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나무가 꽃도 피고 열매도 많이 열었었어요.
어느날 보니 흰가루들이 붙어 있었고 왠지 잎이 햇볕에 빛을 발사, 번들번들해서 농협약제상에 가서 상담하고 약 사와서 살포했어요.
그리고 잊어버린 어느날 발견, 사진처럼 돼버렸습니다.
복숭아 나무 자체가 죽는 것일까요? 그러면 안되는데요...무슨 방도 없을까요?
여러 고수 선생님들 대안을 제시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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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돌산읍에 사과 나무를 몇구루 심어서 사과 열매가 반점이 많이 생겨요~~~^~^
조언을 부탁합니다.
조언을 부탁합니다.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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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입니다
거실문을 활짝열고 밖을 보니 함박눈이 펄펄내리며 환히 새해를 방깁니다
진정, 설날 아침이 화이트 雪로 그림을 그려놨습니다
금년 농사는 大豊임을 알리는 듯합니다
온 국민이ㅡ 전 농가가ㅡ모든 농민들이
한해 풍요로운 삶이 되길 기원합니다 🙏
홍천. 화촌면 황소뱃속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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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나무 파종 일지
01월 20일ㅡ21일 1차파종
01월 30일 싹튀움 1차 잘룩병약 방제 방제약 안타
02월 05일 2차 잘룩병약 방제
방제약 속시원 (비가와서 6일째 방제함)
삽목트레이당 약 70ㅡ130주 싹틈
하우스 온도/습도
낮20/70 밤20/65
선방제 해서 그런지 아직은 병온것없이 잘크고있습니다. 환풍기 1대 내부순환펜1대 서쿨레이터 2대 가동해서
10평 비닐하우스 전체 공기순환 시키고있습니다.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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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예쁜 마을입니다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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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살포한 과수화상병 약 이.....
미국의 자문을 구한 국내회사 가 만든 것이라 일반 농약 살포 방법 과 달라서 처음 살포 할때 난감하더라....
(물약이 병이나 봉지가 아닌 팩 에 포장되었어다 스피드 스프레이 에 약을 조제해서 넣기 전에 평평한 돌바닥에 두고 물렁해질때까지 주무르 라고 하더라)
(그리고 약이 얼마나 독하던지 모두들 방제복 복장 잘차려 입고 살포 하세요.
저 어제 잠깐 그농약 들이 마셨는데 오늘 숨쉬기 가 조금 불편 하네요....)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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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2 -
새벽녘이면 어머니께선 잠자리에서 식구들 행여나 깰까봐 살며시 나가시는데 정제문을 여는 "삐그덕"소리가 들린다.
소나무 두꺼운 송판으로 만들어서 부억을 드나들 때 양쪽으로 여닫는 부엌문을 정제문(정지문)이라 했다.
옛날 안방에는 아랫묵에 이불을 걸 수 있는 횃대와 겨우내 간식으로 먹을 수 있는 고구마를 얼지 않게 웃묵 한쪽에 놓여 있었다.
이불은 청색 광목으로 홑청을 한 두꺼운 솜이불이었다.
새벽이면 식어가는 구들장 때문에 싸늘해지니까 서로 따뜻하게 덮을려고 이불을 잡아당기기도했다.
저희집만해도 할머니와 부모님과 저희 6남매가 안방에서 같이 생활했으니 얼마나 비좁았을까요?
집이 좁아 벽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랫묵 벽쪽에 긴 대나무 앙쪽 끝에 끈을 매어 벽에 달아매어 놓고 옷을 걸거나 이불을 걸게 한 막대기를 횃대라고했다.
가을에 캔 고구마는 지푸라기로 짠 가마니나 멱다리, 수수깡으로 엮은 망에 고구마를 담아서 웃묵에 놓고 아침에 일어나서 물빠진 생고구마를 깍아 먹는 맛과 밥 할 때 껍질째 찐 노란고구마 맛은 그 당시 최애의 간식이었다.
고구마는 얼지않고 움직이지 않아야 썩지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아침부터 부억에 나가 아궁이에 솔잎 불쏘시개를 넣고 불을 지피셨다.
