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에게 잔꾀가 생겨도
마침내 그에게는 도움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리어 마귀의 손이 되어
자신을 죽음의 구렁 속에 빠뜨린다."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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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잎이 노랗게 말라가는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녹두잎이 잎마다 구멍이 있는데 약을 해야되나요?
먹을려고 조금 심었는데
쉬운것은 하나도 없네요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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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권문제로 인물이 안나오게 올린사진을 6개월이 지난 사진이라고 댓글을 작성한 팜모님회원
있습니다.
제가 왜 6개월 지난사진을
올리며 거짓작성을 하겠 습니까 ?
2024년 7월 15일 초복날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상백1리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이 상계탕을 먹은사진을 초상권문제로
인물이 안나온 사진만 올렸는데.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추가증거사진 올려봅니다.
본인이 무심코 작성한 댓글이 남은 큰상처로 남습니다.
이렇게까지 살지 맙시다.
인생말년에 얼마남지 않은인생 편하게 샵시다 ~
답답해서 올려봅니다.
팜모닝 회원님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나날 보내십시요 ~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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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게으름은 더러움에 이르는 길이요, 정진은 깨끗함에 이르는 길이다. 방일은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길이요, 한결같은 마음은 고요에 이르는 길이다."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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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깨 작황이좋와 요병충해지금마무리하시고좋운결실되세요
23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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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좋은날 다가고
일할 날만 다가오네요.
아들,손자,아버님 그리고 나 !
해바라기 중!
4대가 봄 마중 나왔네요.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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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마지막으로 충남 천안에 풀빛정원님께 삼잎꽃나물을 보내 드렸습니다. 수취인 부담으로 보냈으며 요즈음은 맘만먹으면 얼마든지 하루만에 모든것을 해결할수있는 시대가열려 얼마나 편리한지 모른답니다. 소식 자주 전하면서 가까운 이웃이 됩시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누면서 사니까?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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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진 옹이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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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7 -
우리는 국민학교 등교 길은 동네 앞에 모였다가 저학년부터 모아서 출발시켰다.
맨 나중에 6학년과 통학반장이 뒤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등교를 했다.
뒤에서 몰고 간 셈이지요.
마을마다 학교에서 6학년 중에 덩치가 있는 학생을 뽑아서 통학반장으로 임명을 했습니다.
저는 5학년 때부터 통학반장을 맡아서 했습니다.
동네에서 학교까지는 꼬빡 십리(4k)길이었다.
책과 필통을 책보로 싸서 등에 메고 뛰진 않았지만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1시간이 걸렸다.
나무로 만든 필통속에서 연필이 뛸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책가방은 중학교나 입학해야 들고 다녔고 그 때는 하나도 없었다.
거리도 워낙 멀기도했지만 구비구비 산모퉁이를 돌고 인가도 없는 외딴길도 있어서 몸이 약하거나 여자아이들은 입학 적령기인 8살을 지나 한두살 많게는 세살 더 자라서 입학을 시켰습니다.
비포장 도로인 신작로는 마을마다 면에서 구역을 정해서 장마철이 끝나면 냇가에서 자갈과 모래를 지게 바재기로 짊어지어 나르면서 장마에 푹 꺼진 신작로를 고르게 만들었다.
이장님께서는 면에서 할당된 신작로를 마을 가구수로 나누어 다시 말뚝을 박아가면서 집집마다 할당을 했다.
집집마다 할당받은 신작로 오른쪽에 갓길에 자갈과 모래를 냇가에서 퍼다가 길쭉하게 쌓아놓았다.
그렇게 쌓아 놓은 자갈과 모래를 장마철이 지나고 움푹 파인 곳을 군에서 땅고르는 커다란 기계가와서 신작로를 반듯하게 고르고갔다.
국민학교 등하교 길은 늘 굵은 자갈길이었고신작로 양쪽에 가로수로 커다란 포푸라나무가 있었습니다.
