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제가 다녔던 국민학교는 자갈길을 십리를 걸어서 다녔습니다. 비포장된 자갈밭 십리길을 고무신을 신고 등하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체구가 약하거나 여자아이들은 국민학교 입학 년령인 9살에 입학을 하지않고 2-3년 후에 입학을해서 국민학교 동창이 친구의 형과 누나뻘이 있습니다. 국민학교 화단에는 어느 학교나 똑같이 수군장군인 이순신장군 동상과 한글을 창조하신 세종대왕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친 반공소년 이승복어린이 동상이 있었습니다. 또 책 읽은 소녀상의 석고상과 유관순열사의 동상도 있었다. 학교에서 대변을 성냥갑에 담아오기(회충 검사용), 나락모가지 주워오기, 쥐꼬리 잘라오기, 못자리 나방 잡아서 성냥갑에 넣어오기, 솔방울 가져오기도 했고, 겨울철 난로에 땔깜으로 쓸 장작도 가져오기, 여름방학 마치고 등교할 때 퇴비 가져오기, 자그마한 손으로 봄 식목일엔 나무를 심고, 여름에는 신작로에 동네마다 구역을 정해 코스모스를 심어 가을에는 길가에 자동차가 지나가면 뿌연 먼지속에 한들한들 이쁜 코스모스꽃을 보았으며 학교내에서는 통일동산을 꾸몄습니다. 우리는 돌멩이 같이 입에서 깨지지않고 녹지않아 단맛을 오랫동안 맛볼 수 있어 이름 붙여진 독사탕, 말랑말랑한 젤리와 유과, 라면땅, 아폴로, 크라운산도 등과 같은 과자와 쫀드기, 달고나, 띠기 같은 불량식품을 먹고 자랐으며 동네마다 울려 퍼졌던 새마을노래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새마을운동이란 것에 익숙해서 어김없이 아침 동틀 무렵 동네 가운데 있는 높은 정기나무에 매달린 주둥이가 커다란 나팔모양의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새마을 노래를 듣고 자랐습니다.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을 바탕으로 생활환경 개선과 소득증대를 목적으로 한한 범국민적인 지역사회개발 운동을 시작하면서 1972년 6월 20일 박정희대통령이 직접 작사한 새마을 노래가 대도레코드회사가 음반을 만들었다. 1절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2절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3절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4절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 조국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이 새마을 노래는 전국적으로 군대에서 기상나팔같이 새벽이면 울려 퍼졌습니다. 나무울타리 담장과 흙담장을 없애고 초가지붕을 기와로 이양하고 울통불통한 골목길을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반듯하게 넓혔다. 파란색 새마을 모자는 필수품이었다. 지금도 베트남 등 동남아 신흥국가에서는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을 모델로 우리나라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제 친구가 농촌지도소를 퇴직하고 베트남에서 연수원장을 맡아서 베트남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새마을교육을 시키고 있어서 국위를 선양하고 있습니다. 새벽 6시에 기상하고 아침체조와 구보를 시작으로 새마을교육을 모델로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교복을 입고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학과목에 교련과목이 있어서 교련복으로 갈아입고 목검으로 제식훈련과 총검술 및 구급법을 익혔고 운동장에서 열병식을 했습니다. 교련복은 군복과 같았습니다. 교련모와 요대랑 각반도 찼습니다.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향도라는 완장을 찼다. 국민학교때도 교복을 입었고, 모자에 학교를 표시하는 교포를 달았으며 웃도리에도 학교를 표시하는 단추를 달았습니다. 바지는 딱 달라붙는 쫄바지에서 일자바지로 다시 나팔바지로 유행을 탔고 중.고등학교 때는 학생주임 선생님께서 등교길에 복장지도를 하면서 나팔바지를 입은 학생들을 혼내키기도 했다. 카라 한쪽에는 교포를 한쪽에는 학년을 표시하는 아라비아숫자의 뺏지를 달았습니다. 시내에는 머리가 긴 장발단속도 있었고, 무릎위로 너무 짧은 미니스커트단속도 있었다. 밤 12시가되면 싸이렌이 울리고 이 때부터 야간통행금지 시간이어서 순찰중인 경찰에 붙잡히면 파출소로 연행되어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4시까지 보내야했다. 아마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통행금지라는 제도가 있었던 것 같다. 야간에 통행이 필요한 사람은 경찰서에서 야간통행증이라는 증명서를 발급받아야했다. 그러다 1982년에 해제되었다. 또 우리는 운동회 때 "다우다"라는 나이론천으로 만든 백군은 하얀 체육복으로 청군은 파란 체육복을 만들어 입었고 곤봉, 마스게임, 단체무용, 줄달리기, 방울치기, 박터트리기 등 수없이 연습해서 시원한 가을에 접어든 10월 초에 지역잔치인 운동회를 기억합니다. 체육복은 집에서 어머니께서 재봉틀로 박음질하시고 고무줄을 넣어서 만들어 주셨다. 달리기 계주는 키순대로 7명씩 조를 짜서 키가 작은아이들부터 달리기를했다. 저는 늘 맨 마지막조로 편성되었다. 맨손달리기, 장애물을 통과하는 달리기, 쪽지를 주어서 쪽지에 적힌대로 사람을 찾아서 하는 달리기 등 세가지 달리기가 있었다. 쪽지에 "안경쓴 사람"이라고 적혀 있으면 안경쓴 사람을 찾아 손잡고 달리기를 했다. "교장 선생님"이라고 적혀있으면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달리기를 하면 된다. 그런데 교장선생님께서는 꼭 넼타이를 매시고 구두를 신고 양복을 입고계셨다. 그래서 빨리 뛰시지를 못했다. 그야말로 복불복이었다. 운동회의 하일라이트는 청백계주였다. 마을단위로 계주도 있었다. 우리는 하교길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왼쪽가슴에 손을 얹고 가던 길을 멈춰서서 태극기가 다 내려질 때까지 엄숙한 자세로 있어야하는 국기 하강식을 했습니다. 어느날 박정희대통령이 지나가는데 군인 한명이 국기하강식을 그냥 지나친 것을 보고 그 부대에 보고하여 영창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걱정을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을 하지 않는다. 태어나서 부모한테 빚지고 살면서 은행에 빚지고 죽을 때는 자식한테 빚지고 평생 빚만지고 사는게 인생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