그러다 연탄아궁이에서 석유곤로가 등장했고 지금은 씽크대와 가스렌지 가스가 등장했는데 가스가 인체에 해롭다고해서 인덕션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담배를 피지않는 주부들이 페암에 걸린 이유중에 부엌 가스렌지 사용이 일부라고 한다.
부엌에는 살강이 있었다.
살강은 그릇 같은 것을 얹어 놓기 위하여 부엌의 벽 중턱에 대나무를 쪼개서 가로 드린 선반이나 시렁을 말한다.
여기에 온갖 그릇과 부엌 살림을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살강 밑에는 커다란 통나무를 네다리를 만들어서 올려놓고 가운데 옴폭하게 파낸 구시가 있었다.
양쪽은 도마역할을 하고 가운데는 그릇을 씻는 씽크대역할을 했다.
부엌에는 커다란 가마솥과 중간 솥이 걸쳐있고 솥뚜껑은 늘 기름칠을해서 반질반질했다.
새벽녘에 일어나시면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그 차디찬 물에 세수를 하시고 부엌에 있는 조왕단지에 정한수를 떠놓으시고 두손을 모아 조왕신께 식구들 안녕과 건강을 비셨습니다.
조왕신(竈王神)은 부엌을 맡은 신(神)으로 불의 신이라고믿었다.
명절에 차례를 지내거나 집안이 평안하기를기원하는 굿을 할 때 성주신에게 빌듯이 조왕신에게도 조왕상을 차려 놓고 집안이 잘되도록 해달라고 빌며 절을 하였고 새벽에
부뚜막 위에 깨끗한 물을 떠 놓고 집안의 무사함을 빌기도 하였다.
조왕신은 부엌에 머물러 있는 가신으로 조왕대신, 부뚜막신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는 신이다.
조왕신 본질이 화신(火神)이기 때문에 부엌에서 존재하게 되었으며 먼 옛날부터 부녀자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부엌을 관리한다는 신이다.
그래서 부녀자들은 몸가짐을 단정하게하고 부엌을 깨끗하게 했다.
이때 샘물그릇을 조왕주발 목판에 차린 상을 조왕상이라고 하는데 주부들은 정성을 들이는 마음으로 이 조왕신에게도 가운(家運)이 창성(昌盛)하기를 두손모아 빌며 절을 해야 한다.
논에 나락이 주인이 열번 왔다간 나락과 한번 왔다간 나락은 다르다고한다.
모든 농작물은 주인 발자욱 소리에 깨어난다고해서 부지런한 농부가 풍작을 한다는 뜻으로 알려지고 있다.
곧 부지런함을 강조하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깊게 되새길 수 있는 말이다.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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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허리가 잘록병이왔어요.
홍산마늘 인력들로 쫑대를 땄지만,
후에 나온것과 놓친것들을 재차 삼차
돌면서 따다보니
허리가 내거가 아닙니다.
오후에 비예보에
부랴부랴 휴립기로 두둑 만들면서
바로 서리태 파종을 미리합니다.
손바닥과 발꼬락은 괴저괭이병이 와서
딱딱하구요.
얼굴은 깜부기병 와서 아프리카출신으로 오해받겠어요.
종합방제약이 필요해요.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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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Farmmorning
고추가 물러지면서 떨어지네요.어떤 병해가온건지,방제약은 어떤걸 사용해야하는지 궁금합니다.당장 농약방에가야겠어요.
23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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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숲모이라_#임업후계자되자
토지를 #임대해서임업후계자가 되는것이 싶지는 않다.
하지만 할수없는 일은 아니다.
도전해서 #꿈을 이루려는 교육생들의 모습이 훌륭하기만하다
.
#임업후계자신청 서류작성부터
임업경영체를 등록 신청하고 임야에 잔가지치기 기계톱 전문가도 소개해주고 명이나물 모종을 사서 식재방방법을 알려주고 식재 달인 인력들도 일정을 잡아주면서 모든것이 전문적 조력이 없인 임업후계자선정받기가 힘들다는걸 느낀다.
10여년을 나와함께했던 현장 작업 인력들을 소개해서 지시해서 작업을
마치고 나니 노곤함이 기쁨으로 피로가 가신다.
어제 식재를 마치고 #임업후계자 서류만 신청하면 된다.
