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팜모닝입니다.
요즘 쌀값이 게속 상승하고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쌀을 잘 재배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벼에 주로 발생하는 주요 해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벼멸구, 흰등멸구, 애멸구
● 끝동매미충
● 벼잎물가파리
● 이화명나방, 혹명나방, 멸강나방, 줄점팔랑나비
● 벼물바구미
● 벼잎선충
● 가시점둥글노린재, 혹다리긴노린재, 먹노린재
1. 벼멸구는 6월부터 7월까지 주로 발생하며 이동성이 낮습니다. 1차 방제 적기는 7월말부터 8월초 인데 1차 방제를 적기에 진행해야 방제효과가 큽니다.
2. 흰등멸구는 7월말부터 8월초에 그 밀도가 가장 높고 발생 시작 시기부터 방제를 진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벼남방검은줄오갈병을 매개하는 충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2차 피해에도 주의해야합니다.
3. 애멸구는 논둑, 제방, 보리밭 등에서 월동하고 기온이 상승하는 3월말부터 4월중순에 성충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줄무늬잎마름병과 검은줄오갈병을 매개하는 충으로 알려져있으며, 이앙 전 육묘상에서 약제처리와 입제농약을 토양처리하면 방제 효과가 큽니다. 또한 파종 전 종자 처리제를 이용하면 약효가 길기 때문에 좀 더 효과적인 방제가 가능합니다.
4. 끝동매미충은 잡초와 보리밭에서 월동 후 성충이 되면 논둑에 둑새풀에 산란하여 못자리와 본논에 침입합니다. 벼오갈병을 매개하는 충으로 알려져있으며, 방제는 애멸구와 동일하게 적용하면 됩니다.
5. 벼잎물가파리는 1년에 7~8회 발생하고 5월부터 성충이 이앙 직 후
모종에 산란을 합니다. 세대 변화 기간이 13~27일로 짧아 여러 세대가 겹칠 수 있고, 벼물바구미와 겹치는 농약을 사용하여 이앙 당일 약제처리를 하는 것이 방제효과가 높습니다.
6. 이화명나방은 연 2회 발생하며 6월초와 8월초에 밀도가 가장 크게 증가합니다. 유충이 벼 줄기에 구멍을 뚫고 내부에 침입하여 태풍이나 바람에 의해 줄기가 부러지는 피해를 유발합니다. 잎을 가해할 경우 잎이 적갈색으로 변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1차 방제 시에는 입제농약을 토양에 살포하는 것이 좋고, 2차 방제 시에는 희석제 농약을 사용하면 혹명나방과 동시에 방제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7. 혹명나방은 7월~9월중순까지 밀도가 가장 높고 11월까지 성충이 보이기도 합니다. 피해를 확산되는 시간이 빠른편이며 벼 잎을 하얗게 변화시켜 벼의 등숙률에 영향을 줍니다. 이화명나방과 겹치는 약제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8. 줄점팔랑나비는 연 3회 발생하고 유충 상태로 월동하여 6월에 성충이 처음 발생합니다. 6월부터 8월중순까지 밀도가 가장 높고 유충일 때는 방제 효과가 낮아서 성충 발생이 증가하는 7월말부터 적용약제 사용 시작하는 것이 방제 효과가 큽니다.
9. 멸강나방은 매년 발생 밀도가 다르고 5월말부터 성충이 발생하며 6월부터 유충에 의한 피해 증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경작지 주변 목초지, 유휴지 등을 관찰하여 유충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여 미리 약제 살포하는 것이 방제 효과가 큽니다.
10. 벼물바구미의 유충은 뿌리를 가해하여 벼의 생육에 악영향을 줍니다. 논둑, 제방 등에서 월동하여 4월중하순부터 활동을 시작하고 5월중하순부터 논으로 날아와 피해를 주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밀도가 가장 높고 6월 중순부터는 밀도가 감소합니다. 새로운 성충은 7월부터 8월초에 다시 발생하여 밀도가 높아지고 9월부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방제가 어려운 해충이며 이앙일에 육묘에 농약을 살포하거나, 이앙 후 10~15일 사이에 약제 처리하는 것이 방제효과가 가장 큽니다.
