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5 -
우리는 모내기 할 때도 나락타작을 할 때도 학교에 가지 않고 부모님 일손을 도와 드렸습니다.
모내기 할 때는 못줄을 잡고 어른들이 지게 바자기로 모침을 날라서 논에다 뿌려 놓았는데 모심는 사람들이 모를 심기 좋게 모침을 뒤에서 적당하게 분배를 했다.
모판에서 모를 쩌내면 새참을 먹는 시간이었다.
새참은 국수를 삶아 양념장에 비벼서 먹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새참먹는 시간에는 들녘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아가를 키우는 아낰네들은 애기들 형제나 할머니께서 아가들 젖을 물릴려고 등에 업고 나오기 때문에 새참도 넉넉하게 준비를 해야했다.
또 지나가는 사람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새참을 나누곤했다.
그래서 점심 또한 저녁도 넉넉하게 준비해야했다.
저녁은 어르신들이 계신 집은 밥을 따로 싸서 드리기도 했다.
옛날 시골 인심이라 생각한다.
우리집 첫모를 심는 날은 찰밥을 해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산에 있는 논에 식구들이 다 모여서 새참과 점심을 해결했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은 우리집 갑골이라는 산비탈에 있는 자그마한 3개의 다랑논이 있는데 한마지기 반이었다.
맨위에 있는 논 윗쪽에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솟아나 1년 내 물을 가두어서 첫모를 식구들이 다 모여서 심었다.
워낙 굴곡이 있는 논이라 못줄을 잡지않고 흩어지게 모를 심었다.
천수답이지만 가뭄이 있어도 논바닥이 마르지 않아서 대대로 물려받은 소중한 논이었다.
모를 심는 날자는 마을에서도 서로 겹치지않게 잡았다.
한번 심을 때마다 20명 이상씩 모여서 모를 심어야해서 한 마을에서 두세집 이상은 모를 심지 않았다.
저희 동네는 가구수가 많은 제법 큰 마을이었다.
한 마을이지만 아랫 마을,
웃 마을,
잰몰이라고 불리면서 자연스럽게 구역이 나뉘어졌다.
우리집은 주로 아랫마을과 웃마을 아낙네들을 품삯을 주고 모내기를 했다.
모심는 날이면 새참도 날라야했고 모를 다심고나면 논두렁에 못줄 막대기로 구멍을 뚫고 메주콩을 심었다.
보리타작을 할 때도 조퇴내지는 결석을 하면서 부모님의 일 또는 농사일 등을 도와드려야했고 일이 끝나면 해가 넘어가 어두울 때까지 동네어귀에 모여서 형 누나들과 얼음땡, 딱지치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땅 따먹기, 자치기, 숨박꼭질, 간생을 하며 놀았습니다.
보리타작은 보리를 한 곳에 모아놓고 조그만 발동기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보리타작을 했다.
농로가 없고 논두렁이라 발동기를 장정이 지게로 옮겨가면서 보리타작을 했다.
보리타작은 금새 마쳤다.
보리타작을 할 때는 어찌나 꺼끄러운지?
보리 수염 때문에 온몸이 쓰라렸다.
보리를 베내고 논에 벼를 바로 심기 때문에 신작로 양옆이나 논두렁에 보릿대를 세워서 말렸다.
보리타작을 하기위해 보리를 한 곳에 모을 때 바짝마른 보리이삭이 떨어진다.
새벽녘에 비료포대를 들고 다니면서 이슬이 잔뜩 뭍은 보리이삭을 주으러 나갔다.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주워모아야 정작 껕보리는 한줌밖에 되지 않았다.
요즘 말하는 가성비가 없는 일이었다.
보리를 베난 논은 쟁기로 논을 갈고 물을 대서 발로 보리밭 사이에 깔아 놓았던 건초나 지푸라기 보릿대 등을 밟아 넣었다.
물신이 나오기전까지는 발이 나무가시에 찔려서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 다음 써레를 이용해 논바닥을 고르면서 거친 퇴비를 써레가 걸러냈다.
땅이 가라앉을려면 2-3일 정도 시간이 필요해서 며칠 후에 모내기를 했다.
논에 잡초는 초벌, 두벌, 세벌 지심을 맸다.
동네에서 품앗시로 돌아가면서 논고랑 사이를 기어다니면서 잡초를 뽑았다.
그 때 나락 품종은 키가 큰 품종을 심어야했다.
