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삶을 가르치다"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자동차로
꼬박 나흘을 달려 찾아간
인도 서북부 히말라야.
자동차 길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해발
5,360m의 타그랑고개
지대가 너무 높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갈색의 민둥산이
아득하게 이어졌다.
산소가 적어 보통 사람은
숨쉬기조차 힘든 언덕 너머엔
2,000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록파족이 살고 있다.
구름마저도 험준한
히말라야를 넘지 못해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다.
영하 40도의 맵찬 날씨를 견디도록
집은 돌로 쌓았는데,
록파족은 겨울철인
10월에서 3월까지만
이곳에서 생활한다.
나머지 반년은 보름에 한번씩
자그마치 열두 번이나
가축들을 몰고 풀을 찾아
여기저기 떠돈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그들,
의식주 모두가 열악하기 짝이 없다.
백여 마리의 양과 염소에
한 가족의 생계가 매달린 그들에게
혼인으로 인한 형제들의
재산 분할이 불가능하자
일처형제혼 등
일처다부제가 만들어졌다.
생존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의
특이한 결혼풍습보다는
어느 노인의 죽음 의식과
거기에 깃든 그들의
생사관에 더 큰 관심이 쏠렸다.
3월 말, 봄이 되면 그들은
가축의 방목을 위해
겨울을 보낸 돌집을 나선다.
처음 자리 잡은 곳에서
보름 남짓 머물면 풀이 바닥나
새로운 곳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난다.
남자들은 이삿짐을 싸고
여자는 가는 도중 먹을
음식을 마련하는데
시아버지인 일흔여덟 살의 노인은
성치 못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시무룩하다.
물이 있는 다음 정착지까지는
대략 40에서 80km.
움직임이 더딘 고산지대에서
사흘을 꼬박 걸어야 한다.
하지만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은 오늘 가족과 함께
떠나지 않는다 이젠 너무 늙어
며칠씩 걷기에는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세월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자연의 순리.
자식들은 노인을 위해
혼자 지낼 텐트와
두툼한 옷을 준비한다.
버터차와 밀가루빵 등
한 달 치 식량을 남겨두고
떠나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
노인이 살아 있으면
또 한 달 치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결코 한 달을 넘겨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이 고독한 죽음 의식은
노인과 가족 간의 타협이 아니다.
힘든 이동을 거듭해야 하는
고산지대의 오랜 풍습으로
노인 스스로의 결정과
가족들의 수긍이 만든
고립이고 헤어짐이다.
손자에게 마지막 차를 대접받는
노인은 착잡한 표정을 짓고
아들과 손자는 울음을 삼킨다.
정든 사람과의 이별을 두고
열여덟 살의 손자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자
쉰두 살의 아들도 걸음이 휘청거린다.
새로운 생을 받기 위해
몸을 바꾸는 것이니
슬퍼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극진한 신앙도 이 순간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긴 인연에 비해 짧은 이별,
노인은 모든 걸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심경을 묻는 기자에게
'나도 27년 전에
아버지를 이렇게 했다.
자식들을 탓하지 않는다.
행복하기만 빌 뿐이다' 라고
노인은 담담히 마니차를
돌리며 허공을 바라본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나 절망이 아니다.
삶의 끝자락에서 걸려
넘어지는 문턱이 아니라,
이번 생과 맞닿은
또 다른 삶으로 건너가기 위한
매듭이고 통로다.
늙고 병든 몸에서 벗어나 스스로
평온을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고
일상의 수행이 일러준
혼자만의 여행이다.
눈 맑은 그들에겐
저 히말라야 정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신성한 발걸음인 것이다.
가축들을 앞세우고 멀어져 가는
자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노인은 자리에 눕는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몸을 티베트 말로
‘루’라고 하는데 이 말은
‘두고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거대한 자연의 품 안에서
신에 대한 겸손을 배워왔을 노인,
원망이나 미련 없이 죽음을
받아들인 그의 영혼은
몸뚱이를 남겨둔 채
이제 어디로 떠날 것인가.
