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1월 26일
10
3
Farmmorning
보리 손타작 중입니다. 역시 장난이 아니네요. 오늘은 구름이 있어 일하기 수월하네요
5월 30일
5
1
Farmmorning
보리고추장담기 완료 ~
12월 20일
16
6
Farmmorning
옥수수야 무럭 무럭 잘 자라줘서
고맙다.
옥시기 수염은 잘 말려서 구수한
옥수수차로 한모금 머금어보고
알알이 영글은 옥수수는 포~옥 쪄서
이쁘게 핀 꽃을 바라보며
허기진 배도 달래어보리라 ^^
6월 25일
8
4
Farmmorning
작년 뜰깨수확하고
노는땅에 보리를 심었는데
닭사료도 된다고해서
겨울에 파란색도보고
할려고 심었는데 고라니가
내려와서 다뜻어먹고
뜻은자리에 또싹이 올라
오고있네요~~
보리수확하고 뜰깨심을려고
하는데 보리는 수확시기가
언제인가요~
고수님들 좀아려주세요
처음양파를 심었는데
어제 비온다길래 추비를
했습니다~~
양파는 안뜻어 먹었네요
4월 16일
9
5
Farmmorning
오늘흰찹쌀보리밭
가에제초제작업을했음
보리작황이작년에비에
모질게자라고 있네요
3월 31일
3
그리고 보리차 대량으로 끓여서 밖에서 일하는 일꾼들 자주 마시게 해드려야 된다. 저체온증 않걸리게.
9시간 전
2
전남영광은 보리 쌀 고추도
재배하구요
보리특구입니다 그래서다양한
보리가재배중
쌀도갯벌이었던곳을개간하여
재배하니맛이좋구요
2월 21일
5
선배님들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귀농을하여 포도와 벼농사를 어머니와 둘이 짖고 있습니다. 규모는 포도 900평, 벼 대략 6000평 . 헌데 벼보다는 논 콩농사로 가고 싶은데 저희 지역은 포도 주산지라 논 콩 농사를 하시는 분이 없어요. 주변에 콩 농사는 밭에 조금씩하시고 논두렁에 조금씩하시고, 이게 다라 제가 원하는 정보를 듣기가 힘듭니다. 논 콩농사 교육자료는 유튜브나 교육포털에서 조금씩 듣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현재 고민중인게 논 콩 농사(피복안하고) 땅 두둑성형을 할때 장비를 배토기를 저렴히 사야하는지 두둑성형기를 사야하는지 고민입니다. 돈이 있다면 트랙터도 100마력이상 사고 두둑성형 파종기 일체형을 사고 싶지만, 그렇게는 빚에 노예가 되는것 같아 싫거든요.
배토기와 두둑성형기 습해피해에서 차이가 많이 날까요? 둘중에 어떤 장비를 구매해야 하는지 ... ㅠ.ㅠ
보유 장비 : 트랙터 대동50마력, 위캔글로벌 로터베이터
조언 부탁드립니다
1월 24일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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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금년 가을에 흑찰보리를 처음으로 재배 해 보려는 초보자입니다. 현재는 휴경지로 800평 정도 밭을 일구는 작업부터 해아합니다. 일정에 맞추어 어떻게 작업을 해 나가야 할지 막막하네요.^^
8월 22일
4
1
Farmmorning
얼갈이배추 초록물김치 담궜다.
원래는 보리밥을 갈아 넣어야 하는데 보리쌀이 없어 찹쌀로 풀물을 뭉근하게 쑤어서,마늘과 맵소롬한 풋고추와 함께 믹서기에 갈아서 씻어둔 얼갈이배추 켜켜이 부었다.
홍고추 숭덩숭덩 썰어 넣으니 더 맛깔나 보인다.