그 대표 품종이 팔광이라는 벼 품종이다.
그래야 그 키가 큰 지푸라기로 생활용품과 농기구를 만들었다.
나락이 키가 커서 비바람에 많이 쓰러지곤 했다.
태풍이라도 지나가면 논바닥에 벼가 다 쓸어졌다.
나락은 낫으로 베서 8주먹을 지그재그로 놓아 한단으로 묶어 논바닥에 세워서 2주정도 말렸다.
이 때 나락 20단을 한 가리라고 했다.
논 바닥에 세우고 몇가리인가?를 확인하고 작년보다 가리수가 많으면 풍년 적으면 흉년이라고 했다.
모내기 할 때 심었던 콩은 걷어서 집마당으로 날랐습니다.
노란 메주콩이었습니다.
밭이 없어서 이렇게 메주콩을 심었습니다.
다 말린 나락은 지게로 마당으로 날라서 노적봉같이 높게 쌓고 종일 공상을 밟으면서 타작을 했다.
장정 한 사람이 바짝 마른 나락 한가리를 지게에 짊어질 수 있었다.
짚을 요긴하게 써야해서 나락단을 집으로 들여와야했다.
나락타작을 할 때는 공상 양쪽에서 나락을 한주먹씩 떼 주는 사람이 2명,
공상을 발로 밟으며 나락을 요리조리 돌리면서 나락을 훑어내리는 장정이 2명,
다 훑고 난 공상 뒤에서 지푸라기를 묶는 사람이 1명,
공상앞에서 갈퀴질로 검부적과 쌓이는 나락을 긁어내는 사람이 1명
이렇게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않고 일손을 도와야했다.
지금이야 벼를 거둘 때 트랙터가 다 해내지만 예전엔 사람이 일일이 낫으로 베어 홀태라는 기구로 훑어서 벼 알갱이를 털었습니다.
홀태는 길고 두툼한 나무 앞뒤 쪽에 다리 네 개를 달아 팔자(八字)모양으로 떠받치게 하고 빗살처럼 날이 촘촘한 쇠로 된 틀을 몸에 낀 형태로 되어 있지요.
이 빗살처럼 촘촘한 쇠틀 사이로 벼를 끼우고 잡아당겨 벼 낱알을 텁니다.
나는 짚단을 바깥 공터에 나르는 일과 나락가리에서 쌓아 놓은 나락단을 공상가까이에 갔다놓는 일을 했다.
저희는 주로 주말에 큰 일을 잡아서 일을 했다.
저는 군복무를 하는 동안도 보리베고 모심는 농번기 6월과 벼베고 보리 심는 농번기 10월에 한달씩 휴가를 맞춰서 일손을 도와드렸다.
군생활을 광주에서 끗발이 좀 있는 보직을 받아서 정기휴가와 포상휴가 및 기타 휴가를 모아서 농번기 때 1년에 두달 가까이씩 집안일을 도와드렸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휴가를 다녀오면 피부가 뽀앟고 이뻐지는데 저는 쌔까맣게 타서 부대에 복귀를 했습니다.
3년 복무기간에 훈련병과 쫄병시절 첫 해만 가을걷이 농사일을 도와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군대생활 할 때는 복무기간이 36개월이었습니다.
옛날 나락은 만생종이었습니다.
2모작을 했기 때문이 아니가?싶네요.
논바닥에 하얀 서리를 있을 때 벼베기를 했고 일손이 모자란 가정에서는 나락가리를 쌓아 놓았다가 눈을 맞고 타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늦 가을이라 해가 짧아서 나락타작을 하고나면 밤이 다가왔습니다.
마당에 횃불을 밝히고 하루종일 공상으로 훑은 나락을 풍구를 돌려 꺼스랭이와 쭉쟁이를 걸러내고 깨끗한 나락을 광에다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광은 문짝이 1번부터 8번까지 8개였으니까 제법 큰 광이었습니다.
맨 아래 1번부터 문짝을 닫기 시작해서 광안쪽부터 나락을 차곡차곡 다 채우면 마지막 8번째 문짝을 닫으면 광에는 나락이 꽉 찹니다.
타작한 나락이 광을 다 채우면 마당에 멍석을 둥그렇게 세우고 몰아서 임시로 나락뒤주를 만들어 그 곳에도 보관했습니다.
