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60대부터나 시골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23번의 이야기를 올려드렸습니다. 제 어릴적에 추억을 끄집어내서 알아듣지 못할 사투리에다 시작도 끝도 없이 두서없는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고를 쓰고 수정하는 작가들이 쓰는 글이 아니라 그냥 일기쓰듯이 컴퓨터도 아니고 핸드폰에다 써내려갔습니다. 띄어쓰기나 받침 정도는 될 수 있으면 바르게 쓸려고 TV자막에 나오는 문장들을 유심히 보기도 했습니다. 모든 이야기들이 저한테는 일상이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요즘 말하는 저는 흙수저는 아니고 그렇다고 금수저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40마지기의 논이 있어서 머슴이 두명이나 있었다. 저희 고향은 논 한마지기가 150평이었다. 지금은 1,200평을 한필지로 경지정리가 되어있고 볍씨도 개량되어서 쌀 생산량이 많은편이다. 그 때는 모조건 2모작을했고 한마지기에 90k들이 쌀 두가마니가 안되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 마대포대가 생기면서 40k씩담았다. 고등학교를 전주 외갓댁에서 다니면서 하숙비로 40k들이 쌀포대를 메고 다니곤했다. 어느 날 튀밥을 튀는 기계가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는 가끔씩 튀밥기계를 지게에 짊어지고 마을을 돌아다녔거든요. 남들이 먹는 하얀 쌀튀밥을 먹고싶어서 어머니를 졸라서 쌀 한 됫박을 가지고 튀밥을 튀러갔습니다. 하얗게 나와야 할 튀밥이 튀밥은 튀지않았고 색깔만 누렇게 나오더군요. 쌀이 습기가 많아서 그렇다고 튀밥이 실패를 했습니다. 설 명절쯤에 동네에 발동기를 돌려서 가래떡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집은 집에서 쌀을 절구통에 넣고 절굿대로 빻아서 삶아 안반에서 둥글게 만들어서 가래떡을 만들었습니다. 기계로 뺀 가래떡은 말랑말랑하고 낭창낭창하니 맛있는데 집에서 만든 가래떡은 거칠고 딱딱했습니다. 떡빼는 돈을 아끼실려고 집에서 만드신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여느 부모님보다 더 아끼시면서 살림을 하셨던 집이라 그렇게 풍족한 삶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땐 초등학 때부터 교복시대였다고 3번째 이야기에 있었죠? 설빔으로 교복을 사주실 때는 앞으로 2-3년은 더 입히실려고 소매단과 바지단을 무조건 접어서 넣었습니다. 한해가 지나고 다음해에 키가 커서 접었던 곳을 풀어야 했는데 접혔던 곳이 하얗게 달아서 표시가 났습니다. 집에 머슴들이 2명이나 있었는데도 새마을사업하는데 부역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냇물을 막아서 봇또랑으로 물을 대는데 책임자 되시는 분께서 동네 정기나무 아래에서 징을 몇번 치시고 "보매기 나오세요"하시면서 큰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냇물을 막는 보막이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농사철이 다가오면 냇물에 보를 만드는데 추석보와 번암보가 있었습니다. 저희 고향이 장수군과 남원군 경계가 되거든요. 추석보는 남원군에 속한 논에 물을 대는 보이고, 번암보는 장수군에 있는 논에 물을 대는 보입니다. 번암보는 맨 끝에 우리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군데 보막이를 다녀야 했습니다. 번암보는 마을에서 좀 멀리가야 했습니다. 산중이라 그렇게 넓은 뜰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동네 방송시설이 안 되었을 때라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저는 쉬는 날이면 제가 나갔습니다. 연세드신 분들은 삽이나 괭이를 들고 나오시고, 젊은 사람들은 지게에 바작을 얹어서 지고 나왔습니다. 냇물을 막기 위해서 커다란 돌멩이를 주어다 쌓아아했고 옆에 있는 산에서 흙과 떼(잔듸)를 지게로 짊어지고 날라야 했습니다. 그래야 냇물을 막아서 보또랑으로 물을 보냈거든요. 큰비라도 내리면 쌓았던 보가 다 떠내려갑니다. 그러면 다시 "보매기 나오세요"하고 외치면 동네사람들이 나와서 보를 막습니다. 지금같이 비닐이 있는 것도 돌멩이 사이를 솔가지를 베다가 넣고 그 사이를 흙과 떼를 지게로 짊어지고 날라서 막았습니다. 보를 다 막고나면 한말들이 막걸리통으로 새참을 먹었습니다. 안주는 된장에 풋고추인데 보를 막고나면 물이 말라서 뗑아리라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는데 그 뗑아리를 된장에 찍어서 먹기도했습니다. 저도 뗑아리를 된장에 찍어서 먹었습니다. 새마을사업에 부역이나 보막이를 할 때 동네 어르신들께서 저를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잘 아시죠? 새마을사업을하는 부역은 농땡이 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마을사업 때나 보매기할 때 저는 지게로 짊어지고 나르고 일을 잘 했었던 것 같습니다. 머슴들이 나가면 맨날 농땡이만 친다고 저더러 나오라고 했던 것 같았습니다. 학교를 다녀오면 어김없이 깔(꼴-소먹일 풀)을 한망태씩 베서 소여물을 준비해야했습니다. 여름에는 나무도시락에 밥을 싸서 꽤나 먼 산에가서 풀을 베서 말린다음 지게로 날랐습니다. 건초라고 했습니다. 그때 퇴비증산은 국가에서 장려를 했습니다. 생풀은 무거우니까 말려서 지게로 나르는데 길도 좁기도 했지만 꾸불꾸불한 산길로 십리가 짱짱했습니다. 여름방학 때 머슴들을 나무도시락을 싸서 따라다니면서 건초를 하러 다녔습니다. 집으로 가져온 건초는 새벽에 작두로 썰어서 차곡차곡 쌓아놓으면 김이 모락모락나면서 발효가 됩니다. 작두질은 늘 제 몫이었습니다. 