 자식들 전주시내로 유학을 보내시고, 소득이 일정치않은 농민들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자취생들은 빨간 프라스틱통에 김치를 담가서 일요일에 오면 목요일 쯤은 단무지와 콩자반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식량이 부족해서 80년대 초에는 도시락 혼분식 검사를 매일 했답니다. 참 웃픈이야기이지요~
같은 교직에 종사하다가 은퇴했기에 글에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사연이네요. 저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부촌 아이들이라 그런지 큰 말썽없이 잘 지냈지요. 그러다보니 잊어지지않는 사연은 부족한 듯 싶습니다. 큰 어려움없이 교직을 마치고 이제 여주에서 텃밭을 가꾸며 말년을 보내고 있어 나름 만족하며 삽니다.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잘 되길 기원합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교직을 퇴직하고 텃밭을 가꾸는 지인들이 많습니다. 많은 것을 공유하고, 씨앗도 나눔하고, 재미나게 가꾸고 있습니다. 교직을 퇴직하고 어디 경비를 하겠어요? 저는 후배교사들한테 제 경우를 전해 주기도 합니다. 자가소비용이라 비료도 덜하고, 소독도 덜하고, 깨끗하게 씻어서 말리곤 합니다. 손주들 다니는 어린이집 아이들 현장학습을 몇번 했습니다. 쑥개떡으로 간식도 준비하고, 구루마로 밭두덕을 책보를 깔고 태워주면 그렇게 좋아할까요. 유치원 선생님들이 학부형들한테 사진을 보냈나봅니다. 몇 학부형께서 고맙다고? 재현이 할아버지 몸살이나 안 앓았는지? 전화도 받곤 했습니다. 가을엔 고구마, 당근, 대봉시를 가방에 넣어서 보냈습니다.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좋은 일이 많으셔서 웃는 날이 많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러셨군요. 처음 몇해는 무주에 나갈일이 있을 때 큰길가에 있어서 몇차례는 들렀었습니다. 학생네 아버지께서 여자를 몰래 만나셔서 은경이 엄마께서 세상을 멀리했다고 들었습니다. 세상살이가 참 복잡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해야하는데 그리 쉽지가않습니다. 봄비가 너무 많네요. 어제 고추 심을곳에 경운기로 로타리를 쳤습니다. 이제부터 텃밭에 옥수수, 생강 등을 심어야겠습니다. 빗길 늘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죄송한데요.. 선생님 존함은 제 머리속에 박혀 있는데 계속 생각을 해봐도 기억이 나질 않네요 저는 모여상 야간졸업했어요~ 근데 고 3때부터 모여고 행정실에 한 9년정도 근무했거든요 그리고 저는 84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 했어요~ 지금은 이름도 개명했어요 예전 이름은 박선희예요~ 혹시 기억 나실려나 해서 이렇게 공개하에 글 올립니다~ 건강하시고 같은 곳은 아니지만 근교에 살고 계시다니 너무 방갑습니다~ 하긴 선생님이 기억 못하실지는 모르겠네요
공감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가슴이 참 따뜻한 훌륭한 분이십니다. 저도 학교가 체질이었고 눈만 뜨면 자동으로 출근해서 근무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에서 40년을 근무하고 정년퇴직을 하고 4년차입니다. 지금도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근무했던 학교를 바라보면 아직도 가슴이 뛰고 함께 생활하고픈 생각이 듭니다. 이게 바로 체질이란 걸....
작년에 올렸던 메세지입니다. 동창회를 하시면서 은사님을 찾아뵌다고 하시기에 이 글을 올려봅니다.
