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형 마늘을 검단둑실동에
심었는데
겨울나기후 제일 먼저해야하는 일은 무엇인지요?
부직폭벗기고 물주고 거름주어야하나요?
병충해예방방은 문슨약부터해야하나요?
22년 2월 26일
4
내년에 서리태 백평 심을까하는데
강원도 추운지방콩사야
잘된다하는데 어디서 구입하나요?
21년 12월 11일
2
♤오늘의 참사랑♤
♤의성(醫聖) 장기려 박사 ♤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 이야기입니다.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어서 집으로 가세요.”
장기려 박사는 어느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막막해하고 있을 때 이를 눈치 채고는 병원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게 해 주었습니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 원장”
병이 나으려면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장기려 박사가 써준 처방전입니다.
서울대, 부산대 의대 교수, 부산 복음병원 원장을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방 한 칸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재직중 6.25가 발발했습니다.
이남으로 내려온 후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과 전쟁 부상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1968년 당시 100원 하는 담뱃값만도 못한 월 보험료 60원에 뜻있는 사람들과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설립하여 1989년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이 확대될 때까지 20만명의 영세민 조합원에게 의료혜택을 주었습니다.
국가보다 10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바보.. 그는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청지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했고, 집 한 채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고,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 때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고, 자신이 칭송받는 것을 싫어 했습니다.
그는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특히 아내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평양의대병원 2층 수술실에서 그가 밤새워 가며 부상당한 국군 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졌습니다.
국군들은 모두 재빨리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일평생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재혼을 권했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그저 혼자 살겠습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편지는 우리들의 가슴을 에는 듯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가 북한 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 부부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그 기회를 사양하였습니다.
"나만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는 결국 빛바랜 사진을 보면서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 85세를 일기로 소천하셨습니다.

그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 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밤과 같은 그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의성(醫聖), 장기려 박사님의 "바보처럼 사는 삶", 이시대를 밝히는 등불 입니다.
오늘은 건강하시고 복되고 복된 하루되시길 기원합니다.
6월 13일
15
7
배나무이 다발생시 방제법좀여
21년 6월 22일
창녕,초보농부 입니다
직불금이 해당되지않아 실망했는데..
팝모닝에가입 농사에 좋은 정보,소식과
농민지원금이 당첨 되었습니다
그리고 팝모닝에 정보,사랑방소식등
초보농부에게는 많은 도움 됨니다
팝모닝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려요
회원여러 분께서도 계속신청 해봐요
행운이 옵니다,감사합니다
22년 8월 20일
3
<제가 삐돌이 인가요?>
아내와 마트 쇼핑을 했습니다.
이것저것 생활 용품과 찬거리를
카트의 담고 난로도 하나 샀습니다.
가전제품은 별도 계산이라 혼자
난로를 들고 계산을 하고 났더니
아내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내를 찾아 헤매느라 마트 한 바퀴를
돌았는데도 아내는 보이지 않고
손가락은 아파오고 쌀도 사야하고 해서
쌀코너 쪽으로 갔습니다.
쌀을 사야 하니 이곳으로 오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휴대폰도 차에 두고 와서 무작정
10분을 멍하니 기다렸습니다.
10분이 넘어가니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5분이 더 흐르고,
아내가 성난 표정으로 찾아왔습니다.
전화도 안받고 얼마나 찾아 헤맸는데
라며 눈까지 벌게 지면서 화를 내더군요.
같이 쏘아 붙일까 하다 참았습니다.
그냥 빨리 마트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있었으니깐요.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그때서야
화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뭐든지 좀 느린 저는 화까지
늦게 올라오나 봅니다. ㅋㅋ
서로 헤어지더라도 당연히 쌀을 사야 하니까
살코너로 먼저 와봐야 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난로 계산하는 그새를 못 참아서
딴데로 가버리냐?
꿍했던 말을 해버렸습니다.
내가 문구점으로 오라 그랬잖어.
언제 못 들었는데?
자기가 그렇지 뭐 항상 건성건성이지
날씨가 추워서 서로 예민해진 것이
별일 아닌데도 울컥 해 버렸습니다.
하여간 더 이상 길어지면
싸움밖에 안될 거 같아서 참았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마 저는 참았습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전 아무 말 없이
참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분명 참았습니다.