이마 위로 테 굵은 안경이
벗겨지고 손톱 밑이 까만
그의 손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죽음의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근본적인 까닭은 단 하나,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
처음 왔던 그대로
다시 돌아가는 길,
그 길을 히말라야는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대자연으로 돌아가 그 속에서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죽음은
태어남을 뒤쫓고
태어남은 죽음을 뒤쫓아
그것은 끝이 없다’고
그들의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
는 말하고 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듯이
죽은 자는 무엇으로든
반드시 세상에 다시온다는
믿음으로 모든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는 사람들,
죽음의 하늘길을 열기위해
그것과 홀로 마주하는
비감한 모습이 차라리 숭고하다.
이들은 평생 떠남에 익숙하다.
헤어짐도 마찬가지다.
생명이 남아있는 부모를
저승으로 보내는 것도
이승의 인연으로 받아들인다.
지상의 거인 히말라야의
가혹한 자연과 이천년
세월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
어쩌면 그 덕에 어느 문명보다
자연에 가까운 전통을 배우고
이어왔는지 모른다.
‘죽음을 배우라.
그래야만
삶을 배울 것이다.’
설산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돌풍 한 자락이 하늘의
소리를 전하며 칠흑 같은
벌판을 짐승처럼 내닫는다.
7월 9일
5
2
Farmmorning
2월은 정말 잔인한 달인가
마음속이 텅텅 빈 느낌입니다.
머리가 맑으면 좋은 싯 귀절도 저절로 노래하듯 했는데 지금은
글쓰기가 힘듬니다.
이맘때면 봄의 소리 . 느낌. 설레임
진달라 개나리 버들강아지 아지랭이
들에는 냉이 꼬들빼기 쑥 두릅 산에는 고사리 취나물 ...새 생명이 움트는 활력이 넘치는 시기에
이들 소재만
해도 소설책 한 권은 족히 쓰고도 남을 것인데 , 지금의 내 모습이 서글프고 초라해지는 까닭은 무슨
이유인지 그저 답답합니다.
매화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는데 ,
활짝핀 마음의 꽃은 피긴 필려나...
마음은 이팔청춘인데, 몸은 아주 멀리
무거운 어깨에 허탈하고 외로움만
깊어짐니다.
이젠 2월도 몇 일 안남았는데 하루라도 빨리 3월이 왔으면 숨통이
튈 것 같습니다.
잔인한 2월이 다시는 오지않길 바라면서 벚꽃이 만개하면 모든 두려움도 걱정도 훨훨 털고 씩씩하게
내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하고자하는 자유인이 되었으면 하네요.
________허굴산 낙서 끝______%%
23년 2월 21일
7
4
파리가많은데 토끼 염소 닭 강아지한테
뿌려도 되는 약이 있나요?
21년 4월 29일
우리들 이야기 =36
♡ 공주의 남자 이야기 ♡
조선왕조 세조에게는 정희왕후가 낳은 공주가 있었는데 어려서 부터 어질고 성품도 덕스러웠다.
공주는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절제 김종서가 사육신 및 충의를 지키려는 신하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 하려다가 순절하고,
그 가족들이 다 죽임을 당하기에 이르는 것을 보고,
일찍이 눈물을 흘리며 밥도 먹지 아니 하였다.
그리고 단종의 어머니 묘가 파헤져지는 참변을 당할 때는 울면서 간하기를 그치지 아니 하니,
세조는 크게 노하여 장차 화(禍)가 어디까지 미칠지 헤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비밀히 유모를 불러 가벼운 보물을 충족히 주면서 공주와 함께 그것을 가지고 멀리 피신하고,
왕(세조)에게는 공주가 요절한 것으로 알렸다.
마침내 유모는 공주와 함께 몰래 도망하여 충북 보은군에 당도하였고 깊은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는 배고품이 너무 심하여 길가에 앉아 잠시 쉴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한 총각이 쌀을 짊어지고 이곳을 지나다 발길을 멈추고 묻기를
"두 분은 시골 사람들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어찌하여 유독 이런 곳에 와 있습니까?" 하였다.
유모가 총각을 보니 의복은 비록 때가 끼고 남루하나 용모는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답하기를,
"나와 이 낭자는 한양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이곳에 이르렀으니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서 지금 막 주저하고 있을 따름이요." 한즉
총각은 남 몰래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기를,
"나 역시 화를 피하여 이곳에 와서 산 지가 벌써 1년이 지났소이다." 하였다.
유모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와 이 낭자는 그대와 함께 살았으면 하오" 라고 하자, 총각은 흔쾌히 이를 허락하였다.