11. 벼잎선충은 벼 종자에서 월동합니다. 종자소독을 하는 것이 방제 효과가 큽니다
12. 가시점둥글노린재는 벼 출수기와 등숙기에 벼 이삭을 가해합니다. 4월부터 활동을 시작하고 보리나 잡초를 가해하다가 출수기에 논으로 이동합니다. 7월말~8월초, 9월 중순경 밀도가 가장 높습니다. 발생 시작할 때부터 방제를 해야하고 재배지 주변 제초를 철저히 해야 방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13. 흑다리긴노린재는 벼 유숙기에 가해하여 반점미를 발생 시키는 해충입니다. 논 주변 잡초에 기생하다 벼 출수기에 논으로 이동하여 피해를 주기 시작합니다. 출수기 전후에 방제를 시작하고 주변 제초 작업을 하고 예찰하는 것이 방제 효과를 증가 시킬 수 있습니다.
14. 먹노린재는 약충과 성충이 벼 줄기 아래쪽을 가해하여 잎이 꺾어지거나 불규칙한 무늬가 생기고 이화명나방 피해와 유사한 증상을 보입니다. 피해가 심할 경우 벼의 키가 작아지고 말라죽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7월 초에 가장 많이 발생하고 이 시기에 주변 잡초를 제거하고 적용약제를 살포하는 것이 방제 효과가 큽니다.
저희가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 더 유익한 정보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1년 4월 22일
Farmmorning
저는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서유기농 벼 재배로 25년간 짓고있습니다.유통은 농협에서 전량수매 하여 판매하고 있어서 유통
에는 어려움은 없으나 수확량
증가로 농협이 팔지 못 하고
재고가 생기면 걱정이 많이되지요.쌀 소비 확산에 정부정책이
요구됩니다.금년에는 농업인의
어려움이 없는 한해 되세요.
23년 4월 16일
5
1
땅두릅 식재 지역ㆍ
척박한 토지
임야ㆍ돌많은 토지
휴경지ㆍ경사지 벽면 ㆍ둑
식재 전후 물을 안줌
동물 피해 없음
멀칭안함ㆍ살충제 안함ㆍ
배수가 잘되는곳ㆍ
뇌두 구입 문의
농업회사 씨드코리아
010 7668 3929
종자업등록
생산판매 신고
010 7668 3929
23년 4월 13일
4
Farmmorning
벼 재배과정 입니다.
품종 : 추청벼
단계 : 이앙전 밑거름 주기-이앙후 15일 전, 후 가지거름/300평당 요소10kg ,중기 제초제 살포-중간 물떼기 등 물관리 철저-이삭 패기전 25일 전, 후 이삭거름 주기-장마, 폭염 후 도열병 등 1,2차 방제-물걸러 주기 등, 완전 물떼기 후-추수
물관리 : 별첨
* 친환경으로 재배만 지속하다가 올해 장마, 폭염 등 환경이 지속되어 처음으로 수작업 으로만 방제 합니다.
* 차후 동력분무기, 드론 방제로 전환예정
23년 8월 10일
3
1
Farmmorning
장마로 인해 벼병충해및
잡초가 발생하여 제초제뿌려줌
이삭거름도 뿌려줌
23년 7월 19일
1
1
안녕하세요. 경기도 화성시에 살고 있는 여성농부입니다. 올해 비료와 농약 가격이 너무 많이 인상되어서 농사 짓는데 너무나도 힘든입니다. 비료.농약 뿐만아니라 농기계 사용하는 유류(기름)도 너무 많이 상승했더라고요. 이와중에 벼값은 내려가고~
22년 8월 9일
3
4
벼농사에대해서도
잘모름니다. 병해충도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
23년 4월 6일
1
벼뿌리쪽이 까맣게 변했어요. 벼 잎 부분도 하얗게 변한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때문이고 어떻게 해야하나요?