이런 저를보고 아내가 한마디 날리더군요.
이 말을 할 때 아내는 항상
같은 자세와 같은 억양을 유지합니다.
고개는45도 각도를 유지하고 곁눈질로
고 이주일 선생님의 콩나물 무쳤냐 ?
바로 그 억양 삐쳤냐?
삐쳤냐...
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들의
아드리난린을 자극하는 말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듣는 남자들은 순간
참 여러가지 생각을 합니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표정이 아니고
그렇다고 인정을 못하겠고 다시 말하지만
전 분명히 참았습니다.
이런 남자의 대범한 인내심을
삐쳤냐라고 치부하다니 ...
내가 혹시 아까 라면 국물 뺏어
먹었다고 삐진 건 아니겠지?
허참 나 남편을 뭘로 보고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같이 라면을 시키던지 왜
김밥을 시켜놓고 남의 시원한
라면 국물을 뺏어 먹나고요.
그렇다고 이것 때문에 삐진 건
진짜 절대 아닙니다.
절대 물론 약간의 기폭제가 되긴 했습니다만 ...
여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항상 붙어오는 말이 있습니다.
어휴 남자가 하여간 삐돌이
이 말을 남기고 여자들은
항상 쌩하고 가버립니다
삐돌이 집에서 제 별명입니다.
집에 들어와서 난로를 조립했습니다
오늘따라 조립도 잘 안됩니다.
자꾸 뭔가 조여지지 않습니다.
더 짜증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블난데 부채질 한다고 옆에서 들리는
TV 속 드라마 내용이 짜증나게 합니다.
왜 한국 드라마는 꼭 중요한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기억상실 등이 걸리는 걸까요?
베란다에 난로를 가져다 놓고
제 방으로 왔습니다.
아내는 벌써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뒤끝도없는 모양입니다.
소심한남편 성격 뻔히 알면서
삐돌이라고 놀려먹고 잠이 오냐 ?
울마누라도 기억 상실증 같은 것이
걸렸으면 좋겠습니다.
소심하고 잘 삐지는 남편에 대한 기억이
모두 날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아침 아내가 샤워를 합니다.
내 면도기로 다리털을 밉니다.
자꾸 눈에 거슬립니다.
속으로 대범하자 대범하자
아침부터 자기 체면을 겁니다.
ㅡ도윤ㅡ
12월 25일
30
43
1
Farmmorning
고수님들께 엿쭙습니다.
사진과 같이 수박덩굴이 갑자기 말라죽었습니다. 병명과 방제약은 어떤게 있을까요?
21년 8월 30일
2
Farmmorning
https://earth.nullschool.net/#current/wind/surface/level/orthographic=-231.05,30.93,908
태풍위치 확인할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링크를 카톡방 같은 곳에 저장해두고 수시로 확인해 보셔요
클릭하면 바람 세기도 나옵니다
중심부는 바람속도가 시속 100킬로미터를 넘네요 ㄷㄷㄷ
22년 9월 1일
3
Farmmorning
감자종자를 구입해서
살고있는 방에 보관중인데
어떻게 보관할지 궁금해서요
담요로 덮어야하는지
아님 박스그대로 두어야
하는지 궁금해서요
방법을가르쳐주세요
감사합니다
22년 2월 27일
1
마늘잎끝이 보라색으로 변합니다 왜그러가요?? 병이라면 병명과 방제약은 무엇 인가요??
21년 3월 17일
9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10 -
우리는 야간통행금지와 장발단속 그리고 미니스커트 단속을 당했다.
통행금지령(通行禁止令) 또는 통금(通禁)은 일정 시간에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하는 제도로 주로 야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원칙적으로 분쟁이나 재난이 있을 때에 치안 유지를 위해 오직 제한적으로만 시행되었다.
어린이나 청소년의 보호를 위해 시행되기도 했다.
야간통행금지는 밤에 허락받지 않는 사람은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지금도 밤에 치안이 좋지 않는 곳이 있고 과거에는 더 심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범죄율을 낮추고자 과거에 많이 사용했던 규범이다.
그 당시에는 어차피 횃불이나 호롱불외에는 별다른 조명이 없고 해가지면 일반인들이 할만한 야외활동이 없어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1945년 시행되었다가 전방 휴전선부근과 해안 일부 군사시설이 있는 지역을 제외하고 1982년1월5일 전면 해제되었다.
