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6월20일 모종해서 깻잎을 따먹을 즈음되면 사진처럼
노란 반점이 깨알정도 크기로 번져있어
불쾌해서 먹지못하고 그나마 괞찮은 놈
몇개 따와서 먹을려고 하면 냉장고에 오래보관되서 농한거처럼 시커멓케 변함니다.
참고로 약은 하나도 안 친상태입니다
한수 지도바랍니다
21년 8월 25일
2
Farmmorning
-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 -
오늘날의 60, 70, 80세대들이 살아온 길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들이다!"
글을 읽으면서 아주 먼 이야기 같지만 얼른 머릿속에 생각이 많이나서 저의 생각을(●) 얹어 보았습니다.
참으로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었지만 정(情)만큼은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정으로 풍요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우리는 <호롱불> 세대였다.
90%는 전깃불이 없고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호롱불에 머리카락을 태우기도 했고 속옷에 기생하는 써캐를 태우기도 했다.
자다가 등잔을 발로차서 호롱에 있던 석유가 쏟아져서 석유기름 냄새가 온 방안에 몇날몇일 나기도 했다.
호롱심지를 높게하면 그으름이 생겨서 콧속이 새까매지기도 했다.
석유기름은 한되 두되 이렇게 병이나 양철통으로 담아서 구입했다.
호롱불 대신에 촛불을 키기도 했다.
2. 우리는 <뒷간> 세대였다.
90%는 실내 화장실이 없고, 엄동설한 한겨울에도 뒷 구석 재래식변소에서 볼 일을 봤다.
또 잿간이나 돼지막에 올라가서 생리작용을 해결하기도했다.
●지금같이 보드런 화장지는 없고 신문지나 책을 찢어서 사용했다.
그 중에 제일은 미렁지로 만든 일력자리 달력이었다.
라사점이나 안경점에서 주로 만들었다.
옛날엔 옥수수껍질이나 지푸라기를 비벼서 사용하기도 했다고한다.
측간을 갈 때 무서움을 타는 아이들은 측간 문앞에서 무섭다고 기다리라고했다.
외국인들한테 우리나라를 관광할 때 가장 애로가 뭐였나?를 문체부에서 설문을 받았습니다.
제일 많은 것이 냄새나고 지저분한 화장실 문제였다.
정부에서 즉각 공중화장실과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을 점검하고 감독한 결과 전국 어딜가나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3. 우리는 <우물> 세대였다.
상수도가 없어 동네 공동우물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 항아리에 담아 놓고 마셔야 했다.
●군대에서 철모속에 썼던 화이바로 물바가지를 대신해서 물을 퍼올렸다.
우물가엔 앵두나무와 향나무가 있었는데 제
사를 모실 때 향나무를 잘라 향을 피웠다.
우물은 냉장고 역할도했다.
전기시설이 없었고 냉장고가 없을 때라 열무김치를 담가서 빨간 항아리모양의 프라스틱통에 담아 우물속에 끈으로 묶어서 담갔다가 꺼내 먹었다.
4. 우리는 <가마솥> 세대였다.
98%는 목욕탕이 없어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목욕을 했다.
●설명절에나 돼야 읍내에 나가서 "다이얼"이라는 노오란 비누와 이태리 때수건으로 싹싹문질러 때를 벗겼다.
너무 벗겨서 쓰라리기도했다.
샴푸대신에 늘 빨래비누나 세수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요즘같이 매일 머리를 감는 일은 없었다.
5. 우리는 <손빨래> 세대였다.
100%가 세탁기가 없어 개울에 나가
추운 겨울에도 얼음장을 깨고 빨래를 했다.
●공동우물가나 시냇가에 널찍한 바위에서 빨래방망이로 두들겨서 빨래를 했다.
고무장갑이 없이 겨울철 빨래를 할 때는 손이 얼어서 시리다가 저렸다.
삼베나 광목은 양잿물에 담갔다가 찌든 때를 빼고 빨래를 했다.
 
6. 우리는 <보행/자전거> 세대였다.
95%는 자가용이 없어 대부분은 걷거나
일부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지프차나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부의 상징이었다.
멀리있는 교통이 불편한 학교를 다니는 여학생들도 자전거로 통학을했다.
유독 우리고장 남원여고 학생들은 많은 여학생들이 자전거로 통학을했다.
학교가 시내에서 조금 멀리 있어서 교통편의가 좋지 않았다.
