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금치밭에 스프링쿨러 제거작업
23년 11월 8일
대포스피링쿨러회전이잘안되는데. 도와주세요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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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께서 주신 자재로 비가림 허드레용 작업하우스를 지었는데
소소한 부자재와 비닐값도 만만치 않습니다,
비닐 10m×15m=90,000원
패드 6m×8EA= 64,000원
스프링 20EA= 6,000원
차광막 10m×15m=150,000원
등등 , 인건비 손수작업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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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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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 쌀 미(米) -
쌀 미(米)자는 열십자에 여덟 팔자가 두개있다.
그 만큼 사람 손이 여든 여덟번 가야 쌀을 생산한다는 뜻이다.
세상사가 다 그런 것 같다.
특히 농사는 쌀 미(米)자의 뜻 처럼 여든 여덟번의 손이 가아 하는 것이 농사다.
산업화의 기계화에 따라 농업도 기계화가 되었다.
호미나 괭이로 농사 짓는 시대는 지났다.
아무리 농업이 기계화가 되었다 하더라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풍년을 기약할 수가 없다.
농사는 하늘이 아마 8-90%는 차지하는 것 같다.
자연이 주는 물과 햇볕이 적당하다면 대량생산이 가능해서 채소와 곡식을 풍부하게 한다.
올 봄같이 가뭄이 심해서 밭작물 값이 많이 올랐다.
지하수나 물길이 닿는 밭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양수기나 스프링쿨러로 작물에 물을 공급할 수가 있었다.
기후변화로인해서 밭에서 생산되는 채소류도 많이 오른 셈이다.
한때는 배추 한포기가 20,000원에 달했다.
요즘 같이 물가상승에는 자연적인 요소뿐 아니라 기름값 상승과 인건비가 엄청 오른 것이 가장 큰 요인인 것 같다.
축산 농가에서는 사료의 주 원료인 옥수수가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데 곡물값이 전쟁과 유류값 인상 기상이변으로 국제적으로 엄청 상승했다.
농촌에서는 거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농사일을 도맡아 왔는데 코로나 때문에 인력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인건비가 많이 올랐다.
농촌인구는 고령화되고 외국인 근로자 공급이 되지않으니 인건비가 오를 수 밖에 없다.
제가 태어난 고향에 어릴적에는 90여가구가 살았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3개반이었다.
지금은 전체 학생 수가 20명정도란다.
시골 마을에도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3
지금은 제 고향마을에 빈집이 많고 초등학생이 한명도 없다고 한다.
농촌인구 감소는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인 것 같다.
요즘 주유소에가서 차에 기름을 넣을 때마다 치솟는 기름값 때문에가슴이 덜컹한다.
6-70,000원이면 가득채웠던 기름이 100,000원어치를 넣어야 가득채워진다.
코로나라는 세계적인 재앙을 맞이했고,
이 코로나가 조금은 잠잠해지니까 우크라이나전쟁과 유류값인상 기상이변으로 또 다시 전세계적으로 어려움이 닥친 것 같다.
아마 이런 상황이 우리나라 뿐만 아니기 전세계가 겪는 위기 때문에 오래가지 않을까?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어제 신문에 보도된 외국에서 바라본 게엄선포가 미칠 수 있는 경제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 소식을 캡쳐했습니다.
“계엄의 경제적 대가, 5100만 한국인이 할부로 치르게 될 것”
외신들, 한국 경제에 잇단 우려
지난 3일 비상계엄 선포·해제 사태 이후 원화 가치가 급락하고 있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7일 오전 2시에 끝난 야간 거래에서 달러당 1423원까지 올랐다(가치 하락).
“윤석열 대통령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저평가)’를 주장하던 글로벌 투자자들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따라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윤 대통령의 이기적인 비상계엄 선포의 대가를 5100만 한국인이 앞으로 할부로 치러야 될 것이다.”
미국 경제 매체 포브스에 6일 실린 경제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의 칼럼 일부다. 포브스뿐 아니다. 계엄 사태와 탄핵 추진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강화하고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울 것이라는 외신들의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이런 소식을 세계각국이 한국의 경제사정을 바라본 시각을 전한 메세지더군요.
지난 몇년동안 안전불감증으로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대한민국은 수많은 희생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12.3비상게엄은 정치, 사회, 경제는 물론이고 연예계까지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입법기관인 국회의 주인이고 국민을 대표하는 300명의 금뺏지를 자랑으로 하는 국회의월들은 서민들보다 더 배웠고,
더 많이 세상을 보았고,
더 많은 혜택으로 호사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앞뒤도 못가린 어리석은 사람들인줄 몰랐습니다.
앞으로 있을 국민투표에 어떻게 국민들한테 주권행사인 투표를 하라고할 수 있을까요?
자기들은 주권행사를 거부하면서요.
우리나라 국민전체가 이번 게엄령 때문에 발생하는 리스크를 수년간 할부로 갚아야 할 것이라는 기사를 보면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고 다시한번 되새겨봅니다.
작금은 현 사태를 국민들이 심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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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하우스에 스프링큐러설치을합니다
호스간격을 아시은분
조연좀하여주세요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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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감자 피복까지 마쳤습니다
이제 쿨러설치만하면되네요
23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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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
- 6-70년대 우리들의 공감시대 9 -
호롱 또는 등잔은 석유기름을 채우고 문종이로 만든 심지에 불을 붙여서 빛을 낼 수 있게 만든 우리 옛날 조상님들의 조명도구로서 호롱에 밝힌 불을 호롱불 또는 등잔불이라 했다.
호롱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60년대 초반에 출생한 사람 정도까지일 것 같다.
