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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제

자유주제 · 자유게시판
경남거제김삼철
텃밭은 내 놀이터 ♡·
♡어느 어머니의 유언♡

-이일배 / 前 구미 인동고 교장

​어떤 말이 그리 눈물 나게 했을까. 단 열네 줄로 쓴 어느 어머니의 유서를 읽으면서 눈자위를 맴도는 눈물을 삭히기가 어렵다.

자려고 누워서도 유서의 말이 떠올라 눈시울이 젖는다.

그다지 가져보지 못한 눈물인 것 같다.

그 유서의 전문은 이러했다.

(전체가 열네줄이라 했는데 여기 올리면서 몇 줄이 늘어났음을 말씀드립니다.)

​자네들이 내 자식이었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나를 돌보아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세상에 태어나 나를 어미라 불러주고, 젖 물려 배부르면 나를 바라본 눈길에 참 행복했다네.

​지아비 잃고 세상이 무너져, 험한 세상속을 버틸 수 있게 해 줌도 자네들이었네.

병들어 하느님이 부르실 때, 곱게 갈 수 있게 곁에 있어 줘서 참말로 고맙네!

자네들이 있어서 잘 살았네.

자네들이 있어서 열심히 살았네.

​딸아이야 맏며느리, 맏딸노릇 버거웠지?

큰 애야, 맏이노릇 하느라 힘들었지?

둘째야, 일찍 어미 곁 떠나 홀로 서느라 힘들었지?

막내야, 어미젖이 시원치 않음에도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고맙다.

사랑한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자.

2017년 12월 엄마가

​*사십대 초반에 공무원이던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35년간을 홀로 오직 일녀삼남 자식들만 바라며 살아온 어머니의 유서다.

​78세에 난소암을 얻어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이 유언이 공개된 장례식장은 흥건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2017.12.27.>

​무엇이 그토록 눈물겹게 했을까?

우선 자식들을 두고 ‘자네’라고 부르는 2인칭 대명사가 눈물겹다.

친구나 아랫사람을 대우하여 이르는 ‘자네’라는 말 속에는 자식을 끔찍하게 위하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극진한 마음이 녹아 있는 것 같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머니로서 당연한 것이겠지만, 요즈음 세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떠올리기조차 꺼려지는 일이지만, 부모의 학대로 어린 자식이 무도한 지경에까지 이르는 일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는가.

자식을 귀하게 대우하는 어머니임에야 자식인들 어찌 바른 성정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유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식들의 어머니를 위한 지성도 예사롭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어머니는 자식들의 치성이 고맙기도 했겠지만, 그 ‘고마움’은 그것에만 있지 않았다.

어미라고 불러주는 것이 고맙고, 젖 배불리 먹고 어미를 바라보는 그 눈길이 행복을 주어 고맙고, 지아비 잃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버팀목이 되어주어 고맙고, 세상 떠날 때 곱게 갈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아무 바랄 것 없이 거저 내 자식인 것만으로도,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고 있는 무위의 사랑이 눈물샘을 울컥 밀어 올린다.

​노자(老子)가 말한 ‘낳아주되 제 것으로 갖지 않고, 위해주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라게 해 주되 간섭하지 않는 生而不有(생이불유), 爲而不恃(위이부시), 長而不宰(장이부재)’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자는 이를 일러 ‘현덕(玄德)’ 이라 했다.

‘인간이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길 없는 묘한 도덕’ 이라는 말이다.

​이 어머니는, 당신이 있어 자식이 잘 산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있어 당신이 잘 살았다 하고, 당신이 자식을 열심히 살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있어 당신이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당신 삶의 모든 공을 자식들에게 돌리고 있다.

이런 마음을 두고 노자는 '功成而不居 (공성이불거) - 공을 이루고도 연연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이는 곧 ‘자연의 일'이라 했다.

자연이 만물을 대하는 이치와 같다는 말이다.

이 어머니의 사랑이 이와 같을진대 이보다 더 순수하고 숭고한 사랑이 있을까?