벌써 수십명의 교육생이 임업후계자에 선정되었다.
교육을 시키고 임업인의 꿈을 이루는 행보를 함께하는 #모이라임업후계자양성교육센터화이팅하자^^
#양재순#임업후계자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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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우리들 이야기= 다섯
조선 영조 때 이사관
서울 정동에 고려 말 충신 이색의 14대손 이사관(1705~1776)이 살고 있었다.
승정원 동부승지 벼슬을 하다 물러나 한가한 생활을 하던 그는 급한 볼일이 생겨 고향인 충청도 한산에 가게 되었다.
갑자기 몰아치는 눈보라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예산 근처에 이르렀을 때는 유난히 기온이 떨어져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눈을 헤치며 걸음을 재촉하던 이사관이 어느 산모퉁이를 돌다보니
다 헤진 갓에 입성마저 추레한 한 선비가 쩔쩔매며 서있고 그 옆에는 부인인 듯한 젊은 여인이 무언가를 끌어안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사관이 다가가 보니 놀랍게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사관이 “뉘신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시오?”
라고 물으니
추레한 선비가 안절부절하며 
“아내가 해산일이 가까워 처가에 데리고 가려고 나섰는데 그만 여기서 몸을 풀었지 뭡니까.
이런 날씨에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고
이 험한 날씨에 산모와 어린 것이 생명을 부지할지 모르겠구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한다.
이사관은
“아이구! 저런! 큰일이구려!” 라고 한 뒤 자신이 입고 있던 값비싼 양털 가죽옷을 벗어 아기와 산모에게 덮어주고 선비를 재촉하며 마을을 찾아 나섰다.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급한대로
방 한칸을 빌리고 집주인에게 두둑히 돈을 주고 산모의 방에 군불을 뜨겁게 지피도록 하고 미역국을 끓여 산모의 허기를 면하도록 해주었다.
가난한 선비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며 이사관의 손을 잡고 
“노형께서 도와 주시지 않았다면 아내와 어린 것이 큰일을 당할 뻔 했습니다.
이 큰 은혜를 어떻게 갚아 드려야 할지모르겠습니다.” 라고 한다. 
“남의 곤경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아무쪼록 가시는데 까지 무사히 가시구료.” 
이사관이 길을 떠나려 하자 한사코 이름을 묻는다.
“정동에 사는 이사관이라고 하오.”
이후 이사관은 이 일을 잊어버렸지만 가난한 선비는 가슴속 깊이 이사관 이름을 새겨 넣었다.
가난한 선비는 몰락한 양반가 자손 충청도 면천의 생원 김한구(1723~1769)였다. 
그로부터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한구는 여전히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난에 견디다 못해 먼 친척 아저씨뻘 되는 당시의 세도 재상인 김흥경에게 의지하려 길을 나섰다.
김흥경은 친척 조카뻘 되는 김한구를 딱하게 여겨 이따금 쌀가마니 정도를 도와주곤 해서 겨우 연명하며
서울 생활을 견딜수 있었고
가끔 아저씨 사랑방을 찾아가 놀다 오곤 했다. 
마침 김흥경의 생일날 이 집의 사랑방에는 찾아온 축하객들이 아침부터 북적였다.
대부분 높은 벼슬아치거나 신분이 쟁쟁한 사람들이었는데
그 속에 김한구도 한쪽 구석에 여전히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는 관상을 잘 보는 것으로 장안에 유명한 문객도 섞여 있었는데 문득 주인대감 김흥경이 심심 파적으로 
“여보게 음식이 들어올 때까지 여기 계신 대감들의 신수나 보아 드리게."
라고 했다.
문객이 이사람 저사람 관상을 보아주었을 때 김흥경이 웃으며 말했다.
“여보게 저기 윗목에 앉아있는 김생원은 내 조카뻘되는 사람인데 언제쯤이나 사는 형편이 나아질지 보아 주게나.”
그 말을 들은 문객은 김한구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큰절을 하고 말했다.
“생원님의 고생은 이제 다 끝났습니다.
오늘부터 좋은 일이 시작되어 불과 10여일 안으로 대단한 벼슬 운이 트일겁니다.”