그들은 함께 걸어서 깊은 골짜기를 지나 몇 리쯤 가니 토굴이 있어 거적문을 열고 들어갔다.
총각은 손수 밥을 지어 그들을 대접하였다.
며칠이 지난 뒤 유모가 행탁(여행용 자루)에서 가벼운 보물을 꺼내어 총각에게 주면서 이것을 장에 가서 팔아 오라고 하자,
총각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이 보물들은 궁중의 물건인데 아주머니는 어디서 이것들을 얻었 습니까?" 하자 유모는 말하기를,
"굳이 그 출처를 묻지말고 가져가서 팔아 주오" 하였다.
그러나 그 총각은 끝내 그 뜻을 따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의로운 일을 거행할 때 관가에서 화를 피한 자취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1년 남짓 사는 동안에 총각은 공주와 정을 통하고 혼례를 올렸다.
그제서야 총각이 비로소 공주에게 피난한 까닭을 물으니,
공주는 울면서 대답하지 아니하고, 유모가 대신 그 전말을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 총각은 슬피 울며 말하기를,
"나는 절재 김종서의 손자입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함께 화를 입던 날 온 집안이 다 죽임을 당했으나 나만 홀로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른 것이나,
어찌 공주가 그 어린 나이로서 능히 이렇게 의로운 마음을 분별할 줄 뜻하였으리오!" 하였다.
이로부터 두 사람은 서로 공경하며 온정을 나누는 것이 더욱 깊어졌다.
세월이 오래 흘러 그때 화의 법망이 좀 풀리게 되자,
총각은 보물들을 전부 팔아서 많은 돈을 얻어,
산 밑으로 내려와 넓은 전지를 마련하고 몸소 밭을 갈고 책을 읽으며 아들 딸을 낳아 기르면서 살았다.
세조는 말년에 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부처님께 지난 날을 참회하는 기도를 하였는데, 속리산(충북 보은군 북쪽에 있는 산 ) 으로 향하다가 마침 공주가 사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한 어린 아이가 길가에 있었는데,
세조가 그 아이의 용모를 살펴보니 꼭 자기와 닮았다.
세조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수레를 멈추게 하고 애를 앞으로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우는 소리가 울타리 사이에서 들려왔다.
세조는 마음이 흔들려 좌우의 신하들에게 묻기를 "이 어인 울음소리 인가? " 하자, 어린 아이가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어머니의 울음소리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세조가 곧 좌우 신하들을 물리치고 어린 아이와 함께 걸어서 그 사립문에 이르니,
한 부인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었다.
세조는 놀라서 묻기를,
"너는 누구인고?" 하자,
공주는 눈물을 거두며 대답하기를,
"못난 소녀는 지난 날 아버님의 엄한 책망을 받았는데 어머님의 분부로 유모와 더불어 대궐을 떠나 멀리 피하여 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죽지 못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나이다." 라고 하였다.
세조는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너를 일찍이 이미 요절한 것으로 여겼구나.
어찌 지금까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줄 알았겠느냐!
너의 남편은 어디에 있느냐?" 하였다.
공주가 답하기를,
"그는 죽은 영상 김종서의 손자입니다.
그도 역시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왔는데 우연히 길가에서 상봉하여 곧이어 짝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님의 행차가 이곳을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몸을 피해서 지금 집에 있지 아니합니다." 라고 하니 세조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김종서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내일은 마땅이 나오너라.
가마와 말을 보낼 것이니 나와 함께 대궐로 돌아가자.
아울러 네 남편에게도 봉작(작위)를 가하리라." 하고,
세조는 드디어 수레를 돌렸다.