이렇게 광에 있는 나락은 그 때마다 방아를 찧어서 쌀뒤주에 쌀을 넣어 보관했다가 꺼내서 밥을 지었다.
쌀뒤주는 두꺼운 송판으로 위에서 뚜껑을 열고 쌀을 꺼낼 수 있게 만들었고 보통 쌀 2가마니 정도는 들어가는 크기였다.
가끔씩 시내 인터리어 소품으로 볼 수가 있는 장식품으로 쓰이고있다.
우리집 쌀뒤주는 느티나무 원목으로 만들어서 무게 또한 대단했다.
나락타작도 3번은 했던 것 같습니다.
바깥에 지푸라기를 묶어서 쌓아 놓았는데 짚널이 웬만한 큰 집채만 했습니다.
지푸라기는 가마니도 짜고, 멱다리도 만들고, 멍석도 만들고, 산태미도 만들고, 꼴 망태도 만들고, 새끼도 꼬았습니다.
소 마굿간이나 돼지 우리에 넣어 소와 돼지를 따뜻하게 보온도 해주고 소 돼지 배설물을 섞어서 밟혀 퇴비도 만들었습니다.
또 소 여물로 사용했습니다.
지붕을 볏짚으로 이으기도 했습니다.
용머리를 틀어서 지붕 맨 꼭대기에 얹고 흙돌담위에도 용머리를 틀어서 올렸습니다.
이렇게 농촌에서는 볏짚이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평야지대에서는 볏짚을 땔감으로 사용했지만 저희는 산에 나무가 많아서 땔깜으로 사용하진 않았습니다.
지푸라기를 땔깜으로 사용하는 평야지방보다 솔가지나무로 사용한 산간지방은 훨씬 깨끗하고 화력 또한 쎄고 굵은 나무토막으로 군불을 때고 숯도 만들어서 장담글 때랑 사용합니다.
또 화로에 숯불을 담아서 방안의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기도 합니다.
싱그러운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4월보다 좀 더 나은 5월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월 1일
21
24
Farmmorning
오후에 하우스 옆에 있는 노지땅에 깔려있는 콩대 정리해서 한 곳으로 옮겨놓고 작년에 농사짓던 이랑에 골타서 봄보리 파종했습니다. 작년에 보리씨앗 필요없다고 집사람이 버리라고 한 것을 저온창고에 보관해 두었는데 싹이나서 오후에 파종했습니다.아직 두 이랑 남았는데 우천으로 잠시 일손 놓고 막걸리 한 잔 했는데 날씨가 맑아 지네요.
남은 이랑 파종하고 오늘일과 접을려고 합니다.
즐거운 휴일 되시길 바랍니다.
3월 3일
11
6
1
Farmmorning
💕어머니의 편지와
아들의 편지를 읽고
마음이 찡하고 나이 탓인지 눈가에
이슬이 맺히네요.
감동 글이라 올립니다.
1️⃣어머니의 편지📚
파란 보리알
한 사발을
작은 손가락으로
만들어 들고 온
어린 아들의
곱고 고운 정성에
나는 울었다.
고사리 같은
너의 두 손을
꼬옥 안아
주고 싶었지만
나는
너를 위해
매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아주고
싶은 자식을
때려야만 했던
엄마는
가슴에 못을
박는 아픔이었다.
엄마를 생각하는
너의 마음 정말 고맙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ᆢ
~~~^^~~~
어머니의 편지이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집에
먹을 것은 없고
엄마는 몹시도 아파서
방에 누워 앓고 계셨다.
굶고
누워만 계시는 엄마를
지켜만 볼 수 없어
보리밭으로 나갔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파릇파릇한 보리 이삭을
손으로 잡았다.
남의 것을 훔치려니
손이 떨리고 무서웠다.
엄마를 위해
용기를 내어
한아름 뽑아다가
불을
피워 놓고
태워 익혔다.
태운 보리를
내 작은 손가락으로
비벼서
파란
보리알을 골라
하얀 사발에 담았다.
누워
신음(呻吟)만 하시는
엄마 앞에 조심히
사발을 들고 앉았다.
“엄마,
이거라도 드시고
기운(氣運) 내세요.”
엄마는
힘들게 일어나
앉으시더니
내 손을 보시고
사발을 보셨다.
내 손은 까맣게
재가 묻어 있었다.
“어서 나가서
매를 만들어 오너라.”
소나무
가지를 꺾어
매를 만들어 왔다.