저녁을 먹은 후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야 성냥을 당겨 등잔대위에 올려있는 석유가 담긴 하얀 호롱 심지에 불을 붙였다.
등하불명(燈下不明)?
"등잔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있다.
등잔 바로 밑이 오히려 어두운 것처럼 가까이에 일어난 일을 오히려 잘 모르거나 가까이 있는 것을 오히려 못 알아본다는 의미다.
호롱심지를 너무 많이 올리면 끄으름이 많기 때문에 손으로 높낮이를 조정해야했다.
이 때 손에 묻은 석유기름은 머리에 쓱 문질렀던 것 같았다.
호롱불 아래서 숙제도 하고 책을 읽었다.
호롱불 옆에는 겨울엔 화로가 있었다.
부엌에서 잔불이 있는 재를 담아 다독거려서 방가운데 놓았던 화로는 방안 공기를 따뜻하게 했다.
불젓가락 위에서 구워지는 가래떡이나 불속에서 익어가는 고구마나 감자,
할머니의 정을 함께 먹었던 그 옛날이 그립네요.
옛날에는 자주 목욕을 하지 않아서 몸에는 이, 머리에는 머릿니가 많았다.
이와 머릿니의 알을 서캐라고 한다.
참빗은 머리를 빗을 때 머리에 있는 서캐는 머릿니 빗과 서캐빗으로 빗어서 이와 서캐를 잡았다.
서캐빗은 더 촘촘했다.
옷에 있는 이는 잡아서 손톱으로 눌려 죽였다.
옷에도 서캐가 기생하는데 호롱불에 태우기도 했다.
이런 몸에 기생하는 이는 나일론이 등장하면서 사라졌는데 머릿니는 어린아이들한테 최근에도 나타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날개가 없으나 하루 저녁에 몇 사람을 건너갈 수 있다고 했다.
위생이 깨끗하지 못해서 이와 더불어 뛰어 다니는 벼룩도 있었고 갈라진 기둥 사이에 기생하는 빈대라는 기생충도 있었다.
제가 1973년에 군에 입대를 했는데 겨울 내복이 지급되면서 엄지 손가락만하게 주머니를 내복 한벌당 3개씩 만들었다.
상의 양쪽 겨드랑이에 2개를 달고 하의 가랑이 사이에 1개를 달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살충제인 DDT를 주머니에 넣어서 달았던 것 같다.
한 겨울에 모포를 밖에 널었다가 양쪽에서 먼지를 털어내면 추위에 얼어붙은 이가 모포에 굴러다녔다.
첫 휴가를 받아서 전날 깨끗한 내의를 입고 잤는데 아침에 사무실에가서 등이 가려워 웃옷을 벗고 런닝셔츠릍 들춰보니 하얀 런닝셔츠에 까맣게 이가 있었다.
그 때 런닝은 포제였는데 휴가를 간다는 들뜬 마음에 미리 깨끗한 런닝으로 갈아입었거든요.
징그러워서 얼른 벗어서 난로속에 집어 넣어 태워버렸다.
피부병을 전염시킨 매개체인 이와 벼룩, 빈대가 무명옷에서 나일론으로 바뀌고 한옥에서 양옥으로 주거시설이 바뀌고 위생시설이 좋아지면서 사라지고 있다.
제가 군복무 시절만해도 막사 자체가 나무로 만들어졌고 내무반 바닥은 거의 나무로 되었었다.
만원인 버스속에서 여학생 세라복의 하얀 카라에 까만 이가 기어다니는 모습도 있었고, 긴머리를 출렁거린 아가씨 어깨너머로 이가 기어다니는 모습도 있었다.
호롱불은 방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바람에 앵두보다 작은 불꽃이 흔들렸다.
불꽃은 거뭇해서 벽에 까맣게 그을리고 콧속도 까맣게 그으름이 끼기도했다.
석유는 워낙 귀해서 1되짜리 유리병으로 사와서 조금씩 등잔에 따라서 썼다.
제법 심지가 큰 호야등은 집안 대소사를 치룰 때나 넓은 장소에서 넓게 불을 밝혔다.
지금은 호롱이나 호야등은 인테리아 소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름에는 아예 호롱불을 키지 않았던 것 같다.
할머니께서 대문앞이나 골목에서 맨 풀을 모아 마당에서 모깃불을 피고 멍석이나 와상에 둘러 앉아 부채질을 하면서 옥수수와 찐 감자를 먹었고 대형모기장을 치고 잠들기도했다.
그 때 모깃불이 왜 나만 따라오는지?
모깃불은 이쁜 사람한테 간다는 말에 위안을 삼는다.
모깃불이 재가 된 한밤에 눈을 떠서 바라본 하늘엔 영롱하고 초롱초롱하게 별이 빛나고 있었다.
지금도 고향 하늘에는 도회지에서 볼 수 없는 초롱초롱한 별을 볼 수가 있어서 고향하늘이 좋다.
아침 일찍 텃밭에 나가서 오이넝쿨을 만들었습니다.
노가오이5. 가시오이5, 사과참외8, 도마토5, 참외3개를 줄을 애주고 오이집게로 물려주었습니다.
4월 30일에 심은 고추가 심자마자 날씨가 쌀쌀해서 크질않다가 이제 크기 시작합니다.
1차 추비를 요소와 칼슘을 섞어서주고 물도 스프링쿨러로 돌렸습니다.
지인이 날씨 뜨거울 때 햇빛 가리라고 파라솔을 하나 던져주고 가네요.
쉴 때랑 고추 씻을 때 감사하게 쓰겠습니다.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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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mor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