다음 날 세조는 승지를 파견하여 그들을 맞아 오게 하였으나,
공주는 밤을 틈타 그 남편과 함께 가족을 거느리고 몰래 어디론지 숨어버리니 그 거처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전하는 소문에 의하면 당시 세조가 지나가는데
정이품송(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가는 길에 서 있는 수령 600년의 소나무 ) 아래서 두 아이가 놀고 있어 그들의 부모이름을 묻자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마골로 도망을 가길래 그냥 지나쳤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다음날 찾아 보았으나 그들의 부모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세조는 본인의 외손자임을 직감하고 정2품 품계를 적은 문서를 당시의 정이품송 아래에 놓고 왔는데 그들은 끝내 찾아가지 않았으며,
그 후에 문서를 발견한 어느 사람에 의하여 '왕이 손수 소나무에게 정이품의 품계를 내리셨다'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 옮겨 온 글 *
3월 25일
44
29
5
출석 한다는게 그간 댓글에만 글을 남겼네요 바보~ 경영체등록 안하고 무화밭 상속받아 했더니 세금감면도 못받아 올 해 거의 파내고 고사리와 한라봉 좀 심었는데 무더위에 풀관리
닭 기러기 거위 밥주고 물 주는데 넘 힘드네요 내년에 고사리 채취함 비닐하우스가 있어야는데 지원되었으면 좋겠어요 힘들어도 모두들 홧팅하시면 좋은날 올거예요
22년 8월 13일
1
♥️ 금시발복
(今時發福) ❤
* 병상에서 10여년을 누워있는 노모의 병을 고치려고
집까지 날린 금복이는
서호댁 머슴이 되어 그 집 문간방에 노모를 업고 들어갔다.
선불로 받은 새경으로
거동을 못하는 노모를 봉양 하면서도 머슴 일에 소홀함이 없이 밤늦도록 일을 했다.
집주인 서호댁은 손이 귀한 집안에 시집을 와 1년도 못 돼 청상과부가 되어 혼자서 살림살이를 꾸려가고 있었다.
금복이가
노모까지 들어와서 밥을 축내니 "새경을 적게 받겠다"고 했지만...
서호댁은 오히려 새경을 후하게 쳐줘 금복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어느날 밤,
금복이 노모는 숨을 거뒀다.
서호댁의 배려로 뒤뜰에 차양을 치고 빈소를 지키고 있는데,
웬 낯선 사람 하나가 들어와
문상을 하고 국밥에 술까지
벌컥 벌컥 들이켰다.
금복이가 다가가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와는 어떤 사이 이신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엉뚱하게도
"묫자리는 잡았소"? 하고 되물었다.
안 그래도 묫 자리 때문에 고심하던 금복이가
"아직요" 하며 고개를 젖자~
그는 금복이의 소매를 잡아끌며 뒷산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이 자리가 천하 명당이요, 내가 금시발복지지
(今時發福之地)를
발견하고 당신을 찾은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오."
"서두르시오. 오늘 밤 인시(寅時) 를 넘기면 안되오"
그 산은 마침 주인집 산이라 금복은 서호댁에게 첫마디에 허락을 받고,
귀신에 홀린듯이 그 사람과 둘이서 모친의 관을 메고 산으로 향했다.
남향받이 사질토라 땅을 파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는데,
땅을파고 땅을 다지려니 공이 (땅을 다지는 기구)가 없었다.
"인시가 되려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 집에 가서 공이를 가지고 오시오."
달빛에 비친
그 사람의 얼굴에는 위엄이 가득했다.
금복이는 산을 내려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대청마루에
서 있던 서호댁이 버선발로 달려와
금복이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다짜고짜 금복을 안방으로 끌고간 서호댁은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내 말을 잘 들으시오" 하며
침을 꼴깍 삼키고는
"지금 금복씨가 상중이기는 하나 내 부탁을 내치면 아니되오."
"시간이 없습니다" 하며
그녀가 저고리를 벗고,
금복이를 껴안는데
서호댁의 몸이 불덩어리다.
기가 막혔지만,
금복이의 하초는 솓아올랐다.
금복이는 상복을 벗고
두 불덩어리가 알몸으로 금침 속에서 한덩어리가 되었다.
일을 치른후 금복이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가
공이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땅을 다지고 하관을 한후
흙을 덮자~
"꼬끼오" 하고 산 아래서 닭이 울었다.
두 사람이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들어서자 서호댁이 뜨거운 국밥에 술상을 내왔다.
그 사람이 서호댁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보통 좋은 꿈을 꾼게 아니로군~"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술을 들이켜고는 휑하니
제 갈길을 가버렸다.
스물여덟 노총각 금복이와
서른 한살
청상과부 서호댁은 자연스럽게 가시버시가 되었다.
처음 입덧을
한 날 밤!!
금복이의 품에 안긴 서호댁이 그날 밤의 일을 털어놓았다.