밤 10시에서 다음날 4시까지는 일반인들이 시내를 다니지 못했다.
그 후 밤 12시부터 다음날 4시까지로 변경되었다.
12시가되면 싸이렌이 울리고 야간통행증이 없으면 즉결심판을 받고 경찰서 보호실에서 밤을 보내야했다.
신정연휴기간, 광복절, 크리스마스, 재야의 밤 등 특별한 날은 해제되었다.
1970년대 초중반의 장발 단속 정책은 1960년대 이후 서구에서 6.8혁명의 영향을 받은 문화가 한국에 수입되자 당시 정권에서 청년들의 문화를 막음으로써 통제 분위기를 활용하여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막으려 한 의도가 있었다.
6.8혁명이란 1968년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거대한 변혁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니스커트와 장발은 주류 문화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시대를 바라는 젊은이들의 열망이 함축돼 있었다.
1971년 9월 24일 정부는 퇴폐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를 10월 1일부터 단속한다는 방침을 발표했고,
미니스커트와 장발도 포함돼 있었다.
단속 첫 날인 10월 1일 전국적으로 2,600명이 적발되었다고 한다.
장발단속에 걸렸는데 머리깍기를 거부하면 경범죄로 즉결심판에 넘겨졌고 장발인 상태로 예비군훈련에 참가하면 불참처리됐다.
장발단속은 한국에 입국하는 외국인에게도 적용되었는데 1970년 홍콩 배우 성룡이 당시 우리나라에 입국하면서 단속에 걸린 적이 있었다.
한 때는 바가지를 엎어 놓은 바가지 모양의 머리가 유행하기도 했다.
장발단속은 80년대 들어서면서 없어졌지만 이를 단속하는 근거 법안의 장발에 관한 내용이 없어진 것은 1989년입니다.
한국에서는 가수 윤복희가 입은 것이 최초로 알려져 있지만 미니스커트는 당시 적령기 미혼 여성의 정장이 되어버렸다.
유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장발과 함께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당시 경찰들은 풍기단속 등의 이유로 대나무로 만든 30cm자를 가지고 다니며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성들의 치마 길이를 단속하기도 했다.
당시 단속 기준은 무릎 위 20cm에 걸리면 경범죄처벌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
"호황기에 미니스커트를 입는다"는 치마의 길이로 경제 상황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길거리에서는 보행법규를 위반한 사람을 단속하여 한쪽에 노끈으로 선을 만들고 그 선안에 세워두기도 했다.
횡단보도에서 한쪽발만 내려가면 괜찮았고 두발이 다 내려가면 교통단속반이 멀리서 지켜보다가 쫒아와서 적발되었다.
사회 분위기와 물가상승도 차갑게 느껴집니다.
웃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90년대까지만해도 자동차를 운전하시다보면 이런 일을 몇번은 격었을겁니다.
도로변에 화이바를 쓰고 멎진 오토바이를 타고 교통단속을 하는 교통순경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전주시내를 벗어나면 완주경찰서 소속의 교통경찰이 있었고,
완주군을 벗어나면 임실경찰서 소속의 교통순경이 있습니다.
임실군 경계를 지나면 남원경찰서 소속의 교통경찰이 나와있습니다.
남원 시내를 벗어나면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삼거리에 요천 검문소가 있습니다.
70k의 거리에 꼭 3-4차례는 교통단속을 거쳐야했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기준속도를 웃도는 속도로 운행하기도 하지요.
어김없이 한쪽에 살짝 숨어있다가 수신호로 차를 세웁니다.
그 시절에는 면허증 밑에다 5,000원권 지폐를 끼워놓고 다녔습니다.
접어진 5,000원권 지폐랑 같이 면허증을 제시하면 5,000원권 지폐만 꺼내고 면허증을 돌려주면서 "안전운전 하십시요"하면서 거수경례를 하였습니다.
다 그런것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동료들이랑 차한잔하게 해주십시요"하면서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습니다.
어느 날은 요천 검문소에서 안전띠를 안맸던가?해서 검문을 당했는데 호주머니에 현금이 없어서 면허증을 맏겨놓고 시내에서 현금을 인출해서 5,000원을주고 면허증을 찾기도 했습니다.
성실하게 교통업무를 보았던 교통경찰분들한테는 죄송합니다.