-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동창회 - SBS에서 오랫동안 이어온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라는 프로가 있다.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일이 있구나?를 알리는 장수프로의 방송이다. 다재다능한 능력과 그야말로 희안한 일들을 제보받아 촬영을해서 방송되는 프로다. 엣날에는 목요일 저녁에 방송되다가 화요일 저녁으로 편성되었다가 최근에 토요일 저녁으로 방송시간대을 옮겼다. 우연찮게 TV를 시청하다가 이 시간대에 방송되는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라는 방송을 시청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선생님 묘소에서 50년동안 열리는 초등학교동창회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고 서이초 선생님 사건을 계기로 교단에서 각자 겪고 있던 아픔과 고충이 세상 밖으로 알려졌습니다. 심지어는 교육부 사무관이라는 작자는 지아이 담임한테 우리 아이는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기 때문에 왕자에게 말하듯이 듣기 좋게 돌려서 말해도 다 알아듣는다” 등 내용이 적힌 이메일을 보낸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교육부 사무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담임을 교체하고 갖은 갑질을 하고 있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교육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옛날에는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매를 맞으면 집에가서 부모님한테도 매를 맞았다. 엣날 이야기입니다. 오늘 세상에 하나뿐인 초등학교 동창회를 소개하는 시간에 요즘 교육계에 어떤 깊은 교훈을 안겨주는 시간이었다. 강원도 철원 어느 작은 마을에서 토성초등학교 22회 올해로 60살이되는 중년 아저씨들의 아주 특별한 동창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방송팀이 찾았다. 시간이 되자, 초등학교 동창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너무 편해 보이는 복장들이었고 심지어 낫과 갈쿠리 그리고 전기톱까지 꺼내 들었다. 그냥 시골에서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이동한 곳은 산이었는데, 산을 출입할려면 산림청의 허가를 받아 출입을해야 하는데 지역 군 담당부서에서도 출입을 할 수 있도록 열쇠를 제공했다. 무더운 날씨에 준비한 장비로 제초 작업을 시작하는 친구들 사이로 양지 바른쪽에 넓직한 공터 끝에 비석이 하나 보였다. 이곳은 이들의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인 이병덕 선생님의 묘소였다. 1974년 1월, 너무 추운 겨울날에 비워두었던 방에 연탄을 피다가 연탄가스 사고로 일찍이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님은 한창 예쁠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약혼자도 있었다고 기억한다는데 가족의 동의하에 학교 근처에 묘소가 마련됐다고 한다. 약 4년이 지나 중학생이 된 제자들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충격적인 모습을 봤는데 무슨 일인지 산소가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로 뒤덮여 있었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날부터 지금까지 선생님 묘소를 관리하기 시작했다고한다. 함께한 1년이란 시간은 짧지만 당시 선생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매년 때가 되면 벌초하고, 명절이면 성묘를 한다고 한다. 그 세월만 벌써 50년 가까이 됐다. 대체 제자들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선생님의 그리움 때문이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동창회, 고인이신 이병덕 선생님묘는 철원군에서 무연고 묘로 파묘를 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 선생님 언니 한분이 오셔서 모셔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자들이 어떻게 처리하실건지요?라고 묻자 화장해서 재를 뿌린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제자들이 "선생님을 우리가 잘 모시겠다"라고 선생님 언니한테 허락을 받았다. 무연고로 파묘를 할 지경까지 왔는데 제자들이 앞이 환한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묘비를 세우고 모시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매장문화라서 이장을 하기 위해서 파묘를 하는데 곱디고운 옷을 네벌까지 입혀서 매장되어 있었다. 아마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이쁘게 영면하시라고 이쁜 옷을 네벌이나 입히셔서 안장을 했나 싶다. 옷을 태우고 화장을해서 지금 산소에 모시고 매년 동창생들이 모여서 벌초를 하고 있는 시간을 소개했다. 