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친정집도 종가집이고 항상 어려서 부터 보아 오고 해 보아서 어렵지는 않습니다 친정 엄마가 종가집에 시집와서 고생 많이 했다고 딸들은 종가집으로 시집 안 보내려 했는데 딸들중에 저만 종가집의 큰며느리로 들어 와 항상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없는 집에 남편 하나 믿고 결혼하여 결혼초에는 시집살이가 정말 고추보다 맵다고 하는 말이 실감나게 느끼며 살았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내 운명이라면 남편 믿고 열심히 살다보면 해뜰날이 있을거야 그러며 진실되고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여 지금에 이르렀네요
감사합니다 제가 결혼할 때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 결혼 안 한 두 시동생과 출가한 시누이 셋 정말 층층시하 였지요 그래도 남편 하나 믿고 잘 견디며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아버지 손톱 발톱 머리염색 해 드리며 지냈었답니다 시어버님의 환갑 때 잔치가 다 끝나고 저녁에 쇼파에 앉아 계시길래 쇼파에 올라 가 아버님 어깨를 안마 해 드리며 오래오래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 하고 말씀 드렸더니 자식 그 누구도 내 어깨를 주물러 주는 이 없었는데 너에게 이런 호강을 다 받는다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답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1년동안 다사다난 했던 일들을 편지로 적어서 다음 해에는 더 노력하는 종손며느리가 되겠다고 아버님께 글을 써서 드렸었는데 그 또한 너무 감동이었다고 아버님도 편지를 써서 주셨었답니다 30년을 그렇게 해 드렸는데 나중에 아버님이 말씀하시길 너는 우리 가난한 집안에 종부로 들어 와 더할나위 없이 부족함 없이 잘 해 주었다 하시며 고맙다 라고 말씀 해 주셨는데 그 때 눈물이 앞을 가려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결혼하고 30년 동안은 제가 집안에서 제 웃는 소리를 단 한번도 들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 만큼 아버님이 엄하셨기에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돌아가시고 나서 어느 날 집안에서 제가 소리내어 웃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랐었습니다 아 나도 이렇게 집안에서 소리내어 웃을 수 있구나 라는 걸 느꼈답니다 제 스스로 집안에서 소리내는 걸 자제하며 살았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답니다 하지만 밖에서는 왕성하게 3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 만큼은 인기 많고 활기가 넘치는 쌤 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