그 때는 국도지만 2차선이라 중앙분리대가 없어서 건너편에 교통경찰이 있으면 상대방 차에다 비상등을 깜박이면서 교통경찰이 단속을 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미덕아닌 미덕도 있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습니다.
건강관리를 잘 하셔야겠습니다.
5월 23일
12
10
제가 개발해 쓰고있는
살충제를 여기 소개하여
많은 고추농가 들께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주정 침지법 입니다.
만드는데 번거롭고
시간이 필요 하지만
숙성 시기만 지키면
해충은 이한가지 약제로
90%정도 방제가 가능 합니다.제가 이 약제로
무농약18년차인데
아직 한번도 검증에
실패 한적없고 지속 하고 있읍니다.
만든 방법도 간단 합니다.숙성 기간이 150일 이상이 걸려 흠 이지만 20L한통만드는데
16만원 정도 듭니다.
만드는 방법을 소개 합니다. 준비물
1.주정 20L 한통
2.독초 3kg
고삼. 상산.백두홍.초오.
낭독.반하.500g씩
3.숙성 약통23L 한개
약제 6가지 3kg을
숙성 약통에담고
주정 20L를 약통에 붇는다
밀봉 하여 그늘에 150일 이상 숙성 한다.
150일이상 숙성된 약제
는 체에 걸러 물 25말에
약제 1.5L를 혼합 방제
한다.
단 주정은 세무서 신고후 구매가 가능 합니다.숙성기간이 걸러서 그렇지 방제력은
90%이상 입니다.저는
항상 정식후 15일이후부터 10일
주기적 예방 방제를
지킵니다.도움이 될까
하여 올려 봅니다.
23년 8월 2일
10
4
손주들이 방학이면 남원 시골집에 내려와서 며칠 지내다 올라갑니다.
마당에 풀장을 만들어놓고 거의 하루 종일 물속에서 놀고 있답니다.
저희들 국민학교 때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시골 원두막이 있는 외갓집에 놀러가는 로망이었습니다.
저희 손주들도 유치원에 다닐적엔 특히 코로나시절엔 20여일이 넘게 꽤 오랫동안 놀다가 갔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몇일 시간밖에 안되더군요.
새벽에 텃밭에가서 풀좀 뽑고 남원에 내려갔습니다.
가는 길목에 오래전에 어제비를 소개해드린적이 있었지요.
진안으로 돌아가면서 저녁식사를 어제비로 할려고 포장해갔습니다.
내려간김에 저희 비석거리에 풀을 뽑았습니다.
증조모와 조모님 그리고 어머니 이렇게 3대가 효부상을 받으셔서 "서산유씨3대효묘원"이라고 세분 기적비를 세워드렸거든요.
비석둘레에 아버지께서 조경을 하셨는데 관리가 힘들어서 조경수를 캐내고 맥문동으로 심어볼려고 합니다.
비석주변을 세멘트로 하면 편한데 세멘트로 하기가 쫌 그렇더군요.
그래서 맥문동으로 몇년만 관리하면 될 것 같아서 내년 봄에 맥문동모종을 신청했습니다.
이번 장마에 비석주변에 풀이 엄청 자랐더군요.
집에서 엉덩이에 깔고 앉는 방석이랑 가지고 갔습니다.
땅이 촉촉해서 잘 뽑혀지더군요.
제초작업을 마치고,
해질녘에 동네 고샅을 한바뀌 돌았습니다.
고샅길을 잊지나 않으셨지요?
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이나 골목사이를 고샅길 또는 고사테라고 옛날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돌담길은 참 정겨웠습니다.
담을 쌓다보면 둥근돌도 필요하고,
모난돌도 필요하고,
단단한 돌도 필요합니다.
돌다무락을 쌓고나면 반듯하게 잘 쌓은 돌담도 나오고,
삐뚤삐뚤하고 어설픈 돌담도 나옵니다.
삐뚤삐뚤하고 꼬부라진 골목길이 그리워집니다.
지금은 옛날 돌담은 다 없어지고 벽돌이나 블록으로 쌓아 미장을 말끔하게 한 담장뿐입니다.
주름살이 많은 얼굴에 성형수술을 했다! 할까요?
붉은색 벽돌과 페인트로 칠을해서 깨끗하고 반듯해서 좋긴 하지만 정나미가 덜 합니다.