아버지서 한웅큼씩 풀을 작두에 넣으시면 저는 힘차게 작두를 밟아서 풀을 썰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3.6짜리 콘테이너박스 두개크기정도로 퇴비더미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소마굿간에서 나온 두엄과 섞어가면서 몇차례 쇠스랑과 거름삽으로 뒤집으면 하얀곰팡이가 끼면서 퇴비가 만들어집니다. 이퇴비는 가을에 논에 뿌리고 보리를 심었습니다. 겨울철엔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기도했습니다. 큰 재를 넘어 먼곳에 고목나무들이 있는데 그 고목나무가 있는 곳에 관솔이 있습니다. 관솔을 캘려고 재넘어까지 지게를 지고 다녔습니다. 관솔은 소나무가 썩으면서 송진이 뭉쳐서 불을 부치면 지글지글하면서 불이 잘 붙었습니다. 그때는 건초를 하기위해서 일부러 산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야 내년에도 연한 풀을 할 수가 있거든요. 해마다 국유림인 큰재 넘어 깊고 높은 산에 일부러 불을 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야 봄철에 고사리와 취나물, 수리취를 뜯기도 했으니까요. 어떤이는 힘들고 복잡한 지나간 과거를 뭐그리 생각하면서 사느냐?하는 질책도 있었습니다. 힘들고 지칠때도 있었던 어린시절이지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이 그리 싫지는 않았습니다. 나이들면서 새벽잠이 없어지더군요. 그럴때마다 가끔씩 옛날 생각이 떠오르면 잠시 생각나는대로 끄적거려보는 것이 시간 때우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새벽시간입니다. 날새면 친구님들께 제 페붘에 밴드에 카스에 제자들께 단톡방에 지금까지 메세지를 주고받은 많은 사람들한테 올려드릴려고 합니다. 이제 지나간 과거 이야기는 며칠전 보내드린 60년70년 동영상과 이번의 이야기로 마칠 것 같습니다. 그냥 감사할 뿐입니다. 나이들어 가면서 쪼끄만 일에도 감사함을 많이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쩔땐 힘들고 짜증난 날이었는데 손주들의 영상통화에 집안에 생기가 돋는 것 같아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글을 제 자식들도 봅니다. 영상통화를 자주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내리 사랑이라 모든 어르신들은 손주들 재롱이 큰 보약인 것 같습니다. 다들 그렇지 않으십니까? 어제 하루도 별일 없음이 감사하고, 오늘도 감사한 하루일꺼라 생각합니다. 오늘 남부지방에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이 비를 동반한 장마전선이 중부지방으로 올라가면서 이미 비피해를 입은 지역에 또 많은 비예보가 있어서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정부에서 재난지역으로 선포를 했지만 갈수록 노동력이 늙어만가는 농촌에 수해복구를 할 엄두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농사일이 크게 부가가치가 없어서 점차 줄어드는 농촌인구문제를 정부차원에서 심도있게 고민해야하지 않나?싶습니다. 전주는 비소식이 아침부터 비예보가 있었는데 점차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더 큰 비피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아고. 무슨 말씀을요~ 정술님께서 제 이야기를 읽어주시고 답글 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있었습니다. 근데 오빠 성함이 저랑 같으시다고요. 더더욱 반갑습니다. 흔치 않은 이름이거든요. 저는 종손이라 아버지께서 쌀2가마니를 주시고 지은 이름이라고 하셨습니다. 올해 97되신 아버지께서 동생들한테 저를 부를 때 "상우당"이라는 호를 지어주셔서 상우당형님으로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제이야기를 올렸는데 가끔씩 옛날 이야기를 소환해서 올리겠습니다. 제가 살아온 이야기니까 심심하실 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단양은 그렇게 인연이 안 닿아서 세번인가 들렀었습니다. 큰애가 대명콘도가 있어서 가을에만 들렀었는데 다시한번 가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정술님은 저는 남자회원인줄 알았습니다. 충청지방에 비가 많았던데 괜찮으신지요? 장마와 더위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옛날에는 이름도 생일도 그런일이 흔했지요. 제 아들이 대명콘도회원권이 있답니다. 저는 아들만 둘이랍니다. 큰애는 아들만 둘이고 작은애는 남매가 있는데 9월에 손녀가 태어납니다. 근데요. 뭘 조심하시겠다는 말씀인 줄 모르겠네요. 제가 52년생이니까 73살이되네요. 2014년에 교직을 정년퇴직하고 제놀이터가 텃밭이 되었습니다. 많은 회원님들 중에 이렇게 인연이 되네요.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저 서론도 결론도없이 제 이야기를 끄적거려 보았습니다. 텃밭에서 라디오나 또는 TV를 시청하다가 좋은 이야기나 어릴적 생활이 나오면 간단하게 제목만 메모를 합니다. 그러다 이른 새벽에 눈을 뜨거나 쉬는 시간에 어릴적 추억을 소환해서 여러곳에 올리곤 합니다. 제 첫 제자들이 띠동갑이라 올해 환갑을 맞이했더군요. 아무래도 첫제자들이고 여자애들이라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성민님같이 많이 공감해주시면 핸드폰에 돋보기안경을 쓰고 이야기를 쓰면서 저 스스로 재미도 느끼곤 합니다. 가끔씩 우리생활 이야기를 올려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항상 조심하시고 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웬지 오랜 친구같은 기분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