"당신이 산에 간사이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청룡이 내려와 내 치마 속으로 들어 갑디다.
예로부터 용꿈을 꾸면
세상을 호령할 귀한 자식을 낳는다 했으니~
하늘이 준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어요."
열 달후,
서호댁은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다.
그후 살림은 불같이 일어나 천석꾼 되었고,
그 아들은 15살에 알성 급제를 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금시발복*
(今時發福 : 묘를 쓰는
즉시 복이 나타난다는 뜻)
"새벽 5시에 묘를 쓰고,
아침 7시에 복이 들어온다" 는
그야말로
"최고의 명당자리"라는 뜻 입니다.
이처럼 어른을 공경하고,
착하게 어질게 살다 보면
하늘도 감동하여...
*금시발복* 같은 행운에 기회를 주십니다.
요즘 무더위로 많이들 힘들어하시고
침체되어 있는데~
이글을 읽고 모두들
힘 내시고,
매사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 하다보면...
천지 신령께서 이 카톡을 받아 읽는 이 에게
큰 축복과 행운에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8월 15일
26
16
1
♡...읽다보니 우리들 얘기네요...♡
69세에 작고하신 우리 
부친이 꽤 늙었고 나이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난 그 
나이를 훌쩍 넘어 70代를 
살면서도 늙었다거나 나이 
많다는 생각이 전혀 안드니 
어쩐 까닭일까요...?
80代도 이렇게 친한 척 
다가 오겠지요 ?
1) 내가 10代였을 때는
70代는 완전 꼬부랑 할배, 
할매 인줄 알았고,
2) 내가 20代였을 때는 
70代는 인생줄 놓은 마지막 
단계 노인인 줄 알았다.
3) 내가 30代였을 때는 70
代는 어른인줄 알았고,
4) 내가 40代였을 때는 70
대는 대선배인 줄 알았다.
5) 내가 50대였을 때는 70
대는 큰 형님뻘인 줄 알았고
6) 내가 70대가 되어보니 
70대도 매우 젊은 나이구마! 
항상 멀게만 느껴지고 아득
했던 70代, 이제 70줄에 
들어서고는 뭔지 모르게 심쿵
했는데 어김없이 올해도 
지나가겠지!
80代도 이렇게 소리없이 
나에게 친한 척 다가오겠지!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하룻
밤 꿈같다고 누가 말했던가.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진 
그 얼굴들이 왜 이렇게 또 
다시 떠오르나......!
정다웠던 그 눈길 그 목소리 
어딜 갔나?
친구야! 
붙잡아도 어차피 가는 세월! 
나이 계산일랑 말고,
그저 주어진 일에 열심히 살고, 
여행도 다니며 재지 말고, 
소박하고, 즐겁게 살자구나!
내가 흘려보낸 것도 아니고 
내가 도망쳐온 것도 아닌데, 
세월이 제 자랑 하며 흘러 
버렸으니 청춘이란 꽃밭은 
아득히 멀어져 잊혀지고 
흰머리 잔주름에 검버섯같은 
허무만 남았다....
이제 갈 길은 외줄기, 피할 
수 없을 바에는 홀가분하게 
그 길을 걷자!
욕심과 아집, 버겁고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가벼운 몸 
즐거운 마음이면 좋지 않겠나.
그저 하루하루 즐겁고 당당
하게 걸으면 되지 않겠나?
고운 마음으로 열심히 살면 
지금까지 한 세월이 바람처럼 
흘렀듯, 건강하고 즐거우니 
이것도 축복과 은혜가 아닌가?
같이 하는 가족에게 감사하고, 
함께 걷는 친구들에게 감사
하고, 인연이 닿은 모든분들께 
감사하며 살련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도 
미리 해두고 싶다.
인생 100세 시대에 아직도 
시들 나이가 아니다.
80보다 젊고 90보다 어리지 
않는가?
잘 익은 인생, 
저녁노을 고운 빛깔처럼 
절정을 준비하는 나이, 
우리도 붉게 타오르는 저녁 
노을로 우리 삶을 붉게 물들
여 봐야 하지 않을까요?
믿음 소망 사랑 그중 제일은 
사랑입니다......♡
👖청춘은
👖바로
👖지금! 이순간 부터입니다!!!
모두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삽시다!