탱자나무와 사철나무로 울타리를 한 집도 있었습니다.
그 억센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 울타리을 지나칠려면 조금은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가을철이면 노랗게 익은 탱자를 주우러 다녔습니다.
탱자 껍질이 까끌하고 약간 거무잡잡한 것을 호박잎으로 문지르면 노란탱자로 변합니다.
자그마한 소쿠리에 담아 놓으면 방안에 놓으면 방안 가득하게 시큼한 탱자향이 오늘날 방향제를 대신한 것 같습니다.
저희 고향에도 두어집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었습니다.
또 탱자나무가 단단해서 자치기할 때 가지를 잘라서 만들기도 했습니다.
자치기는 길이가 조금 긴 막대기로 땅에 홈을 파고 작은 막대기를 쳐서 멀리보내는 놀이입니다.
이 때 작은막대기가 한뼘정도 크기인데 "알" 이라 불렀습니다.
알이 야무지고 단단해야 멀리 나가기 때문에 탱자나무 가지로 만들었습니다.
사철나무 울타리는 돌로 쌓은 담장위에 사철나무를 올려서 1년내내 푸른 사철나무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또 어느집은 나무가지를 엮어서 울타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주로 대나무나 싸릿대로 엮었습니다.
사립문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거나 산에서 싸리나무를 베다 만들기도 했습니다.
수수깡으로 사립문을 만든 집도 있었습니다.
대문 양쪽에 커다란 통나무를 땅에 묻고 대나무나 싸릿대로 엮은 사립문을 칡이나 철사로 묶어서 여닫고 했습니다.
사립문이나 울타리는 도둑을 예방하는 것보다는 짐승들의 출입을 막는데 쓰였던 것 같습니다.
닭이나 강아지 심지어는 돼지새끼까지 고사테를 휘젖고 다녔거든요.
그나저나 온기가 나는 집보다 듬성듬성 빈집이 많아지는 고향동네.
아이들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사라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앞으로 농촌인구가 줄어들어 농촌이 무너지고나면 입에 풀칠 할 쌀을 수입해야겠지요.
농촌에 빈집이 늘어나는 수 만큼 빨라지겠지요!
지붕과 마당에 잡초만 수북한 빈집이 많았습니다.
동네를 한바뀌 돌았는데 동네 어르신들 몇분밖에 뵙지를 못했습니다.
어서 빨리 정부에서 농촌살리는 대책을 심도있게 고민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장마가 물러난 것 같습니다.
태평양 고기압과 티벳 고기압이 곂쳐서 당분간 폭염이 계속될거라는 예보입니다.
폭염에 주의하셔야겠습니다.
7월 29일
33
20
2
Farmmorning
뚝방잘막아눟았어요^^
23년 7월 1일
고령운전자 후미추돌 사고 후기입니다.
부산에 집이 있고 남창 인근에 2필지 200여평 조금 안되는 텃밭을 가꾸며
드문드문 활동하고 있는 도시농부 입니다.
TV에서나 보던 고령운전자 사고를
어처구니 없이 당하게 되었네요.
대형면허 경력자(5톤부터 25톤)이기도 하지만 항상
정체구간에선 비상깜빡이 켜고 후미차량에
알리면서 룸미러로 후미차량 주시하며 다닌
덕에 사고없이 잘 다녔는데
제가 그 TV에나 나오는 사고에 주인공이
될줄은 몰랐네요.
80 언저리 되시는 QM 6 어르신
경사도 좀 있는 커브 구간인데
그냥와서 쎄리 박아버리네요.
교통량이 많은곳도 아니고 앞차량
5톤 카고에 굴삭기를 싣다보니
속도가 줄어 정체 되고 정차한 마지막 차량이였는데
정차하고
몇초만에 후미추돌 당했네요.
정차하고 불과 몇 초만에 사고가 나
영문도 모르고 지진 난줄 알았네요.