교복은 치마지만 자전거로 통학할 때는 바지를 입고 다녔다.
 
7. 우리는 <고무신> 세대였다.
95%는 구두도 운동화도 없어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타이어표"검정 고무신은 어찌나 질긴지?발바닥쪽이 밀릉밀릉할 때까지 신어야했다.
여름엔 양말을 신지않아서 조금만 걸어도 까만 때꼬장물이 고무신 테두리에 보였다.
교복을 입으면서 얇은 천으로 된 검정운동화를 신게 되었다.
체육시간에 공을 몇차례 차면 운동화 가운데가 동그랗게 벗겨지기도 했다.
교복에 학교를 상징하는 뺏지와 모자에 교포를 달고 다녔다.
8. 우리는 <까까중> 세대였다.
100%가 이발비가 적게 드는 까까중 머리로 다녔다.
●고향 마을에 1년에 나락 한말과 껕보리 한말을 주고 양손 바리깡으로 머리를 빡빡 깍아주시는 어른이 계셨다.
한달 보름정도에 한번씩 이발을 하는데 바리깡에 머리카락이 씹히면 머리는 하늘로 치솟는다.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머리를 하도 감지 않아서 쇠똥같이 때가 낄 때도 있었다.
9. 우리는 <보자기> 세대였다.
98%는책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차고 뛰어 다녔다.
●어깨에 천이 미끄러운 나이론천인 다우다로 만든 책보로 책을 싸서 어깨에 둘러매고 뛰면 할머니께서 합천해인사에 다녀오시면서 선물로 사주신 나무로 된 필통을 사주셨는데 나무필통속에 연필이 얼마나 달그락 거리는지?
다우다천이 미끄러워서 풀리면 책이랑 필통속에 연필이 다 쏟아지기도했다.
양철로 만든 필통도 있었다.
 
10. 우리는 <고무줄> 세대였다.
100%가 장난감이나 놀이기구가 없어서 여자애는 고무줄 넘기하고, 사내애는 말타기 놀이도하고 새총을 만들었다.
●여자애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 면도칼로 고무줄을 자르고 도망치기도 했다.
남자애들은 자치기나 못치기 땅따먹기 등 놀이를 즐겼다.
11. 우리는 <강냉이> 세대였다.
100%가 쌀이나 보리쌀이 없어서 학교에서 주는 강냉이 가루로 강냉이 빵이나 꿀꿀이 죽을 만들어 끼니를 때워야만 했다.
●미국에서 원조식품으로 우유가루를 주었는데 유통과정에서 오래되어 우유가루가 돌뎅이가 되었는데 얼마나 딱딱한지?
우유가루 덩어리를 깨서 먹으면 달작지근하고 맛있었다.
우유덩어리에 삿카린을 조금넣고 끓여서 마실 때 그 맛은 신기루였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강냉이죽을 끓여서 나누어 먹었다.
옥수수가루로 만든 푸석푸석한 옥수수빵도 맛있었다.
 
12. 우리는 <주경야독> 세대였다.
98%가 낮에는 가사일, 농사일 돕기, 풀베기,
나무하기, 소먹이기, 동생돌보기 등을 하고서 밤이 되어야 학교숙제를 했다.
●집집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소를 먹였다.
학교갔다오면 소를 몰고 방천이나 냇가에가서 소에게 풀을 먹였다.
꼴망태를 메고 낫을 숫돌에 날이 서도록 잘 갈아서 깔을 한망태씩 매일 베기도했다.
집집마다 소를 키우기 때문에 소깔도 귀했다.
시내에서 바라구 등 많은 풀을 보면 소깔베는 생각이 나서 아깝다고 생각하곤 했다.
지금도 천변에 수북하게 자란 풀을보면 낫으로 베다가 소를 먹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소를 몰고 가다가 소가 맛있는 콩을 보고 논두렁에 콩잎을 뜯어 먹어 논주인한테 야단을 맞은적도 있었다.
13. 우리는 <주판> 세대였다.
100%가 전자계산기나 컴퓨터는 없고 다섯 알 짜리 주판을 굴리면서 셈을 했다.
급수를 따야 은행 등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
●상업학교에 진학해서 주산급수를 따고 은행에 취업하면 동네잔치를 하기도했다.
은행에 취직을 할려면 2급이상은 따야했다.
주산은 아이들 지능을 키우는데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세계주산대회와 암산대회도 열리곤 했다.
시내에 주산학원도 엄청 많았다.