이 말을 들은 방안의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사람 팔자는 모른다는 말이 있지만 기적이 생기지 않는 한 가난의 때가 쪼르르 흐르는 보잘 것 없는 궁짜 낀 선비가 열흘 안에 높은 벼슬을 받게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때는 나라에서 과거를 보는 시기도 아니며 설사 과거에 갑자기 급제한다 해도 미관말직에서 벼슬이 시작되는 것이지 높은 지위를 부여받는 길은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조롱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문객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지금은 모두들 웃으시지만 며칠만 두고 보십시오.
여러 대감님들도 생원님께 절을 올려야 하는 처지가 되실 겁니다.”
나중에 문객이 한 이 말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때문에 가벼운 농담 정도로 생각하던 대신들이 웃음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는데
주인대감 김흥경이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고 마침 잔칫상이 들어오는 바람에 분위기가 겨우 수습되었지만 당사자인 김한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음식도 못 얻어먹고 황급히 자리를 떠야 했다.
자기 때문에 분위기가 망쳐질 뻔했기 때문이다.
“에이 참! 오늘 재수가 없으려니
그 점쟁이가 미쳤나?
왜 그런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해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나?
오랜만에 주린 뱃속에 고기구경좀 시켜주려 했더니 그놈 때문에
다 그르치고 말았네!”
투덜거리며 집에 돌아와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년 들어 열여섯 살인 딸이 왕비 간택의 대상으로 뽑혀 대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아이가 지난날 눈이 쏟아지던 길바닥에서 태어나 이사관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그아기였다.
아이가 용모가 뛰어나고 총명했기에 은근히 부잣집에 시집보내 그 덕을 좀 보려는 욕심도 있던 김한구였다. 
당시 영조는 이미 예순 다섯 이었으나 정정했고 늘그막에 중전인 정성황후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나라의 법도상 국모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 영조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간택령을 내리게
된 것이었고,
가난하지만 뼈대있는 가문이었던 김한구의 딸도 후보자 중 한명이 되었던 것이었다. 
간택일이 되자 백 여명의 후보 규수들이 대궐로 모였고 영조가 친히 접견하여 그 중 1명을 선택 하였다.
김한구의 딸의 미모에 혹한 영조가 그녀의 사주단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는 
“면천 태생인 김선비의 여식이라
애비는 김한구, 본관은 경주, 조상은 효종 때 바른 말 잘하기로 소문난 유명한 김흥욱이란 말이지?
흠! 이만하면 문벌도 괜찮구나!”
결국 간택을 받게 되었다. 
김한구는 문객의 예언대로 정일품 보국승록대부 오흥부원군의 작위를 받았고 신분이 하늘처럼 높아져 금위대장 병부까지 하게 되었으며 아들과 아우까지 벼슬을 얻었다.
오두막살이에서 1백여 칸의 고래 등 같은 집으로 옮겨 살게 되고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게 어려운 생활에서 초호화판 생활로 갑자기 바뀌었다.
문객의 말이 제대로 맞은 것이다. 
김한구는 잊지 않고 딸에게 청을 넣어 은인인 이사관은 호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영조 48년(1772년)에 우의정에 이어서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옛날 베푼 은혜가 큰 복이 되어 돌아온 셈이요,
김한구는 은인에게 제대로 된 보은을 하게 된 셈이었다. 
이래서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있는 듯하다. 
오늘날의 세상은 자기 배만 부르면 남이 어떠하든 관심없고
친척과 이웃과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 삭막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하늘이알고 세상이 아는법.
복을받는 사람은 넉넉한
마음으로 친척과 이웃을 잘 대접하는 사람인 것이 하늘의 이치 아니겠는가?
https://youtu.be/Hl44Q8IAa9U?si=g3U61QN9Ji1uh8Nz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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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에 고리니 멧돼지 가 많아서 임시로 해둔 과라니망에 고라니가 3마리나 죽엇네요 정부지원사업 울타리망신청은했는데 당첨이 델련지 야생동물때문에 농사도 못지어요 밤나무 새순도 다 따먹고 나무들을 키울수가없고 고구마 땅콩등등 속에 천불이 나네요 그래도 그물에 걸려 죽은 고라니 보니 괜히 마음만 아프고
4월 30일
14
12
Farmmor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