23년 7월 22일
1
가을
맑은하늘 천공에는
고추 잠자리 날고
땅 벌판에 등 굽은 할매
씨앗 후벼 넣으니
어느세 노랗게
멍들어 뜰어지네
잠자리는 끝에 앉아
행복한 날개친다
10월 25일
1
1
[ 옛날 이야기 한토막 / 긍휼(矜恤) ]
영조 때 한양 정동에
고려 말 충신 이색의 14대손 이사관(李思觀, 1705~1776) 이 살고 있었다
승정원 동부승지를 물러나 한가한 생활을 하던 그는
급한 볼일이 생겨
고향인 충청도 한산에 가게 되었다.
그날따라
몰아치는 눈보라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예산 근처에 이르렀을 때는 기온마저 떨어져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걸음을 재촉하던 이사관이
어느 산모퉁이에 돌다보니
다 헤진 갓에 입성마저
추레한 한 선비가 서있고
그 옆에는 부인인 듯한 젊은 여인이 무언가를 끌어안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사관이 다가가 보니
놀랍게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사관이 
“뉘신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시오?”라고 물으니
추레한 선비가 안절부절하며 
“아내가 해산일이 가까워
처가에 데리고 가려고 나섰는데
그만 여기서 몸을 풀었지 뭡니까.
이런 날씨에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어찌 할 바를 모르겠구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한다.
이사관은
“저런! 큰일이구려!” 라고 한 뒤
자신이 입고 있던 값비싼 양털 가죽옷을 벗어
아기와 산모에게 덮어주고
선비를 재촉해 마을을 찾아 나섰다.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급한대로 방 한 칸을 빌리고
집주인에게 두둑히 돈을 주고
산모의 방에 군불을 뜨겁게 지피도록하고 미역국을 끓여
산모의 허기를 면하도록 해주었다.
선비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며 이사관의 손을 잡고 
“노형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아내와 어린 것이 큰일을 당할 뻔 했습니다.
큰 은혜를 어떻게 갚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곤경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아무쪼록 가시는데까지
무사히 가시구료.” 
이사관이 길을 떠나려 하자 한사코 이름을 묻는다.
“정동에 사는 이사관 이라고 하오.”
이후 이사관은
이 일을 잊어버렸지만
가난한 선비는 가슴속 깊이 이사관 이름을 새겨 넣었다.
가난한 선비는 몰락한 양반가 자손 충청도 면천의 생원 김한구(金漢耉, 1723~1769)였다. 
십 수 년의 세월이 흐르고
김한구는 여전히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난에 견디다 못해
먼 친척 아저씨뻘 되는
당시의 세도 재상인 김흥경에게 의지하려 길을 나섰다.
김흥경은
친척 조카뻘 되는 김한구를 딱하게 여겨 쌀가마니 정도를 도와 주곤해서 겨우 연명하며 견딜수 있었고
가끔 아저씨 사랑방을 찾아가 놀다 오곤 했다. 
마침 김흥경의 생일날
이집의 사랑방에는
찾아온 축하객들이 아침부터 북적였다. 대부분
높은 벼슬아치거나
신분이 쟁쟁한 사람들이었는데
그 속에 김한구도
한쪽 구석에
여전히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는
관상을 잘보는 것으로 장안에 유명한 문객도 섞여 있었는데
문득 주인대감 김흥경이 심심파적으로 
“여보게 음식이 들어올 때까지
여기 계신 대감들의
신수나 보아 드리게.”라고 했다.
문객이
이사람 저사람 관상을 보아주었을 때 김흥경이 웃으며 말했다.
“여보게
저기 윗목에 앉아있는 김생원은
내 조카뻘되는 사람인데
언제쯤이나 사는 형편이 나아질지 보아 주게나.”
그 말을 들은 문객은
김한구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큰절을 하고 말했다.
“생원님의 고생은
이제 다 끝났습니다.
오늘부터 좋은일이 시작되어
불과 10여일 안으로
대단한 벼슬 운이 트일겁니다.”