14. 우리는 <일제고사> 세대였다.
100%가 입학 / 졸업은 물론이고,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교생이 일제히 시험을 치르고 등수를 매겨 경쟁했다.
●일제고사에서 1등을하면 그 집안에 경사가났다.
일제고사 성적으로 등수를 매겼다.
15. 우리는 <입학시험> 세대였다.
100%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본고사 입학시험을 치러 상급학교에 진학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께서 마을회관이나 넓은 집을 빌려서 중학교 진학희망자들을 모아서 중학교입시를 위한 과외를 합숙을 하면서 했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2곳의 남자중학교가 있었는데 경쟁율이 평균 2:1이 넘었었다.
 
16. 우리는 <공돌이 공순이> 세대였다.
하도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하면 식모살이 아니면 구로공단 같은 공장에서 공돌이 공순이 버스차장을 하면서 땀 흘려 일을 하고 야간에는 교복입고 야간학교에 등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지게를 맞췄고 그 지게지기가 싫으면 검정고무신을 신고 야간 완행열차타고 서울로 올라가 요꼬공장 등에 취직을했다.
여자아이들은 지금은 도우미라고 하는데 부잣집에 들어가서 식모살이를 하기도했다.
추석과 설명절에 새옷에 새구두에 폼을 잔뜩내고 고향을 찾아와서 시건방을 떨고 다니고기도했다.
17. 우리는 <삯 월세> 세대였다.
80%가 신혼 살림집을 구할 돈이 없어 거의 모두가 사글세 단칸방부터 시작하여 전세로 옮겨 다녀야만 했다.
●처음엔 사글세방으로 시작해서 전세로 옮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단칸방이나 미닫이로 가운데를 막은 이간장방을 얻어서 살림을 시작했다.
 
18. 우리는 <월남전> 세대였다.
나라가 빈곤하여 목숨걸고 전쟁터에서 돈을 벌어 와야만 했다.
●지금은 비행기로 3시간 남짓이면 가는 베트남인데 부산항에서 배로 보름이 걸렸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갔던 파월장병님들께 많은 감사를 드립니다.
윌남전에 다녀온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도했다.
 19. 우리는 <광부. 간호사> 세대였다.
최 빈곤국으로 독일에 가서 석탄 광부와 시체 닦는 일로 돈을 벌어 와야 했다.
그나마 고졸이상 경쟁이 치열했다.
평균 5:1이었다.
●서독에서 1,000미터 넘는 깊은 땅굴에 들어가 석탄을 캐고 서독의 병원에서 요양원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를 돌보고 대 소변을 치우고 시체를 닦고 염을 하면서 외화를 벌어들이고, 노무자를 담보로 차관을 얻어와
공장을 지으며 산업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이 진정한 애국자로 인정받고 국가보훈 자격을 드렸으면 한다.
이분들 때문에 독일에서 차관을 했고 경제개발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쥐나 개나 엉터리 국가유공자들이 많이 있는데 진정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충분한 국가유공자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20. 우리는 <중동 노동자> 세대였다.
열사의 나라 중동지역에서 가족과 자식을 위해 돈을 벌었다.
우리가 피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건재하고 있지 않는가?
●뜨거운 사막에가 건설현장에서 많은 돈을 벌어 가정의 경제는 물론이고 국가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국내에서 건설일을 하는 사람보다 몇곱은 더 임금을 받았던 것 같다.
 
젊은이들이 우리를 "꼰대"라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꼰대"이다.
우리 중에는 지금도 재활용 폐품을 줍는 부모도 계신다.
작은 리어카에 폐지를 주어 폐지값이 헐값이라 몇푼밖에 받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과 가족을 위해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일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가난하고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와 열심히 캥거루 세대를 키워낸 죄밖에 없는 샌드위치 세대 들일 뿐이다.
곳곳에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네요.
요즘 곳곳에 화재가 많습니다.
재산피해도 이제는 그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날씨가 늦게까지 더위가 있더니 갑작스럽게 차가워졌습니다.
올해 독감이 유행일거라는 중대본부의 예상이니 독감예방접종을 하셔서 독감에 걸리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10월 25일
9
13
♡ 행복한 사람
엄상익 변호사가 올린 글입니다.
읽다가 가슴에 닿아서 올려드립니다.
요즈음은 이따금씩 세상을 힘겹게 건너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상을 통해 본다.