정차가 아닌 주행중인 차량으로 인식했다며
고바위 차고 올라가려고 탄력 붙여
브레이크도 안 밟고 그냥 마~
쎄리 박아서
차는 2주 렌트비 포함
450정도에 수리 마쳤는데
충격으로 인한 목 통증과 허리 통증땜에
다리까지 방사통이 와서
한방병원에 1주일 입원하고
(올 해 법 바껴서 어디 부러지거나 의사의
추가 입원 치료 소견 없으면 타 병원 전원도 안됨)
사고 다음날부터 사고 충격으로 인한 통증과
으슬으슬 추운 오한과 해질녘이면
몸살할때처럼 산발적으로 여러부위 뼈마디가 쑤시고 아픈 증상이
나타나더니
3주차인 지금까지도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힘이 드네요.
상대보험사는 2주치 한방병원비(올해 법이 바껴서 합의 보고와도 바로 의보 적용 안되고
자동차보험 자보 금액으로 3~4주 지나야 의보처리 된다네요)
도 안되는 금액을
제시하네요.
한방병원 물리치료 전기치료 및 부황
약침 외 실비 가입자는 자비로 계산하고
도수치료며 추나 영양제 다 받을수 있지만
상대 자보로 도수나 추나 각종 추가 벌침이니 이런건
상대보험사에서 사고로 인한 치료 입증이 힘드니 환자 자부담으로 하고 상대 보험사랑
알아서 하라는 방식이네요.
사고를 대비 해 드는게 자동차보험이지만
한 번 망가진 몸은 회복이 너무 더디고 힘드네요.
추가로 적자면 한방병원에 대부분이 60이상
실비 있으신 분들이며 정형외과처럼
휠체어 타고 다니는분 한번도 못 봤고
회진도 없으며 혈압이나 체온 체크도
코로나나 특이증상 없으면
없습니다.
젊음분들 호캉스가듯 교통사고로 상대방
보험사 나올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실비가 왜 해마다 오르는지 이유를 알게
된 계기네요.
정상까진 아니라도 오한과 산발적인 뼈마디
쑤시는 증상이 어느정도 사라질 줌
처음 제시한 합의금 근처로 쇼부 보려합니다.
당근님들 안전운전도 중요하지만
방어운전도 진짜 중요합니다.
한 번 다친 몸은 아무리 의료기술이 좋아졌다지만 사고 전 컨디션으로 돌어가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방어운전 필수입니다.
사고내신 그 어르신 보험불러 사고 처리 후
차량 운행 가능해서 직접 운전해서 가셨어요.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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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14 -
이제 우리들 기억속에서 조차도 사라져가는 새마을구판장을 우리는 어렴풋이 기억한다.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자 애환과 소비의 장이었던 곳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난지 오래전이다.
70~80년대 지역농협에서 운영하던 연쇄점도 이제는 하나로마트로 이름을 바꾼지 오래이고,
6-70년대 남원읍내에서 성업하던 동문상회, 남원상회들도 세월의 변천사에 따라 슈퍼와 마트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져갔다. 
마트, 슈퍼, 편의점과는 달리 이름부터 생소한 구판장이었다.
새마을구판장은 마을부녀회에서 생활물품을 공동구매하여 동네 주민들에게 저렴하게 판매하는 곳을 말한다.
70~80년대 각 마을마다 있었던 구판장은 동네 사람들이 쓸 생활필수품을 부녀회원이 돌아가며 판매했던 마을 점방이었고, 임대를 주어 임대료를 마을에 내고 운영하기도했다.
5일장에 나가야 생활필수품을 장만할 수 있었던 옛 시절 5일은 기본이고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 하루에 몇차례 오는 버스에 쉽거 농촌에서 나갈 용기조차 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이 같은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마을마다 구판장이 있을만큼 보편화된 소비장소였다.
100여호의 이상의 가구수가 있는 큰 마을에서는 2개의 구판장이 있기도했다.
100가구 이상인 마을에는 동네마다 이발소도 같이 있었다.
새마을 사업 이전에는 이같은 작은가게를 점방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자가용과 같은 교통수단이 널리 보급되고 마트 등 대형매장이 생활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구판장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 대부분의 구판장들은 문을 닫은지 오래이다. 
이제는 사라져간 구판장에 갔을 때 간단한 종류의 생필품과 음료수 빙과가 있다.
살 수 있는 물건의 종류도 마트나 편의점처럼 다양하지는 못하다. 