머리에 흘리는 땀을 닦을려고 수건을 동여매고 벌초를 마치고 준비해간 제수를 돗자리를 깔고 놓고 모두 재배를 하고난 뒤 준비해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담소하는 60대의 중년이 된 초등학교 동창회가 너무 아름답고 따뜻했습니다. 74년에 20대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신 선생님을 60이되는 중년의 10여명의 남녀 졸업생들이 선생님묘에서 동창회를 하는 모습은 오늘 날 높게 평가받는 최고의 아름다운 초등학교 동창회가 아닌가요? 어쩌면 요글래 정말 감명깊고 마음 따뜻한 이야기를 소개한 시간같아서 저 또한 기분이 흐믓한 시간이었습니다. 요즘 코로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7만명을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고 하네요. 웬만한 감기로 생각할 정도로 크게 느낌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지요. 저도 갑자기 두통이 조금 있고 얼굴에 열이 있어서 동네의원엘 갔습니다.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라고 감기 몸살약만 처방 받았습니다. 그까짓 것으로 병원에 가느냐고 하시겠지요? 제가 아침마다 어린 손주들을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있거든요. 그래서 많이 걱정을 했답니다. 만약에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면 차속에서 많은 시간을 같이하고 있는데 얼마나 걱정이겠어요? 그런데 코로나 진단카드를 5,000원에 구입해서 자가에서 진단하는 것 보다 병원에서 검사를 하니까 더 저렴하게 할 수 있더군요. 그냥 기본 진료비만 지급했습니다. 이번 태풍 카눈이 더위를 물리쳤나 봅니다. 한낮에도 폭염은 없는 것 같습니다. 환절기에 건강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과찬이십니다. 어려울 때 좀더 도와주었더라면 더 좋은 추억으로 제자들이 기억할텐데요. 아이들과 잘 지내는 편이었습니다. 체육대회 때는 저희반 아이들이 경기를 많이 이겼습니다. 같이 많이 뛰었거든요. 나이들어서 자식들 키우면서 선생님을 찾는 제자들이 많습니다. 편안한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제가 70년대 전학을 가서 진안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진안중학교를 다니다가 1학년 5월초에 군산으로 전학을 가던 때가 엊그제인 것 같네요 고향인 전주에서는 입시였던 때여서 고교부터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뒤로 진안중학교와 진안여중이 통합되었고, 진안여중자리에는 신설된 진안공고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희도 진안에 살던 진안등기소 관사에서도 툭하면 연탄가스에 중독되고 했습니다 연탄보일라가 활성화되던 70년대 중후반부터는 연탄가스가 많이 줄었지만 기름보일라가 대중화되던 이전까지는 연탄가스뉴스가 나오곤 했지요 요즘은 화목보일라 일산화탄소중독이 어쩌다 보도되고 있지요 그 시절 아련한 추억입니다
70년대 진안은 오지였지요. 요즘 시골엔 화목보일러가 많습니다. 들녂은 나무를 조달하는데 힘들겠지만 제고향 남원만 하더라도 야산에 쓰러진 나무들이 많답니다. 이번에 마굿간을 뜯고 나온 나무는 장애가 있는 집에 실어다 주었습니다. 옛날 고향의 추억은 늘 아름답답니다. 감사합니다.
그렀죠? 아궁이에 불을 지펴도 구들장사이로 연기가 나오기도했지요. 환경이 참 어렵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화장실 문화는 아마 세계 최고가 아닐까!싶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나 국립공원 화장실은 정말 깨끗하잖아요. 연탄으로 난방을할 때 가스에 양철로 된 연통이 삭아서 망가지잖아요. 지금은 얼마나 살기편한 세상입니까? 그러나 옛날 자연스럽던 환경이 많이 아쉽습니다.
연탄난로로 난방을 하는 시절엔 가스사고가 빈번했던거 같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객지생활 했는데 80년도 초에는 서울에도 꽤 많은 집들이 연탄을 사용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직장선배와 쪽방을 얻어 숙식을 하였는데 하마터면 20도 안되어 하늘나라에 갈뻔 했지요. 다행스럽게 이웃에 사는 친구가 들르러왔다가 발견하고 어찌어찌 살아났답니다. 서울의 신도림동이란 동네였는데 지금은 개벽을 했더군요. 연탄이 싸서 좋긴해도 잘못하면 큰 피해를 주더군요.
참으로 훌륭하신 진정한 선생님이셨군요. 저도 아직까지 잊을수 없는 선생님 한분이 계시답니다. 6학년 담임선생님이셨는데 중학교 2학년때 유행성 출혈열로 돌아가셨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이튼날 몸이 아파 학교도 못갔던 적이 있답니다. 존경스럽습니다.지금도 제자를 제자같이 스승을스승같이 마음으로 배우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있을까요?
고맙습니다. 과분한 칭찬에 부끄럽습니다. 학생주임이라는 업무를 을 오래동안 담당해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여학생들도 지리산 천왕봉을 데리고 다녀왔습니다. 백무동 야영장에서 식사당번이 아닌데도 늘 아이들 식사를 준비하는 학생도 있고, 늘 선생님먼저 드시라고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참 이쁘게 자랐구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