새벽 1시반에 지하철역을 청소하는 60대쯤의 여성이 보인다.
플랫폼 벽 아래 의자 주위에 떨어진 쓰레기들을 빗자루로 쓸어내어 쓰레받기에 담는다.
수세식 변기를 세제로 닦고 반들반들하게 윤을 낸다.
저런 여성들의 수고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악취 없고 깨끗한 지하철역이 되는구나를 알았다.
노조가 파업할 동안 파리의 지하철역에 진동하는 지린내를 맡아본 적이 있다.
낙서가 가득하고 더러운 뉴욕의 지하철을 탄 적도 있다.
화면 속의 그녀는 밤일이 끝난 후 혼자 사는 단칸 지하방으로 돌아가 밥을 먹는다.
잠시 후 그녀가 다른 일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화점의 종이 쇼핑백들이 방바닥에 가득 쌓여있다.
그녀는 종이 쇼핑백에 플라스틱 손잡이를 끼우고 있다.
한 장 끼우는데 10원, 몇시간을 일하면 8000원을 번다고 했다.
그외에도 그녀는 공공근로나 일거리만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다 하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그녀가 방에 앉아 슬퍼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제 번 돈으로 오늘을 살고 생존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그걸 보면서 가슴이 찡하고 내가 편하게 사는 게 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변호사를 40년 하다 보니까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보았다.
소아마비로 어려서부터 다리가 불편한 여자 판사가 있었다.
명문 여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고시에 일찍 합격하고 판사가 되었다.
그녀가 있는 판사실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녀는 내게 다음 번 세상에는 청소부가 되더라도 매춘부가 되더라도 정상적으로 걸을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그 말의 진정성이 내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천만명의 기독교 신도들이 애창하는 찬송시를 지은 여성 시인을 여러번 만났다.
심한 뇌성마비로 그녀의 몸은 작동기능을 거의 잃었다.
물체같이 굳어버린 몸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두 손가락과 높은 아이큐의 두뇌뿐인 것 같다. 혼자서는 무엇도 할 수 없다.
이따금씩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그녀에게 가서 목욕시켜주는 봉사를 하는 여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목욕을 시켜 주고 돌아갈 때 혼자 몸을 닦을 수 있는 것만도 행복이라고 느꼈어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뇌성마비의 그녀는 유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카톡을 통해 내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변호사님 한번 입을 테이프로 막고 손발을 꽁꽁 묵고 사람들 사이에 쳐 박혀 있어보세요. 그게 60년 넘은 일생을 지내온 제 상태랍니다.’
나는 그 머리 좋은 찬송 시인이 다리를 절더라도 혼자 일어나 걸을 수 있다면, 혼자 목욕을 하고 밥을 먹을 수 있다면, 분명 행복해 할 것 같았다.
나는 가난하고 험한 삶의 밑바닥에서 맑은 샘물같은 행복을 퍼 올린 사람을 보기도 했다.
노동자 출신 시인인 그는 폐암 말기였다.
달동네 꼭대기 어두컴컴한 임대아파트 방에 혼자 누워 있는 그를 찾아갔다.
세상의 고난은 모두 그를 찾아와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난과 고독, 병과 늙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의 마지막 파도에 그는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같은 죽어가는 환자가 하루종일 누워있을 수 있는 방이 있다는 게 감사해요.
이웃의 중학교에서 급식에 남은 누룽지를 가져다줘요.
성당에서 나물 반찬을 가져다 냉장고에 넣어줘요.
목욕 봉사를 하는 분이 더러 와서 몸을 씻겨줍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투명한 이슬이 맺힌 호박꽃이 보입니다.
누가 호박꽃을 밉다고 표현하나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저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시인은 내가 만난 후 죽을 때까지 몇 달 동안도 매트리스 아래 공책과 연필을 놓고 시를 쓰다가 죽었다.
그는 내가 그의 마지막 시집을 내줬으면 하는 것 같았다.
어젯밤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환한 달빛 띠가 펼쳐진 번들거리는 밤바다를 보았다.
하늘에는 총총한 별들이 떠있었다.
멀리서 색색으로 반짝이는 보석같은 부둣가의 불빛들이 검은 바다 위에서 물결쳤다.
걸으면서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하루하루에서 작은 성취와 기쁨을 발견해 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번 폴라산이 많은 비를 뿌리고 물러난 뒤 하늘에 가을이 왔습니다.
새벽엔 홑이불을 끓여당기게 되더군요.
