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네 슈퍼의 비밀 편지

이 골목 어귀에 있는 작은 슈퍼마켓은 동네 사람들의 숨은 쉼터였다. 번쩍이는 간판도 없고, 할인 행사 같은 것도 거의 없었지만, 이웃들은 늘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슈퍼 주인 아저씨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맞았다. 그러나 그 슈퍼마켓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민수는 그 비밀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슈퍼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주머니를 확인했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건 몇 개의 동전과 오래된 지폐 한 장. 실직한 지 벌써 석 달이 넘었다. 아이의 우유와 빵을 사야 하는데, 그마저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슈퍼 안은 늘 은은한 라디오 음악이 흘러나왔고, 진열대마다 정성스럽게 놓인 과자와 음료수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수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천천히 진열대를 둘러보았다. 마음속으로 계산을 했다.
‘이 우유랑… 빵 하나. 계산하면…’
그는 한숨을 삼켰다. 돈이 부족했다.

그때 카운터 앞에 걸린 작은 메모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의 행운 문구: ‘별빛’ — 계산 시 말씀하시면 특별할인!"
민수는 잠시 멈춰 서서 글씨를 읽었다. 손글씨로 적힌 글씨는 따뜻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그는 망설이다가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았다.

“이거 계산해 주세요.”
“네~.” 슈퍼 주인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계산기를 두드렸다.
민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낮게 말했다.
“…별빛.”
“네?”
“…그, 메모에 있던… 오늘의 문구요.”
아저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 오늘의 손님이시군요.”
그는 영수증을 내밀며 말했다.
“이건 특별 할인된 가격이에요.”

민수가 받은 영수증에는 원래 가격이 적혀 있었지만, 최종 결제 금액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이렇게 해주셔도 돼요?”
“우리 가게에 자주 와주셔서 고마운 마음이에요. 오늘은 별빛의 주인공이시네요.”
아저씨는 미소를 지었고, 민수는 그 말에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날 밤, 민수는 아이에게 우유를 건네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웃으며 우유를 들이켰다. 그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무너졌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무력해진 게 미안했고, 누군가의 따뜻한 배려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 후에도 슈퍼에서는 며칠마다 ‘오늘의 문구’가 바뀌었다. ‘달빛’, ‘바람꽃’, ‘햇살’… 손님들이 그 문구를 말하면 자연스럽게 큰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슈퍼 주인의 작은 이벤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 뒤에 누군가의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골목 끝에 있는 3층짜리 현대식 주택, 그곳에 사는 현우는 동네 사람들과 거의 교류가 없었다. 항상 고급 세단을 타고 출퇴근하며 조용히 살았던 그는 사람들에게 ‘성공한 사업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그는 매달 슈퍼 주인에게 일정 금액을 전달했다.

“이건 이번 달 지원금이에요.”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이웃들이 편하게 장보는 걸 보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언젠가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으니까요.”

현우는 자신이 어릴 때 가난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동네 빵집 주인이 몰래 빵을 싸주던 그날의 따뜻함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이 그 온기를 돌려주고 싶었다.

민수는 슈퍼를 들를 때마다 조심스럽게 ‘오늘의 문구’를 말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 줄 수 있었고, 저녁 식탁에 김치찌개 외에 작은 반찬 하나를 더 올릴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슈퍼 앞에서 우연히 현우를 보았다. 현우는 슈퍼 주인과 웃으며 얘기하다가 민수에게도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민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저 부러운 마음으로 현우를 바라봤다.
‘저런 사람은 걱정 같은 거 없겠지…’
민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 미소 뒤에 자신과 같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시간이 흘러 민수는 조금씩 일을 찾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택배 일이었지만, 점차 수입이 늘었다. 그는 슈퍼에서 물건을 계산할 때 더 이상 ‘오늘의 문구’를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계산대에 작은 편지 하나를 두고 갔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제 아이가 굶지 않았습니다."

슈퍼 주인은 편지를 읽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편지를 현우에게 전해주었다. 현우는 조용히 편지를 읽으며 오랜만에 눈가가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사람 마음이 참… 별빛 같네요.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빛나니까.”
그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동네 슈퍼마켓의 작은 메모지는 여전히 매일 바뀌었다. ‘오늘의 문구’는 계속해서 누군가의 숨겨진 도움을 상징했다. 사람들은 그저 소소한 이벤트라고 웃으며 넘겼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메모 한 장이 삶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골목길의 그 슈퍼는 오늘도 조용히 문을 열고 사람들을 맞았다. 비밀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비밀 속에서 싹튼 온기는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