산업화 과정에서 시골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도회지로 떠나버려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수십명에 불과한데다 교통이 좋아져 필요한 물품을 시내에 나가 사다 쓰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과 달리 태어난 마을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웃는 말로 제비새끼 까듯 자식을 6~8명씩 낳아 기르던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교통이 불편하다보니 읍내에 서는 오일장에 장보러 가는 날 빼고는 마을 사람들이 필요한 물품을 사다 파는 마을 가게에서 사서 쓰곤 하였다.
시골마을 구판장은 명색이 가게라고 하지만 보잘 게 없었다.
읍내에 있는 가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니 가게라고 볼 수도 없는 시늉만 낸 가게였다.
그러니 파는 물건이 많을 리가 없었다.
겨우 몇 가지에 불과했다.
빨래비누, 국수, 사카린, 사카린처럼 단맛을 내는 당원, 비닐봉지에 땅콩 몇개와 멸치 대여섯마리를 넣은 술안주, 신선로 그림이 그려진 미원 몇 봉지, 바늘, 실, 머리핀, 참빗 정도였다.
담뱃집을 겸하고 있으면 '아리랑' 궐련담배 몇 갑에 말아 피우는 풍년초를 쌓아 놓은 봉초 정도였다.
이외에 동글동글한 하얀 독사탕(돌사탕)과 비과,캬라멜, 일본말로 '덴뿌라'라라고 부르던 꽈배기 정도를 아이들 간식용으로 팔았다.
이처럼 구판장은 막걸리, 담배, 국수를 파는 것 말고도 마을 내 소통의 중간자 역할도 톡톡히 하였다.
요즈음에는 마을마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회관이 없는 마을이 없지만 그때만 하여도 회관이 있는 마을은 거의 없었다.
마을회의를 할 경우에는 잘사는 집 사랑채나 제각 등을 이용하였다.
여름에는 마을 정자나무라 불렀던 느티나무나 팽나무 고목 아래 멍석이나 돌을 의자삼아 깔고 앉아 이장이 면에서 지시한 사항을 전달한 후 말 빨깨나 하는 몇 사람이 침을 튀기면 말 주변 없는 쑥맥들은 그저 하염없이 듣는 식으로 진행했다.
또한 구판장은 외지에서 마을에 사람이 오게 되면 주로 마을 입구에 있는 구판장을 찾게 되다보니 찾는 집을 안내하고 물건이나 편지를 맡겨 놓으면 가져다 주기도 하고 동네에 구판장에 비상용 전화가 1대 놓였을 때 자식들이 고향부모님께 긴급한 일이나 안부전화를 할 때면 마이크에다 "아아. 누구 아버님. 서울 큰 아들한테 전화왔습니다"라고 방송을 하면 행여 전화세가 많이 나올까봐 부리나케 달려와서 헐떡거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곤했다.
이렇게 마을구판장은 그 마을의 따뜻한 사랑방이었고 애환과 소비의 장이었다.
제가 2학년 담임을할 때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 때도 현충일을 가운데 두고 농번기방학이 있어서 시골에 내려가 들녘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는데 동네 등구나무에 달려있는 확성기에서 저를 찾는 방송이 나온겁니다.
부리나케 달려가서 전화를 받았더니 당직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신 겁니다.
저희반 아이가 대학병원 응급실에 입원해 있는데 학부형과 의사선생님께서 담임인 저를 꼭 만나야한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수학여행을 설악산으로 3박4일로 다녀왔는데 아침 일찍 출발하고 여주에선가 잠간 쉬었는데 그 때부터 아이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설악동 숙소에 도착해서 속초의료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심한 빈혈과 영양실조라 몸이 약해서 정신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쩔 땐 심한발작을 일으키고 있어서 병원에서 천질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심할 때는 입에 거품을 물고 떨기도 했습니다.
그 때마다 손을 주물러주고 처방된 약을 먹였습니다.
놀랐습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택시를 타고 시내를 벗어난 시골에 데려다주면서 그간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3박4일동안 그 아이를 떠니지않고 돌보게 된 일들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부모님께서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다큰 여자아이가 천질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에 상심이 크셨습니다.
집안 대대로 천질을 앓은 조상님이 안계셨는데 의아해 하셨습니다.
빨리 병원 치료를 받아보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바로 대학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아무말도없이 선생님만 찾는다고 학부형께서 학교로 오셔서 저한테 연락을 하신겁니다.
바로 올라와서 병원에 들렀습디다.
온 식구들이 다 모이셨더군요.