엄상익 변호사의 글을 읽고 제가 본 한사람이 생각납니다.
제가 안과를 많이 이용하는데 그 병원에 청소를 하시는 아주머니 한분 이야기입니다.
병원이 개원한지가 40년이 넘어서 이제는 호남에서 규묘가 제법 큰 안과병원이 되었습니다.
안과 종합병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이 병원에서 개인병원으로 개원하면서부터 지금까지도 병원 청소를 하시고 계십니다.
지금은 7층의 건물이라 여러명이 나누어서 하십니다.
제가 자주 다니는 병원이라 인사를하고 지냈습니다.
올해 73살이고 저와는 동갑이더군요.
30대부터 병원 청소를 하기 시작했더군요.
슬하에 2남1녀가 두었습니다.
삼남매를 다 서울대학교를 보냈답니다.
큰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세종시에서 부부가 같이 근무를 하고,
둘째는 광주에서 부부가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딸은 시내 종합병원에서 과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흔히 자식들 잘 키웠으니까 이젠 일을 그만 둬도 되지않느냐?라고 말한답니다.
지금이니까 탕비실도 있고 휴계실이 있지만 옛날에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 입고 창고 같은 한쪽 청소용품을 모아둔 구석진 곳에서 점심도시락을 먹었지 않았을까요?
또 지금이야 자식들 다 잘키웠고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지만 30대 젊은 새댁 꽃다운 나이에 얼마나 힘들고 무시당하고 애로사항이 많았을까요?
그 때는 자식들 키우느라 어쩔 수 없이 일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핸드폰을 옛날 폴더을 쓰고 계시더군요.
또 얼마나 성실하시게 일을 하셨으면 지금까지 한곳에서 일을 하고 있을까요?
이런 경우를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자식들 삼남매를 서울대학에 보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제가 그랬습니다.
이제 그만하셔도 되지않느냐?
자식들이 제발 일좀 그만 하시라고 한답니다.
지금은 100명이 넘은 직원들이 실장님으로 불리더군요.
웃으시면서 "놀면 뭐하느냐?"하시더군요.
긴글 읽으시느라 애쓰셨습니다.
군산 아버지한테와서 아침 드시고 주무시는 아버지옆에서 끄적거려봅니다.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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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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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3일
즉 5년 전 카카오 스토리 에
써놨던 글 되세겨봅니다.
♡영원불변 어머니 모습♡
난 여기 사진 속 오이(물외)와
가지를 보면 아련한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초등 방학 때 어머니 께서
콩밭.명(목화) 밭에서 풀메기 하시면
반나절 시간쯤 시암 (우물)에서
주전자에 물 떠서 들고 갔다 드리면
오랜 목마름 얼마나 참으셨는지
한 사발 남짓 될 정도 물 꿀떡꿀떡
목 넘김 소리 들리게 드신 모습
볼 수 있었네요.
그렇게 밭에 가면
밭두렁(밭 가상)에 심어진
넝쿨 여기저기 달려있는
물외 하나 따서 치마 자락에
쓱쓱 닦아서 먹으라며 주시는데
돌이 켜보면 풀메는 중 흙먼지
치마 자락에 묻어 있을 터이지만
그런 건 아랑곳없이
자식 먹일 거라서 그렇게
닦아 주신 것이었네요.
또한 이른 아침 동틀무렵
밭에 나가셔서 풀 메시고
아침밥 시간에 맞춰 돌아오시면
치마 자락은 풀잎 이슬에 젖어있고
겨드랑에 껴있는 대바구니 속에
식구들 반찬으로 해 먹을
구부러진 보라색 가지와
물외가 몇 개씩 들어있었던 것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데
요즘이라면 재초제 뿌려서
그토록 풀메는 일 덜할거고
냉동실에 물 얼려놓아  아이스박스에
가져가시면 시원한 물 마실 수 있으련만
그 시절 나 살던 시골마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으니
냉장고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네요.
한편 오전에 밭일 끝내고
집에 들어 오시면 더위 잠깐이라도
잊으시려고 집 앞으로 흐르는
또랑(개울)에서 물 한 바케스 퍼와
학독 옆에서 등목 하실 때
한 바가지 떠서 허리부터
목 부분까지 부어드리고 나면
 아 시원하다 말씀하셨고
젖은 몸 수건으로 닦으실 때
눈에 띄는 어머니 젖가슴은
가뭄에 메마름처럼
작고 쭈글거림 모습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1960년대
참 어려웠던 농촌생활
어머니 50대 후반 연세였지만
7남매 자식들 젖 물려 키우시며
먹을 음식 눈앞에 있어도
자식들 입에 넣어주는 일
먼저였으니 어찌 아니랴...