23년 9월 12일
10
8
Farmmorning
파리가많은데 토끼 염소 닭 강아지한테
뿌려도 되는 약이 있나요?
21년 4월 29일
1
3월 7일 화요일 (음력 2월 16일) 운세🍀
쥐띠 🐭
52세 남의 것을 탐하면 관재구성 생기니 욕심부리지 말기를
64세 새로운 시작보다 정리가 우선이니 마무리 잘하도록
76세 재산은 있을 때 관리를 잘해야 하니 함부로 퍼주지 말기를
소띠 🐮
51세 동업은 아무런 이익 없으니 거절하는 것이 좋을 듯
63세 무슨 일이든 단기적으로 끝내는 것이 신상에 이롭고
75세 가까운 지인과 문서문제로 다툴 일 생기니 조심하도록
호랑이띠 🐯
50세 재물보다 사람이 우선이니 등지는 일 없도록 주의하고
62세 지나치게 강하면 부러지니 유연하게 대응하도록
74세 한발 양보하면 편안해지니 먼저 연락하는 것이 좋을 듯
토끼띠 🐰
49세 말이 앞서면 실수하게 되니 남의 비밀 함부로 말하지 말고
61세 남을 이유 없이 모함하는 일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고
73세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니 너무 앞서가지 말기를
용띠 🐲
48세 거래이익 생기니 과감하게 처분하는 것이 이로운 길
60세 내부문제로 고민하나 정리할 일 미루지 말기를
72세 오랜만에 온 가족 모여 즐거운 시간 보내니 신변에 좋은 일 있을 듯
뱀띠 🐍
47세 투자 등의 일로 고민하나 시운 불리할 땐 무리하지 말고
59세 환경이 불리하고 반란세력이 등장하니 미리미리 대비하도록
71세 지나친 스트레스로 건강장애 염려되니 마음 편히 하도록
말띠 🐴
46세 안정을 찾는 일이 중요하니 마음 비우고 편히 쉬도록
58세 쓸데없는 허상은 버리고 현실에 충실하도록
70세 자신의 세상의 가치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고
양띠 🐑
45세 확신 갖고 길 나서면 소원 이루어지니 힘차게 출발을
57세 명예 구하는 일 뜻대로 이루어지니 걱정 말기를
69세 약간은 부족해도 수용하는 것이 이로우니 내일을 위한 희망의 길 가도록
원숭이띠 🐵
44세 지나친 투기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니 과욕 자제하고
56세 가까운 사이일수록 돈거래는 분명히 하는 것이 좋고
68세 투자손해 있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니 멈추는 것이 이롭고
닭띠 🐔
43세 이동 문제 대안이 없으니 무리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도록
55세 무슨 일이든 억지 부리지 말고 현실에 맞게 수용을
67세 밥그릇이 깨지는 형상이니 무모한 투자는 자제함이 바람직
개띠 🐶
42세 목표가 정해지면 바로 출발하는 것이 이익 남기는 길
54세 지나친 편견은 자기발전에 해가 되니 마음 비우고
66세 당장 남을 돕는 일은 선업을 쌓는 길이니 적극적으로 행하도록
돼지띠 🐷
41세 윗사람의 도움으로 회생의 길이 열리니 만사 길
53세 지난 일은 모두 잊고 새로운 길 나서는 것이 자기발전에 이롭고
65세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지는 법이니 긍정 마인드가 중요
출처 http://m.kyeongin.com/view.php?key=20230307010001017
23년 3월 7일
14
2
Farmmorning
3월 8일 수요일 (음력 2월 17일) 운세🍀
쥐띠 🐭
52세 이동문제 원만히 해결되고 안정을 되찾으니 한시름 놓게 되고
64세 지나친 스트레스는 건강에 해로우니 마음 비우고
76세 새로운 환경이 펼쳐지니 어려운 일 하나둘 풀려나가고
소띠 🐮
51세 피할 수 없다면 직접 나서서 해결 짓는 것이 좋고
63세 억지 인연은 서로에게 상처뿐이니 억지 부리지 말고
75세 일을 억지로 행하면 탈 나게 되니 능력 범위 내에서 해결하도록
호랑이띠 🐯
50세 순간의 이익에 남을 속인다면 큰 관재로 이어지니 조심하도록
62세 어렵고 힘든 현실이나 가던 길 꾸준히 한길 가도록
74세 눈앞에 이익보다 사람의 소중함을 먼저 생각하고
토끼띠 🐰
49세 주식 코인 등에 손해 볼 일 생기니 과도한 투자는 자제하도록
61세 투자손실로 마음고생 있다면 과감히 정리하도록
73세 남의 말 한마디에 투자하는 일은 위험한 발상이고
용띠 🐲
48세 일이 중도에 막히나 밀고 나가면 성공하니 힘내도록
60세 타인의 협조로 원하는 문서 잡게 되니 소원 이루고
72세 가택 문제로 고민하나 자손 등의 도움으로 원만히 해결되고
뱀띠 🐍
47세 일보다 건강관리가 우선이니 잠시 쉬면서 충전하도록
59세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이미 되새기며 마음 다져가도록
71세 호흡기 질환 등으로 병원 찾을 일 생기니 전염병 관리 잘하고
말띠 🐴
46세 어렵고 힘든 현실이나 이동은 불리하니 참아보도록
58세 시작보다 마무리가 중요하니 정리할 일 미루지 말고
70세 호흡기 질환 등으로 고생하게 되니 관리 잘하고
양띠 🐑
45세 새로운 환경이 펼쳐지면 강하게 추진하는 것이 이롭고
57세 사소한 일은 가볍게 넘기는 것이 신상에 이롭고
69세 사소한 일은 가볍게 넘기고 주어진 일 가는 것이 신상에 이롭고
원숭이띠 🐵
44세 이익 없는 길은 나서지 않는 것이 좋으니 서두르지 말고
56세 투자손해 크다면 늦기 전에 빠져나오는 것이 현명
68세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니 안되는 일은 억지로 행하지 말기를
닭띠 🐔
43세 투자 등의 일로 고민하나 무리하면 탈 나게 되니 지켜보도록
55세 급히 나서지 않아도 해결되니 순리 따라 행하고