정신과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들 줄잡아 15명정도가 있었습니다.
여행중에 하던대로 손을 주물러 주면서 양볼을 손바닥으로 만지면서 "ㅇㅇ야. 선생샘이다"했더니,
눈을 뜨고 살며시 웃더니 다시 잠들더군요.
정신과 치료가 참 복잡합니다.
의사들과 언니, 형부, 부모님이 아무리 흔들고 때려보기도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제가 한번밖에 부르지 않았는데도 눈을 뜨고 다시 잠들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과 가족들한테 속초의료원을 두번가고 경주에서도 병원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의사선생님께서 왜 선생님만 찾은 이유를 알았다고 애쓰셨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에 결혼하고 전혀 아픈데없이 잘 살고 있다고 우연히 만난 형부가 말하더군요.
자취하면서 식사를 거르고 몸이 약해서 정신적으로 혼란을 가져왔나 봅니다.
1년중 담배가 가장 적게 판매하는 달이 1월이고 가장 많게 팔리는 달이 2월이라고 방금 아침마당에서 이야기하네요.
작심삼일(作心三日)을 잘 나타낸 말이네요.
금연을 실천하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못참고 다시 담배를 피기 시작한다는 뜻이겠지요.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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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시감3차방제약은
21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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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숭아 정식과 개원에 대한 모든 것!
1. 땅 고르기
- 평지
- 경사지
2. 재식 방법
1️⃣ 평지
평지는 일반적으로 1) 토양이 비옥, 2) 작업이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1) 땅값이 비싸고, 2) 물 빠짐이 나쁘며,
3) 지역에 따라 서리 피해 우려가 있어요.
평지 개원 시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물 빠짐 상태인데요.
물 빠짐만 문제 없다면 경사지보다 재배가 쉬워요.
2️⃣ 경사지
경사지는 땅이 비옥하진 않지만, 물 빠짐이 잘 되고,
서리 피해가 적으며, 땅값이 싼 편이에요.
다만 1) 작업이 불편하고 2) 토양 침식이 심하고
3) 땅심이 약해 영양 부족, 건조 피해 등을 받기 쉬워요.
경사지에 개원할 땐 표토 유실과 수분 부족 등을 방지하기 위해
깊이갈이와 유기물 투입에 힘쓰는 게 좋아요.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경사지 개원 할 땐 다음 사항을 유의하세요.
✔️ 지형을 잘 고르고 평탄화 시키기
✔️ 서리를 막기 위한 방상림 조성하기
✔️ 냉기류를 배출할 수 있는 방법 찾기
3️⃣ 재식
① 심는 시기
보통 복숭아를 심는 시기는 봄 심기와 가을 심기로 나뉘어요.
가을 심기는 낙엽이 지는 시기~땅이 얼기 전까지라
11월 중순~12월 상순까지 심을 수 있어요.
봄 심기는 땅의 해빙과 함께 시작해 늦어도 3월 중순까지 심어야 해요.
가을 심기는 봄 심기보다 활착이 빠르고, 생육이 좋지만
동해나 건조 피해가 우려되고요.
봄 심기 시엔 너무 늦지 않도록 유의 하며, 봄철 건조에 각별히 주의하세요.
② 구덩이 파기
구덩이는 미리 심을 거리에 맞춰 파놓고,
토양 풍화를 시키는 것이 좋아요.
경사지가 생땅인 경우는 구덩이에 물이 고이지 않고,
경사 아래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세요.
복숭아는 뿌리가 얕게 뻗는 천근성 과수라
뿌리 산소 요구량이 많아 구덩이에 물이 차지 않을 수 있도록
얕게 파는 것이 중요해요.
심을 땐 땅을 밟아 다진 후 접목 부위가 지면보다 5~6cm 높게
올라오도록 높이 심으세요.
나무 심기 전 토양 산도를 교정하기 위해
생석회를 적당량 살포하고,
용성인비는 구덩이당 2~4kg 흙과 섞어주세요.
③ 심는 거리(재식 거리)
심는 거리는 품종 특성, 토양 비옥도 및 대목 종류에
알맞게 해주어야 단위 면적당 수량을 최대로 올릴 수 있어요.
자세한 내용은 이미지를 참고하세요!
출처: 농촌진흥청 농업기술길잡이
23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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