이 말을 들은 방안의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가난의 때가 꾀죄죄 흐르는
보잘 것 없는 궁짜 낀 선비가
열흘 안에 높은 벼슬을 받게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때는
나라에서 과거를 보는 시기도 아니며
설사 과거에 갑자기 급제한다 해도 미관말직에서 벼슬이 시작되는 것이지 높은 지위를 부여받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드러 내놓고 조롱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문객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지금은 모두들 웃으시지만
며칠만 두고 보십시오.
여러 대감님들도
생원님께 절을 올려야 하는 처지가 되실 겁니다.”
당사자인 김한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음식도 못 얻어먹고
황급히 자리를 떠야 했다.
자기 때문에 분위기가 망쳐질 뻔했기 때문이다.
“에이 참!
오늘 재수가 없으려니
그 점쟁이가 미쳤나?
왜 그런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해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나?
오랜만에 주린 뱃속에
고기구경좀 시켜주려 했더니
그놈 때문에
다 그르치고 말았네!”
투덜거리며 집에 돌아와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년 들어
열여섯 살인 딸이
왕비 간택의 대상으로 뽑혀 대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아이가
지난날 눈이 쏟아지던 길바닥에서 태어나 이사관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그 아기였다.
아이가
용모가 뛰어나고 총명했기에
은근히 부잣집에 시집보내
그 덕을 좀 보려는 욕심도 있던 김한구였다. 
당시 영조는
이미 예순 다섯 이였으나 정정했고 늘그막에
중전인 정성황후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나라의 법도상 국모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 영조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간택령을 내리게 된 것이었고
가난하지만
뼈대있는 가문이었던 김한구의 딸도 후보자 중 한명이 되었던 것이었다. 
간택일이 되자
백 여명의 후보 규수들이 대궐로 모였고 영조가 친히 접견하여
그 중 1명을 선택 하였다.
김한구의 딸의 미모에 혹한 영조가
그녀의 사주단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는 
“면천 " 태생인 김선비의 여식이라
애비는 김한구,
본관은 경주,
조상은
효종 때 바른 말 잘하기로 소문난 유명한 김흥욱 이란 말이지?
흠! 이만하면 문벌도 괜찮구나!”
결국 간택을 받게 되었다. 
김한구는
문객의 예언대로
정일품 보국승록대부 오흥부원군의 작위를 받았고
신분이 하늘처럼 높아져
금위대장 병부까지 하게 되었으며
아들과 아우까지 벼슬을 얻었다.
오두막살이에서
1백여 칸의 고래 등 같은 집으로 옮겨 살게 되고
죽마저 끼니를 때우는게 어려운 생활에서 초호화판 생활로 갑자기 바뀌었다.
문객의 말이
제대로 맞은 것이다. 
김한구는
잊지 않고 딸에게 청을 넣어 은인인 이사관은
호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영조 48년(1772년)에
우의정에 이어서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옛날 베푼 은혜가
큰 복이 되어 돌아온 셈이고
김한구는
은인에게 제대로 된 보은을 하게 된 셈이었다. 
이래서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있는 듯하다. 
따뜻한 마음으로
긍휼한 자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준 이사관이나
그것을 잊지않고
은혜를 갚는 김한구의 사람됨도 훌륭하다 (無 ) -------------------
* < 이사관 ( 李思觀 ) / 조선 후기의 문신 >
이사관(李思觀, 1705년 ~ 177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한산으로,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다.
자는 숙빈(叔賓),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 생 애 >
정언, 지평, 사간을 거쳐 의주부윤이 되고,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황주 목사에 이어 승지가 되고, 이후 충청도관찰사를 하다가 
도승지를 하고 나주목사를 거쳐 
예조판서, 병조판서, 호조판서, 도총관으로 내국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를 거쳐 수어사를 하다가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하고 
우의정, 좌의정을 하고
판부사에 이르렀다.
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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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22년도)에 벼한섬 (120kg) 수매가격
아시는분 계시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3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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