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풍모래당근해풍쪽파종구·
2026~2027 당근일지
사람의 시간에서, 당근의 시간으로
어제와 오늘의 밭이 확실히 달랐다.
9월 26일, 행원리에 하루 30mm가 넘는 비가 내렸다.
9월 내내 가뭄 속에서 관수로 버티던 당근에게는 정말 촉우였다.
다음 날 밭에 나가보니 기존 잎만 다시 선 것이 아니었다.
행원로151, 농공단지 도로밭, 농공단지 아래밭 모두에서 연둣빛 새잎이 올라오고 있었다.
가뭄 속에서 생육이 멈춘 줄 알았던 당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을 가까이 들여다보니 생장점에서 새잎이 올라온다.
아직 올해 작황이 회복됐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
새잎이 나온 것과 뿌리가 굵어져 상품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당근은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사람의 일도 정리해본다.
9월 28~30일 오전에는 솎아낸 당근과 큰 검질을 고랑에서 걷어낸다.
9월 30일 마지막 비행기로 서울에 올라가 일주일 휴가를 보낸다.
10월 1일에는 예약해둔 3차 드론방제.
10월 6일 오전 행원으로 돌아온다.
10월 7일에는 4명을 투입해 마지막 보정솎음을 한다.
전 포장을 다시 솎는 것이 아니다.
두 포기, 세 포기가 붙어 있는 곳만 찾아 약한 것을 정리하고 한 포기가 제대로 클 공간을 만들어주는 정도다.
10월 8일에는 농공단지 포장 상태를 다시 확인한 뒤 칼륨을 보충할 생각이다.
그리고 10월 9일 이후.
이제는 농부가 당근을 억지로 끌고 가는 시간이 아니라
당근 스스로 햇빛을 받고, 뿌리를 내리고, 몸을 키우는 시간으로 넘겨주려 한다.
올해는 중경작업도 하지 않기로 했다.
파종할 때 트랙터로 이랑과 고랑을 만드는 작업이 아직 미숙했다.
지금 다시 기계를 넣으면 오히려 뿌리를 건드리고 포장을 망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올해의 실수는 올해 억지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내년 파종 때 더 정확한 이랑과 고랑을 만드는 것으로 고치면 된다.
이번 2026~2027 당근 시즌에서 가장 강하게 배운 것도 하나 있다.
내가 경험한 올해 행원리 당근 농사에서는
태풍이나 집중호우보다 더 무섭게 다가온 것이 조풍이었다.
강한 바람에 실려온 염분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잎을 태우고 광합성을 멈추게 하고,
거기에 가뭄까지 겹치면 당근은 조금씩 힘을 잃는다.
그래서 올해는 물을 대고, 또 물을 대며 버텼다.
그리고 9월 26일 비가 왔다.
다음 날 새잎이 올라왔다.
농사는 결국 사람이 다 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농부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놓고
어느 순간에는 작물에게 시간을 넘겨줘야 한다.
9월까지는 농부의 시간이었다.
10월부터는 당근의 시간이다.
이제 나는 조금 물러서서 지켜본다.
올해 당근이 어디까지 스스로 일어서고,
어디까지 영글어갈지.
그 답은 10월과 11월의 밭이 보여줄 것이다.
2002년 서울에서 행원리로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인영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