오랜만에 만들었더니 담백하고 맛있다고 한다~
9월 10일
19
10
1
Farmmorning
고구마 심을준비중
어제두둑을만들어 비닐씌우고 ᆢ 밤고구마모종신청 하고ᆢ
올해는 잘되야할텐데 ᆢ
올해는보리도심어서 로타리
작업을마쳐쓰니 잘되겟죠 ᆢㅎ 낼저녁비소식있어서
고구마모종30k 쯤심엇슴다
이제 일 못하겟네요 피곤해서 ㅜ
5월 24일
12
16
Farmmorning
고구마농사 시작입니다 유박뿌리고 보리대깔고 경운하고 있어요 작년에 꿀고구마 조직배양 해서 올해 종자로 나가요
1월 15일
21
1
Farmmorning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5 -
우리는 모내기 할 때도 나락타작을 할 때도 학교에 가지 않고 부모님 일손을 도와 드렸습니다.
모내기 할 때는 못줄을 잡고 어른들이 지게 바자기로 모침을 날라서 논에다 뿌려 놓았는데 모심는 사람들이 모를 심기 좋게 모침을 뒤에서 적당하게 분배를 했다.
모판에서 모를 쩌내면 새참을 먹는 시간이었다.
새참은 국수를 삶아 양념장에 비벼서 먹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새참먹는 시간에는 들녘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아가를 키우는 아낰네들은 애기들 형제나 할머니께서 아가들 젖을 물릴려고 등에 업고 나오기 때문에 새참도 넉넉하게 준비를 해야했다.
또 지나가는 사람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새참을 나누곤했다.
그래서 점심 또한 저녁도 넉넉하게 준비해야했다.
저녁은 어르신들이 계신 집은 밥을 따로 싸서 드리기도 했다.
옛날 시골 인심이라 생각한다.
우리집 첫모를 심는 날은 찰밥을 해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산에 있는 논에 식구들이 다 모여서 새참과 점심을 해결했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은 우리집 갑골이라는 산비탈에 있는 자그마한 3개의 다랑논이 있는데 한마지기 반이었다.
맨위에 있는 논 윗쪽에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솟아나 1년 내 물을 가두어서 첫모를 식구들이 다 모여서 심었다.
워낙 굴곡이 있는 논이라 못줄을 잡지않고 흩어지게 모를 심었다.
천수답이지만 가뭄이 있어도 논바닥이 마르지 않아서 대대로 물려받은 소중한 논이었다.
모를 심는 날자는 마을에서도 서로 겹치지않게 잡았다.
한번 심을 때마다 20명 이상씩 모여서 모를 심어야해서 한 마을에서 두세집 이상은 모를 심지 않았다.
저희 동네는 가구수가 많은 제법 큰 마을이었다.
한 마을이지만 아랫 마을,
웃 마을,
잰몰이라고 불리면서 자연스럽게 구역이 나뉘어졌다.
우리집은 주로 아랫마을과 웃마을 아낙네들을 품삯을 주고 모내기를 했다.
모심는 날이면 새참도 날라야했고 모를 다심고나면 논두렁에 못줄 막대기로 구멍을 뚫고 메주콩을 심었다.
보리타작을 할 때도 조퇴내지는 결석을 하면서 부모님의 일 또는 농사일 등을 도와드려야했고 일이 끝나면 해가 넘어가 어두울 때까지 동네어귀에 모여서 형 누나들과 얼음땡, 딱지치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땅 따먹기, 자치기, 숨박꼭질, 간생을 하며 놀았습니다.
보리타작은 보리를 한 곳에 모아놓고 조그만 발동기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보리타작을 했다.
농로가 없고 논두렁이라 발동기를 장정이 지게로 옮겨가면서 보리타작을 했다.
보리타작은 금새 마쳤다.
보리타작을 할 때는 어찌나 꺼끄러운지?
보리 수염 때문에 온몸이 쓰라렸다.
보리를 베내고 논에 벼를 바로 심기 때문에 신작로 양옆이나 논두렁에 보릿대를 세워서 말렸다.
보리타작을 하기위해 보리를 한 곳에 모을 때 바짝마른 보리이삭이 떨어진다.
새벽녘에 비료포대를 들고 다니면서 이슬이 잔뜩 뭍은 보리이삭을 주으러 나갔다.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주워모아야 정작 껕보리는 한줌밖에 되지 않았다.