67세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나 대안이 없으니 다른 길 찾아보도록
개띠 🐶
42세 가까운 지인과 등지는 일 이익보다 손해가 더 클 수도
54세 남의 말만 믿고 움직이면 후회하게 되니 중심 바로 하고
66세 전염병 등으로 고생하게 되니 문 밖 출입은 자제하는 것이 좋고
돼지띠 🐷
41세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하였으니 과욕 자제하고
53세 적은 내부에 있는 것이니 중요 비밀 함부로 발설하지 말기를
65세 길이 멀어도 안전한 길 가는 것이 좋으니 방향이 중요하고
출처 http://m.kyeongin.com/view.php?key=20230308010001304
23년 3월 8일
17
5
Farmmorning
♤오늘의 참사랑♤
♤의성(醫聖) 장기려 박사 ♤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 이야기입니다.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어서 집으로 가세요.”
장기려 박사는 어느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막막해하고 있을 때 이를 눈치 채고는 병원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게 해 주었습니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 원장”
병이 나으려면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장기려 박사가 써준 처방전입니다.
서울대, 부산대 의대 교수, 부산 복음병원 원장을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방 한 칸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재직중 6.25가 발발했습니다.
이남으로 내려온 후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과 전쟁 부상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1968년 당시 100원 하는 담뱃값만도 못한 월 보험료 60원에 뜻있는 사람들과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설립하여 1989년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이 확대될 때까지 20만명의 영세민 조합원에게 의료혜택을 주었습니다.
국가보다 10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바보.. 그는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청지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했고, 집 한 채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고,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 때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고, 자신이 칭송받는 것을 싫어 했습니다.
그는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특히 아내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평양의대병원 2층 수술실에서 그가 밤새워 가며 부상당한 국군 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졌습니다.
국군들은 모두 재빨리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일평생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재혼을 권했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그저 혼자 살겠습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편지는 우리들의 가슴을 에는 듯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가 북한 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 부부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그 기회를 사양하였습니다.
"나만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는 결국 빛바랜 사진을 보면서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 85세를 일기로 소천하셨습니다.

그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 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밤과 같은 그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의성(醫聖), 장기려 박사님의 "바보처럼 사는 삶", 이시대를 밝히는 등불 입니다.
오늘은 건강하시고 복되고 복된 하루되시길 기원합니다.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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