“굶어 죽더라도
남의 것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는 거야.”
바지를
걷어 올리고
많이 맞았다.
까칠까칠한
소나무 가지라서
아프기도 많이 아팠다.
“엄마,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도둑질 안 할게요.”
엄마를 위해
했던 일이
도리어
엄마를 슬프게
하고 말았다.
마음까지
아프게 한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려 울었다.
“이대로 들고 가서
밭주인에게
사죄(謝罪)하거라”
사발 속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친구
달봉이네
집으로 갔다.
하얀
사발을 앞에 놓고
마당
가운데 무릎을 꿇었다.
“달봉이 엄마,
용서(容恕)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달봉이 엄마는
깜짝 놀라
달려 나와 물으셨다.
“난대 없이
이 사발은 뭐고,
용서는 무슨 말이냐?” 
보리타작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달봉이 엄마는
나를 일으켜
세우시더니
내 다리부터 보셨다.
내 종아리를 보신
달봉이 엄마는
나를 안고 우셨다.
“이 어린 자식이
무슨 죄야,
가난이 죄지.
너의 엄마도 참~.”
달봉이 엄마는
눈물을 닦으시며
보리알 사발에
쑥개떡을 담아 주셨다.
“엄마 밥은
내가 만들 테니까,
너는
걱정 말고 가서
쑥떡이나 먹거라.”
먼 눈물 이야기로
시작한 나의 인생길~
이 편지(便紙)를
볼 때면
어린 시절(時節)
어머니와의
추억(追憶)에
눈물이 맺힌다.
나는
어머님의
임종(臨終)
소식(消息)을
도쿄에서 들었다.
타국(他國)에 있는
자식을 기다리다
눈을 감으신 것이다.
갚아야 할
은혜(恩惠)가 산 같은데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신 지
어느새
18년이 지났다.
2️⃣ 아들의 편지📚
사랑 하나~
정성 하나~
눈물 하나~
날마다
자식(子息)
나무에 물을 주어
푸른 동산을
가꾸어 주신 어머니
자식의 기쁨을
당신의 기쁨으로
자식의 슬픔도
당신의 슬픔으로
어머니의
발자국 마다마다에는
마를 수 없는
사랑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힘든 농사일에
그토록
지치신 몸으로
자식에게는
곱게 곱게 입혀 주고
싶어서
깊어가는 밤~
그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직
닭도 울지 않은
이른 새벽
도시락을
만들어주시던 어머니
조용한
그 칼도마 소리
정겹게 들려옵니다.
자식을 위한
어머님의 땀방울~
자식을 위한
어머님의 눈물~
은혜의 강이 되어
지금 내 가슴속을
흐르고 있습니다.
제가 그토록
고향(故鄕)이
그리웠던 이유는
그곳에는
어머님이 살아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디서
그 사랑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걸어온 길 뒤돌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뻤던 날들보다
슬펐던 날들이
더 고왔습니다.
산과 들에
뻐꾹새 뜸북새 우는
산 마을 내 고향
그 새파란
보리밭으로
어린
소년 하나가
엄마를 부르며
달려갑니다.
지인이 보내준 글인데
너무 사랑.교훈.감동을
주는 글이라 퍼 나릅니다
6월 14일
17
8
3
오늘이 공휴일 이더라구요.
몰랐습니다...
오늘도 굴비 주문해주신분들이 많아서 택배로 모두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참조기굴비 포장한 모습이구요. 내일 바로 싱싱하게 받아보실 수 있게 보내드리겠습니다~
23년 5월 29일
6
2
Farmmorning
"보리심[구도심]을 일으키고 나서 해야 할 다섯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좋은 것을 가까이 함이요,
둘째는 성내는 마음을 끊음이요,
셋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름이요,
넷째는 연민(憐愍)의 정을 일으킴이요,
다섯째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일이니라."