고목인 포푸라나무에는 버섯이 피기도 했고 가운데가 썩어 껍질만 있는 속이 텅빈 나무도 있었다.
신발은 기껏해야 타이어표 검정고무신이었다.
겨울철이 아니고는 양말을 신은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고무신을 신고 조금만 걷다보면 발에서 땀이나서 새까만 때꼬장물이 생기고 신발이 미끄러위서 벗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운동회나 체육시간에는 맨발로 달리기도하고 공도 맨발로 찼다.
등교길 중간에 괴일이라는 마을앞에 회(세멘트)다리가 있었다.
날씨가 따뜻한 5월부터 여름까지는 물이 있고 시원해서 괴일 다리밑에 나병환자(문둥병)들이 몇명이 비닐을 치고 양은솥을 걸고 살았다.
항아리에 뱀을 잡아 놓았다가 끓여 먹기도 했고, 그 옆에는 동냥으로 얻어 온 곡식자루가 있었다.
다리밑에 있는 나병환자들이 어린이 피를 빨아먹으면 문둥이병이 낫는다는 헛소문이 어린아이들을 공포에 떨게했다.
그래서 하교길에 그 회다리를 건널 때는 절대 뛰지말고 살살 기다시피 조심스럽게 건너라고 통학반장이 저학년 아이들에게 가르켰습니다.
혹시나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나병환자들이 깰까봐서 그랬지않나?싶습니다.
혼자는 무서우니까 여러명이 모여서 그 회다리를 건넜다.
눈썹이 없고 얼굴에 흉터가 있고 손가락이 없으며 중절모를 꾹 눌러 쓴 나환자는 정말 공포의 대상이며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 손이 없어서 쇠로 된 갈쿠리를 내밀면서 동냥을 달라고 할 때는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좀도리 쌀을 담아 놓은 단지에서 한바가지 떠다 주었다.
옛날엔 동냥을 하는 동냥아치들이 참 많았다.
동냥으론 쌀과 보리, 식은밥을 주기도했다.
또 스님들도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목탁을 두드리면서 시주를 받으러 다녔다.
나환자나 동냥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온 동네가 시끄러웠다.
그때는 거의 집집마다 개를 묶지않고 키웠고 그 많은 개들이 한꺼번에 짓어대니까 엄청 시끄러웠다.
그렇게 온동네 개가 짖으면 숨기도했다.
도심지에는 넝마주이들이 있었다.
넝마주이는 양아치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5.16군사혁명 이후까지 있었다.
서울의 경우 40∼50곳에 거지들이 모여 살았으며, 동냥뿐만 아니라 넝마주이를 하기도 했다.
넝마주이는 "사설막"(대원들을 거느린 주인인 ‘조마리’가 관리하는 막), "자작"(개인 또는 가족단위로 만든 막) 방식의 조직을 갖추고 등에 짊어진 망태기와 집게를 사용하여 폐품을 수집하여 판매하면서 생활했다.
넝마주이도 떼지어 다닐 적엔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늘 날 페품수집의 원조가 아닐까?싶다.
구불구불하고 자갈이 깔려있던 신작로가 반듯하게 만들어지고 아스콘으로 포장되면서 포푸라나무는 사라졌다.
담양 메타쉐콰이어길과 진안 메타쉐콰이어길이 사진작가들의 출영장소가 되듯이 커다란 포푸라나무가 양 옆으로 있는 반듯한 신작로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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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데비 풀을키우고잊씁니다 부지포데용 알바하느라바빠서고추받손을몾데내요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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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뭐야!? 우리 과수원 옆에 있는 과수원은 벌써 단면반사필름 배치 하였다!!!!????
이제 우리도 마음이 조급해진다....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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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도마도재배법좀 알려주세요.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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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노랗게 변해서 마그네슘 EM혼합하여 엽면살포 하였습니다
수확할때가 되서인지요?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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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