이미 50여 년에 세월이 흘러
어머니께서 세상 떠나신 지
25년이 지났고 내 나이 60대
초반이지만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어머니 모습 내 마음속에
영원불변으로 남아있네요.
23년 8월 13일
10
31
Farmmorning
텃밭에 있는 가지.고추.토마토 호박 .고구마 이렇게 있거든요. 장마때 텃밭에 배수가 않되면서 몇그루 탄저도 왔고 많이 썩고 떨어져서 유기농 뽀빠이 타서 살포뒤 살충제 사진참조 표대로 살포해서 살아난것들 냉장고에 3봉지 나와서 저장했고 친정2봉지 보내드렸어요. 텃밭이 저희것두 아니고 몇그루 않심었는데도 병해충많이 없이 잘따서 현재는 붉은고추 좋은거 건조망에 해뒀습니다.
참고로 양파.감자 이건 시골집서 잘되서 먹고있고요.양배추.깻잎.대파.오이.호박.벼
잘이용하는 살충제와 유기농 뽀빠이 입니다.팜모닝에서 상탄 영양제도 쓰고요.
제초제는 전번 사진에 보낸 일등 된 거 쓰고 있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23년 8월 3일
Farmmorning
저희 큰애네는 아들만 둘입니다.
손주만 둘인 셈이지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11살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6살배기입니다.
그 중에 둘째를 아내가 많이 이뻐합니다.
즈네 할머니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작은 손주한테 다섯번째로 당첨된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둘째 손주가 전화를 하는 도중에 즈네 할머니를 여섯번째라고 하더군요.
할머니가 "그럼 할머니 삐진다 "그랬더니
곧바로 "그럼. 다섯번째로 할까요?"하더군요.
그 와중에 할아버지인 저는 다섯번째였나 봅니다.
즈네 할머니가 만들어준 멸치조림을 먹으면서 "칼슘이 많아서 뼈에 좋다"라고 하면서 맛있게 먹던 손주녀석이 즈네 할머니를 여섯번째로 좋아한다니 즈네 할머니가 조금은 서운해 할법도 하지요.
그저 손주들이라면 있는것 없는 것 다해주고 싶은 할머니들 마음 아닌가요?
이번 추석명절 연휴 때 "네번째"로 등급을 올려야겠는데
어떻게 해야할까?
우스갯 소리로 고민을 합니다.
며느리가 돈이 더럽다고 돈 만졌던 손을 씻으라고 했나봅니다.
그 뒤로는 돈을 만지고는 꼭 손을 씻는답니다.
용돈을 주면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받습니다.
그러고는 물티슈를 달래더니 돈을 집은 손가락을 딱더군요.
한번은 용돈을 주었더니 화장지로 싸서 달라고 하더군요.
멸치도 즈네 엄마가 칼슘이 많아서 뼈에 좋다고 했더니 멸치를 먹으면서 뼈에 좋은 거니까 많이 먹어야한다고 하더랍니다.
생선을 많이 먹어야 영리하다고 했나봅니다.
싫어하는 갈치를 발라서 숫가락에 얹어주었더니 "저는 영리하니까 생선을 안 먹어도 된다"라면서 먹질 않더군요.
요즘 아이들 너무 빠르게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온 갖 미디어가 주변에 많이 있어서 접할 기회가 많아서 그럴까요?
아님 천재라서 그럴까요?
일단 묵은 곱창김이 한톳 있어서 때는 아니지만 김부각을 만들었습니다.
찹쌀죽을 끓이고 갈아서 육수로 맛을 내고 농사지은 참깨를 볶아 꽃모양을 내면서 듬뿍넣어서 김부각을 만들었습니다.
때아닌 김부각이라 식품건조기에 말렸습니다.
예전엔 봄에 김부각을 만들 때는 옥상에 올라가서 와상에서 만들어 깨끗한 망에 말리면 한두시간이면 마르거든요.
커다란 망에 한톳을 다 만들었습니다.
식품건조기에는 김이 네장씩 밖에 안들어가서 네번에 나누어서 만들었습니다.
매년 김부각을 만들어서 보냈는데 올 봄에는 어찌하다가 만들지 못했거든요.