그 순수와 숭고가 다시 눈물샘을 솟구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어머니는 일녀삼남을 일일이 다 부르면서 제 노릇하며 사느라고 얼마나 버겁고 힘들었느냐고 오히려 위로해 주며 ‘고맙다. 사랑한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자.’ 면서 자식들을 토닥인다.

이에 이르러 방울 굵은 눈물을 지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하물며 그 자식들은 어떠하였을까?

​이 유언을 들으면서 자식들이 흐느낀 울음이며 세상 사람들이 지은 눈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물론 말할 수 없이 지극한 자애(慈愛)에 대한 깊은 감동의 눈물일 것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애정이며, 자식의 부모에 대한 경애심이 점점 흐려지고 거칠어져 가는 세태가 돌아보일수록 이 유언에 어린 감동이 더할 나위 없는 큰 울림으로 새겨져온다.

​어찌 감동으로만 끝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서 누구든 자신의 삶이 돌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생의 종언을 앞두게 되었을 때, 무슨 말을 아이들에게 줄 수 있을까?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나는 이 어머니만한 지성으로 살아오지 못한 것 같다.

자식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를 생각하면 민연해질 때가 있다.

하물며 어찌 이런 말을 남길 수가 있을까.

내가 못한 것을 너희들은 잘 해달라는 구차한 말조차도 남기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일을 생각하다보면 이 어머니의 유서가 다시 눈물겹다.

​내 살아온 자취가 더욱 눈물겹다.

​*우리 어머니들은 오르지 가족과 자식을 위해 손발이 다 닳도록 일만 하시고 자기 몸은 돌보지 못하신 어머니...

그 깊은 사랑과 희생을 무었으로 갚을 수 있을까요?

​불러도 대답없는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오늘밤 꿈에서라도 꼭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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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창원만당사
즐겁게 농사를짓고있어요·
한편의 드라마의 줄거리를 읽어가는
감동이였습니다
어머니의 자식을. 기른 고귀한 정성을 소롯이 묻어나게하며
저~어 깊은곳에서
묻어나는 어머니의 자식을 기른 애틋함을
담은 콧끝찡하게 감동을 받아 한줌의 눈물을 지웠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경남거제김한주
귀농 3년차 초보농부·
안녕하세요 고연호씨 혹시 대산면 모산에 사시는 분인가요? 제가 모산에 살면서 성함이 들은바있어서 여쭙니다.
전남광양빛그린 김용화
건강과행복을기원합니다.·
ㄴ ㅐ가슴이 뭉클하고 애잔한 글이었습니다. 엄마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자식들은 알려는지...
경북경주이영호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경북봉화방글댁
비오는날 좋은글 감동입니다~**
제주서귀포김종규
한편의영화같은이야기정말감동입니다,
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
어머니 어머니어머니
부디 오래오래 사십시오 건강하세요
경남창원만당사
즐겁게 농사를짓고있어요·
김한주님이라면 혹여
동명이인인지 모르겠지만 작고하신
김우현씨 막내자제분
아니신가요 존함이 기억납니다