요즘 말하는 가성비가 없는 일이었다.
보리를 베난 논은 쟁기로 논을 갈고 물을 대서 발로 보리밭 사이에 깔아 놓았던 건초나 지푸라기 보릿대 등을 밟아 넣었다.
물신이 나오기전까지는 발이 나무가시에 찔려서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 다음 써레를 이용해 논바닥을 고르면서 거친 퇴비를 써레가 걸러냈다.
땅이 가라앉을려면 2-3일 정도 시간이 필요해서 며칠 후에 모내기를 했다.
논에 잡초는 초벌, 두벌, 세벌 지심을 맸다.
동네에서 품앗시로 돌아가면서 논고랑 사이를 기어다니면서 잡초를 뽑았다.
그 때 나락 품종은 키가 큰 품종을 심어야했다.
그 대표 품종이 팔광이라는 벼 품종이다.
그래야 그 키가 큰 지푸라기로 생활용품과 농기구를 만들었다.
나락이 키가 커서 비바람에 많이 쓰러지곤 했다.
태풍이라도 지나가면 논바닥에 벼가 다 쓸어졌다.
나락은 낫으로 베서 8주먹을 지그재그로 놓아 한단으로 묶어 논바닥에 세워서 2주정도 말렸다.
이 때 나락 20단을 한 가리라고 했다.
논 바닥에 세우고 몇가리인가?를 확인하고 작년보다 가리수가 많으면 풍년 적으면 흉년이라고 했다.
모내기 할 때 심었던 콩은 걷어서 집마당으로 날랐습니다.
노란 메주콩이었습니다.
밭이 없어서 이렇게 메주콩을 심었습니다.
다 말린 나락은 지게로 마당으로 날라서 노적봉같이 높게 쌓고 종일 공상을 밟으면서 타작을 했다.
장정 한 사람이 바짝 마른 나락 한가리를 지게에 짊어질 수 있었다.
짚을 요긴하게 써야해서 나락단을 집으로 들여와야했다.
나락타작을 할 때는 공상 양쪽에서 나락을 한주먹씩 떼 주는 사람이 2명,
공상을 발로 밟으며 나락을 요리조리 돌리면서 나락을 훑어내리는 장정이 2명,
다 훑고 난 공상 뒤에서 지푸라기를 묶는 사람이 1명,
공상앞에서 갈퀴질로 검부적과 쌓이는 나락을 긁어내는 사람이 1명
이렇게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않고 일손을 도와야했다.
지금이야 벼를 거둘 때 트랙터가 다 해내지만 예전엔 사람이 일일이 낫으로 베어 홀태라는 기구로 훑어서 벼 알갱이를 털었습니다.
홀태는 길고 두툼한 나무 앞뒤 쪽에 다리 네 개를 달아 팔자(八字)모양으로 떠받치게 하고 빗살처럼 날이 촘촘한 쇠로 된 틀을 몸에 낀 형태로 되어 있지요.
이 빗살처럼 촘촘한 쇠틀 사이로 벼를 끼우고 잡아당겨 벼 낱알을 텁니다.
나는 짚단을 바깥 공터에 나르는 일과 나락가리에서 쌓아 놓은 나락단을 공상가까이에 갔다놓는 일을 했다.
저희는 주로 주말에 큰 일을 잡아서 일을 했다.
저는 군복무를 하는 동안도 보리베고 모심는 농번기 6월과 벼베고 보리 심는 농번기 10월에 한달씩 휴가를 맞춰서 일손을 도와드렸다.
군생활을 광주에서 끗발이 좀 있는 보직을 받아서 정기휴가와 포상휴가 및 기타 휴가를 모아서 농번기 때 1년에 두달 가까이씩 집안일을 도와드렸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휴가를 다녀오면 피부가 뽀앟고 이뻐지는데 저는 쌔까맣게 타서 부대에 복귀를 했습니다.
3년 복무기간에 훈련병과 쫄병시절 첫 해만 가을걷이 농사일을 도와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군대생활 할 때는 복무기간이 36개월이었습니다.
옛날 나락은 만생종이었습니다.