4월 25일
7
1
벼,보리농사,고추농사,열매마농사
1월 23일
8
2
Farmmorning
귀소본능
남편고향
충주시 대소원면
복합영농으로
주생산은ㆍ보리ㆍ콩입니다
4월 23일
2
밀감.단호박.콩.보리
2월 21일
3
감자를 심은지 40일이 지났네요
작은 텃밭에 3줄을 심었는데 3군데정도 발아가 않되고 나머진 잘자라고 있는 모습인데 키가20센티 정도 됩니다
가운데 고랑에는 잡초를 방지하기 위해서 보리씨를 뿌렸더니 많이 자랐네요
4월 18일
7
Farmmorning
보리 수확 중에 보리가시 1개가 목에 걸려 죽을똥 살똥 합니다. 보리 짚단 냄새를 맡으니 예전 아버지와 벼 수확 하던 추억이 떠올라 한장 올립니다
23년 5월 25일
11
9
Farmmorning
흑토마토
구매하고
밍밍한 맛에
놀랬어요,
짭짤이,
대저토마토 맛을
기대했나봅니다,
녹두,
팥,
찹쌀,
찰보리
구매해서
열심히
먹고있습니다,
삼겹살+소고기미역국
언니랑,
남동생
함께 모여 먹었습니다,
4월 16일
5
♡월요일 밤 편지♡

♪曺秀美의 愛國心♪
세계 Top Class인
Opera 歌手
‘曺秀美(조수미)’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본명은
‘조수경’이었는데,
發音이 부자연스러워
‘조수미’로
•'改名'했다고 합니다.
慶南 昌原 東面
本浦里가 고향이며
서울
선화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녀는
원래
•'피아노 神童'이었지만
주위에서
노래를 시켜야 한다고
적극 권유했다고 합니다.
이미 어릴 적부터
天才性이 보여
그런 이유로
서울大學校
音大 聲樂科에
合格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같은 학교
經營學科의 남학생과
•'사랑에 빠진 후'
그녀는
戀愛를 시작하면서
‘조수미’의
모든 것이 달라졌고
예전의
‘조수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敎授와
父母님은
相議 끝에
‘조수미’의
장래를 생각해서
서울大를
中退시키고,
世界에서
가장 오래되고
傳統있는
이태리 로마의
명문대학인
산타체칠리아
(Santa cecilia
Conservatory
of Music) 音樂院에
•'강제 留學'을
보내게 됩니다.
그때부터
‘조수미’는
본격적인
才能을 펼치기 시작했고
남자친구로 부터
이별 통보를 받은 후
‘조수미’는
그때부터
지독하게 다짐하면서
音樂院에서
5년 과정을
2년 만에
졸업을 하는
놀라운
天才的 才能을
발휘하여
敎授 全員이
感歎을
했다고 했습니다.
世界舞臺(세계무대)를
활보하며
結婚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1인자가
되기 위한
이런 熱情이
오늘의
‘조수미’를
만들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하는
대목 입니다.
世界的으로
故國을 알리며
활동하는
‘조수미’씨가
대단하고
자랑스러우며
내일 모래면
回甲인데
아직도
未婚이라는 게
안타깝습니다.
지금부터
30年 前인
스물여덟 살 때
이미
世界의 頂上에
올랐던
‘조수미’의
수많은 逸話 중
하나를
지금
소개하려고 합니다.
당시
英國의 가장 큰
音盤會社에서
‘조수미’씨에게
레코드 하나를
내주겠다고
提議(제의)를 했습니다.
이런 경우
일반적인 歌手들은
世界에서 가장 큰
音盤會社에서
자신의 레코드를
내준다며
提議가 들어오면,
무조건 환영한다면서
좋아서
受諾(수락)을
했겠지만
‘조수미’씨의 태도는
보통 歌手와는
전혀 달랐 습니다.
‘조수미’씨는
레코드會社에
‘條件(조건)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레코드에
‘보리밭’을
넣어 주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레코드會社 社長으로
50년이나 근무했지만
'보리밭'이라는 노래는
들어 본 적이 없는
生疎(생소)한
이름이었습니다.
“‘조수미’선생!
그 '보리밭'이라는
노래가
무슨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Aria)입니까?”
“그것은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가 아니라,
내 祖國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歌曲(가곡)입니다.”
‘조수미’씨의
提議를 듣고 난
레코드社 社長은,
“이것은
서울에서 파는
레코드가 아닙니다.
이것은
世界的인 都市인
파리에서 팔고,
런던에서 팔고,
로마에서 팔고,
빈에서도 팔고,
뉴욕에서도 팔리는
世界的인
•'레코드'입니다.
거기에다
世界 사람이
아무도 모르는
‘보리밭’을
넣어 가지고
그 레코드가
成功은커녕
팔리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면
그만 두시지요.”
‘조수미’씨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당황한
레코드會社 社長은
“앉으세요.
꼭 원하신다면
提議하신대로
‘보리밭'을
넣도록 합시다.