자유주제모임의 연관글

잠시 함박눈이 내리는 주말 아침입니다. KBS에서 매주 토요일 아침에 방영된 황금 연못이라는 프로를 시청했습니다. 60대 이상인 분들께서는 많은 공감을 하는 프로라 가끔씩 즐겨보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노래하는 시인 박인희가수님께서 심순덕 시인의 시를 낭독하더군요. 황금연못에 출연한 사람은 물론이고 많은 시청자들이 눈시울을 적시더군요.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아버지가 화나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이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외할머니 보고 싶다 ,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아......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 ​다시들어도 가슴이 아파옵니다. 내 아이들에게 후회없는 아버지가 되어야 겠습니다. 심순덕 시인의 이야기는 하늘나라에 계신 저희 어머니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정말 늘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같이 시청하던 아내가 "꼭 당신 어머니 이야기네요"하더군요. 남들은 일하시다가 마무리 하시고 쉬시는데도 계속일을 하시고 계시는 어머니한테 부하가 나서 큰소리로 이제 그만하시라고 소리만 질렀던 제가 많이 부끄럽습니다. 남들은 동네 어귀에 있는 둥구나무 아래서 쉬시고 계시는데 그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를 짚으시면서 산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 하셨습니다. 특히 머슴살이가 사라진 후에는 일꾼들 밥상을 차릴 일이 없으셔서 어머니 식사 시간은 정해 있지 않았습니다. 해가지고 깜깜해서야 집에 들어 오셨습니다. 제가 주말에 내려가서 일을 도와드리면 이제 그만하자!라고 집에 들어 오셨습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떠난 것을 보신 후에 다시 논밭으로 나가셨습니다. 저를 보내시고 또 호미를 들으셨습니다. 그렇게 자식들 위해서 애쓰셔서 지금 저희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께서 너희 엄마 때문에 잘먹고 살 수 있잖느냐?하시면 듣기가 싫었었습니다. 참외껍질을 벗겨서 속살은 자식들 먹이시고, 울 어머니는 껍질을 드셨습니다. 빨간 수박속을 자식들 먹이시고, 껍질에 붙은 하얀속살을 숫가락으로 긁어 드셨던 어머니였습니다. 그 옛날 식량이 부족해서 보리밥을 혼식으로 정부에서 장려를 했지만 거의 강제였습니다. 밥솥에서 위에 쌀이 섞인 밥을 자식들 퍼서 먹이고 당신은 맨 바닥에 있는 보리만 퍼서 드셨습니다. 겨울철에 무우를 썰어서 넣은 무우밥을 해먹었습니다. 약간 질퍽하기도 했지만 무우밥을 싫어하는 저희들한테는 밥솥위에서 밥을 퍼주고 밥솥바닥에 있는 무만 퍼서 드셨습니다. 저희형제들은 부모님 모시고 해외여행을 몇차례 다녀왔습니다. 그러던 중 학년말 방학을 이용해서 일본 벳부쪽으로 온천여행을 가게되었습니다. 저희 6남매 부부와 부모님. 시간되는 조카들해서 20명이 넘게 부산항에서 비틀이라는 배를 타고 출발했죠. 제 막내 동생이 일본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일본생활을 해서 그 동생이 부모님과 형제들 조카와 사촌 동생네도 같이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이드없이 동생이 부모님을 위주로 여행계획을 준비했습니다. 가족여행이 빠듯하지도 않고 여유로워서 좋더군요. 그땐 일본에 들어갈려면 입국수속에서 지문인식을 해야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지문이 안나오는거예요. 여권 만들때도 어렵게 만들었거든요. 출입국관리소에서 지문이 안나오니 입국을 안시키는거예요. 결국은 사무실까지 들어가셔서 바듯이 통과했답니다. 얼마나 일을 하셨으면 손가락이 다 닳아서 지문이 안나왔을까요? 주무실 때도 발뒤끔치가 벌어지고 다헤져서 이불에 부프러기 생긴다고 버선을 신고 주무셨던 어머니였습니다. 발바닥에 궂은살이 박히고, 몇군데 갈라져서 양말이나 버선을 꼭 신고 주무셨습니다. 바세린을 듬뿍 바르시고요. 어쩌다 등이 가려워서 "등좀 긁어주셔요"하면서 등을 내밀면 어머니 손바닥은 너무나 꺼끄럽다기 보다는 아프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손바닥이 쇠수세미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손주들 얼굴한번 만지시지 못하셨습니다. 여린 손주들 피부에 그 억센 손바닥이 행여나 상처를 주지나 않을까?해서요. 정말 우리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침에 박인희 가수님께서 심순덕 시인의 시를 낭독하는데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어머니를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열흘남짓 지나면 여섯번째 제사를 모시기에 더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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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머니 *******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1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를 씌워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3일 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 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30살 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 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서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 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하시며 우셨다. 그 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 글 속의 “어머니”는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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