2모작을 했기 때문이 아니가?싶네요.
논바닥에 하얀 서리를 있을 때 벼베기를 했고 일손이 모자란 가정에서는 나락가리를 쌓아 놓았다가 눈을 맞고 타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늦 가을이라 해가 짧아서 나락타작을 하고나면 밤이 다가왔습니다.
마당에 횃불을 밝히고 하루종일 공상으로 훑은 나락을 풍구를 돌려 꺼스랭이와 쭉쟁이를 걸러내고 깨끗한 나락을 광에다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광은 문짝이 1번부터 8번까지 8개였으니까 제법 큰 광이었습니다.
맨 아래 1번부터 문짝을 닫기 시작해서 광안쪽부터 나락을 차곡차곡 다 채우면 마지막 8번째 문짝을 닫으면 광에는 나락이 꽉 찹니다.
타작한 나락이 광을 다 채우면 마당에 멍석을 둥그렇게 세우고 몰아서 임시로 나락뒤주를 만들어 그 곳에도 보관했습니다.
이렇게 광에 있는 나락은 그 때마다 방아를 찧어서 쌀뒤주에 쌀을 넣어 보관했다가 꺼내서 밥을 지었다.
쌀뒤주는 두꺼운 송판으로 위에서 뚜껑을 열고 쌀을 꺼낼 수 있게 만들었고 보통 쌀 2가마니 정도는 들어가는 크기였다.
가끔씩 시내 인터리어 소품으로 볼 수가 있는 장식품으로 쓰이고있다.
우리집 쌀뒤주는 느티나무 원목으로 만들어서 무게 또한 대단했다.
나락타작도 3번은 했던 것 같습니다.
바깥에 지푸라기를 묶어서 쌓아 놓았는데 짚널이 웬만한 큰 집채만 했습니다.
지푸라기는 가마니도 짜고, 멱다리도 만들고, 멍석도 만들고, 산태미도 만들고, 꼴 망태도 만들고, 새끼도 꼬았습니다.
소 마굿간이나 돼지 우리에 넣어 소와 돼지를 따뜻하게 보온도 해주고 소 돼지 배설물을 섞어서 밟혀 퇴비도 만들었습니다.
또 소 여물로 사용했습니다.
지붕을 볏짚으로 이으기도 했습니다.
용머리를 틀어서 지붕 맨 꼭대기에 얹고 흙돌담위에도 용머리를 틀어서 올렸습니다.
이렇게 농촌에서는 볏짚이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평야지대에서는 볏짚을 땔감으로 사용했지만 저희는 산에 나무가 많아서 땔깜으로 사용하진 않았습니다.
지푸라기를 땔깜으로 사용하는 평야지방보다 솔가지나무로 사용한 산간지방은 훨씬 깨끗하고 화력 또한 쎄고 굵은 나무토막으로 군불을 때고 숯도 만들어서 장담글 때랑 사용합니다.
또 화로에 숯불을 담아서 방안의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기도 합니다.
싱그러운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4월보다 좀 더 나은 5월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월 1일
21
24
Farmmorning
희찰쌀 보리논
오늘 도 아자아자 화이팅
1월 13일
9
2
Farmmorning
💕어머니의 편지와
아들의 편지를 읽고
마음이 찡하고 나이 탓인지 눈가에
이슬이 맺히네요.
감동 글이라 올립니다.
1️⃣어머니의 편지📚
파란 보리알
한 사발을
작은 손가락으로
만들어 들고 온
어린 아들의
곱고 고운 정성에
나는 울었다.
고사리 같은
너의 두 손을
꼬옥 안아
주고 싶었지만
나는
너를 위해
매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아주고
싶은 자식을
때려야만 했던
엄마는
가슴에 못을
박는 아픔이었다.
엄마를 생각하는
너의 마음 정말 고맙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ᆢ
~~~^^~~~
어머니의 편지이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집에
먹을 것은 없고
엄마는 몹시도 아파서
방에 누워 앓고 계셨다.