’조수미‘선생
이제
滿足하시겠지요?”
‘조수미’는
그냥
지나가지 않았 습니다.
“條件(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슨 條件이십니까?”
“레코드 재킷에는
'보리밭' 이라는
題目을
大韓民國
(대한민국) 글자인
‘한글’로
찍어 주셔야합니다.”
레코드會社 社長은
비서실에
전화를 하는 등
한참 수선을 피우더니
지금 英國에는
한글 活字가
없다는 이유로
‘조수미’의
提案(제안)에
難色(난색)을
표합니다.
‘조수미’씨는
물러서지 않았 습니다.
“社長님!
‘British Airway
(영국 항공사)’에 가면
한글 活字(활자)가 있다”
고 맞섰습니다.
그래서
‘조수미’씨의
첫번째 레코드에
'보리밭'이 들어갔고,
'보리밭'이
英語도 아니고
佛語도 아니고
이태리語도 아닌
당당한
한글 <보리밭>으로
찍혀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透徹(투철)한
愛國精神을 갖은
偉大한
大韓의 딸입니까?
상식적으로
이런 내용의 부탁은
일개국의 大統領이
레코드社를 訪問해서
부탁해도
쉽게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가냘픈
한 女性 歌手가
자기 祖國(조국)
이라는 것에 대해
愛着(애착)과
熱情(열정)과
깊은 愛國心을 갖고,
더 나아가
큰 自負心(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感動的인 行步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수미(曺秀美)’씨는
88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 前夜祭(전야제),
2018년
평창 冬季올림픽 때에
이태리에서,
파리에서,
런던에서
그 바쁜 와중에도
모든 일을 제치고
한숨에
서울로
달려왔습니다.
‘조수미’씨
그녀는
祖國이 부르면
어떤 先約(선약)도
뒤로 미루고
언제든지
달려왔습니다.
이런 人間性을
길러내는 것이
敎育의
窮極的 目的이라
하겠 습니다.
글만 가르치는 것이
•'能事'(능사)이고
•'所重'(소중)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젊은 그들에게
자라나는 人格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人格을
만들어 주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自負心(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 民族(민족)이
偉大(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 입니다.
우리도
그 누구나
자신이 가진
才能과
能力에 따라
社會와
國家와
民族을 위해
어떠한 모습과
형태로든
忠誠(충성)하고
봉사할 수 있는
•'재능'이 있고
•'기회'가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나이에
내가 뭘…?
아니 올씨다!
‘괴테(Goethe)’가
유명한 戲曲(희곡)인 ‘파우스트(Faust)’를
完成한 것은
나이 80세 넘어서 였고,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로마에 있는
聖베드로 大聖殿의
돔(Dome)을
70세가 넘어
完成했고
헨델(Handel)과
하이든(Haydn) 같은
유명 作曲家들도
古稀(고희)의
나이를 넘겨
不朽(불후)의 名曲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모세'(Moshe)를
보십시오!
80세에
민족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한다며
壯丁 60만
(실제 숫자 200만)을
이끌고
애급을 탈출,
가나안 福地를 향해
유대 민족을
구출하는
대역사를 장식했습니다.
당시의
이 정도 나이는
지금의
100세가 넘는
老齡(노령) 입니다.
老年을
초라하게
보내지 않도록
餘裕(여유)를 가지는
마음 자세와
모든 세상을
包容(포용)하고
容恕(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을
維持(유지)하면
더욱 좋겠 습니다.
조금이나마
優雅(우아)한
생애를 보내겠다는
결단을 가지시고
생활하는 습관이
몸에 배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면
더더욱
좋을 것입니다.
☆2024.08.12.월.밤.
'빠삐용'이 옮겨 쓰다.☆
♬‘曺秀美'의 ‘보리밭’♬
https://youtu.be/ln6cei3vblA
♪sop '조수미'의
'그리운 금강산'♪
https://youtube.com/watch?v=nfGMpz-q7SQ&si=ATXA8UuQGEGqCG4G
9월 10일
14
5
1
2년째 벼농사와 무농약 무공해 콩수확해서 보리효소로 효소된장 담아 결혼한 아들,딸 형제들과 사돈들께 선물로 보내드려요~♡♡♡
2023년도 고생하신 농부님들 늘건강하시고 새해에도 모두 기쁘고 행복하시게요~♡♡♡
12월 22일
18
10
Farmmor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