손주들이 과자같이 김부각을 좋아합니다.
이번 추석명절 연휴에 집으로 바로 내려오지말고 남원으로 내려가서 놀다가 오라고 했습니다.
좁은 저희 집에서 며칠을 보내면 저희도 번거롭고 정신이 없거든요.
저는 더위를 많이 타서 가장 편한 거의 속옷으로 생활하는데 아무리 가깝게 지낸 며느리지만 조금은 불편하더군요.
그래서 남원으로 바로내려가서 며칠 쉬었다가 추석전날 오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남원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추석전까지 3일동안 아이들이랑 여수가서 바다도 구경하고 해상케이블카도 타보고 남해안도 돌아오고 지리산 둘레길도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연휴라고 어디 콘도나 펜션에 들어가면 경비가 많이 들지않습니까?요
콘도나 펜션에 들어가는 경비대신에 남원에서 보내면서 먹고싶은거 사먹으면서 놀다오라고 했습니다.
오늘 남원에 잠시 다녀올려고 합니다.
집이 비어 있으니까 밤에 도착하면 심란하잖아요?
그래서 청소도 간단하게 해주고
큰애네 먹을 밑반찬도 조금 준비해서 냉장고에 넣고 올려고요.
또 고구마를 5월 5일에 심었으니까 120일이 지나서 고구마를 캘 때가 되었거든요.
고구마도 조금 캐서 차례상에 어머니께서 농사지으신 고구마를 항상 올려서 저희도 고구마를 캐서 올릴려고 합니다.
마당에 주렁주렁 달린 토종 대추도 한웅큼 따와야하고요.
지난 일요일에 벌초를 마치고 씻는데 목욕탕에 기어다니는 벌레가 들어왔더군요.
아마 옆 창고에서 기어들어왔나 봅니다.
그래서 보일러실이나 창고 같은 곳에 조금씩 뿌리면 기어다니는 벌레는 전혀 나타나지않는 벌레를 퇴치하는 약이 있어서 습지고 어둑한 곳에 살짝 뿌릴려고 합니다.
통게피를 25도 이상도수가 있는 소주에 담가놓아서 며칠두면 약간 주황색으로 우러납니다.
우러난 소주를 망에 걸러서 스프레이에 담아서 뿌리면 향긋한 게피향과 소주의 알콜향이 싫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천연 모기기피제입니다.
들에서 일하실 때 몸에 뿌리면 모기가 달라들지 않습니다.
조금씩 키우는 상추나 텃밭에 작물에도 뿌리면 진딧물도 없습니다.
대신에 하얀색의 옷에는 게피우린 소주가 옷에 자욱을 남길 수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과 캠핑하실 때 한병 준비해가시면 요긴하게 쓸 수가 있습니다.
조금씩 키우는 상추나 집안 화분에 뿌리면 진딧물이 사라집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슈퍼킬 200"이라는 해충소독제가 있습니다.
바뀌벌레, 돈벌레, 지네, 민달팽이 등 기어다니는 벌레는 한번 뿌려주면 나타나질 않습니다.
습진 곳이나 어두운 창고, 지하실, 다용도실, 보일러실, 주방 씽크대 등에 스프레이를 살짝만 뿌려도 기어다니는 벌레는 접근을 못합니다.
깨끗한 아파트는 필요없겠지만 단독주택이나 한옥, 보일러실, 컨테이너박스, 시골에서는 가정상비약으로 하나쯤 준비해 놓으셔도 좋을 듯 합니다.
습진곳이나 어둑한 곳에는 바뀌벌레나 다리가 여러개달린 돈벌레, 시골에는 지네도 있기도 하거든요.
한병 사 두시고 이런 벌레가 보이면 몇번 뿌리시면 없어지거든요.
인터넷에서 구입을 하시면 됩니다.
15,000원대의 정도의 가격일 겁니다.
철물점에서 판매하는 곳도 있기도 합니다.
전주는 진북동 천변에 있는 일오삼철물점에서 판매하더군요.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을 온 가족과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오랫만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빈가요?
여느날 아침보다 기분이 좋은 아침입니다.
김장용 배추나 무, 밭작물한테는 용든 보약 한첩같은 보약이겠지요!
염려했던 13호 태풍 버빙카도 중국으로 진로가 예정된다는 소식도 반갑네요.
이번 추석에 손주한테 한등급씩 올려보겠습니다.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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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