굶고
누워만 계시는 엄마를
지켜만 볼 수 없어
보리밭으로 나갔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파릇파릇한 보리 이삭을
손으로 잡았다.
남의 것을 훔치려니
손이 떨리고 무서웠다.
엄마를 위해
용기를 내어
한아름 뽑아다가
불을
피워 놓고
태워 익혔다.
태운 보리를
내 작은 손가락으로
비벼서
파란
보리알을 골라
하얀 사발에 담았다.
누워
신음(呻吟)만 하시는
엄마 앞에 조심히
사발을 들고 앉았다.
“엄마,
이거라도 드시고
기운(氣運) 내세요.”
엄마는
힘들게 일어나
앉으시더니
내 손을 보시고
사발을 보셨다.
내 손은 까맣게
재가 묻어 있었다.
“어서 나가서
매를 만들어 오너라.”
소나무
가지를 꺾어
매를 만들어 왔다.
“굶어 죽더라도
남의 것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는 거야.”
바지를
걷어 올리고
많이 맞았다.
까칠까칠한
소나무 가지라서
아프기도 많이 아팠다.
“엄마,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도둑질 안 할게요.”
엄마를 위해
했던 일이
도리어
엄마를 슬프게
하고 말았다.
마음까지
아프게 한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려 울었다.
“이대로 들고 가서
밭주인에게
사죄(謝罪)하거라”
사발 속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친구
달봉이네
집으로 갔다.
하얀
사발을 앞에 놓고
마당
가운데 무릎을 꿇었다.
“달봉이 엄마,
용서(容恕)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달봉이 엄마는
깜짝 놀라
달려 나와 물으셨다.
“난대 없이
이 사발은 뭐고,
용서는 무슨 말이냐?” 
보리타작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달봉이 엄마는
나를 일으켜
세우시더니
내 다리부터 보셨다.
내 종아리를 보신
달봉이 엄마는
나를 안고 우셨다.
“이 어린 자식이
무슨 죄야,
가난이 죄지.
너의 엄마도 참~.”
달봉이 엄마는
눈물을 닦으시며
보리알 사발에
쑥개떡을 담아 주셨다.
“엄마 밥은
내가 만들 테니까,
너는
걱정 말고 가서
쑥떡이나 먹거라.”
먼 눈물 이야기로
시작한 나의 인생길~
이 편지(便紙)를
볼 때면
어린 시절(時節)
어머니와의
추억(追憶)에
눈물이 맺힌다.
나는
어머님의
임종(臨終)
소식(消息)을
도쿄에서 들었다.
타국(他國)에 있는
자식을 기다리다
눈을 감으신 것이다.
갚아야 할
은혜(恩惠)가 산 같은데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신 지
어느새
18년이 지났다.
2️⃣ 아들의 편지📚
사랑 하나~
정성 하나~
눈물 하나~
날마다
자식(子息)
나무에 물을 주어
푸른 동산을
가꾸어 주신 어머니
자식의 기쁨을
당신의 기쁨으로
자식의 슬픔도
당신의 슬픔으로
어머니의
발자국 마다마다에는
마를 수 없는
사랑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힘든 농사일에
그토록
지치신 몸으로
자식에게는
곱게 곱게 입혀 주고
싶어서
깊어가는 밤~
그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직
닭도 울지 않은
이른 새벽
도시락을
만들어주시던 어머니
조용한
그 칼도마 소리
정겹게 들려옵니다.
자식을 위한
어머님의 땀방울~
자식을 위한
어머님의 눈물~
은혜의 강이 되어
지금 내 가슴속을
흐르고 있습니다.
제가 그토록
고향(故鄕)이
그리웠던 이유는
그곳에는
어머님이 살아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디서
그 사랑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걸어온 길 뒤돌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뻤던 날들보다
슬펐던 날들이
더 고왔습니다.
산과 들에
뻐꾹새 뜸북새 우는
산 마을 내 고향
그 새파란
보리밭으로
어린
소년 하나가
엄마를 부르며
달려갑니다.
지인이 보내준 글인데
너무 사랑.교훈.감동을
주는 글이라 퍼 나릅니다
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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